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268
268화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는 에긴의 목소리에 리디안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말을 함께 알아들은 크라이그나 보리알도 눈가를 실룩이며 에긴을 노려봤다.
리디안은 ‘헤임달’이라는 이름에 놀라 저도 모르게 다가갔다.
땅바닥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닿자 고개 든 에긴이 울먹이며 호소했다.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것만이 우리의 신, 헤임달 님을 도울 유일한 힘입니다. 헤임달 님이야말로 이 세계의 진정한 구원자입니다. 저 악랄한 오딘에게서 우리를 구해 낼 유일무이한 빛이란 말입니다!”
악랄한 오딘이라니. 이쪽 세계에서 오딘을 향한 비난을 듣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 반응이 신선했지만, 에긴의 마지막 목소리는 왜인지 고압적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핏발까지 선 눈동자에 놀란 리디안은 반사적으로 크라이그와 보리알을 쳐다봤다. 그날, 경계의 숲을 통해 파프니르의 계곡에 동행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헤임달의 존재를 확인한 두 사람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방금, 헤임달이라고 그랬죠? 그때 거기에 쓰러져 있던 사람 아닌가요?”
정보가 뜨지 않아 추측이긴 했지만, 정황상 그 존재는 아마 헤임달이 맞을 것이다. 리디안은 삐걱삐걱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크라이그는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에긴을 쳐다봤다.
[교단의 협조자] [필요 아이템 : 오딘의 눈] [교단의 협조자 퀘스트 진행을 원한다면 ‘에긴’에게 다시 말을 걸어 주세요.] [보상 : ???]그새 새로 갱신된 퀘스트 창에 리디안은 멍한 눈을 끔뻑였다. 갑작스러운데다 하필 필요 아이템이 오딘의 눈이라니.
리디안으로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헤임달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뭐야? 얘들이 믿는 신이 오딘을 무찔러 준다는 얘기인가? 그럼 도와줘야지. 오딘은 우리 적 아니야?”
파파가 물었으나 리디안은 대답을 아꼈다.
물론 비극의 일기장 퀘스트에서부터 오딘의 적의가 강했다. 그리고 NPC들의 정보로도 오딘은 이방인. 아니, 플레이어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느낌이니, 구태여 구분하자면 ‘적’이 맞다.
“헤임달이 얘네 신이라고? 어, 잠깐. 오. 맞네. 헤임달도 신화에선 신이잖아. 그럼 오딘이랑 어느 정도 대등하지 않을까? 근데 쟤 말하는 거 보니까, 헤임달은 지금 쪽도 못 쓰는 상태인 것 같고. 그걸 원상 복귀 시키려면 오딘의 눈이 필요하다는 얘기 아니야? 그리고 헤임달이 오딘에게 대항할 수 있는 존재면 우리한테는 이득 아닌가?”
의외로 이터널리스트가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 발언은 리디안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뭐, 단순히 생각하자면 이터널리스트의 말이 옳았다.
이 세계의 신에게 맞서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 현 상황의 흐름은 물론. 헤임달이 오딘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헤임달이 정말 오딘만큼 영향력 있는 강한 존재라는 가정을 두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런 전제라면 교단을 도와 헤임달을 각성시켜, 보답으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야 했다. 헤임달은 현재 파프니르 계곡에 쓰러져 있다. 미미르의 말을 떠올리자면 헤임달 또한 이방인의 등장에 영향받아 침묵했을 확률이 높다.
또 대중적인 정보로도 헤임달은 오딘의 충직한 신하이자, 무지개다리를 지키는 파수꾼이다.
그러니 이방인에 의해 쓰러진 헤임달이 이방인을 도와 오딘을 무찌를 거란 상상은 다소 현실적이지 못했다.
한참 생각하던 리디안은 답답함에 표정을 실룩였다.
‘차라리 헤임달이 오딘과 한패라는 게 더 말이 되는 것 같은데. 어쩌면 오딘이 헤임달을 통해 ‘눈’을 빼앗으려 하는 건지도…….’
물론 교단의 창설 스토리를 떠올리면, 이 추측의 가능성은 낮았다.
왜냐하면 붉은 태양 교단은 애초부터 이단 마법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다.
그들이 비도덕적인 실험을 위해 폐신전을 점거한 뒤, 비밀 실험을 숨기려 포장한 게 종교 단체 행세다.
그 후 잘못 만들어진 약물에 의해 마법사들이 미쳤고, 미친 마법사들에 의해 단체가 변질하여 지금의 사이비 종교에 이른 것이다.
‘이건 공홈 맵 설정에서도 개발자 코멘터리로 달린 내용이니 확실해. 그러니 헤임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은 적을 거야. 단순 게임 설정 기반으로만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럼에도 헤임달이 이들의 신으로 추앙받게 된 건…….
아마 이단 마법사들의 시초가 인간. 즉, 이방인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이방인은 무지개다리를 통해 건너왔으니, 이방인 관점에서 무지개다리의 관리자인 헤임달을 특별하게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다면 헤임달은 이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너무 추측이긴 하지만, 같은 이방인의 시각으로 생각하면 그럴듯하긴 하지. 그때 계곡에 다녀온 우리도 헤임달을 깨어나길 바랐으니까.’
어쩐지 이 사이비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이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엇보다 오딘과 헤임달의 관계를 알 수 없으니 더욱더 그랬다.
“자자~ 다들 잘 생각해. 얜 뭐다?”
뒤에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이노센트가 나서 한마디 했다. 못마땅한 그녀의 손짓을 따라간 곳엔 퀭한 표정의 에긴이 있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적혈구가 제 이마를 턱 치며 말했다.
“맞네. 이 새X들. 노르드 월드의 대표적인 사이비 종교였지.”
명쾌한 해답에 모두에게서 낮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진작 에긴을 사이비로 보고 있던 리디안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사이비는 어느 나라, 어느 세계를 가도 엮이지 않는 게 현명해. 그러니까 이 퀘스트는 못 들은 거로 합시다.”
“근데 만약 그냥 게임이었으면 재미 삼아 진행했겠죠? 정체불명의 보상이 있는 데다, 어차피 아이템은 다시 퀘스트로 구하면 되니까요.”
호드라의 말에 몇몇이 피식 웃으며 동의했다.
리디안도 지금이 단순한 게임이었다면 고민도 없이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극의 일기장이 본인에게만 드롭됐다는 점. 진행도 본인만 가능하다는 현재의 사정이나 아이템의 입수 난이도를 생각하면 당연히 거절하는 게 맞다.
“별생각 없었는데. 큰일 날 뻔했네. 하마터면 사이비한테 속을 뻔한 거잖아.”
파파가 가슴을 졸이며 이노센트를 쳐다봤다. 이노센트의 한마디, 그리고 적혈구의 묵직한 발언이 아니었으면 당장 진행하자며 리디안을 닦달했을지도 모른다.
“그치, 그치. 자나 깨나 사이비 조심.”
이터널리스트도 반성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긴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리디안은 안도했다.
헤임달이라는 이름에 잠깐이나마 진지해졌던 분위기는 사이비라는 한마디에 폭삭 식어버렸다.
찰나의 적막에서 이터널리스트는 대뜸 기억났다며 파파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 진짜 예전에 길에서 어떤 여자애가 투표해 달라면서 다가오길래, 생각 없이 체크하고 번호 남겼었거든? 근데 그게 알고 보니까…….”
적당한 화젯거리로 분위기가 바뀌었지만, 보리알은 여전히 찝찝한 눈빛이었다.
“이렇게 되면 헤임달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신용이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사이비가 믿는 신이라니.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닐 것 같은데요?”
“근데 현실에도 멀쩡한 신 세우고도 변질된 곳이 많잖아요. 여기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름만 내건, 전혀 관계없는 집단일 수도 있고요.”
큰 뜻 없을 거라며 페페가 보리알을 안심시켰다. 마침 생각난 게 있었지만, 리디안은 말을 아꼈다.
그날 함께 파프니르 계곡에 다녀온 건 크라이그와 보리알뿐이다. 그나마 페페가 레온을 통해 내용을 알고 있고, 이노센트나 이상성욕자, 호드라도 대강 알고 있겠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밝혀진 내용이 아닌 만큼, 아무것도 모를 파파나 이터널리스트 앞에서 섣불리 이야기할 순 없었다.
“뭐, 아무튼. 안 하기를 잘하신 것 같네요.”
말수 적은 고독한조차 사이비를 껄끄럽게 대했다.
고개를 끄덕인 리디안은 마침 옆에 있던 크라이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혹시 모르니까 이 얘기, 간부분들한테도 전하는 게 낫겠죠?”
“흠. 별거 아닌 일 같기도 한데. 조금이라도 찝찝하면 그래야죠. 헤임달이 언급된 만큼 재수 없으면 오딘과 관계되어 있을 수도 있고요.”
“안 그래도 저도 얕은 지식으로 이거저거 추측해 봤는데, 좀 복잡하긴 해요.”
“그럼 박회장 님한테 말해 보는 건 어때요?”
“아! 그러네요. 회장 님이라면 뭔가 알지도 모르겠어요.”
우울하던 리디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별거 없으니까 이제 미드가르드로 돌아갈까요?”
적혈구가 손뼉을 치며 시선을 끌었다. 그에 모두가 흥미를 잃곤 돌아섰다.
미안해진 리디안은 괜한 헛걸음을 하게 만든 갈라르를 떠올리며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그러나 갈라르 역시 사이비 교단의 사제. 좀 더 일찍 사이비의 실속이 없음을 간과하지 못한 건 자신의 실수였다.
“일 다 끝났으면 우린 퇴장!”
미드가르드로 돌아온 직후, 다람이 고독한과 김팔라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데, 다람은 자신의 재료를 구해야 한다며 바쁜 척 설명했다. 더불어 의식의 흐름을 따라 불필요한 말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피곤해짐을 눈치챈 크라이그가 어서 꺼지라며 박대하던 때였다.
“어어! 리디안 님! 페페 님!”
주택가가 밀집된 거리에서 괴자가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그 옆에는 최근 공식적으로 커플임을 선포한 오토마타도 있었다.
익숙한 얼굴에 도도와 페이지의 표정이 밝아졌고 리디안 역시 괴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괴자 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얼굴이 싱글벙글하시네요.”
“그러게. 입이 귀에 걸린 것 같네.”
“이노 님이랑 다른 분들도 계셨네요! 아, 그러고 보니 리디안 님 쪽은 퀘스트 하고 있었다고 그랬죠? 그럼 못 들었겠네. 지금 난리 났어요. 전투 길드들, 오늘부터 공개적으로 신세계 애들 척살할 거래요.”
리디안과 이노센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한쪽 눈을 실룩인 이노센트가 곧장 백검에게 연락을 시도했고, 나머지 사람들도 갑작스러운 정보에 수군댔다.
멀뚱멀뚱 서있던 페이지는 자연스럽게 도도를 쳐다봤다. 덩달아 나머지 사람까지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도도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마제 님한테 이따 모이자는 얘기 들은 건 맞는데. 나는 그 얘기인 줄은 몰라서…….”
어설픈 대답에 이번에는 모두가 크라이그를 쳐다봤다. 크라이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조만간 잡는다는 얘기는 있었는데. 오늘부터 할 거라는 얘기는 저도 못 들었어요.”
마침, 별 언덕에 가기 전 길드 성에서의 대화를 떠올린 김팔라가 페페를 쳐다봤다.
“ONE 길드에서 당분간 맵 돌면서 무필할 거라고 선언하지 않았어요?”
“네. 분명 그랬죠. 근데 이렇게 갑자기 공개로 돌린다는 건,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 그쵸, 괴자 님?”
“어, 맞아요. 오늘 아침에 베누스랑 쿠렉이 오전에 무생숲 습격해서 일반 플레이어들 PK 했대요. 그거 수습하다가 차라리 빨리 걔들부터 정리하고 가자고 말 나와서…….”
괴자는 말하는 내내 싱글벙글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긴 한데, 그새 베누스가 또 사고를 쳤다니. 다들 질렸다는 듯 넌더리를 떨었다.
“켁. 당한 사람이 일반 플레이어? 선 씨게 넘네.”
“어제 하는 꼬락서니 보고 앞으로 더 지X할 것 같긴 했는데. 역시나는 역시나네.”
“근데 베누스 입장에선 개꿀이죠. 자기보다 약한 플레이어 PK 하는 거에 쾌감 느끼는 새X인데. 오늘 갑자기 사람들 우르르 맵에 몰려나오고 있으니, 걔 심정이 어떻겠어요? 맵 전체가 X나 개쩌는 사냥터가 된 거지.”
베누스의 빙의한 듯, 이터널리스트의 자세한 설명에 적혈구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정상인의 범주로는 이해하기 힘든 족속이었다.
“근데 베누스가 그 소식을 듣고도 가만있진 않을 텐데? 지 꼴리는 대로 약 올리다가 버로우 타면 어쩌려고? 우리만 개고생하는 거 아닌가?”
이노센트의 의아함에 파파가 곧장 검지를 흔들었다.
“에이, 누님. 아니죠. 베누스 성격 아시면서.”
“알지. 아는데. 이번엔 전체가 작정하고 잡는 거잖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번엔 걔도 몸 사리지 않을까?”
“그러니 더 작정하고 도발해야죠. 아마 샤봉 님이나 스타일 님이 좀만 살살 긁으면 바로 휩쓸려서 나올걸요?”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태양의 신전 PK 때 샤봉과 싸우던 걸 생각하면, 다혈질에 단순해 보이긴 했으니까.
“뭐, 그리고 목적 자체가 필드에 못 나오게 하는 것도 있으니까 의미는 있을 거예요. 아무튼! 그래서 사람들한테 제보받는 식으로 요청할 거고, 랭커들끼리 조 짜서 무한으로 필드 순찰할 거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