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316
316화
그 낯선 존재는 이름의 표기나 HP 상태바마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에겐 요툰하임에서 패턴 없이 활동하던 흐레스벨그보다 더, 충격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저, 저 여자예요! 저 여자가 아까 대장군 님을 죽였어요!”
적막 속에서 페이지가 기겁해 소리 질렀다. 요정 기사는 그런 페이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벌레 같은 놈. 멀쩡히 도망갔군.”
마치 죽이지 못해 아쉽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 살벌한 느낌에 페이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리디안과 플레이어들도 섬뜩함을 느꼈다. 방금 그 한 문장으로도 그녀가 이방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눈치를 살피며 가능한 말을 아꼈다. 뭐, 사실 열에 아홉은 겁에 질려 석상처럼 굳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흉흉한 살기를 풍기며 플레이어들을 압도적으로 짓눌렀다.
완벽하게 기선 제압당한 리디안은 이를 딱딱 떨었다. 말 못할 공포가 등골을 감싸왔다. 미미르가 플레이어에게 적의를 품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싹함을 느끼면서도 리디안은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앞으로 움직였다. 모두가 정지한 가운데 하나뿐인 움직임이어서일까. 요정 기사의 시선이 리디안에게 내려앉았다. 하나 신기하게도 공격의 낌새는 없어 보였다.
다른 느낌으로는 하등 미물을 관찰하는 고등 생명체 같기도 했다.
“다, 당신이 ‘브륀힐드’ 님인가요?”
리디안이 용기 내어 물었다.
본인이 직접 내뱉고도 사실 신기했다. 어쩌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며 말이다. 하지만 절박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핏기가 사라진 얼굴을 하면서도 리디안은 요정 기사의 반응을 살폈다.
곧 그녀의 안면이 일그러져갔다.
“…너 따위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나.”
‘브륀힐드’는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곤 바로 허리춤의 검을 빼 들었다. 놀란 리디안이 헉, 신음을 삼켰고, 뒤에 있던 딜러들이 반사적으로 리디안의 이름을 외쳤다.
찰나의 순간, 브륀힐드는 리디안이 있는 방향으로 자비 없이 검을 그어 내렸다.
칼날로부터 백색 섬광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커다란 검기였다. 시야를 가득 메운 섬광에 리디안은 본능적으로 섬뜩함을 느꼈다.
“여신의 손길―!”
다급히 외운 회복 스펠에도 일순 HP가 반 아래로 떨어진 게 보였다. 회복 스펠을 사용한 건 리디안 혼자만이 아니었다. 리디안을 가격하고 지나친 백색 섬광이 파티원들마저 덮친 것이다.
눈앞으로 회복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한가득 떠올랐다. 리디안은 좌우로 가득한 세인트 군단에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
한편 사방에서 다급히 외치는 목소리, 푸르고 하얀 회복 이펙트를 본 브륀힐드의 눈매가 더 사나워졌다.
“정말 기분 나쁜 능력이로군.”
혀를 찬 브륀힐드가 다시 검을 들어 허공을 갈랐다. 재차 날아오는 검기에 세인트들의 입이 바빠졌다.
그러나 그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불쾌하다 못해.”
거칠게 위로 올라간 손짓에 한 번.
“증오스럽고 저주스러워.”
다시 아래로 그어진 검날에서 또 한 번.
제멋대로 휘젓는 동작에 여러 차례 검기가 휘몰아쳤다. 뒤에서는 플레이어들의 비명이 난무했고 세인트들은 혼비백산하여 여신의 손길을 복창했다.
“대열 지키세요!”
뒷걸음질 치며 흐트러지는 대열에 신사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낯선 존재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순 없었다.
몇몇은 극심한 공포감에 못 이겨 뒤돌아 도망쳤다.
대부분 전투 길드에 속한 일반 랭커들이었다. 간부들과 하이 랭커들을 통해 말만 들었지. 직접 만난 미지의 존재는 아직 그들에게 벅찬 상대였다.
기어코 무너져 버린 대열에 신사의 눈앞이 빙빙 돌았다. 하지만 돌아오라는 말보다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는 말이 먼저였다.
이 상태에서 플레이어들까지 나서 브륀힐드를 공격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길드 마스터들도 그걸 알기에 서둘러 지시했다.
“딜러들, 절대 공격하지 마세요!”
그에 이노센트가 뛰쳐나가려던 크라이그를 붙들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며 신사를 눈짓했다.
“아퀴나스 님! 다람 님 말고, 이제부터 리디안 님 보호해 주세요!”
신사의 절박한 요청에 아퀴나스가 재빨리 뛰어나갔다. 등 뒤에 울고불고 난리가 난 다람이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리디안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었다.
아퀴나스는 ‘숭고한 방패’로 리디안의 대미지를 대신 받아냈다. 하지만 리디안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넬 틈이 없었다.
그동안에도 검기는 맹렬하게 쏟아졌다. 브륀힐드는 연신 허공을 잘라내며 분노를 표출했고, 리디안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여신의 손길을 재차 반복했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회복 스펠을 들으며, 신사는 모두를 데려오지 않길 잘했다며 실소했다.
“후.”
잠시 후. 흥분을 가라앉힌 브륀힐드가 드디어 검을 내렸다. 공격이 멎자 플레이어들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움직였다.
리디안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에 숨을 삼켰다.
말을 할 기회는 지금인데. 서슬이 퍼런 기세에 또다시 공격이 날아올까 봐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평소라면 리디안을 재촉했을 샤봉이나 태양 연합도 똑같았다. 사실 심각한 상황이라서기보다는 겁먹어 입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말이다.
더 차분해진 브륀힐드는 얼어붙은 플레이어들을 두루 훑었다.
대다수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는 중이었다. 죽지 않은 것이 마뜩잖았으나, 공포감을 심어준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런 그들을 조소하던 브륀힐드의 시야로 문득 대장군이 들어왔다.
불과 한두 시간 전, 제 손으로 직접 죽인 이방인이었다. 브륀힐드는 대장군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에 눈썹을 꿈틀댔다.
“과연 보고대로군.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이.”
브륀힐드의 표정은 더 불쾌해졌다.
“하지만 수백 번을 죽고도 다시 살아날지 궁금하군.”
무미건조하게 말한 브륀힐드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경멸 섞인 눈빛, 찌릿한 살기에 리디안은 번뜩 정신 차렸다. 저 기사는 진심이다. 지금 잠깐 생겨난 호기심을 충족할 때까지 여기 있는 모두를 도륙할 게 분명하다.
그 생각에 이르자 리디안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브, 브륀힐드 님!”
겁에 질린 듯 애처로운 목소리에 브륀힐드의 눈빛이 닿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건 잠시일 뿐. 브륀힐드는 그대로 리디안을 무시했다.
마치 말도 섞기 싫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철벽과도 같은 반응에 리디안은 절망했지만 부름을 멈추지 않았다.
“제발 잠시만요! 브륀힐드 님!”
한 발자국 움직이자 다시 브륀힐드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불쾌해 보였다. 마치 왜 자꾸 부르는지 모르겠다며, 거슬린다는 느낌 또한 다분했다.
이야기를 들어 달라 애원할 시간도 없었다. 브륀힐드는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백색 검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무자비한 검기 폭탄에 플레이어들의 비명이 다시금 솟구쳤다. 성물을 가진 탱커나 딜러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으나, 비격수들은 그렇지 못했다.
더욱이 세인트의 회복도 한계가 있었다. 브륀힐드가 가장 좋은 자리에서 쿨타임도 없이 검기를 연속으로 날리고 있으니 감당이 되질 않았다.
결국, 체력이 약한 비격수 몇 명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퍼붓는 공격기에 회복을 위해 사용되는 MP가 많은데. 부활의 몫까지 떠안게 되자 세인트들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그중 모두의 MP 게이지를 살피던 보리알이 보다 못해 조절을 권고했다.
“이러다 우리 MP가 먼저 축나겠어요! 로테이션을 돌리든지, 후퇴하든지. 어서 결정해야 해요!”
“버텨주세요! 저 사람이 리디안 님의 말에 반응할 때까지!”
리디안의 애탄 부름은 끝나지 않았다. 페페는 비명 속에서 목이 찢어져라, 외쳐대는 리디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인트들을 설득했다.
“후퇴 지시 내려오기 전까지 버티세요!”
캐티스가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두려움에 갈팡질팡하던 세인트들은 이를 악물며 회복에 전념했다.
“저랑 하이로 님이 조절하겠습니다!”
연신 브륀힐드를 부르면서도 틈틈이 회복 스펠을 사용하는 리디안을 목격한 이트가 외쳤다.
스카디를 가진 이트와 고성능 회복력 수치를 보유한 하이로. 두 사람이 회복을 늦추며 조절을 시작했지만, 언제까지고 유지될 순 없었다.
등 뒤, 세인트들 사이에서 절박한 목소리가 뒤엉키자 리디안도 점차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브륀힐드의 공격을 멈춰야 했다.
“브륀힐드 님! 브륀힐드 님! 잠시만요!”
“브륀힐드 님!”
리디안 혼자만 외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마제스티도 말을 얹었다. 그를 따라 다른 이들도 한 마디씩 조심스럽게 던져댔다.
“침공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잠깐만 시간 좀 내주세요!”
“부탁드려요!”
여러 명의 반복적인 부름이 이어지자, 브륀힐드가 그제야 반응했다.
자꾸 귀에 제 이름이 울리는 것도 신경이 쓰였고, 무엇보다 이방인들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것도 의아했다.
어째서인지 의문이 생긴 브륀힐드는 잠시 손을 내렸다.
비로소 공격이 멎자 리디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브륀힐드 님! 아까는 제가 무례했어요! 사실 알프하임 출신이신 빌 우드 님께 듣고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거였어요!”
빌 우드의 이름을 언급한 건 신의 한 수였다.
아는 이의 이름이 나오자 브륀힐드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녀에겐 빌 우드가 이방인에게 자신의 이야길 한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혐오하는 그 장로가 말이다.
“빌 우드가 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가?”
설마 정말일까. 의심스럽지만 정황을 따져보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하루 전, 브륀힐드는 알프하임에 도착했고 제정신이 아닌 빌 우드를 진정시켜 잠깐 대화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군.”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으나 리디안에겐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폭우처럼 쏟아지던 검기 공격이 멈추니 등 뒤, 파티원들도 안도했다.
특히 간부들은 브륀힐드에게서 대화의 낌새가 보이는 것에 쾌재를 불렀다.
“빌 우드 님께서 알프하임에 현재 브륀힐드 님이 와 계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브륀힐드 님을 만나러 온 거고, 기사 복장을 보고 브륀힐드 님일 것을 추측하여 여쭤본 것이에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노여워 마세요.”
리디안은 최대한 저자세로 굽신거렸다. 파티원들 역시 그 마음을 알아주어 숨죽인 채 브륀힐드의 눈치를 봤다.
반면 브륀힐드는 혼란을 느꼈다.
빌 우드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저들이 어째서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아랫사람처럼 구는지 알 수 없었다.
까마귀들에게 듣기론 이방인들이 흐레스벨그의 무리를 무자비하게 도륙했다던데. 지금의 모습은 듣던 것과는 달랐다.
저 많은 인원이 무한한 생명력을 내세우며 자신을 공격한다면 솔직히 조금의 승산이 있을 텐데. 공격하긴커녕, 전부 무기를 내린 채 방어하며 벌벌 떨고 있으니. 브륀힐드로선 통 이해할 수 없었다.
또 제일 앞에서 간절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아이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도 생겼다.
대체 저 아이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빌 우드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아주 조금은 그들의 사정이 궁금해졌기에 브륀힐드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방인이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왔나.”
퉁명스럽고 차가웠으나 리디안은 기쁜 마음으로 답했다.
“지금 일어나는 침공전과 이곳 세계에 관해, 브륀힐드 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드려요! 저희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어요. 미미르 님께서 말씀하시길, 증표를 갖고 있으면 다른 존재들이…….”
순간 브륀힐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렴풋이 살기를 느낀 리디안은 저도 모르게 텁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브륀힐드는 다시 불쾌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가증스러운 것들. 세 치 혀를 놀려 우리의 경계를 풀고 뒤통수를 치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것도 요툰하임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다시금 검을 드는 모습에 리디안이 기겁했다.
“오, 오해예요! 그럴 마음 없어요! 브륀힐드 님! 저희는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갇혔어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니 더더욱 브륀힐드 님 같은 분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예요! 제발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두 손 모아 처절히 외친 탓일까. 아니면 그녀가 빌 우드보다 훨씬 더 정상적인 상태라 그런 걸까.
리디안은 멈칫하며 고민하는 브륀힐드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마조마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검을 쥔 손이 다시 스르륵 내려갔다. 그에 박회장이 조심스럽게 나와 손을 들었다.
“저희는 이방인을 대표하는 무리입니다. 이 사태에 관해 잠시 대화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박회장은 공손하게 고개 숙였다. 얼어붙은 채 지켜보고 있던 마제스티나 레온 등도 허겁지겁 따라 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 숙이며 부탁을 운운하니, 브륀힐드도 조금은 당황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