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317
317화
“저희는 싸우고 싶지 않아요. 지금까지의 일은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그 사정에 관해서 설명해 드리고 싶어요.”
간절한 리디안의 목소리에 브륀힐드는 고민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오딘에게 명령받은 대로 행동해야 했다.
이방인들을 말살하는 것.
그게 브륀힐드의 임무였다.
그러나 공격성 없는 이방인들에게서 일차적인 흥미를 느낀 참이었다. 어차피 기선 제압은 완벽했고, 저 모습으로 보아하니 공격할 느낌은 없어 보였다.
날카롭게 훑은 브륀힐드는 잠시 자신의 임무를 내려놓았다.
“너희는 웃는 얼굴로 선의를 보이다 우리를 배신했다.”
경계 가득한 질타부터 떨어졌다. 그에 리디안은 단번에 로크바를 떠올렸다. 마녀 자매에 대한 로크바의 배신이야말로 이방인과 요정족의 관계가 틀어지게 된 시초였다.
“그렇기에 나는 너희를 믿지 않는다.”
차디찬 목소리에 리디안은 또다시 절망했다.
믿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대화를 거부한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실패를 예감한 리디안은 곧 날아들 공격에 바싹 긴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잠했다. 조심스럽게 올려다본 순간, 브륀힐드가 말했다.
“하나 너희가 무슨 변명을 할지는 다소 궁금하다.”
브륀힐드는 그길로 지붕 위를 미끄러져 내려와 훌쩍 뛰어내렸다.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은 그녀는 은빛 검을 지면에 꽂은 채, 금빛 투구를 벗었다.
흔들리는 은실 머리카락 뒤로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움이 나타났다. 리디안을 포함한 플레이어들은 그 아름다움에 두려움도 잊고 멍하니 감탄했다.
“그 전에. 먼저 묻겠다.”
경계하듯 땅 위에 박힌 검의 손잡이를 붙든 브륀힐드가 질문했다.
“네가 이방인의 우두머리인가?”
브륀힐드가 바라보는 이는 리디안이었다. 두리번거리다 자신이라는 걸 눈치챈 리디안은 당황했다.
“아, 아니요! 절대 아니에요! 저희는 보통 길드 단위로 움직이고, 길드에는 각 길드를 이끄는 장이 있어요. 저는 일개 길드원일 뿐이고요.”
“그럼 어째서 네가 가장 강한 힘을 품고 있는 것이지?”
갸웃한 브륀힐드의 반문에 리디안의 말문이 막혔다. 우두머리라는 단어에 처음에는 피식거리며 웃던 플레이어들도 뒤이은 질문에 혼란스러워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브륀힐드 님. 강하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변절자의 힘 말이다.”
리디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변절자의 힘이란 건 빌 우드도 언급했다. 하지만 그건 성물을 뜻하는 게 아니었나? 리디안은 혹시나 해 자신의 인벤토리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붉은 태양 교단의 성물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리디안은 ‘에긴’에게서 성물을 구매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사방에 변절자의 힘이 가득한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네가 가장 강한 힘을 품고 있어 물어본 것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훔친 오른눈은 그렇다 쳐도. ‘그것’의 출처는 알고 가야겠다.”
어쩐지 대화가 맞물리지 않는 기분이었다. 리디안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때, 브륀힐드가 오른손을 들어 검지를 뻗었다.
“말하라. 누가 너에게 ‘그것’을 주었느냐?”
손끝이 가리킨 곳은 리디안의 어깨 위, 정확히는 귀밑에서 반짝이는 귀걸이였다.
반사적으로 귀걸이를 만진 리디안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브륀힐드가 귀걸이를 가리킨 순간, 머릿속이 정지되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리디안은 침착한 어조로 되물었다.
“설마 이 귀걸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이건 미미르 님께서 주신 증표를 가공해 만든 것이에요. 브륀힐드 님이 뭔가 오해하신 것…….”
“미미르.”
브륀힐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금 기분 나쁜 감정을 드러냈다.
“대체 미미르는 어찌 알고 그 이름을 입에 담느냐?”
“예……? 그야 샘에서 미미르 님을 만나서…….”
“샘? 미미르가 지금 샘에 있나?”
“네? 저희가 찾아갔을 땐 샘에 계셨고요. 이야기를 끝내고 귀걸이를 받은 뒤에는 바로 잠드셨어요. 그러니까 침묵을…….”
“그 귀걸이를 샘에 있는 미미르가 줬다는 말이냐?”
“네에…….”
브륀힐드의 날카로운 물음에 리디안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왜인지 브륀힐드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더군다나 자꾸 말을 끊는 게, 마치 취조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불쾌감을 표현할 순 없으므로 리디안은 계속해서 브륀힐드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귀걸이를 응시했다.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조마조마하던 리디안을 향해 브륀힐드가 차갑게 말했다.
“그 귀걸이에선 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내게는 아주 기분 나쁜 변절자의 기운에 불과해.”
“변절자의 힘이라뇨……?”
리디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미미르에게서 받은 상앗빛 구슬로 만든 귀걸이다. 그런데 변절자의 힘이 느껴진다니.
언뜻 듣자면 미미르가 변절자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애초에 미미르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는다. 너희는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네? 그게 무슨……. 아, 아니에요! 저희는…….”
“내가 미미르의 행적을 모를 줄 알았나?”
“예……?”
브륀힐드의 눈빛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미미르는 침묵한 지 오래다. 비프로스트가 열린 직후 침묵했고, 그 후 종적을 감췄지. 그런 미미르를, 너희가 무슨 재주로 만났다는 것이지?”
떨어진 물음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리디안은 사고가 정지해 초점을 잃었다.
미미르가 침묵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침묵하기 전에 우리가 만났다고 답하려 했다. 그러나 그다음으로 이어진 브륀힐드의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미르 님이… 한참 전에 침묵했다고요……?”
스르륵 주저앉은 리디안은 자문했다.
그럼 우리가 만난 미미르는 누구란 말인가?
혼란에 휩싸이긴 뒤편의 파티원들도 똑같았다. 특히 리디안과 함께 미미르의 샘에 발길 했던 플레이어들의 안색은 새파래져 있었다.
박회장은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라며 창백하게 실소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크라이그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브륀힐드는 검사인 그의 모습에 잠시 경계했으나, 무기가 검집에 보관된 것을 보곤 손아귀에 쥔 힘을 풀었다.
“변절자라는 건, 누구를 뜻하는 말입니까?”
피아 구분을 명확히 하려는 질문이었으나, 브륀힐드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너희들은 변절자와 내통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그 누구와도 내통한 적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다.”
단호하고도 모호한 대답이었다. 아직 귀걸이의 의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리디안은 ‘변절자’라는 단어에 홀려 멍해졌다.
변절자는 같은 뜻, 같은 마음을 함께한 아군이 아닌 채로는 지칭될 수 없는 단어였다.
그 말인즉슨, 이곳 세계의 존재가 이 사태의 주범이라는 뜻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을 꾸민 게, 이곳 세계의 누군가라는 뜻이고. 저 여자는 그 인물이 자신들의 치부라고 생각되어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건가?”
리디안을 보호하느라 바로 옆에 있던 아퀴나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리디안은 조심스럽게 브륀힐드의 눈치를 살피며 끄덕였다.
“굳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걸 보면… 정확히는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를 경계하며 추궁한 거군요. 우리가 놈의 조력자인 줄 알고.”
이제 알겠다는 듯, 아퀴나스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브륀힐드의 시선이 닿았다.
“오딘께선 너희가 변절자의 충직한 종이라 하셨다.”
설마 대화를 들은 걸까. 갑작스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아퀴나스와 리디안이 동시에 움찔했다.
당황한 두 사람을 대신해 대꾸한 건 박회장이었다.
“종이라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우린 뭐가 뭔지도 모른 채 끌려왔다고요! 그리고 이거 하나는 짚고 넘어갑시다. 그쪽에서 변절자라고 지칭하는 것 자체가 그쪽 사람이 배신했다는 뜻 아닙니까?”
흑막, 원인 제공자에 대한 단서를 잡아서인지. 박회장은 다소 분개하며 브륀힐드를 쏘아붙였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같은 기분이었다.
“뭐야. 결국 자기들 편에서 배신이 일어난 거잖아? 우린 거기에 휘말린 거고. 근데 이방인이라고 우리를 무조건 죄인 취급 하는 건 뭔데?”
아직은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억울함에 흥분한 샤봉이 이를 갈며 분노했다.
점차 목소리가 커지니 레온과 마제스티는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진정시켰다. 누가 뭐래도 현재 시점의 절대자는 브륀힐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륀힐드 역시 이미 기분이 나빠진 터였다.
브륀힐드는 돌변한 이방인들을 차갑게 바라봤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변절자’가 너희로 인해, 혹은 너희 세계의 영향을 받았을 거란 생각은 안 하나?”
묵직한 반문에 플레이어들의 말문이 막혔다.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원인을 이방인에게 짊어지우려는, 교묘한 궤변 같기도 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그 부분에 대해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에 핑크푸크가 곤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래선 우리가 가해자나 다름없군요.”
새로운 시각에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렸다.
브륀힐드는 말없이 플레이어들을 응시했다. 아직도 군데군데 겁에 질린 이들이 여전했다.
사실 마지막 말은 고의적인 도발이었던 터라. 자신의 말을 들으면 반드시 분노하며 반격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들은 화를 내긴커녕, 대부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개중에는 작게 흐느끼는 이도 있었다.
브륀힐드는 그제야 진상을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직한 종이 아니라 어리석은 꼭두각시였군.”
혀를 찬 브륀힐드는 다시 리디안을 쳐다봤다.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네가 걸고 있는 그것. 정말 미미르가 준 것이 맞느냐?”
“네, 네! 맞아요! 퀘스트 때문에 미미르 님의 샘에 들렀고, 이후에 미미르 님께 상아색 진주를 받았어요. 그런데 미미르 님이 잠드시고, 밖으로 나온 순간 그게 아이템으로 바뀌는 바람에 그다음 퀘스트가 발생했어요. 아, 퀘스트는 저희 세계에서 수행하는 일종의… 아니, 아무튼 그래서 제가 레긴의 대장간에서 따로 가공을……. 어?”
횡설수설 말을 멈춘 리디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리디안은 조심스럽게 브륀힐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브륀힐드 님. 혹시 변절자의 힘이라는 게, 시스템. 그러니까 저희 세계에서 건너온 특별한 힘을 말씀하시는 게 맞죠?”
“그렇다.”
그녀의 긍정에 리디안이 작게 탄성했다. 그와 동시에 빌 우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뻔뻔하게 변절자의 힘을 품고 있다고 했을 때, 훔쳐 더럽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 알겠어. 오딘의 눈을 알아보고 오해한 거야. 퀘스트로 내게 소유권이 양도되고 아이템화되는 바람에……!’
미미르에게 받은 ‘지혜의 증표’도 같은 논리로 이해하면 맞아떨어졌다.
샘을 나온 순간 증표가 완벽하게 아이템화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브륀힐드가 미미르의 증표로 인정할 수 없던 것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미미르가 한참 전에 침묵했다는 그녀의 주장은 좀 더 생각해 볼 문제였다.
“알 것 같아요! 미미르 님의 증표도 미미르 님이 침묵한 순간, 침식당한 것 같아요!”
추측을 확신한 리디안이 외치자, 브륀힐드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침식이라……. 대강 이해했다. 너희가 샘에서 만난 미미르는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군. 조력자도 없이 무슨 수로 깨어나 샘에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을 되뇐 브륀힐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니 받았다는 증표도 아마 진짜겠지. 지금은 더러운 변절자의 물건에 불과해도…….”
한숨 쉰 브륀힐드는 지면에서 검을 뽑아냈다.
왜 검을 다시 뽑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들의 사정을 이해해 준 듯한 모습에 리디안이 서둘러 말했다.
“브륀힐드 님! 저희 세계에 대해 더 드릴 말씀이 많아요! 별도로 묻고 싶은 것도 많고요! 괜찮으시다면 더 이야기를……!”
“아니.”
브륀힐드는 딱 잘라 말했다.
“대화는 여기서 끝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게……!”
“들을 가치도, 여유도 없다.”
“아니, 잠깐만요! 우리 사정을 이해하는 것처럼 굴다가 갑자기 이러시면……!”
흥분한 박회장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브륀힐드는 온전히 우위에 선 강자처럼 여유롭게 말했다.
“너희들의 사정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너희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온전한 라그나로크를 위해, 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방해되는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