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35
35화
“습득자는 불꽃심장 님! 도전자는 럭키가이 님이랑 리디안 님이네요.”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가니 여기저기서 환호 소리가 들렸다. 럭키가이에게는 잔혹하게도, 대부분이 리디안을 응원했다.
반 장난으로 일부러 리디안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레이드에서 보인 리디안의 가능성에 반해 응원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해도 플레이 센스가 더 좋은 리디안이 스펠을 갖는 게 옳다고 말이다.
“자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갑니다. 첫판에 이긴 사람이 승자!”
앞서 아이템 정리로 시간을 꽤 잡아먹은지라, 마제스티는 후다닥 진행했다. 리디안과 럭키가이는 서로를 마주 보며 의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웬만해서는 양보하는 성격이지만, 이번만큼은 꼭 갖고 싶다는 의지가 활활 타올랐기에 리디안은 용기 내어 럭키가이를 바라봤다.
럭키가이 역시 순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이지만 직업 필수 스펠이다 보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드물게 그 강인한 모습에 짓궂은 길드원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와! 양보 따윈 없는 상남자다!”
“나 같으면 양보할 텐데!”
“양보 없는 상남자는 주먹이지!”
“리디안 님 이겨라! 럭키가이 져라!”
“오늘은 언럭키가이로 가즈아!”
다 친밀함과 우정, 사랑에서 비롯된 거겠지만, 지나치게 짓궂은 야유에 리디안은 괜히 창피하여 눈알을 굴렸다.
슬쩍 본 럭키가이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길드원들의 배신감에 상처받은 듯했다.
그에 살짝 마음이 약해졌지만, 리디안은 마음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에 현혹되면 안 된다고. 흔들리면 큰일 난다고.
심호흡하며 차분하게 생각했다.
남자는 주먹, 이라는 말이 나오면 보통 다른 걸 내기 마련. 확신할 순 없지만 분명 럭키가이는 주먹이 아닌 가위나 보를 낼 확률이 높다.
그러니 리디안 역시 주먹이나 가위,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리디안은 다시 크게 심호흡했다.
그래, 결정했다.
‘가위다!’
“자 준비하시고. 3, 2…….”
마제스티가 카운트 하는 순간. 맞은편 럭키가이의 눈이 번뜩였다.
리디안은 순간 싸한 느낌을 받았다. 왜인지 생각했던 것을 내면 안 될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내지르던 손을 잽싸게 바꿨다.
“1!”
찰나의 정적이 끝나고 사방에서 커다란 폭소가 터져 나왔다.
“럭키가이 님 바위. 리디안님 보! 리디안 님 승리!”
“그러취! 남자는 주먹이지!”
쌤통이라는 장난기 가득한 놀림에 럭키가이가 주르륵 주저앉았다. 나름 전략적으로 허를 찌르려던 수법이었는데, 실패했다며, 그는 다 잃은 소녀처럼 얼굴을 가린 채 비참하게 흐느꼈다.
이겼다! 리디안은 가위를 냈으면 졌을 상황에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패배자는 얼른 끌어내 달라는 길마의 잔인한 말에, 럭키가이는 부길드 마스터인 백검에게 붙잡혀 엉엉 울며 끌려 나갔다.
“리디안 님이 ‘여신의 노래’ 쟁취했네요. 축하해요.”
금빛의 화려한 스펠 북이 리디안의 손으로 떨어졌다. 리디안은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감격했다.
설마 이걸 이런 식으로 얻게 될 줄은…….
럭키가이에겐 미안하지만 그래도 정당하게 이겨 얻은 것이다. 오히려 어쭙잖게 배려하는 게 패배자를 더 슬프게 만들 뿐.
리디안은 헤헤 웃으며 습득자인 불꽃심장, 그리고 모두를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리디안 님! 축하해요.”
“축하요.”
“축하해요”
리디안과 같은 라인에 앉아 있던 테세우스, 크라이그, 일반인이 한마디씩 던졌다.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로 돌아온 리디안은 부끄러워 볼을 긁적였다. 이따 정모가 끝나면 언니들이 보는 앞에서 배울 예정이라 금빛 스펠 북을 손에 꼭 쥔 채였다.
반대편 럭키가이 쪽에 먹구름이 낀 것 같지만 리디안은 모른 척 외면했다. 원래 승부의 세계는 잔혹한 법이니까.
그 와중에도 아이템 정리는 계속 진행됐고, 30분 정도가 더 지나 완전히 종료됐다. 그럼에도 남은 아이템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거나 혹은 길드에 기부되어 훗날 길드 자금에 보탬이 될 예정이었다.
“템 정리도 다 끝났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우선 랭커 회의에서 논의된 길드 가입 관련해서 먼저 공지 드릴게요.”
유쾌했던 분위기가 소강 되고 얌전해진 길드원들은 마제스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뭐 하나 단서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특히 친목 길드 쪽에서 무 길드 플레이어분들을 많이 보듬어 주셨거든요. 해당 플레이어들도 잘 적응하는 단계고요. 그래도 아직 필드에 나가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은 건 여전해요.”
저도 가끔 무섭거든요. 이어진 뒷말에 몇 명이 웃음을 터트렸다.
“각자 개인의 사정이 있을 뿐이니, 특정 분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친목 길드 측에서 보살피고 수용할 예정입니다. 근데 또 최근, 보조 직업 붐으로 필드에 나가는 분들이 많아진 거 알고 계시죠?”
소식에 빠른 길드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요했다. 리디안도 오는 길에 봤기에, 보조 직업 얘기가 나오자 큰 관심을 보였다.
“전용 맵인 ‘탐구자의 섬’이 다른 곳에 비해 워낙 쉽다 보니까 일부 플레이어분들이 금방금방 필드에 적응하더라고요. 랭커 회의에서 예상하기를, 이번 일로 전투에 흥미를 느끼고 상위 필드로 나가는 분이 많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추후에는 전투 길드로의 이적을 원하시는 분들이 나올지도 몰라요. 아무래도 전투 길드는 필드 플레이에 더 적극적이고 선호하는 편이니까요.”
조만간 신규 길드원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한참 동안 길드원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레기온 길드원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미 리디안의 등장으로 신규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상태였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레기온은 우선, 추천제를 유지합니다. 길드원 추천자 외에 만약 가입 신청자가 있다면 간부 회의와 투표로 결정할 거예요. 전 직업 동일하게요. 왜냐고 물으신다면… 하위 전투 길드에게 먼저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길마님, 지금은 남 생각할 때가 아니지 않나요?”
손을 들고 발언한 이는 조금 날카로운 이미지를 가진, 바드 미도리샤워였다. 나름 핵심적인 반박에 모두가 꼴깍, 마른 침을 삼켰다.
마제스티는 고개를 끄덕이다 답변했다.
“네, 맞는 말씀이에요. 하지만 어느 정도 길드 간의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다는 상위 전투 길드의 의견입니다. 아시다시피, 100위권 하이 랭커가 거의 ONE, 태양에 몰렸으니까요. 그 안에는 레기온 지분도 꽤 있고요.”
리디안은 대강 분위기를 이해했다. 길드끼리의 구도가 잡혀가는 시점에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건, 길드원. 즉, 전력.
양보 없이 경쟁하기 바빴던 게임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어느 정도의 협력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니 밸런스에 대한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뭐, 작은 길드끼리 뭉치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길마를 맡은 사람들이 그리 호락호락한 성격들은 아니고. 그렇다고 그 길드들이 대형 길드에 각각 흡수되는 건 더더욱 아니죠. 그럴 바에 전부 합쳐서 전체 길드 연합으로 가는 게 이치에 맞죠. 게다가 실제 해당 길드들도 대형 길드에 흡수될 마음도 없어서요.”
마제스티가 싱긋 웃었다. 미도리샤워는 그에 수긍하고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좋게 풀이하자면 각 길드 마스터의 자존심을 배려하는 것이고. 달리, 조금 나쁘게 받아들이자면 상위 길드들이 섞이지 않고 자신들만의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해서 친목 길드 내 플레이어가 전투 길드로의 이적을 원할 시. 해당 친목 길드 마스터가 무법자, 슈퍼문, SSR, 노르드연합, 청풍명월, 파라다이스, 신세계 등으로 먼저 추천할 거예요. 그래도 상위 길드로 오고 싶다고 하면 그때부터 해당 길드 내부에서 심사가 들어갈 거고요.”
사실상 상위 전투 길드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신규 길드원을 받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길드끼리의 파티 플레이가 활성화된 지금. 친목 길드를 달고 있는 플레이어나 무 길드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과 교류할 일은 거의 없으니, 운이 좋아야 한두 명 정도? 아주 극소수만이 레기온에 가입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 뜻을 이해한 길드원들은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리디안도 자신과 같은 신규 길드원이 가입할 확률이 희박하다는 것에, 작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흠. 인원수 적은 전투 길드 애들이 생떼 썼나 보네. 자기네들 인원 채워 달라고. 나름대로 전투 길드인데 쓸 만한 랭커가 없으니 어디 나가서 뻗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친목으로 갈아타자니 쪽팔리니까. 누구누구 씨들 성격 생각하면 안 봐도 뻔하지.”
혀를 찬 테세우스가 슬쩍 크라이그를 바라봤다. 특유의 분석력으로 간부 회의 때마다 끌려다니던 크라이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번 문제는 랭커 비율이 가장 적은 청풍명월에서 나온 불만이 빚은 결과기도 했다.
“그리고 전투 길드끼리도 길드원 의사를 존중해 자유 이적을 허용할 겁니다. 뭐, 벌써 알게 모르게 이적하신 분들이 있기도 하고요. 또한, 이적한 플레이어에 대해서 일절 뒷말 나오지 않게 배려할 예정입니다.”
테세우스는 별일이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길드 이적이야 개인의 자유지만, 철새 문화가 없는 노르드 월드의 전투 길드 특성상, 누가 잠깐 길드 마크를 바꿔 달아도 별별 소문이 무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페페가 태양 길드에 반년 정도 머물다 탈퇴했을 때, 태양 간부들로부터 협박 비슷한 악담을 받은 일화며, 응급실이 창설될 때까지 ONE과 관련해 페페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나돈 건 유명했다.
“길드 가입 건은 전체 길드 동일하게 당분간 이렇게 진행될 겁니다. 뭐, 당장 겨울이 되어 봐야 알겠지만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현재로서 길드 간 PVP 콘텐츠가 없어 길드끼리의 대립은 웬만해서는 없을 거예요. 생겨도 가급적 길마들끼리 중재할 거고요.”
게임 시절처럼 개싸움을 기대했던 테세우스가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없을 거라고는 장담 못하겠네요. 조금 걱정되는 부분은 필드인데, 고레벨 사냥터의 경우 보스 존만 겹치지 않게 길드끼리 조율해서 쓰고 있고, 그 외 사냥터는 플레이어들끼리 기본적인 사냥 룰만 지키면 서로 부딪힐 일은 없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지난번, 요툰하임에서 일어난 섀헌 3인조 몹 몰이 사건 같은 건. 제보 들어오는 대로 담당 랭커들이 처단하러 갈 예정이니 참고해 주세요.”
리디안은 곰곰이 생각했다.
길마 마제스티가 했던 말을 종합해 보면, 겨울 침공 이벤트가 길드 간의 대립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하지만 그동안 노르드 월드 내에서 몬스터 침공 이벤트가 없었기에 갈피를 잡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타 게임의 사례를 예상하자니, 리디안은 타 게임을 해본 적이 없어 그도 어려웠다. 리디안은 슬쩍 옆을 바라봤다. 크라이그나 테세우스. 왠지 두 사람은 잘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길드원 관리 건입니다.”
조금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딴생각에 한눈팔던 리디안은 반사적으로 마제스티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많이 안정된 상황이다 보니 일반 플레이어분들에 대한 뒤치다꺼리가 많이 줄었어요. 앞으로는 랭커 회의도 점점 횟수가 줄어들 거고, 나아가서는 끽해야 한 달에 한 번 정도 하겠죠. 그래서 이참에 레기온은 한동안 길드원 육성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 말에 사방이 어수선해졌다. 리디안도 길드원 육성이라는 말에 큰 호기심을 보였다.
“안전을 위해 최소 두 명 이상의 랭커가 붙은 형태로 진행할 거예요. 필요하면 중간중간 멘토 역할 해드릴 거고요. 이것도 당연히 원하시는 분 위주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빨리 레벨 업 하고 싶은 분들은 지금 손들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레이드에서 초라함을 느꼈고, 그에 대해 아쉬움이 커 이번 주부터 열렙 하자고 자토와 의기투합한 상태였다.
리디안은 묻고 따질 것도 없이 번쩍 손 들었다.
자토를 비롯한 레기온 70 전후 저레벨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레이드로 인해 꽤 자극받은 상태였다.
노르드 월드에서는 보통 76레벨 중반 이상이 하이 랭커에 속한다. 랭킹 1위인 레온이 80을 바라보는 79레벨, 100위인 세자가 76레벨 후반, 74에서 76레벨 중반까지는 보통 일반 랭커로 분류된다.
73레벨까지는 고렙 초반이라 가장 정체된 구간이자, 이도 저도 아닌 엉성한 고렙이 가장 많은 구간이기도 했다. 특히 70레벨에서 71로 넘어가는 구간이 극악의 헬 난이도라, 리디안처럼 70만 찍고 업을 포기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 구간을 버티고 레벨을 올려도 76에서 또 한 번, 77, 78에서 차례대로 계속 막힌다. 현재 노르드 월드에 75, 76레벨이 널리고 널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른바 레벨 마지노선인 셈이다.
100위권 하이 랭커들의 상황도 다를 바 없다.
올해 들어 플레이어 수가 부쩍 줄어든 탓에 분위기도 좋지 않았고 랭커들의 활동도 저조했던 만큼, 사냥하여 경험치를 쌓는 플레이어는 몇 되지 않았다. 대략 40위 정도까지가 그들만의 리그였고, 그 밑으로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리디안은 70이 되자마자 손을 놔버렸기에 쌓인 경험치도 적었다. 그나마도 최근 이곳으로 이동된 후 필드에 다닌 덕분에 조금씩 오른 것들이었다.
레벨이 스펙이 되어버린 현실에 리디안은 좀 더 레벨 업 하여 길드원과 지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이 손을 든 것이다.
곳곳에서 번쩍 솟아난 손에 마제스티는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와. 참여도가 높네요. 길마로서 무척 뿌듯해요. 근데 아시죠, 여러분? 여기 오고 나서 일이고 사생활이고 깡그리 없어져서 우리가 할 건 넋 놓거나 사냥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 스파르타하게 갈 거니까 게으름 피울 생각 마세요!”
길마는 산뜻한 얼굴로 끔찍한 말을 뱉었다.
손들었던 길드원들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러갔다. 리디안은 지난주 만난 헤른의 핼쑥했던 모습을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휴무 없이 일주일 내리 출근하는 기분이라 했던가. 혹시 잘못 걸린 건 아닐까?
리디안은 땀을 삐질 흘렸다.
“오, 리디안 님 완전 의욕 넘치네요.”
테세우스가 더 뿌듯한 눈빛으로 그리 말했다. 리디안은 그를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도와주신다는데 넙죽 받고 감사히 여겨야죠.”
“아~ 좋은 자세예요. 그보다 다른 사람들도 생각보다 참여도 높아서 다행이네. 그쵸, 형?”
불쑥 다가온 테세우스의 얼굴을 슬쩍 피한 크라이그는 무심한 얼굴로 끄덕였다. 리디안은 이때다 싶어 궁금했던 것을 조심스레 물어봤다.
“갑자기 레벨 업 시키려는 거, 혹시 저번 레이드랑 관계있어요?”
들뜬 분위기에 주변은 소란스러웠지만, 리디안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알아들을 거리였기에 크라이그는 의외라며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저레벨들이 그렇듯, 리디안 역시 레이드에서의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 관심도 높은 플레이어는 마음에 들었기에, 크라이그는 새로운 시선으로 리디안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첫인상과는 좀 다른 면모가 있긴 있었다. ‘죽늪’에서 리디안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냥 좀 용감한, 평범한 힐러인 줄 알았다. 함께 레이드를 하게 됐을 때도 럭키가이나 도륵 정도의 실력을 가졌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직접 겪어 보니 그 두 사람보다 훨씬 침착했고, 이모탈의 지시대로 잘 따라왔다.
스위칭을 했던 기지도 그랬다. 리디안을 과소평가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그 혼란한 상황에서 곧장 무기를 스위칭한 기지는 높이 평가할 부분이었다.
실제로 그 일로 리디안에 대한 간부들의 평가가 높아지기도 했고, 크라이그 본인도 괜찮은 힐러가 들어온 것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세인트 리디안이라.’
크라이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컨트롤도 나쁘지 않고, 사람 자체도 착해 보이니 이 정도면 작정하고 리디안을 집중적으로 육성해도 괜찮을 듯싶다.
힐러야, 사냥터 레벨 제한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니 73이나 74까지 레벨을 올리며 사냥터 경험을 쌓으면 지금보다 더 잘할 테고. 이후에 아이템을 제대로 세팅해 본격적으로 고정 파티에 넣는다면……. 길드 차원에서 넓게 바라보자면, 리디안은 큰 도움이 될 사람이었다.
간단한 계획을 잡은 크라이그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리디안을 바라봤다.
사실 레이드 테스트에 대한 일은 원래는 함구해야 할 일이지만, 리디안이라면 알려 줘도 크게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랬기에 크라이그는 리디안을 향해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맞아요. 지난번 경험하셨듯 보스 패턴이 좀 기묘했잖아요. 난이도도 예상보다 높았고. 그래서 지난주에 ONE이랑 랭커 단위로 헬하임 지역 한 번 싹 쓸었거든요. 도훈, 그때 30인 파티였나?”
“어, 형. 그거 아직 비밀…….”
크라이그는 불안한 테세우스의 중얼거림을 눈짓으로 막았다. 리디안이 어디 가서 눈치 없이 떠벌릴 사람으로는 안 보였고, 솔직히 리디안의 근처에 이노센트가 있어 어차피 금방 알게 될 사실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크라이그는 흔쾌히 정보를 오픈했다.
“보니까. 다른 곳의 보스도 전체적으로 패턴 난이도가 전보다 어려워졌더라고요. 이 상태면 몬스터 침공 이벤트도 헬 난이도가 될 것 같아서 하루빨리 저렙들 끌어 올리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한 거죠. 웬만하면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업 하는 게 좋겠지만, 시간이 촉박하니까……. 레벨이라도 높고 장비라도 빵빵해야 좀 더 안 죽고 버틸 테니까.”
“아… 그럼 레이드는 당분간 못 도는 거네요?”
“2주, 3주 뒤에 결과 보고요. 아직 랭커 파티로도 클리어가 힘들어서 패턴 확인 못 한 곳도 있거든요.”
리디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A구역의 얘기겠지만, 랭커들로도 클리어가 어렵다니. 대체 얼마나 어려운 걸까? 왠지 괜한 사실을 알게 된 느낌이었다.
크라이그는 다소 겁먹은 리디안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자세한 건 다음에 알려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은 혼자만 알고 있어요.”
“네에…….”
“리디안 님! 걱정하지 마세요! 리디안 님은 제가 무조건 지켜…….”
테세우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윽, 일반인의 시선이 닿았다. 생글거리는 무언의 압력에 테세우스는 깨갱, 꼬리를 말고 고개 숙였다. 힝힝거리는 테세우스의 앙탈에 크라이그가 혐오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들의 모습에 리디안은 작게 웃었다. 동네북인 것처럼 보여도, 나름 분위기 메이커라고, 다소 부담스러웠던 테세우스의 이미지가 이제는 친숙하게 느껴졌다.
크라이그도 딱히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물어보면 숨김없이 곧장 대답해 주는 게 나름 친절하게 보였다.
또 언제 기회가 될지 몰라, 마제스티와 백검이 조를 짜는 동안, 리디안은 궁금했던 것을 하나 더 물었다.
“그럼 혹시, 몬스터 침공 이벤트에 대해서도 알고 계세요? 대충 예상이라도요.”
다른 게임은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그리 덧붙이니, 크라이그와 테세우스, 일반인이 의외라며 쳐다봤다.
하도 게임에서 고인물 룩을 하고 다녀서 타 게임에도 나름 익숙한 줄 알았으니까.
물론, 굳이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침공 이벤트라…….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많죠.”
어려운 질문에 일반인이 한숨 쉬는 사이, 턱을 괸 크라이그가 먼저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음. 일단은 마을 침공 타입이 제일 흔하죠. 선공이냐 비선공이냐가 관건인데. 지금 흐름이면 당연히 선공일 테고, 전 도시에 침공할 수도 있고, 미드가르드만 침공할 수도 있죠.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아직 감이 안 잡히네요. 대학살 시나리오로 떨어지면 답이 없긴 한데.”
“대, 대학살이요?”
“어디까지나 최악으로 가정해서요. 뭐, 현재 예상하기로는 도시별로 포인트 잡고 수성 형태로 진행할 것 같기도 해요. 그게 가장 흔한 방식이고 이 회사 전작 이벤트 방식 떠올리면 그게 가장 유력하거든요.”
“수성… 어? 그러면 인원이 엄청나게 필요할 텐데요? 주요 도시만 해도 일곱 개인데… 거길 다 방어하려면…….”
“그쵸. 장비 제대로 갖춘 70레벨 이상이 많이 필요하게 되겠죠. 뭐, 도시마다 어느 정도 레벨 상한이 정해질 수도 있지만. 아무튼, 거기서 전체 길드 단합이 될지, 길드별 대항전이 될지 또 갈릴 거고요. 그 안에 어중간한 길드들도 다 병합되거나 와해할 테니까.”
“네? 길드끼리 경쟁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몬스터가 무언가를 드롭한다는 가정에서?”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서로 경쟁할 이유가 있나요? 서로 도와서…….”
그에 일반인과 테세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리디안은 혹여 실수라도 했나 싶어 말끝을 흐렸다. 잠깐의 침묵 후, 크라이그가 툭 뱉었다.
“글쎄요. 이 상황이 겨울 안에 끝날 거라는 확실한 보장이 없잖아요.”
“랭커 동맹도 솔직히 신용이 낮죠. 지금이야 서로 웃으며 손잡고 있지만, 누가 먼저 자기들만 살자고 마음먹으면 뒤통수치는 거야 뭐…….”
뒤따른 테세우스의 중얼거림에 리디안의 얼굴이 싹 굳었다.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긴데. 정말 최악의 상황을 예상한 거라 달리 반박할 수도 없었다. 물론,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악의 최악을 염두에 두는 것도 당연했지만, 정말 그런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건 당연했다.
금세 하얗게 질린 리디안의 낯빛에 크라이그가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괜한 얘길 꺼냈네요. 침울한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해요. 지금은 파티부터 짜야 하니까.”
길드 마스터와 부길드 마스터가 있는 앞쪽을 가리키는 크라이그의 손짓에 리디안은 갸웃했다.
‘나중에 다시? 따로 만나서 얘기하자는 소린가?’
그러나 직접 묻기 민망해 조심스레 눈동자를 굴렸다. 흘끔거리는 눈치에도 크라이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