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99
99화
구불구불한 미로를 따라 당도한 곳은 놀랍게도 드넓은 잔디밭이었다.
잔디의 색이 좀 칙칙하다는 걸 제외하면 말라비틀어진 작은 나무와 돌무더기가 썩 잘 어울려, 그럴듯한 정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구분할 만한 뚜렷한 경계가 없어 위치를 인지하기가 좀 힘들었는데, 좀 더 깊이 들어서니 중앙 부근으로 비석처럼 생긴 돌이 시계 방향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그 비석에 방향을 표시하는 숫자가 새겨져 있어 다행히 방향과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비석 안쪽 중앙으로는 유난히 하얀 자갈밭이 있었다. 그곳이 보스 포인트라는 걸 확신한 리디안은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앙과의 거리도 상당했지만, 숨 막히도록 빽빽하게 들어선 돌벽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았다.
“혹시, 저기 보이는 벽 뒤로 다 미로인 거예요?”
“네. 엄청 넓죠? 길 한 번 잘못 들면 뺑뺑이 돌 수도 있어요.”
대운동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정원의 넓이처럼 그를 감싼 벽 너머 미로의 규모도 엄청났다. 겁을 주듯, 규호의 장난 섞인 답변에 리디안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눈동자를 떨었다.
본격적인 보스 구역이다 보니, 정원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돌았다. 고요함에 이어 탁한 어둠이 주는 공포도 상당했기에 분위기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잠시 후, 멤버들이 비석에 가까워진 순간, 정원의 정 가운데 위치인 자갈밭에서 푸른빛이 회오리치며 솟아났다. 도깨비불을 닮은 그것은 한동안 활활 타오르다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동시에 바닥에 스며들었고, 뿌리처럼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끝없이 퍼져 나간 빛이 당도한 곳은 정원의 외곽을 감싼 돌벽이었다.
컴컴했던 돌벽은 푸른빛을 흡수해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한층 시야가 밝아지자 이번엔 중앙 위치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림자는 그대로 떠올라 액체처럼 출렁출렁 흔들리다 점차 형상을 빚어냈다.
넝마처럼 해진 갈색의 로브를 걸친 몸체는 점차 커지더니 하얀 뼈뿐인 팔과 다리를 드러냈다. 덜거덕거리며 지면을 디딘 그것은 푹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후드에 가려진 얼굴은 이목구비 없이 온통 깜깜했다. 새카만 바탕에 오로지 붉은 안광만 짐승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크기가 좀 큰 걸 제외하면 크게 임팩트 있는 비주얼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보스를 뭐 이렇게 대충 만들었냐고 할 정도였다.
보스가 완전한 모습을 보인 후, 마지막 그림자가 고리처럼 보스의 몸을 빙빙 돌기 시작하자, 머리 위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혼을 부리는 마법사]리디안은 허공에 둥둥 떠오른 보스를 바라보며 짐작했다.
퀘스트 내용대로라면 마녀에게 쫓겨 이곳에 숨은 로크바가 확실했다. 저런 모습이 된 것도 훔쳐간 ‘눈’과 관계됐기 때문일 거라고,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사이에도 보스는 비선공인 탓에 플레이어들을 무심히 바라만 봤다.
“다들 제자리로!”
“기존 패턴 잘 기억하시고 변경된 부분 확인 시 바로 알려 주세요!”
신사와 레온이 차례대로 외쳤다. 리디안은 머릿속에 달달 외워둔 공략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하 도시 보스는 세 종류의 전체 공격, 각종 디버프와 봉인, 쿨타임 증가 저주, 랜덤 텔레포트를 활용한 방해와 잡몹 소환, 회복 찬스, 그리고 오브젝트를 이용한 공격력 증가 패턴을 사용한다.
대충 보면 별거 아닌 듯 보여도, 하나하나 자세히 따져보면 귀찮은 것투성이였다.
과연 배운 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변수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지, 리디안은 잔뜩 굳은 어깨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메인 힐은 리디안 님 기준으로 타이밍 맞출게요.”
이번에도 역시 세인트의 리더는 페페였다. 이모탈과 캐티스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리디안은 아직도 퀭한 페페의 안색을 보며 작은 걱정을 삼켰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 웃으며 수다를 떨었을 텐데, 오늘의 페페는 헬하임에서부터 이곳까지 꽤나 조용했다. 그에 힘내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또 생각할수록 그런 말을 건네도 되는지 의문도 생겼다.
게다가 본의 아니게 알게 된 사정이라, 뜬금없이 뱉은 응원에 페페가 괜히 더 스트레스를 받진 않을지, 문득 그런 걱정도 들었다.
결국 리디안은 하고 싶은 말을 억누른 채 정면을 향했다.
“메인 팔라딘들 레디하면 하츠 님부터 스타트요!”
신사의 외침에 리디안은 무기를 꼭 쥔 채 스펠 시전 준비를 했다. 그사이, 보조 비격들이 모든 버프를 완료한 상태였다.
이윽고 마법 방어에 특화된 팔라딘들이 삼각 구도로 자리 잡자, 메인 다크 템플러인 하츠가 보스 몹 근처에서 천천히 몸을 수그렸다.
잠시 후, ‘신의 사슬’을 외치는 팔라딘들의 어그로와 함께 바닥에 손을 짚은 하츠가 모든 수치 감소 필드를 바삐 시전했다.
빠르게 생겨나는 디버프 게이지에 준비하고 있던 딜러들도 재깍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스 몹, 로크바는 타격을 받기 시작하자 역동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첫 번째로 플레이어들을 덮친 건 전체 공격 패턴 중 하나인‘체인 라이트닝’이었다.
로크바의 손에 생겨난 전격 구체는 빛처럼 번져 플레이어들을 덮쳤다. 그 빛은 플레이어의 몸에 닿자마자 파직거리며 긴 띠를 만들어 갔다. 5초 동안 이어지는 짜릿한 전격 마법에 여기저기서 비명과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전체적인 HP 비율로 따지면 큰 대미지는 아니지만, 저릿저릿한 고통이 오래 이어지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리디안은 온몸에 퍼진 찌릿찌릿한 감각에 온갖 인상을 썼다. 덩달아 ‘경직’이 걸렸지만 상태 이상 저항 수치가 충분한 리디안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상저 수치가 미달인 몇 명은 경직에 걸려 정지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네, 여긴 상저 수치 적용되는 듯해서. 마녀 무덤은 수치 상관없이 무조건 전체 경직 걸리더니…….”
행여나 전원 경직에 걸릴까 걱정하고 있던 마제스티의 표정이 밝아졌다.
“경직 시간 체크해 주세요!”
페페의 외침에 ‘신축’ 담당 힐러인 괴자, 그레이스, 드림드림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대다수의 경직을 풀어낸 그들은 비교적 한산한 ‘탐식자’를 상대로 시간을 쟀다.
게임 시절에는 5초 이내에 풀리던 경직이었지만, 변수인지 지금은 10초, 15초 이상 지속되고 있었다.
대체로 경직은 빠른 시간 내에 풀리는 편이기에, 과하게 지속 시간이 늘어난 것에 세인트들이 잔뜩 인상 썼다. 그들로선 할 일이 늘어난 셈이었다.
공교롭게도 초반부터 체인 라이트닝이 빗발치니, 괴자와 그레이스, 드림드림의 입은 더욱더 바빠졌다. 경직에서 자유로운 리디안은 메인 힐러들과 함께 전체 힐에 집중했다. 아직은 HP가 위험해질 만한 공격이 없어 대체로 여유로운 편이었다.
로크바의 패턴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다양해지는 형식이라 초반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다.
“어? 이상한데?”
한창 로크바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고 있던 이터널리스트가 돌연 의아함을 내보였다.
“뭔가 피가 안 빠지는 기분인데요?”
찌푸린 그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며 동요했다. 비격수들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갸웃거리는 사이, 로크바의 HP 게이지를 주시하던 딜러들도 점차 표정을 찡그렸다.
이게 원래 이렇게 딴딴했나? 이노센트 역시 100%에서 전혀 줄지 않는 게이지를 보며 갸웃했다. 그에 플레이어들이 이상함을 느낀 찰나, 로크바가 손에 쥔 검은 안개를 흩뿌렸다.
랜덤 디버프 패턴이었다. 상저 수치가 낮은 일부 플레이어들이 제각각 상태 이상에 걸리기 시작하자, 겨우 한숨 돌리고 있던 보조 세인트들이 다시 분주해졌다.
“뭐야, 잘 안 풀리네.”
‘신축’ 연타에도 시우에게 걸린 혼란이 풀리지 않자, 괴자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하지만 노련한 세인트답게, 그녀는 인벤토리에 있는 지능 무기로 스위칭해 재시도했다.
다행스럽게도 두어 번의 시도 끝에 상태 이상이 해제됐다. 그레이스와 드림드림도 같은 방법으로 다른 플레이어들을 구제했다.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페페는 확인차 모두에게 알렸다.
“랜덤 디버프, 지능 신축으로 해제 필요! 체크해 주세요!”
예상보다 빠른 확인과 처리 덕분에 파티는 흔들림 없이 침착함을 유지했다.
운 좋게도 시작하자마자 변수가 두 개나 확인한 셈이다. 다들 예감이 좋다며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터널리스트가 맨 처음 지적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도 로크바의 HP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자, 동요가 번져 나갔다.
“다들 때리고 있는 거 맞죠?”
“피가 안 빠지네?”
“이거 진짜 이상한데? 오류 아니야?”
온 힘을 다해 딜을 넣고 있던 딜러들에게서 비슷한 투덜거림이 쏟아졌다. 열심히 전체 힐을 넣고 있던 리디안도 여전히 100%를 유지하고 있는 로크바의 HP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플레이어의 게이지만 신경 쓰던 다른 비격수들도 변동 없는 보스 게이지를 확인하곤 술렁이기 시작했다.
“HP 오류면 진짜 나가린데…….”
“이거 혹시 회복력 증가 적용되는 거 아니에요?”
한참을 갸웃하던 도도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그에 다들 어? 하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고, 도도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말을 이었다.
“미묘하게 99%로 줄었다가 다시 100%로 차오르는 느낌이 들어서요. 오류면 100% 고정이어야 하는데 그래도 1%씩 깎이는 걸 보니까 왠지…….”
확신 없는 그의 목소리에 레온이 눈을 빛냈다. 그는 딜러들을 향해 순간 동시 공격을 지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모든 공격이 동시에 들어가자, 로크바의 HP가 아주 잠시 99%, 98%로 내려갔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을 기만하듯 눈 깜짝할 새에 100%로 회복되었다.
실시간으로 로크바의 회복력 증가 여부를 확인한 플레이어들은 어이없어 콧방귀를 뀌었다.
“와 씨, 실화냐. 기본 회복력이 너무 사기잖아.”
“이건 아예 없던 변수 맞죠?”
“그럼 이제 못 잡는 거?”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잠깐만요. 다템한테 회복력 감소되는 디버프 있지 않아요?”
잠시 물러난 크라이그가 하츠와 인드라를 향해 그리 물었다. 다른 이들도 격하게 동의하며 다크 템플러들을 쳐다봤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인드라가 난감하게 대꾸했다.
“있긴 있어요. 안티 리질리언스 필드. 제가 배우긴 했는데… 문제는 스펠 자체가 유지 시간이 10초밖에 안 되고, 버그 때문에 쿨타임이 길어서…….”
말끝을 흐린 인드라가 직접 나와 필드를 시전했다. 보라색 필드가 로크바의 주위를 장악하자, 신기하게도 HP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안티 리질리언스 필드, 다크 템플러의 고레벨 스펠로 범위 내 대상의 회복력. 즉, HP와 MP 틱 속도를 크게 저하한다. 주로 PVP에서 사용하며 PVE에서는 적당한 사용처가 없었다. 그동안은 말이다.
공격에 알맞게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HP에 딜러들의 표정이 밝아졌지만, 10초가 지나 필드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떨어졌던 HP가 빠른 속도로 차올라 100%로 고정됐다. 실망한 딜러들은 말도 안 통하는 로크바를 향해 양심이 없다는 둥의 야유를 던졌다.
“방금 보신 것처럼 지속 시간이 짧아서 보스 몹한테는 의미 없어요. 쿨타임은 지금 30초 넘고요. 이건 마지막 업데이트 후 생겨난 버근데, 다음 업데이트 때 수정 반영될 예정이어서…….”
패치되기도 전에 갇혔다는 인드라의 말에 간부들이 한숨을 삼켰다.
안티 리질리언스 필드의 스펠 지속 시간은 10초, 스펠 쿨 타임은 30초. 공략을 위해선 지속적인 안티 리질리언스 필드 시전이 필수였다. 하지만 희귀 스펠이라 배운 다크 템플러를 찾는 것도 힘들었으며, 설령 있다 하더라도 쿨타임이 30초면 둘이 번갈아 사용하기에도 모호했다.
“그나마 죽마저 끼면 지속 시간이 많이 늘어나긴 해요.”
하츠가 애써 웃으며 덧붙였다.
죽마저는 ‘죽은 마녀의 저주’라는 다크 템플러의 유니크 무기를 뜻했다.
아이템에 일가견이 있는 신사가 낮은 신음을 삼켰다. 자세한 옵션은 몰라도, ‘죽마저’ 자체가 유니크 분류에서 비인기 무기인 건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망했네. 죽마저 그거, 안티 리질리언스 옵션만 달려서 쓰레기 취급당하는 거잖아. 가진 다템이 있으려나?”
버베나도 그 아이템에 대해 알고 있어 낭패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보스의 HP를 깎는 건 불가했다. 줄지 않는 로크바의 HP로 인해 분위기는 점점 다운됐다.
눈치껏 전체 힐을 하는 리디안도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울 수 없었다.
“아, 다람 형. 다람 형이면 갖고 있을지도…….”
크라이그가 인드라를 보며 중얼거렸다.
다람. 그 이름에 인드라의 눈이 반짝였다. “맞네, 다람 님!” 그 외침에 모두가 이해했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한 육성 방법을 고집하는 데다, 다크 템플러 장인에 가까울 정도로 직업 분석에 뛰어난 다람이라면 다크 템플러의 모든 무기를 섭렵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네, 그 또라이라면 수집하고도 남을 놈이지. 과거, 30레벨 제한 저레벨 무기를 찬 다람에게 능욕당했던 버베나도 똥 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 나가서 빌려 오는 걸로? 아니면 이참에 다시 재정비?”
슬그머니 물러난 이노센트가 그리 물었지만, 레온과 마제스티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일단 다들 자리 지켜 주세요! 지금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됐어요. 원래 목적도 클리어가 아닌, 패턴 분석이었고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패턴 유도해서 최대한 분석하는 거로 진행할게요.”
레온의 외침에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진정됐다. 보스의 비이상적인 회복력 증가에 집중력이 떨어진 딜러들을 제외하면, 탱커와 비격수들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전체 공격과 디버프에 정신이 없었다.
“봉인도 기존이랑 같네요. 걸리는 사람 수나, 지속 시간이나, 해제 불가한 것까지.”
봉인 패턴이 플레이어를 휩쓸고 가자, 페페가 안도하며 말했다. 이곳의 봉인은 일정 플레이어의 스펠, 스킬을 30초 사용 불가하게 만드는 상태 이상으로 방식 자체는 랜덤 디버프와 같지만, ‘신축’으로도 풀리지 않는 특징이 있어 별도의 패턴으로 분리되고 있었다. 다행히 이 패턴은 기존과 똑같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혼령화 패턴 준비하세요!”
로크바가 허공으로 두 손을 뻗음과 동시에 레온이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