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05
105
* * * *
1월 19일.
산강그룹 회장의 셋째 며느리, 장은숙.
다시 말해 박선우의 어머니가 호텔 개업일로 딱 좋다고 추천하신 1월 19일은 소위 말하는 손 없는 날이었다.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악귀들이 죄다 하늘로 올라가 지상의 일이 잘 풀린다는 이야기였다.
봉은사의 스님인지 무당인지 모를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귀에서 거르지 않고 전달한 장은숙의 귀뜸에 박선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열어도 상관이 없던 탓이었다.
‘내가 호텔 운영하나.’
박선우는 말 그대로 건설 책임자일 뿐이었다.
처음에야 박선우가 건설 책임자로서 허울좋게 호텔 총책임자, 총지배인, 대표, 호텔 사장, 뭐 여러 좋은 이름들로 포장되어서 때깔 좋게 올라가있을 테지만 그 명함 벗는 것에는 한 달도 걸리지 않을 터였다.
백산(白山) 호텔.
하얀 산과 같이 솟아있는 백(白)색의 건물이라 하여서 산강그룹의 회장이 손수 이름을 지어준 이 호텔은, 삼남의 막내가 가질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내가 먹기엔 너무 크지.’
박선우가 개업식을 앞둔 호텔을 올려다봤다.
고개가 자연스럽게 꺾어져 목이 뻐근해질 지경이었다.
참 높게도 솟아있네.
서울 남산에 자리한 21층짜리 리조트 호텔, 백산은 아름다운 백색의 설원 같은 맛이 있었다.
마치 상아와 대리석을 반반 섞어놓은 것 같은 색감.
미색과 회색이 섞여 탄생한 백색의 느낌에서 오는 그 오묘한 고급스러움이 서울을 숲 삼아 산책하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아댔다.
“뭐야? 여기 너무 예쁘다.”
“새로 생긴 호텔 같은데···? 다음에 가볼까?”
“아직 공사 중인거 아니야?”
그들은 지나가면서도 고개를 빼어 건물을 바라봤다. 얼마쯤 하려나. 지나가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박선우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비리가 터져나가는 건설 현장을 발 벗고 돌아다니며 단속한 보람이 있었다. 튼튼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제야 왜 할아버지가 굳이 나에게 이 일감을 던진 것인지도 알 것 같았다.
‘내가 칼잡이로 쓰기 좋았던 거구만.’
한강물을 죄다 집어삼킬 능구렁이가 할아버지 배에 들어앉은 게 분명했다.
경영권에 관심없는 박선우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 건설책임자에 앉았어 봐라.
경영권 신경쓰랴, 임원들 지지 신경쓰랴, 건설 눈치봐랴, 정부 눈치보랴, 이것저것 눈 굴리느라 돈이 줄줄 새는 걸 눈앞에서 보고만 있었을 터였다. 건설비용을 온전히 건설에만 쓰기가 어려웠겠지.
경영권에 관심이 없는 박선우이기에 비리를 멋대로 단속하는게 가능했다. 임원들이 미워하던 말던 박선우는 상관 없었으니까. 박선우의 뿌리는 산강문화재단 쪽이었다.
돈이 나오는 허브가 따로 있는데 돈 만드는 공장에 눈을 돌릴 리가 있나. 할아버지 또한 알았던 거다. 그래서 제 돈 빼돌리는 일 없이 온전하게 건물에만 투자하라고 이 박선우를 건설책임자에 안심하고 앉혔던 거였다.
‘···날 칼잡이로 써먹었겠다.’
박선우가 시원하게 웃었다.
겨울치고 화창한 날씨.
야외 온천이라는 철 지난 회장님 소원을 이뤄드리느라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얼마를 팔아먹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이 거대한 부채덩어리를 바라보는 박선우의 얼굴은, 청량 그 자체였다.
그런 박선우의 시야 안으로 저 멀리서 류정형이 걸어들어왔다.
“류형.”
“네, 대표님.”
류정형은 어린시절 보아오던 박선우를 잘 알았다.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저렇게 신이 났나. 류정형이 한숨을 삼키며 박선우에게로 걸어갔다.
“류형. 우리 강작가님에게 온천 입장권을 얼마 비율로 정산하기로 했었죠?”
“······몇 가지 예외상황이 있겠지만···향후 온천 이용 추가 금액의 5%, 그리고 이 있는 스페셜 온천 입장권 같은 경우에는 평일주말 할 것 없이 추가비용에 대하여 35%까지 강석 작가님에게 정산하기로 했었잖습니까.”
그랬지.
그랬었지.
박선우가 선제시한 금액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명당 자리 금액까지 따지면 거의 한 명당 만원 꼴로 돌아가겠네요?”
“······그렇게 되겠죠.”
류정형의 한숨을 다시 삼켰다. 물론 이것 역시 강석에게 치루는 값이라 따졌을 때 결단코 비싸지는 않았다.
하지만 호텔은 원래도 적자사업인 법이었다.
‘이 호텔을 세울 때 들어간 돈이 백산의 야외 온천을 물 대신 메꾸고도 남을 정도인데 여기서 어떻게 이윤을 추구하게 만들려는 건지···’
류정형은 벌써부터 회장님이 이 계약서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노하실 것을 떠올리면, 등에 식은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류정형이 내려앉은 안경을 검지로 쓸어올리며 박선우에게 물었다.
“대표님.”
“네.”
“·········대표님이 보시기에는 이 호텔이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제 값을 치루는 건 좋은데 호텔에 적자가 날 것 같으니 계약 조항을 지금이라도 바꾸시죠. 류정형은 돌리고 돌려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선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대로만 두면, 손익분기점을 넘기고도 남습니다.”
분명 넘는다.
염려를 해주는 마음은 알겟지만 계약서 내용을 바꾸지 않고 이대로 두어야, 넘을 거다.
칼잡이로 쓰인 것이 배가 아프긴 했지만, 이 호텔의 수익구조는 강석이 만든 이 들어옴으로써 완벽해졌다.
비싼 값을 치루고 볼만한 작품이었다.
그런 대단한 작품을 보면서 온천까지 즐긴다니. 나라도 돈을 주고 올 터였다. 아니, 실제로 개업식이 끝나서 정식으로 예약이 가능해지면 당장 지를 생각이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들 그럴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보여지는 행복을 워낙 신경쓰는 나라이니 처음에는 사람들이 보러 간다고 너도 나도 보러올 거다.
온천이 아니라 온천에 있는 덕분에 명당 입장권이 팔릴 거고, 그 명당 입장권을 싸게 구매하겠다고 기왕 잘 곳을 고를 바에 신축에다 좋은 것들로만 채워진 백산에서 1박을 청할 터였다.
SNS에 사진들을 올릴 거였다.
너도 나도 자랑하겠지.
‘서비스야 확신할 수 없지만, 누가 맡게 되든 산강그룹 회장님의 백산을 망치려 들 리는 없다. 직원 관리 하나는 알아서 잘 하겠지.’
그리고 온천에 있는 을 보고 진심으로 반하게 되는 거다.
그때부턴 뭘 할 것도 없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1명은 2명이 될 거고, 2명은 가족단위로, 가족들은 분기별로 찾아오게 될 거였다.
아니라고 하기엔 의 연일 매진 행진과 작약갤러리에 하나 보겠다고 들어가서 작품을 구매하고 나오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나도 높았다.
를 보아라.
달려드는 예약자들 때문에 블룸 미술관의 홈페이지가 며칠에 한 번 꼴로 다운되어서 개관이래 처음으로 홈페이지 서버를 대대적으로 손 본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봉은사의 주지 법경스님은 을 대신할 불상을 받겠다고 연일 스님들과 함께 수행을 할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회의를 하고 있다 들었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태풍의 중심부인 강석 주변만 고요하여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풍지대의 밖에선 빠르게 강석에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강석보유국이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며 박선우가 웃었다.
이 사실을 청화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한 산강의 오너일가는 알고 있을까.
“류형. 아니, 류이사님에게 질문을 하나 할게요.”
“네. 말씀하세요.”
“백산 호텔이 제 직감대로 잘 된다고 했을 때. 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 그건···”
류정형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분명 박선우의 말대로 될 터였다.
산강그룹의 회장님은 경영권에 관심 없는 사람을 호텔 경영 자리에 오래 앉혀둘 인물이 아니었다.
백산 호텔이 손익분기점을 거의 넘겼을 때.
회장님은 고생했다며 용돈 크게 한 번 쥐어주시고, 박선우에게 자유 아닌 자유를 선사할 터였다.
경영권을 일찍이 공개적으로 포기한 박선우에게 호텔 하나 더 얹어줄 양반이 아니니. 박선우는 형제든 조카든 사돈의 팔촌이든 누구에게든 호텔 자리를 넘겨주게 될 터였다.
류정형이 말을 흐림으로써 박선우의 질문에 답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질문을 하나 더 할게요. 제가 백산 호텔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뒤. 제 자리에 앉은 사람은 손익분기점을 거의 넘기는 걸 코앞에 두고 있을 겁니다. 저보다 잘한다는 걸 회장님에게 증명하고 싶겠죠. 회장님이 그냥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으라 해도 뭐라도 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대서 미칠 겁니다.”
박선우는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 형누나들이 그렇잖아요. 워낙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니까. 응?”
“············”
류정형이 박선우가 길게 말하는 의도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보고만 있었다.
그때.
박선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힐긋 손목에 있는 시계를 내려다보니 어느새 호텔 개업식의 시작까지 겨우 두 시간이었다. 동시에 박선우가 걸음을 옮기는 이유를 눈치챘다. 강석이 오기로 한 시간이었다.
류정형 또한 박선우의 뒤를 쫓아 걸었다.
걸어오는 류정형을 바라보며 박선우가 뒷말을 이었다.
“누가 앉든 최대의 수익을 내려고 할 텐데 그때 그 사람들이, 백산의 무엇을 바꾸려고 들 것 같아요?”
호텔의 화려한 외관을 향해 걸어가며 박선우가 말했다. 류정형은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박선우를 쫓아 걸으며 되물었다.
“······뭘 바꾸려고 한다고요?”
“그대로면 수익은 같잖아요. 기존의 무언가를 버려서 순이익을 높이거나, 리뉴얼을 해서 값을 올려 매출 자체를 올리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할 텐데 후자를 선택하기에 백산은 너무 신축이니까. 기존의 무언가를 버리거나 바꾸려 하겠죠.”
그 순간.
박선우의 어깨 너머로 너무 가까워져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백산의 하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거대한 설산과 같은 모습이었다.
“뭘 선택할 것 같아요?”
이 하얀 백산의 모습은 전부 회장님 취향이었다.
이걸 바꾸려 들까?
그들이 순이익을 높일 수 있는 부분은···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류정형의 눈동자가 점점 커다래졌다. 박선우와 나누었던 대화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 ‘···향후 온천 이용 추가 금액의 5%, 그리고 이 있는 스페셜 온천 입장권 같은 경우에는 평일주말 할 것 없이 추가비용에 대하여 35%까지 강석 작가님에게···’
– ‘명당 자리 금액까지 따지면 거의 한 명당 만원 꼴로 돌아가겠네요?’
설마.
류정형이 고개를 들어 답을 물었다.
“이대로 놔두면 그들이 강작가님과의 추가 정산 계약을 바꾸려고 할 거라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계약서는···”
건드리기가 어려울 터였다. 류정형이 뒷말을 흐렸다.
박선우가 무언가를 대비하듯 꼬고, 건드리고, 복잡하게 이중 삼중으로 계약을 걸친 데다가 강석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 같은 조항들은 죄다 뜯어고치고 들어내버린 뒤였다.
직접 계약했던 박선우가 아니라면 강석은 바꾸지 않을 터였다.
류정형은 강석을 조금이나마 안다.
강석은 조각에 미쳐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가 만든 조각을 아꼈다. 작품에 대한 소유욕도 엄청났다. 마냥 착하고 성실하게 보이는 얼굴 뒤로 제 작품과 조각을 열기가 광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이리저리 긁어버리면 어차피 반쯤 소유권도 강석에게 있겠다, 강석이라면 차라리 을···허억!’
류정형이 박선우를 바라봤다.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건물의 입구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 같은 바람이었다.
바람이 뺨을 스치는 걸 느끼며 류정형은 이어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강석이라면 차라리 을······, 백산에게서 빼앗아버릴 터였다.
류정형이 입을 다급하게 움직였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강작가는 이제 국제 아트딜러들도 주목하는 블루칩이나 다름 없습니다. 오늘 백산의 개업식에 찾아온 소더비나 크리스티측 사람들도 강석의 이 야외온천에 전시될거란 소식을 듣고 온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백산의 이 없으면 손해가 막심할 겁니다.”
“류형.”
박선우가 회전문을 등지고 서서 강석이 어디서 올지를 살피며 가벼운 어조로 읊조렸다.
“방금까지는 류형도 이 백산을 하나가 책임질거라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 ‘·········대표님이 보시기에는 이 호텔이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제 값을 치루는 건 좋은데 호텔에 적자가 날 것 같으니 계약 조항을 지금이라도 바꾸자고, 분명 류정형 이사도 생각했었다. 박선우가 웃었다. 생일선물로 뭘 받을까 고민하며 신나하는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바로 그거죠. 눈앞에 커다란 돈이 아른거리면 그것보다는 적게 지불한 것이 안 보이거든요.”
“그래도 강작가님 작품인데···”
“우리 산강그룹 형제자매님들이 다 좋은데, 하나가 좀 모자라요. 그게 뭔지 알아요?”
“···뭡니까.”
“콧대가 너무 높다는 거죠. 내가 다 조사해봤는데 나의 위대하신 형제자매님들께서는 우리 강작가님 작품을 한 번도 감상해본적이 없으시더라고.”
류정형이 그게 말이 되냐며 박선우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데 그러더라니까요? 감상해본 적이 없고, 오늘도 안 올 거고, 앞으로도 바빠서 안 올 거고, 나 대신 대표자리 맡아도 야외 온천까지는 직접 안 걸어가볼 거고.”
내가 우리 가족들 성격 하나를 모를까. 박선우가 신이 난다는 듯 웃었다.
“······진짜 대표님 생각대로 될까요?”
“저야, 모르죠.”
박선우가 제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걸 바라봤다. 한숨이 겨울의 공기가 되어 사라져갔다.
신이 나던 박선우의 눈동자에 묘한 무료함이 스쳐지나갔다.
“너무 내 생각대로만 흘러가도 재미없는데. 그죠?”
삶이 무료하고, 권태롭고, 느렸다.
박선우가 계속해서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서도 그 틈에서 강석이 어디에 있나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런 박선우의 귓가로 류정형의 목소리가 쫓아왔다.
“대표님은 만약에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의 소유권이 반쯤은 강작가님에게 있지만, 나머지 반은 대표님에게 있잖아요. 일단 강작가님이 올려서 호텔의 수익이 떨어져 적자가 나면 대표자리를 딜로 거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백산에서 을 치워버리시는 게 목표이신 거예요?”
대체 뭘 위해서 그러시는 겁니까?
류정형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하는 것에 박선우가 추위로 빨개진 귀를 슬쩍 매만졌다. 차갑다. 그리고 온기가 닿아 따갑다. 귀를 매만지며 먹먹해진 소리를 느끼며 박선우는 생각했다.
그러게.
날 뭘 위해 이런 설계를 한 걸까.
박선우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저 멀리서 한 명이 패딩을 입은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에 잘생긴 미청년의 얼굴이지만 워낙에 인상이 험악하고 굳어져 있어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 강석이었다.
박선우가 그 많은 돈을 들고서도 택시 하나 없이 걸어오는 강석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우리 강작가님은 이 추운 날씨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신 걸까. 저번에 보았던 패딩과 또 똑같은 패딩이네.
강석은 상위 0.1%의 연봉을 이미 뚫었을텐데도 재료를 사거나 작품과 관련한 일을 할 때 말고는 누구보다 검소해보였다. 요즘 유행한다는 힘을 숨긴 어쩌고 같은 건가.
강석을 보고 있자니 박선우가 했던 모든 생각이 의미없다는 듯 허공으로 흩어졌다.
박선우가 걸음을 내디뎠다.
강석에게 걸어가기 위함이었다. 오늘 을 보기 위해 소더비와 크리스티에서 사람이 나왔다고 말해줘야지. 한명의 팬으로 돌아간 박선우가 서둘러 걸어가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
박선우가 내뱉은 말에 류정형은 쫓아갈 생각도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서 뒷모습을 응시했다.
진담 반 농담 반이라기엔 지나치게 살벌했다.
– ‘건물 선물은 좋아하셨으니까 호텔 선물도 좋아하시겠지?’
·········설마.
류정형이 농담일거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뒤쫓아갔다. 박선우를 말려야했다. 류정형에게 새로운 사명이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 * * *
강석이 걸음을 옮겼다.
박선우가 책임을 맡았던 백산 호텔의 개업식에 초대를 받아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한겨울이라 숨을 뱉을 때마다 찬 숨이 나와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날씨만큼은 푸르고 맑았다. 청자의 색깔을 닮은 푸른색 하늘에 강석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 푸른 하늘 너머에 떠있는 별들이 기억 속에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통영에서 보았던 밤하늘과 일주 운동, 그리고 고두한 선생님이 보여줬던 달의 관측 사진이 차례대로 스쳐지나갔다. 바로 어제까지 작업에 열중했기에 아직도 영혼의 한쪽은 작업하던 작품 곁에 있는 것 같았다.
투명한 유리 뼈대 모형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커팅을 이곳저곳 해놓아서 마치 하얀색처럼 빛났지만, 그 안에 심장을 넣어놓으면 다시 투명해지리라.
그래서는 안 되었다.
강석은 그날 통영에서 보았던 카노프스를 다시 떠올렸다.
원래는 백색의 별인 카노프스는 지상에 가까워져 색이 물들었는지 새하얀 빛의 노란띠를 머금고 있었다.
한마디로 밤하늘에 작은 보름달이었고, 낮의 태양을 대신하여 뜬 밤의 태양 같았다. 그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마냥 투명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다음 작업이 필요하지.
강석이 어제 뼈대만 만들어놓고 집으로 돌아온 이유가 있었다.
오늘 개업식을 끝내자마자 집에 가봐야지.
어서 도착해야할텐데…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강석의 품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강채영으로부터의 전화였다.
“왜.”
ㅡ 오빠. 이거 뭐야? 무슨 매니큐어? 같은 것들이 왔는데 젯소…? 이런 것들 왔는데 방에 갖다놓으면 돼?
“아.”
자신이 주문했던 것이 도착한 게 분명했다.
“방 말고 작업실.”
강석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씰룩였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릴 것이었다.
다음 작업을 위한 재료들이 집으로 도착한 모양이었다. 강채영이 이번에도 화장품 같은 것들을 가져왔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석이 웃었다.
어서 개업식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느려졌던 걸음을 다시 재촉하듯 발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이었다.
불현듯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강석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박선우가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달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박선우의 뒤로는 추운지 새파랗게 질린 류정형이 내달려오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강석이 카라라산(이탈리아의 대리석산)마냥 아름답게 솟은 호텔을 바라보는 그때.
내달려오는 류정형의 뒤로 질주하며 달려오는 두 형체가 강석의 시야에 들어왔다. 눈 파란 외국인 둘이었다.
“미스터 강!”
“미스터 스톤!”
그들은 박선우와 류정형을 지나쳐 얼굴이 벌게진 채 강석을 향해서 달려왔다.
“·········뭐야?”
강석의 눈썹 하나가 갈매기처럼 휘었다.
눈 파란 외국인 둘.
그들의 손에 들린 채 바람에 바들바들 떨리는 명함이 눈썰미 좋은 강석의 눈에 붙잡혔다. 요즘 외국 진출을 위해 영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강석은 어렵지 않게 읽어내렸다.
왼쪽은 크리스티.
그리고 오른쪽은 소더비.
크리스티와 소더비.
런던을 본거지로 하는 미술시장 경매사의 양대산맥, 만년 1등과 2등이 강석에게로 불도저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106. 1월 3일 영국 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