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4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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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투박함과 청아함. 상반된 소리가 함께 들렸다. 연필을 끼워둔 깍지가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동휘가 보였다. 놈은 한 곳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넋이 나간 모양새. 뭘 보는 거지? 나도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들이 보고 있는 건, 내 그림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시원한 것도 같았다. 아니. 시원했다.
2년 내내 청화예고에서 변종, 아웃사이더, 꼴등으로 살아왔다. 언젠가는 모두를 놀라게 해줄 거라 꿈꿨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꿈을 이루다니. 기분이 째질 것 같았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모두 관종이라더니 이런 느낌인가. 뭔가 중독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입맛을 다시는 사이, 선생님들은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등을 돌려 소묘 수업을 총괄하는 고두한 선생님에게로 걸어갔다.
“종이 다 깔았나 봐.”
“쉿쉿, 조용해. 이제 시작할 것 같아.”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이제 곧 평가가 시작될 거라 떠들어댔다. 내가 봐도 그랬다.
이미 바닥에는 저 끝부터 이 밑까지 총 팔십 장의 종이가 깔려 있었다.
위에서부터 A반, B반, C반, D반 순으로 깔린 종이에는 오늘 주제였던 ‘비너스’가 다양한 시점으로 그려져 있었다.
오늘의 평가 대상이었다.
고두한 선생님은 바닥을 힐긋 바라보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우리 쪽을 바라보시면서 선언하셨다.
“그럼 지금부터 평가를 시작하겠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 입을 다물고 있도록.”
입을 다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고두한 선생님은 차가운 눈으로 말씀하셨다.
선언이 있은 직후.
고두한 선생님 밑에서 제자 노릇을 자청하고 있는 시간강사 선생님들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제일 첫째 줄 앞까지였다.
맨 위에서부터 평가할 생각이신가. 그 생각이 맞다는 듯 선생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평가의 시작이었다.
셋은 첫째 줄 첫 번째 종이부터 천천히 평가를 시작했다.
“이건 여기 있기엔 작품이 너무 부실한데···”
“손동욱 선생님? 이 작품은 내리죠.”
주변에 있는 것보다 못 그렸으면 아래로 내려가고, 주변에 있는 것보다 잘 그렸다면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선생님들의 의견은 일치되기도 하고, 서로 부딪히기도 하면서 움직였다.
“이건 올리죠.”
“그럴까요? 형태력이 기존 B반 아이들보다 조금 부족해보이는데···, 장유민 선생님 의견은 어떻나요?”
주로 B반을 담당하는 손동욱 선생님과 D반을 담당하는 임우현 선생님 위주로 진행되고, C반의 장유민 선생님은 의견을 보태는 형식이었다.
“음···C반에서 한 학기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그럼 이건 이대로 놔두도록 하죠.”
그렇다 하더라도 이름이 가려진 상태에서 오로지 그림의 완성도만으로 순위가 정해지는 시스템이었기에, 평가는 공정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건 여기로···”
“이건 저리로···예···부족···”
선생님들이 작게 속닥거리며 평가를 진행하는 동안, 아이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은 채 지켜봤다.
그도 그럴 게 오늘 시험은 3학년 1학기 소묘 반편성 배치고사 첫 번째를 대신한다.
실기반 편성은 학기별로 단 두 번. 이번 평가로 기말고사 시즌까지 어느 반에서 소묘 수업을 받을지가 결정되는 거다.
애초에 소묘화가로 유명한 고두한 선생님께서 직접 가르치는 건 A반뿐이었다. 욕심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A반에 가고 싶을 터였다.
고두한이 누구인가.
소묘작의 대가이자 미술계의 블루칩.
작품 하나가 외제차 4대 값이라는 고두한 작가님께 직접 소묘를 배울 수 있는 곳은 전국을 다 뒤져도 이곳, 청화예고 소묘 A반밖에 없다.
그래서 저렇게 기도라도 하는 심정으로 지켜보는 거겠지.
그러나 큰 이변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나는 확신했다.
청화 예고의 반편성 배치고사는 학기별로 단 두 번이지만, 지금은 이미 2학년 2학기였다.
그동안 우리는 여덟번에 거쳐 소묘 반편성 배치고사를 경험해왔고, 그 과정에서 우리들의 소묘실력은 분별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나뉜 지 오래였다.
지나치게 나태해서 볼품없어진 자와 끝없이 노력해 결실을 본 자들 몇 명만이 선생님의 손에 의해 위아래 한 등급 정도만 바뀔 뿐. 대부분은 같은 반 내에서 순위만 겨우 바뀌고 끝일 게 분명했다.
내 작품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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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D반도 저번 평가 때랑 별다를 게 없네. 임우현은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생각했다. 이제 손을 뻗을 필요도 없겠다.
그 정도였다.
성장도 도태도 없는 엇비슷한 수준. 임우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D반을 담당하고 있는 임우현에게는 아쉽기만 한 결과였다.
올라갈게 이렇게 하나도 없나.
···그러고 보니 강석이 그림은 어딨지?
태도에 비해 성적이 아쉬운 강석의 그림이라도 찾아볼 요령으로 눈을 굴리는데, 맨 끝에 있는 그림 앞에 다른 두 명이 서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 무슨 일입니까?”
임우현이 빠르게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보았다.
“허···”
일생일대의 가장 아름다운 비너스를. 맨 밑줄, 맨 마지막, D반 그림 사이에서 군계일학처럼 솟아난 비너스는 임우현의 마음을 관통했다.
‘석고소묘’가 한국의 순수미술 입시를 지배했던 1980년이 지금 돌아온다고 해도 이것보다 잘 그린 작품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석고상의 원본인 ‘밀로의 비너스’를 가져와 얼굴만 잘라붙인 거래도 믿겠어.’
임우현은 홀린 듯 그림을 감상했다. 그림자가 그림을 가릴까 기괴한 자세로 허리를 숙인 채로.
그리고 그건, B반을 담당하고 있는 손동욱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D반 학생이 겨우 세 시간 만에 완성한 작품이라고···? 서교동 입시 강사가 한 달 동안 달라붙어 만진 연구작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 이게? 이게···말이 되나?’
손동욱이 당황스럽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임우현과 장유민 역시 같은 감정인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비슷하리라.
세 명의 심정을 대변한 말이 손동욱의 입에서 터졌다.
“이게···D반 학생이···그린 비너스가 맞는 거죠?”
비너스가 아니라 비너스 석고상을 그린 그림이었지만, 손동욱은 물론이고 다른 두 사람 역시 말에서의 어폐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엔 이건 그냥 비너스였으니까.
선생님들은 일제히 침을 삼켰다.
완벽한 반우측면.
잘못하면 길어 보일 수 있는 비너스의 얼굴은 그저 우아했다.
연필 위를 손가락으로 쓸어보면 석고상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질 것 같은 생생함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었다. 아니 느껴졌다.
그림을 바라보던 세 명이 돌연 부르르 몸을 떨더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번에도 세 명의 뜻은 같아보였다.
시간 강사 중 대장격이라 할 수 있는 손동욱이 말없이 그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움직였다. D반, C반, B반. 손동욱은 빠른 걸음으로 그림 사이를 지나쳤다.
갑작스런 상황.
손동욱의 손에 들린 그림이 강석의 작품임을 아는 몇몇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설마 설마 하는 심정으로 손동욱의 발걸음을 눈으로 좇아갔다.
몇초도 지나지 않아 그들의 설마는 사실이 되었다.
맨 끝, 맨 마지막에 있던 강석의 작품이 기어코 맨 윗줄, 맨 처음에 놓였다.
A반 중에서도 제일 첫째 순서였다. A반의 1등. 80명 중에 1등을 만년 꼴등이 차지한 거다.
D반이 A반으로 올라가는 대이변.
한칸씩 밀려나는 본인의 그림에 그들이 경악을 터트리는 사이, 이제야 그림을 발견한 다른 학생들도 놀라서 그림을 쳐다봤다.
“뭐야?”
“···저게 세 시간만에 가능해?”
“방금 D반에서 올렸지?”
“미쳤다. 와! 진짜 이거 미쳤는데···!”
순수한 감탄이었다.
“저거 누가 그린 거야?”
“알겠냐. 이름 가려져 있잖아. 아, D반 반장이 걷었으니까 걔는 알겠네. 누구더라, 오혜정?”
“······혜정아!”
조용했던 실기실이 출근길 도로 한가운데처럼 시끄러워졌다. 평가 동안 입 다물고 있으라 했던 고두한의 경고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떠드는 그때. 작품의 주인, 강석만은 조용히 침묵을 유지했다.
강석은 고두한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은 먹이를 노려보는 그것과 닮아 있었다.
“선생님 평가 끝났습니다.”
“음.”
팔짱을 끼고 있던 고두한이 시간 강사 손동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이 반절 이상인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고두한은, 각이 진 모자를 고쳐 쓰며 움직였다.
그는 세 명과는 반대로 밑에서부터 올라갔다. 시간 강사들이 제대로 평가했는지 검수하기 위함이었다.
움직이는 와중에 그림을 꿰뚫듯 바라보는 시선이 매서웠다.
고두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림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겠다는 듯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폈으나 그의 손은 팔짱을 낀 상태에서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시간 강사 셋이 평가를 제대로 했단 뜻이었다. 고두한의 팔짱이 길어질수록 세 명의 어깨는 당당하게 펴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고두한이 A반의 첫 번째 그림, 강석의 그림 앞에까지 당도했다. 이번 평가에서 단연코 가장 큰 이변이었다.
천천히 그림을 바라보던 고두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스타일이 A반에 있었나?
선이 거친 듯 세세하며 폭죽이 폭발하듯 격한데도 강약 조절이 완벽했다.
고두한이 한쪽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턱 라인을 따라 짧고 촘촘하게 관리된 턱수염이 그대로 쓸려왔다.
완벽 위의 완벽.
형과 형태, 원근법과 비례, 명암과 질감, 양감과 동세, 그 모든 것을 단색으로 표현해내는 기법.
소묘(素描). 그것이 그대로 담긴 작품이 여기 있었다.
고두한은 고민을 거듭하다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A반 위의 또 다른 반이 있는 것처럼 맨 윗줄에 강석의 그림을 따로 뺐다.
그로부터 한참을 더 바라만 보던 고두한이 슬쩍 등을 돌렸다.
“이게 원래 A반 학생 그림이던가?”
고두한 선생님 특유의 느긋한 말투와 꿰뚫듯 관찰하는 눈빛이 뒤를 향했다.
눈빛을 정통으로 맞은 손동욱이 잽싸게 대답했다.
“아, 아뇨. 원래는 D반에 있던 학생의 그림입니다.”
손동욱의 목소리는 양처럼 떨렸다. 잘못한 것은 없으나 괜히 고두한 앞에 서면 긴장하게 되는 손동욱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두한은 수염을 쓸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얻은 그는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두한은 또다시 오래도록 그림을 감상했다.
마치 전시회에 온 사람처럼.
긴 침묵 속에서 그림을 바라본 끝에, 그는 고집스레 다물린 입을 열어 한마디를 내뱉었다.
“잘 그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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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용 눈이 아니었군.
···응? 나 방금 미켈란젤로나 할 법한 생각을 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사이 고두한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을 향해 말했다.
“평가 결과는 이대로 가지.”
평가가 완료되었다는 소리였다.
이 말은 즉슨, 내가 3학년 1학기부터는 소묘 A반에서 수업을 듣는단 소리였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고두한 선생님의 입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겨우 A반에 가겠다고 이렇게 열정적으로 비너스 석고상을 그린 게 아니야. 주먹을 꽉 쥐고 고두한 선생님을 바라보는데 D반부터 순서대로 그림이 걷히기 시작했다.
초점의 끝에서 평가 결과를 기록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장유민 선생님의 손이 보였다.
그 순간. 고두한 선생님이 수염을 쓸면서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근데 이 그림을 그린 학생이 누구지?”
소란스러워지던 실기실이 다시 침묵에 빠졌다.
“저희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을 받은 시간강사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두한 선생님의 눈이 이번에는 학생들을 향했다.
시선을 받은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이미 학생들 대다수가 그림의 주인이 강석이라는 얘기를 들은 뒤였지만, 강석의 그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진짜 강석이 그린 건가. 그들은 강석을 힐긋힐긋 돌아봤다. 진짜 너라면 나서보라는 눈빛이었다.
의심하고 추궁하는 눈빛 속에서 강석은 느리지만 당당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접니다.”
음?
이 엄청난 그림이 청화예고의 둔재 강석이 그린 그림이라···?
고두한이 의외라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가, 이내 재밌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고두한.
그는 진흙 속의 진주를 좋아하고, 진흙 위에 피어나는 연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재밌다는 듯 숨을 먹는 것 같은 웃음을 터트린 고두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업 끝나고 좀 남지.”
5. 점심밥 맛있게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