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54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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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石彫). 대리석을 조각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감자를 깎는 것과 같다.
우선 스케치를 해놓은 것에 360도 돌려가며 가장자리부터 껍질을 벗기듯 돌을 쳐낸다. 여러겹의 껍질이 있다는 게 좀 다르지만, 일단 벗기듯 쳐낸다.
그리고 속살이 들어나면 그 겉면을 다시 360도 돌려가며 스케치를 한다.
그 다음 다시 한 번, 감자의 뿌리가 파고든 부분을 도려내듯 세밀한 묘사를 시작한다. 그제야 그라인더와 망치와 끌을 이용해 작품의 모습을 찾아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서 바로 끝나지는 않는다.
다시 스케치하고, 파고들고, 또 스케치하고, 다시 또 파고들고···몇십 몇백 번에 걸쳐서 반복해야만 조각의 형상을 드러낼 수 있다.
이때에도 360도 돌려가며 작업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부피가 크면 클 수록, 그 행위의 반복은 길어지고 횟수를 더한다.
그게 석조였다.
또한, 돌을 조각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작업이기에 이 모든 과정 중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야 했기에 시간도 품도 많이 들었다.
여간 피곤한 작업이 아니었다.
‘······분명 그랬을텐데.’
양선구와 정병권은 묘한 표정으로 강석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사용법을 물어본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윙윙거리는 그라인더는 원래 강석의 신체 일부였던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돌만 몇십년을 캐내본 거장의 등이 강석에게서 보이는 것은 분명 둘만의 착각이 아니리라.
“허어···.”
“허.”
양선구와 정병권은 서로 똑 닮은 한숨을 흘러내쉬었다. 석재를 다루다 포기하고 수지나 목재로 넘어간 정병권은 물론이고, 석재를 다루는 양선구에게는 허탈과 황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재능이었다.
내가 저랬다면 어땠을까.
내가 처음 그라인더를 다룰 때 저랬다면 어떤 위치에 서 있을까.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자로서 닿을 수 없는 재능을 발견하는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저게 그라인더를 처음 사용하는 사람 맞나?”
“···아닌 것 같은데요.”
더군다나 조각하는 방식도 어딘가 달랐다. 스케치도 안하고 들어갈땐 뭔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납득이 갔다. 강석은 땅 속의 보물을 파헤치는 해적처럼 대리석을 깎아내고 있었다.
일말의 주저도 없는 동작.
동시에 한 번 선 지점에서 다른 면으로 이동하는 일도 없었다.
여러 면을 이동하며 전체적으로 균형을 맞추면서 해야 작품이 기우는 일 없이 제대로 설 수 있건만 강석은 대리석의 한쪽 면만을 계속해서 파내듯이 조각했다.
나는 자신 있으니 무게 중심 따위는 엿이나 바꿔 먹으라는 것처럼.
어쨌든 벌써 세시간 째였다.
“슬슬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그라인더가 돌에 끼이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자세를 잘 잡아야 하는 것은 물론, 힘과 자르는 방향, 각도에도 신경써야 했다.
몸과 정신 양쪽이 축나는 고난이도의 작업이라 분명히 중간중간 휴식을 취해야 할 터인데.
“근데, 말리는 게···맞나?”
“······그러게요.”
분명히 쉬어야만 하는데···강석에게서는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엿보이지 않았다.
물론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는 했다. 송글송글 맺히다 못해 흘러내리는 땀이라든가, 점점 상기되어 가는 얼굴 같은 거.
하지만 그것은 피로의 흔적이라기보다는, 좋아하는 운동을 즐기는 스포츠맨의 열정 같은 느낌이었다.
위이이이잉! 크드득, 크드드득, 위이잉!
실제로 강석은 옆에 누가 다가오든 말든, 무아지경에 빠져 그라인더를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 그라인더와 돌밖에 없다는 것처럼.
‘이게 정녕 인간의 집중력인가?’
정병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방진 마스크를 뒤집어 쓴 강석의 눈이 고글 너머에서 빛나고 있었다. 아까 슬쩍 살펴보기를, 광기가 깃든 듯 하기도 하고, 황홀함에 풀려있는 것 같기도 했다.
꺼내줄게, 라고 말을 하는 것 같더니 진짜 무언가를 한시라도 빨리 꺼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구조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석에게 눈치를 살펴 말을 걸려던 정병권과 양선구가 그 눈빛에 기가 질려 천천히 뒤로 물러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작품의 과몰입은 가끔 뒤로 나와 보는 것을 잊게 만들어, 꼭 억지로라도 집중력을 끊어줘야 하건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심지어 수정이 불가능한 대리석이 아닌가.
사용법이 특이하다고 한들 한 번이라도 잘못 길을 들면 그라인더의 날이 끼이거나, 대리석이 망가질 수도 있었다.
‘······일단 나가자.’
‘네. 그래야 할 것 같네요.’
그들은 결국, 강석에게 말 한 번 못 걸어보고 작업 공간에 마련된 유리벽 너머로 자리를 이동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강석에게 무슨 사고가 날까싶어 밖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예고에도 없던 철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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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블룸 미술관.
산강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당 미술관은 도시, 건축,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 안에 있다. 예술과 인간이 맞닿을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하려고 했던 블룸 미술관의 정경은 멀리서 보기에도 잘 조형된 공간이었다.
예를 들자면, 건물을 타고 올라간 등나무와 녹음이 푸릇한 저 잔디와 나무들이. 그러했다.
새파란 하늘.
아침 특유의 햇살이 쨍쨍하고 하늘의 색감이 맑아 보이는 풍경. 유리벽 너머에 있던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벽 너머에서 들릴 리 없지만, 날개를 포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그때. 위이잉. 양선구의 귓가로 익숙한 그라인더의 소음이 찾아왔다.
순간이나마 새에게 빼앗겼던 그의 시선이 다시 한쪽으로 돌아갔다.
양선구가 있는 공간은 원래 휴식공간이었다. 오른쪽으로는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있고, 정면을 응시하면 전시공간을 구경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양선구의 시선은 이제 막 정면을 향한 참이었다.
강석이 그곳에 존재했다.
양선구가 새삼 혀를 내둘렀다.
한 달.
약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강석을 지켜봐 왔다. 지켜볼 필요는 없었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선구는 일정이 비는 날이면 이렇게 블룸 미술관에 찾아와 강석을 지켜보곤 했다.
강석 역시 그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가능만 하다면 매일매일 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블룸에만 상주하지 않았으니.
아직 강석은 고등학생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유리공방이라는 곳에서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가끔은 다크서클의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과 커피를 마시며 심각하게 얘기를 주고받느라 시간을 쏟곤 했다.
강석을 지켜보고 있자면, 혼자서만 하루를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게다가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면서 저 속도감은 도대체 무엇인가. 잠을 안 자는가? 잠을 안 잔다고 해도 말이 안 될 정도로 경이로운 수준의 빠르기였다.
아직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벽면이 깎아내려서 가운데 파묻혀있던 인체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수준이라니.
그림이야 손으로 그리니 그렇다 치지만, 그라인더는 기계가 돌아가는 것인데 어찌 같은 그라인더를 써서 남들보다 몇 배 이상의 속도를 내는 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스케치를 안 하고, 망설임이 없어서 단축되는 시간이라고 뭉뚱그려 넘어가기엔 빨라도 지나치게 빨랐다.
“신기한지고.”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어찌 저리 무한하게 쓰는지. 양선구의 눈동자에는 나이를 떠난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물론, 바쁘게 살아가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감히 자신보다 어린 사람을 경외하게 되는 것은 신의 손을 훔쳐온 것 같은 저 실력 때문이었다.
그 정도였다.
양선구는 강석이 조각하고 있는 저 거대한 대리석을 본다면 누구라도 제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다.
차마 불경하여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강석은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양선구는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미켈란젤로.’
지고의 조각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강석은 꼭 그를 떠올리게 했다.
닮은 것이 아니라, 떠올리게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조심스러울지언정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든해를 넘게 산 양선구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강석이 조각하고 있는 저 대리석에선 이따금 감히, 미켈란젤로가 보였다.
필요없는 모래를 삽으로 파내듯 한쪽 면을 부여잡고 죽 파고드는 강석의 방식이 일단 미켈란젤로를 떠오르게 했고, 한쪽 벽면 위에 입체적인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하는데···그 일부가 지나치게 훌륭하여 다시 한 번, 영혼의 울림에 따라 조각했다는 미켈란젤로를 떠올리게 했다.
여기서 드는 가장 큰 의문은 미켈란젤로의 아이덴티티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강석이 조각하고 있는데,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제 몸에 맞게 어울려 보인다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법이 따라 한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하지만.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었다.
‘······진정 크게 될 젊은이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라인더로 돌을 벗겨 내는 강석을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양선구의 눈으로 서서히 희열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파괴충동도 일기 시작했다.
모래바람처럼 부는 하얀 가루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잡히기 시작한 조각은 황홀했지만, 끝없는 절망과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게 했다.
그것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또 시작이군.’
양선구가 냉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 몰아쳐 오는 황홀한 분노에서 도망치겠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강석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산신령 같은 복장을 한 양선구는 수영장에 다이빙을 하듯 다급하게 바깥 공기를 향해 걸음을 놀렸다.
강석이 작품을 만드는 것을 지켜본 지 2시간하고도 3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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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미술에는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나곤 한다.
현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말이다.
그 중에는 스탕달 신드롬과 다비드 증후군을 꼽을 수 있었다.
스탕달 신드롬은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 역사적인 예술 작품을 목도하는 순간, 정신적 일체감을 느끼면서 일어나는 여러 정신적 충동과 분열 증상이 생기는 경우를 말함이고.
다비드 증후군은 위대한 작품,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면 사람들의 감정은 황홀함에서 점차 초조해지고, 공격성이 짙어지며, 파괴 충동을 느끼다, 결국 패닉상태의 공격성을 띄게 된다는 연구결과에 이름 붙여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양선구는 그 두 가지 모두를 겪고 있었다.
양선구에겐 종종 일어나곤 하는 흔한 일이었다. 누구에게 떠벌리고 다닌 적은 없지만, 양선구는 가끔 위대한 대작들을 보면 이런 감정을 느끼곤 했다.
물론, 과거의 인물이 아닌 현대 인물의 작품에서 이런 충동을 느낀다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내가 현대 조각가가 만든 작품에서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몰랐거늘······.’
심지어 완성품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면 기함이 나올 정도였다.
“후우······.”
양선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녹음이 푸르른 정경을 바라봤다.
수염을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쓰다듬으며 심신의 안정을 불러일으키는 초록을 바라보고 있으니 평화로웠다.
그때였다.
“작가님. 또 속이 안 좋으세요?”
양선구에게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게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여인은 블룸 미술관의 큐레이터 진유미였다. 그리고 이번에 유치된 양선구 작품전의 총괄 담당이기도 했다.
“음. 아닐세.”
수염을 몇 번 쓰다듬은 양선구가 속이 안 좋아서 걷는 게 아니라고 말을 짧게 축약했다. 사실 지금으로선 이 정도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위경련과 가빠진 호흡에 술을 마신 것처럼 흥건한 어지러움은 양질의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작가님. 요즘 몸이 좀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쉬는 게 어떠세요?”
진유미가 손수건을 건네며 물었다. 요즘 따라 강석의 조각을 바라보고 있다가 밖으로 나와 산책하는 걸 반복하고 있자니 그런 모양이었다.
손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맙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받아든 양선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그저 내가 지나치게 감수성이 뛰어나서 문제인 거니···”
“네?”
“아닐세.”
이걸 구구절절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모두가 느끼는 증상이 아니었으니까. 스탕달 신드롬이니, 다비드 증후군이니 하는 것은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 일부만이 느끼는···어쩌면 정신병의 일종이었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 이해를 바라는 게 우스웠다.
“진짜 괜찮으세요?”
“괜찮대도.”
그와 동시에 이 황홀함과 함께 찾아온 공격적인 태도를 억누르고 있기도 벅찼다. 폭언이 나올 것 같고 맹렬하게 공격하고 싶었다.
마치 1991년에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망치로 다비드상의 발을 내려친 전적이 있는 파괴자와 같은 증상이었다.
‘자리를 피해야겠어.’
자신은 신사였다.
여든여덟, 인간답게 살아온 양선구는 이제 와 짐승이 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예술작품을 만나며 고비를 넘겨왔던 만큼. 이번에도 자신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양선구가 인사를 하며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때.
“그럼 다행이에요. 사실, 요즘 저도 몸이 안 좋아서 우리 양선구 선생님도 그런 건가 걱정했거든요.”
“···자네 몸이 안 좋나.”
파괴 충동 속에서 일말의 연민이 새순을 피우듯 올라왔다. 진유미는 자신의 작품전을 종종 열어주곤 하는 담당 큐레이터였다. 거의 파트너쉽을 맺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호흡을 많이 맞춰온 전우이기도 했다.
그런 이가 아프다고 하면 걱정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아니겠나.
양선구가 공격성도 내리누르고 진유미를 바라보고 있자니. 진유미가 약간은 붉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카라로 힘껏 올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힐긋힐긋 먼 곳을 응시하던 진유미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요즘 심장이 계속 뛰고, 숨은 쉬기 어렵고, 무릎은 떨리는 게···양선구 선생님이 저랑 비슷한 증상을 느끼시기에 전 블룸에 전염병이라도 도는 줄 알았다니까요. 꽃가루 알레르기나?”
“···전염병? 알레르기?”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퍼뜩 놀라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걸 지켜보던 양선구가 묘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진유미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는 유리벽 너머의 강석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강석과 대리석이 있었다.
“혹시 진유미 자네, 그 증상을 이곳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감?”
“네?”
진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작가님도 그러세요?”
그 말을 하면서 진유미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녹음이 푸르른 정경에 벌레라도 있는지 살피는 기색이었다. 퍽 표본을 찾는 파브르의 그것과 같았다.
“진짜 여기에 무슨 벌레나 그런 게 들어온 건가? 무슨 전염병이나, 알레르기나, 어떻게 이거 관장님한테 보고를 올려봐야 할까요?”
양선구가 묘한 낯으로 진유미를 바라보았다.
진유미가 말하는 증상은 자신이 보기에 스탕달 신드롬과 닮아있었다. 자신이 그런 걸 겪고 있어서 뭐 눈에 뭐만 보이는 격일 수 있으나, 이곳을 지날 때마다 느꼈다면 꽤 그럴싸했다.
양선구는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수염을 동물의 갈기라도 되는 것처럼 쓰다듬던 양선구가 묘한 낯을 띄웠다.
강석이 작품을 완성했을 때.
미술계는 새로운 변화를 맞닥트릴지도 모른다.
양선구가 가슴에 손을 올렸다.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또 다른 설렘이 황홀감을 뚫고 용암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양선구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양선구의 신음 같은 중얼거림이 작게 흘러나왔다.
“이거 바빠지겠어.”
오로지 양선구만 들을 정도의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양선구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리고는 여즉 불안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던 진유미에게 해답을 제시했다.
“이 길로만 산책하지 말고, 다른 길로도 산책을 해봄세. 자네가 잡초 알레르기 같은 것일 수도 있잖나.”
“···그럴까요?”
“그렇지. 그리고 이 근처에 입구를 좀 막아놓고 바리케이드도 치고 싶은데···”
“네?”
“아니. 이건 내가 정리한 뒤에 관장에게 따로 말할 테니 신경 쓰지 말게. 그럼 내가 급히 가볼 때가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네. 미안허이.”
양선구가 급하게 걸음을 놀렸다. 언제 안색이 안 좋았냐는 듯 날아갈 것 같은 발놀림이었다. 진유미가 그 근두운이라도 탄 것 같은 빠르기에 놀라 지켜보다 손을 흔들었다.
나름, 배웅이었다.
* * * *
후우.
짧게 숨을 고른 강석이 방독면을 얼굴에서 풀었다. 열린 창문으로는 하얀 가루들이 나비의 떼 지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환풍기가 거세게 돌아가는 와중이었다.
이곳에서 완전히 나가지 않고 방독면을 풀었다간 코딱지는 하얀색이 되어 나오고, 머리는 흰색 가루가 묻어 분필처럼 뭉치고 할 테지만. 워낙에 방독면을 써보고 작업한 이력이 없어 그라인더만 끄면 자신도 모르게 방독면을 풀어버리곤 했다.
익숙하지 않은 자의 말로 같은 거지.
벌써 뻣뻣해진 것 같은 느낌에 머리를 쓸며 강석이 밖으로 나갔다. 혹시나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을까 고개를 돌려보니 양선구 할아버지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 ‘할아버지라고 부르래도.’
– ‘·········.’
– ‘어허?’
– ‘·········하, 할아버지.’
– ‘옳지. 옳지. 호박엿이라도 챙겨줄깜?’
나름 전생까지 끌어오면 정신연령은 제가 형님 연배일 건데. 귀여움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허, 거 참. 강석이 난감하단 얼굴로 콧등을 긁었다.
한쪽 손으로는 오늘 아침에 나눠 받은 호박엿을 주머니 속에서 굴리면서, 걸음은 느리지도 않게 빠르지도 않게 나아가는 중이었다.
이영혁 할아버지도 그렇고, 양선구 할아버지도 그렇고. 이번 생에선 꽤 할아버지들에게 예쁨 받을 상인가보다. 생각해보면 전생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를 소유하고 싶어했던 역대 교황들을 떠올려보던 강석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붉어진 낯으로 지나가는 진유미 큐레이터가 강석의 눈에 보였다.
그녀는 복도의 문을 걸어잠그고 있었다. 구두 뒤꿈치가 살짝 벗겨졌다. 검은 스타킹을 신은 발꿈치를 무의식중에 눈에 담는데 진유미가 고개를 돌려 강석을 아는체했다.
“작가님?”
진유미는 강석이 고등학생이건 말건 꼬박꼬박 작가님이라고 호칭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오늘은 작업이 꽤 일찍 끝나셨나 봐요?”
강석이 작업이 끝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하는 말이었다. 강석이 슬쩍 콧등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약속요?”
무슨 약속인지 궁금해서인지 아니면 습관성 반응인지 진유미가 고개를 기울였다. 강석은 물어보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어디 갈 데가 있습니다.”
“어디 가시는데요?”
“아, 음. 병원이요.”
“네? 병원이요? 어어, 설마 작가님도 혹시···?!”
진유미가 놀랍다는 듯 손뼉을 쳤다. 붉어진 홍조에서 동조를 원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강석은 그게 뭐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예? 아뇨? 그, 뭔지는 몰라도 아마 아닐 겁니다. 작품 발표회 때문에 가는 거거든요.”
“···에. 어어···그렇구나. 그나저나 작품 발표회요?”
큐레이터가 본업인 진유미가 다소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병원에서 작품 발표회라니. 자선행사 같은 것에 참여하나?
“그럼 먼저 갈게요. 다음에 봬요.”
“아, 네네. 작가님, 안녕히 가세요.”
연달아 두 번이나 작가님을 배웅하게 된 진유미를 뒤로 하고 강석이 한 발짝 내디뎠다.
4월 7일, 세계 보건의 날.
오늘은 드디어 마크툽이 세상에 발표되는 날이었다.
55. 오 고상한 정신, 드높은 영혼과 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