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01)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01화
사기꾼의 승리법 (3)
다음 날.
협회장 한태호와의 자리가 마련됐다.
오진은 이우혁과 함께 협회로 향했다.
“오셨군요.”
협회에 도착하자 한 부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한 부장의 안내를 따라 협회 안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보안장치를 뚫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우웅.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넓은 사무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무실 중앙에 앉아 있는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군.”
왜소하고 깡마른 체구.
자글자글 주름진 피부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
형형하게 눈빛에선 좌중을 압도하는 묵직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한태호라고 하네. 먼저 찾아갔어야 했는데 이렇게 늦게 인사하게 되어 미안하네.”
정중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 한태호가 오진과 이우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번 사태에서 뇌랑과 흑사자 덕분에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었네. 아직은 보상을 논할 때가 아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협회 차원에서 공에 걸맞은 보수를 약속하겠네.”
박건우가 그를 가리켜 늙은 독사라고 했던가.
‘독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보수는 괜찮습니다.”
이우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이런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잡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고 싶을 뿐입니다.”
자신과 같은 사기꾼이 아닌 진짜배기 영웅이라 이건가.
탄성이 절로 흘러나오는 발언이었다.
‘물론 난 받을 거지만.’
준다는 데 받아야지.
그걸 왜 안 받아?
“그 부분에서는 뇌랑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네만?”
한태호는 자리에 앉으며 오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 여러분들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진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구로동 습격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저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 하나가 고층 빌딩 창문에서 현장을 내려다보는 걸 발견했습니다.”
“으음. 그 상황에서 현장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예. 수상쩍게 생각한 저는 그자를 쫓았고… 이걸 발견했습니다.”
오진은 검은 술잔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게 무엇인가?”
“마수를 조종하는 성유물입니다.”
“……!!!”
네 사람의 눈이 크게 부릅뜨였다.
“그, 그게 진짜입니까?”
“예. 실제로 사용도 해봤습니다. 마수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었죠.”
“아… 그럼 중간에 마수들이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췄던 이유가.”
“제가 내린 명령 때문입니다.”
“…허.”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수를 조종하는 성유물이라니.
이제까지 한 번도 기록된 적 없는 능력의 성유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마수 사태를 누군가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뜻이군.”
한태호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흑성회.”
까득.
그 범인이 누군지 짐작이 간다는 듯 이우혁이 사납게 이를 갈았다.
“그 검은 로브의 사내는 잡으신 겁니까?”
“붙잡기는 했지만… 제압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결해 버렸습니다.”
오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마 이번 사건의 진정한 배후가 들통 나는 걸 막기 위함이겠죠.”
“…배후라니.”
한태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흑성회와 연루된 인물이 협회 내부에 있다는 걸.”
“설마….”
그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천우성… 그자가 이번 사건의 배후라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닐 이유가 있습니까?”
한태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적어도 그는 비각성자들을 건드리지는 않네.”
“정확히는 건드리지 않‘았’던 거죠.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이번 사건으로 인해 누가 가장 위태로워졌는지, 반대로 누가 가장 많은 이득을 챙기게 되는지는 한태호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슨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가장 큰 이득을 본 놈이 범인이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논리지만, 사실 대부분의 상황에 들어맞는 말이기도 하다.
“…….”
한태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이어갔다.
“믿기 힘드신 것도 이해합니다.”
아이러니한 일이긴 하지만.
이제까지 천우진이 비각성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던 건 그의 ‘진심’이었다.
‘뭐, 마지막에 와서는 숭고한 희생이니 뭐니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짓밟아버렸지만.’
어쨌든.
천우진을 쭉 옆에서 지켜봐 오던 한태호의 입장에선 그토록 비각성자들을 아끼던 그가 이번 학살 사태의 배후라 하니 믿기 어렵겠지.
“…솔직히 믿기 어렵네만.”
깊은 한숨.
“그가 이번 사건의 배후라 한다 해도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나?”
“이제부터 만들어야죠.”
“만든다고?”
한태호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기자회견을 여셔서 협회장님께서 직접 이걸 들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검은 술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현재 범인을 잡아 심문 중이라고. 곧 이 사건을 지시한 배후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덫을 깔아둔 채 먹잇감을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오진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 * *
어둑한 사무실.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빛만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이게 범행에 사용된 성유물입니다.]티비에 속에선 협회장 한태호가 기자들 앞에 검은 술잔을 내밀고 있었다.
[마수를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성유물이죠.]그는 검은 술잔을 든 채 한쪽으로 걸어갔다.
-크르르릉 커헝!
견고한 철제 우리 안에는 이번 구로동 사태에서 생포한 마수가 붙잡혀 있었다.
[두 팔을 들어라.]검은 술잔에 대고 명령을 내리자 우리 속의 마수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기자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퍼졌다.
[이처럼 범인은 마수를 조종해서 의도적으로 시민들을 학살한 겁니다.]무수한 플래시 라이트.
술렁거림은 이내 소란으로 변했다.
[현재 범인은 협회 안에 구속 중이며 심문이 끝나는 대로 배후에서 누가 지시를 내렸는지 밝혀내겠습니다.]굳은 의지가 담긴 선언을 끝으로 회견이 종료됐다.
“제기랄!!”
쨍그랑!
천우성은 화면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하아, 하아!”
거칠어진 숨결.
‘박건우가… 잡혀 버렸다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대체 왜?’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하려고 일부러 계획에 투입되는 인원을 박건우 하나로 한정했고, 마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위치 또한 절대 들킬 리가 없는 곳으로 선정했다.
심지어 박건우는 상급 정무관의 직위를 받은 실력자.
쫓긴다고 해도 어찌 알아서 잘 빠져나가리라 믿었지만.
-까득.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멍청하게 특무관 손에 잡혀 버리고 말았다.
‘박건우가 심문에 입을 열지 않으면 아무 문제없지만.’
과연.
그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어떻게든 손을 써야 했다.
박건우를 탈출시키듯, 아니면 제거하든.
‘내가 직접 움직일 수는 없어.’
지금 자신은 흑성회와 연루된 게 아닌지 의심을 받는 상황.
직접 움직이다가 발각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흑성회와 조금의 연관도 없으면서도.
협회 안에 잡혀 있는 박건우에게 접근할 수 있을 만한 영향력 있는 인물을 움직여야 한다.
“…정 이사 어딨어?”
“바로 불러오겠습니다!”
천우성의 명령에 올빼미 하나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5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하아! 하아! 부, 부르셨습니까!”
반쯤 벗겨진 머리에 뒤룩뒤룩 살찐 사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정승만 이사.
천우성이 협회에 잠입한 이후 만든 부하로 그의 정체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 있는 사내였다.
‘만약 이놈이라면 붙잡혀도 문제없겠지.’
애초에 흑성회가 아니니 아무리 털어도 증거가 나올 리가 없을뿐더러.
박건우가 붙잡힌 곳까지 접근할 수 있을 만한 권력도 지니고 있다.
‘나한테 지시를 받고 한 일이니 어쩌니 씨불이면 좀 곤란하긴 하겠지만.’
괜찮다.
그 정도는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뗄 수 있다.
“정 이사님.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방긋.
천우성은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어떤….”
“이번에 붙잡힌 범인 아시죠?”
“그… 마수 사태를 일으킨 범인 말씀입니까?”
“예.”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를 죽이세요. 죽이는 게 힘들다면 최소한 밖으로 탈출시키세요.”
“그, 그런!”
정승만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그가 이사라는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지만 마수 사태를 일으키고 시민들을 학살한 범인을 풀어줬다가는 그대로 매장이었다.
“제 부탁… 들어주실 거죠?”
천우성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히, 히끅!”
정승만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딸꾹질했다.
안절부절 폭포수처럼 식은땀을 흘리던 그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는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밖으로 나갔다.
“후우.”
천우성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
그는 창밖으로 바라보며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
가만히 기다리기 지쳤는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천우성은 사무실 금고 속에 은밀히 보관된 통신 구슬을 꺼냈다.
그의 아버지, 천도윤에게 직통으로 연결되는 통신 구슬.
천우성은 갈등에 찬 표정으로 손에 쥔 구슬을 내려다봤다.
‘아버지에게 상황을 보고할까?’
짧은 고민이 스쳤지만.
“…아니.”
이건 천도윤이 자신을 믿고 맡긴 임무.
어떻게든 그의 힘으로 해결해야 했다.
‘아버지는 지금 많이 바쁘시니까.’
정확히 그가 무슨 일을 계획하는지는 천우성 자신도 잘 알지 못했지만.
연락도 잘되지 않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하아.”
천우성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렸을까.
-우우우웅!
통신 구슬이 진동했다.
-서, 성공했습니다!
구슬에 비치는 건 잔뜩 땀에 절어 있는 정승만의 얼굴.
천우성의 눈이 반짝였다.
“죽였나요?”
-아, 아뇨.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 모, 몰래 감금장치를 풀어서 탈출시켰습니다!
삐익!!! 삐이이이익!!
박건우가 탈출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협회 전체에 시끄러운 경보가 울려 퍼졌다.
‘그렇지!’
불끈.
천우성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박건우가 탈출했으니 자신이 할 일은 하나였다.
“올빼미들이여.”
슈슈슈슈슉!!
검은 깃털이 흩날리며 수십 명의 올빼미가 집결했다.
“박건우를 찾으러 가죠.”
박건우가 다시 붙잡히기 전에.
자신이 먼저 직접 그를 처리해야 했다.
-달칵.
천우성은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그… 모, 몰래 감금장치를 풀어서 탈출시켰습니다!”
반쯤 벗겨진 머리.
뒤룩뒤룩 살찐 사내가 통신 구슬을 붙잡으며 다급히 외쳤다.
삐익, 삐이이이익!!
곧 시끄러운 경보가 협회 안에 울려 퍼졌고.
-뚝.
통신이 끊겼다.
“읍!! 으으읍! 으읍!!”
통신이 끝나자 억눌린 신음이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아저씨, 조용히 하고 있으란 말 못 들었어?”
정승만이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더니 빙글 몸을 돌렸다.
그의 아래에는 (볼드)정승만이 와이어에 꽁꽁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두 명의 정승만.
묶이지 않은 쪽의 정승만이 와이어에 묶인 정승만의 입을 막고 있는 테이프를 잡아 뜯었다.
-치익!
“푸하!”
정승만은 거친 숨을 내쉬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덜덜 몸을 떨었다.
“나,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네!”
“그래, 그래.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으면서 말이지?”
정승만 이사의 갑질은 협회 내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비서를 세 명이나 강제로 희롱했다고 했던가.’
당장 잘려도 할 말이 없는 패악질이었지만.
천우성의 입김 덕분에 어찌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그건.”
삐질삐질.
두툼하게 살이 오른 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 살려주게!! 제, 제발!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깐!!”
“흐응. 그러고 싶긴 한데 입이 가벼운 놈을 살려두는 건 좀 위험해서 말이지.”
정승만의 얼굴을 한 괴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 어차피 나는 자네 진짜 얼굴도 모르지 않는가!! 자네 정체가 들킬 일은 없어!!”
그의 말마따나.
정승만은 자신을 습격한 괴인이 누군지조차 알지 못했다.
무슨 능력을 쓴 건지 감쪽같이 자신의 얼굴로 변장한 모습만 봤을 뿐.
“아, 그래?”
꾸르륵.
정승만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괴인의 얼굴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녹아내렸던 얼굴이 오진의 얼굴로 변했다.
“이제 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