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4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48화
축하 파티 (4)
“와아! 역시! 파군성 님 쪽에서 먼저 고백하신 거였군요!”
멜리사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기도를 하듯 두 손을 꼭 모아쥐었다.
이사벨라에 대한 선망의 빛이 한가득 담겨 있는 눈빛.
리무진 안에서 들었던 이사벨라의 강의가 머리를 스쳤다.
‘이게 바로 사랑의 주도권!’
멜리사는 이사벨라를 향해 찡긋 윙크하며 조용히 엄지를 척 추켜올렸다.
이사벨라 님의 조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의 신호.
“그, 그래요. 오, 오진 씨가 먼저… 고, 고백하셨어요.”
무한한 선망과 경외가 담긴 멜리사의 눈빛에 이사벨라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제 그만 요리를 하러….”
다급히 화제를 돌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이사벨라였지만.
“어디서요?”
“예?”
“어디서 고백받으신 거예요?”
이제 막 사랑을 알아가는 소녀의 호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 그, 그러니까.”
이사벨라가 힐끗 오진과 하은 쪽을 바라봤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둘 다 눈치챈 듯 오진은 실소를 흘리고 있었고, 하은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입을 틀어막은 채 끅끅거리고 있었다.
“…….”
이사벨라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해, 해변가였어요.”
“아! 산 프루투오소! 그때였군요!”
“그, 그래요.”
멜리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비틀며 꺄아! 비명을 질렀다.
“노을이 지는 해변가에서 고백이라니! 로맨틱해요!”
노을이 졌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소녀의 상상력은 이미 주체할 수 없이 폭주하고 있었다.
“멜리사. 조금 진정….”
“대사는! 제일 중요한 고백 대사는 뭐였나요? 파군성 님은 이사벨라 님에게 어떤 사랑의 말을 속삭이셨나요?”
“사, 사랑의 말이요?”
덜덜덜 떨리는 이사벨라의 다리.
그녀는 차오르는 수치심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희망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자신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던 말.
물론 멜리사가 말한 사랑의 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말은 그녀에게 있어서 어쭙잖은 사랑의 말 따위보다 몇 배는 더 마음을 뒤흔들었다.
“희망? 사랑이 아니라요?”
“…예.”
“흐으으으음.”
뭔가 기대와는 다르다는 듯 눈을 좁히는 멜리사.
“파군성 님!”
멜리사의 시선이 오진에게 향했다.
그녀는 흥분에 찬 콧김을 내뿜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사벨라 님에겐 언제 반하셨나요?”
“어… 그러니까.”
“오, 오진 씨!”
이사벨라가 오진을 향해 몸을 돌리며 기도를 하듯 두 손을 포갰다.
제발 말을 맞춰달라는 간절함이 담긴 몸짓.
오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일까.”
“아아! 역시! 역시 첫눈에 반하신 거였군요!”
멜리사가 붉게 달아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꺄아꺄아 고개를 저었다.
“멜리사. 이만 돌아가자꾸나.”
“앗! 지, 집사장님 아직 물어볼 게 남았…!”
로베르토가 한숨을 내쉬며 멜리사를 잡아끌었다.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폭주하던 멜리사가 집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간 순간.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은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리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뭐야, 뭐야, 뭐야~? 우리 아가씨 밖에서는 오지니랑 사귀고 있다고 구라치고 다녔던 거야?”
“시, 시끄러워요. 언니!”
“꺄하하하! 아 웃겨 죽겠네 진짜!”
“언니이!”
이사벨라가 씨익씨익 얼굴을 붉히며 오진을 돌아봤다.
“오진 씨! 언니 좀 말려….”
“오랜만에 이사벨라를 만나니 그날 노을 진 해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네.”
“…예?”
오진은 우수에 찬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때, 내가 용기를 내서 고백했었지.”
“헉.”
“이사벨라… 네 희망이 되어 주겠다고 말이야.”
“오, 오진 씨까지!”
이사벨라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오진은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이사벨라 바라봤다.
평소 귀족 아가씨처럼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의 이사벨라가 이렇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 그래? 우리 연인 사이 아니었어?”
“아으, 아으, 아으으으!”
이사벨라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눈을 글썽였다.
“몰라요 진짜! 두 분 다 너무해요!”
이사벨라가 획 찻잔을 집어던졌다.
오진은 빈 찻잔을 재주 좋게 받아내며 시계를 살폈다.
“그나저나 이렇게 있어도 되는 거야?”
“예?”
“손님들 올 때까지 2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앗.”
이사벨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정신없이 있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바, 바로 요리 시작할게요!”
이사벨라는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갔다.
* * *
“칠성에 뽑히신 걸 축하드립니다, 오진 씨.”
가장 먼저 찾아온 건 한 부장이었다.
“나도 왔어 형!”
그의 뒤에서 어울리지 않는 흰색 연구복을 입은 소년이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협회 소속 성유물 연구소 총책임자 김시후.
어린 나이에도 천재적인 성유물 제작 실력으로 연구소장 자리에 앉은 소년이었다.
“오랜만이네.”
리빙 아머의 창을 얻기 전까지만 해도 정기적으로 무기 점검을 받으려 만났지만, 최근에는 거의 보지 못했다.
“형! 새로운 성유물을 얻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거?”
허리춤에서 꺼낸 폴딩 나이프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촤르르르륵, 착!
눈 깜짝할 사이에 창의 형태로 변한 나이프.
“오오! 그게 소문의 에고 웨폰이구나!”
김시후는 들뜬 표정으로 창에 손을 뻗었다.
파직!
창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주인이 아니면 못 만져.”
“으음. 그렇단 말이지.”
김시후는 연구복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하나 꺼냈다.
“형 잠깐 이거 바닥에 내려놔 줄 수 있어?”
“응.”
리밍 아머의 창을 바닥에 내려놨다.
김시후가 돋보기를 가져다 대자 푸르스름한 빛이 실타래처럼 빠져나와 창을 휘감았다.
“흐음. 단탈리안이라….”
“단탈리안?”
“이 창의 이름이야. 창대 쪽에 술식으로 새겨져 있어.”
“뭐?”
오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대 부근을 바라봤다.
어둠을 뭉쳐 만든 듯 매끈한 칠흑만이 있을 뿐, 술식처럼 보이는 건 없었다.
“아, 정확히는 창대 내부에 새겨진 술식이야. 이걸 이용해야만 볼 수 있어.”
김시후가 돋보기처럼 생긴 성유물을 들어 올렸다.
‘단탈리안이라.’
오진은 흥미로운 눈으로 칠흑의 창을 바라봤다.
에고 웨폰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 무기의 자아(自我)가 깃들어 있다는 걸 체감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이름이 있을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단탈리안.”
오진은 창을 쥐며 이름을 불렀다.
우우우우웅!
칠흑의 창이 부르르 떨리며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응? 어째 평소보다 출력이 좋아진 것 같다?”
단탈리안에 살짝 마력을 흘려 넣어본 오진은 동그랗게 눈을 떴다.
한 거라고는 그냥 창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평소보다 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한층 짙어졌다.
“이름 때문이야.”
“이름 때문이라고?”
“에고 웨폰은 그 안에 깃든 자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성능이 좋아지거든.”
김시후는 돋보기처럼 생긴 성유물을 사용해 칠흑의 창을 다시금 유심히 살폈다.
“형. 언제 한 번 시간 내서 연구실로 올래? 연구실 장비면 안에 새겨진 술식을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거야.”
“알았어.”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오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김시후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오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때? 이 정도면 축하 선물로 최고지?”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라 오늘.”
피식 웃으며 김시후의 어깨를 두드렸다.
“끄응. 이거 갑자기 제 선물이 좀 민망해지는데요.”
한 부장이 들고 온 과일바구니를 내려다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민망하다뇨. 잘 먹겠습니다 부장님.”
“하하. 이건 회삿돈이 아니라 제 사비로 샀습니다.”
한 부장에게 큼지막한 과일바구니를 받아들었을 때.
“오랜만입니다 오진 씨. 리빙 아머 때 이후로 수련에 집중한다고 제대로 연락도 못 드렸네요.”
한 부장의 뒤를 이어 이우혁이 도착했다.
못 보던 사이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기세.
‘이번에 9성으로 올라섰다고 했나.’
확실히 8성이었을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련 성과가 좋으셨나 보네요.”
“하하. 오진 씨만큼은 아니죠.”
이우혁 또한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오진이 괜히 칠성에 뽑힌 게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진짜 8성… 맞지?’
이우혁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여기 축하 선물이에요.”
이우혁과 함께 온 발할라 길드의 부길드장, 김선영이 돔페리뇽이라 적힌 샴페인을 내밀었다.
김선영을 바라보는 오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대체 뭘 망설이는 거예요! 동생이잖아요… 하나뿐인 가족이잖아요!
표독스러운 눈으로 이신혁을 노려보며 당장 이우혁을 구하러 가야 한다고 외치던 그녀의 모습.
“…….”
왠지 모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오진 씨?”
“아, 예. 감사합니다.”
오진은 샴페인을 받아들며 몸을 돌렸다.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며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 차려.’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나의 아이야! 축하하느니라!]“크르릉. 흥, 애송이치고는 분발했군.”
그 뒤로 베가와 리아크도 파티에 참석했고,
“아쟈씨! 잘 지냈어?”
리베카 또한 명랑한 미소와 함께 오진을 찾아왔다.
“자! 그럼 파군성 오지니의… 푸흡! 아, 이거 칭호 겁나 어색하네.”
모두가 모인 자리.
잔을 들어 올린 하은이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사신무 안 쓰냐?”
“시끄럽고 하던 말이나 마저 해.”
누가 연인 사이 아니랄까 봐 어째 생각하는 것까지 비슷하냐.
“크흠! 어쨌든! 우리 오지니가 칠성이 된 걸 축하하며! 건배!”
맑은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파티가 시작됐다.
[미미(美味)! 역시 하은이 만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로구나!]“앙?”
“이걸 전부 혼자서 만드신 거예요?”
이사벨라의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신나게 먹고 마시며 파티의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을 때.
‘음?’
순간.
오진의 다리에 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려보니 늘씬하게 뻗은 새하얀 다리가 오진의 다리를 슬슬 간지럽히는 게 보였다.
다급히 고개를 들어 식탁 건너편을 바라보니 딴청을 피우고 있는 이사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뭐 하는….”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오진 씨?”
이사벨라는 짓궂은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능숙하게 발을 움직여 오진의 발을 살살 자극했다.
마치 연인 사이에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은 몸짓.
오진은 이사벨라가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까 그거 때문인가!’
멜리사 앞에서 시원하게 망신을 당한 것 때문에 그녀 안에 있는 어떤 스위치가 켜진 모양.
건너편에 앉은 이사벨라는 늘씬하게 뻗은 두 다리를 움직여 오진의 다리를 감쌌다.
“자, 잠….”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당황한 표정으로 발을 빼내려고 했을 때.
“가만히 계세요.”
우뚝 멈추는 몸.
이사벨라는 두 다리를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여 그의 정강이를 간지럽혔다.
아니, 간지럽혔다는 표현을 쓰기엔 너무 자극적인 쾌감을 동반하는 움직임.
“아까 잘도 절 놀려주셨죠?”
이사벨라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다리의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오진은 밀려오는 쾌감을 견디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 누나도 같이 했는데 나만 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하은 쪽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이우혁이 가져온 샴페인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다른 사람들과 떠드느라 이쪽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크윽.”
오진은 입술을 짓씹으며 최대한 신경을 분산시키려 했다.
그런 그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사벨라의 다리가 점차 허벅지 쪽까지 뻗어오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이 자리엔 그의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 민망한 광경을 들키게 됐을 때 어떤 후폭풍이 덮칠지는 불 보듯 뻔한 일.
‘목소리가… 나와 버렸!’
오진은 질끈 눈을 감은 채 밀려드는 쾌감을 견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