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9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98화
하늘 산맥 (4)
“어머, 어머, 어머!”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어머’를 연발하는 스피카.
“그, 그렇게 안 봤는데 이거 속이 새카만 아이였네!”
스피카는 경기를 일으키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데네브와 대리전을 펼치는 모습을 봤을 때는 뭐 이런 쌍또라이가 다 있나 전율했지만.
그 뒤에 칠성의 일원으로 뽑혀 ‘파군성’의 이름을 부여받기 위해 만났을 때는 인상이 좀 달라졌었다.
뭔가 영웅의 기개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오진이 역천의 별이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니 대리전 때 보여줬던 정신 나간 행동들도 뭔가 굳은 결의와 신념을 바탕으로 이뤄진 영웅적인 행동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이런저런 일이 있고 난 뒤 그녀의 머릿속에 잡힌 오진의 이미지는 세속과 불통한 채 고고한 신념을 가슴 속에 품고 고행길을 떠나는 수도승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애인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니.
세속과 불통(不通)하는 게 아니라 풀통(Full通)하는 파계승이 아닌가.
[속이 새카맣다니. 그대가 그 아이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런 말을 지껄이느냐?]베가의 말투가 다소 거칠어지며 날카로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모두가 잠든 어두컴컴한 밤.
그 속에서 홀로 창을 휘두르며 자해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고 있던 오진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제 살을 도려 내가며 훈련을 이어가던 오진.
어찌 그런 아이에게 속이 새카맣다는 막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 미안, 미안. 진정해 언니. 내가 잘못했으니깐.”
진짜 중증이네 이 언니.
스피카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알았다면 됐느니라.]“어쨌든. 우선 상황 정리부터 하고 가자. 언니는 그 애들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그 애들이라니?]“왜 그 애인이라는 두 명.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선 그 둘부터 우선 어떻게 해야 할 거 아냐.”
[…….]그 둘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니.
오진에게서 하은과 이사벨라를 억지로 떼어놓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라.]이제까지 오진이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지켜봐 왔다.
속을 게워내고,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던 그의 모습을.
“으음. 그러면 자연스럽게 언니에게 마음이 옮겨가게 해야겠네.”
[그럴 필요 없느니라.]베가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금빛 눈동자에 씁쓸한 감정이 깃들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그 아이와 맺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에이 또 그런다. 성좌와 인간이 맺어지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
[그것 때문이 아니니라.]베가는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니? 그럼 뭔데?”
성좌와 인간이 맺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지닌 책임과 힘이 다를 뿐.
본질적인 영역에서 성좌와 인간은 둘 다 티탄에게서 태어난 피조물이었으니까.
오진이 이사벨라를 받아들였듯, 자신도 노력한다면 그와 맺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행복한 감정에 취해 그의 품에 안기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 이상 그 아이에게 짐을 짊어지우게 하고 싶지 않구나.]두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그가 얼마나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어찌 그런 아이에게 더욱 무거운 짐을 짊어지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본녀는 그 아이를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느니라.]그렇기에.
그러니까.
그러므로.
[그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설사 그의 옆자리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더라도.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언니.”
숨이 턱 막힐 듯한 농도 짙은 감정에 스피카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반론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렇다면 언니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오히려 언니가 있으므로 그 아이가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으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황금빛 눈동자에 새겨진 단호한 감정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베가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리란 걸.
[그 아이를 위해서 본녀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좋으련만….]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베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스피카의 눈이 반짝였다.
“해줄 수 있는 게 없긴 왜 없어?”
“에이, 그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꼭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
[호오. 그럼 무엇이 있단 말이냐?]그녀에게 있어서도 베가는 소중한 존재였다.
다른 성좌와는 말조차 거의 섞지 않는 베가가 ‘언니’라는 친근한 호칭을 허락한 건 스피카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베가가 지금처럼 감정을 가슴 속 깊이 묻은 채 썩어가길 바라지 않는다.
‘내가 아니면 누가 저 답답한 언니를 도와줄 수 있겠어?’
정공법으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베가가 눈을 시퍼렇게 뜨며 거절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사고방식에 아주 조그마한 ‘변명’을 만들어주는 것.
“언니의 마음이 가득 담긴 응원! 위로! 격려! 그런 걸 해주면 되는 거지!”
[…그런 뜻이었느냐.]베가는 실망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기껏 생각해 낸 것이 응원과 위로, 격려라니.
물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모르는 소리야 언니! 내가 말하는 대로 하면 응원과 위로만으로도 각성자의 힘을 두 배, 세 배 끌어올릴 수 았다고!”
[그런 방법이 있단 말이냐?]“고럼, 고럼! 특히 남자 각성자라면 더더욱 효과적이지!”
저토록 자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확실한 수가 있는 것 같았다.
[그 방법이 무엇이느냐?]베가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걸렸어.
스피카는 속으로 씩 웃으며 살랑살랑 베가에게 다가갔다.
“언니. 얼마 전에 수인족 왕국에 갔다고 했지?”
순결과 사랑의 여신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어으… 죽겠네 아주.”
“호호호. 벌써 끝인가요?”
목요일 회식을 마치고 금요일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피로에 찌든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진은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를 느끼며 스스로에게 건 ‘거짓말’을 해제했다.
눈앞에 이죽거리고 있던 칼리케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젠 굳이 환영을 만들지 않아도 쓸 수 있게 됐네.’
예전에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거짓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환영으로 적의 모습을 만들고 염소자리의 성흔으로 목소리를 흉내를 내는 등 여러모로 준비할 점이 있었지만.
이것도 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단순한 상상만으로 완벽에 가깝게 가상의 적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좀 더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어.’
환영과 소리 조작에 드는 정신을 온전히 전투에만 쏟으니 좀 더 실전에 가까운 전투를 펼칠 수 있었다.
뭐, 그것 때문에 훈련 중에 입는 부상이 더 많아지긴 했지만.
“…이럴 거면 저녁을 먹지 말 걸 그랬네.”
오진은 바닥에 질펀하게 퍼진 토사물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상상으로 만들어낸 칼리케와의 전적은 5전 5패.
베가의 축복 빨이 얼마나 컸는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긴 사실 축복을 받은 상태로도 압도하진 못했으니까.’
어느 정도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압도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칼리케가 호루스 쪽에 그렇게 정신을 팔았을 여유도 없었겠지.
“아직 갈 길이 머네.”
오진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수련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흘러버렸다.
‘누나한테 들키기 전에 돌아가야지.’
밤중에 홀로 나와 수련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키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겠지.
오진은 피로에 저든 몸을 돌려 텐트를 친 장소로 이동했다.
‘자고 있나.’
하은과 이사벨라의 텐트에 귀를 기울이니 안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오진은 자신의 텐트로 들어가 땀에 전 옷을 벗어 한쪽 구석에 쌓아뒀다.
베가에게 받은 펜던트까지 풀어둔 오진은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은색 갈기 부족 마을 옆에 흐르던 개울보다는 훨씬 크기가 작고 고작 무릎 정도까지 밖에 물이 차올라 있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몸을 씻는 건 충분하리라.
“으… 이제 좀 살겠네.”
무릎까지 차오른 개울에 몸을 담그자 수력친화 스킬이 발동하며 몸을 치유했다.
‘거짓말’을 활용한 이미지 트레이닝은 그 효과는 확실했지만, 오히려 너무 효과가 좋은 탓에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컸다.
오늘만 해도 지구에서 직접 만들어 가져온 포션과 물병자리의 성흔의 힘이 아니었다면 다섯 번이나 칼리케와 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해야지.”
아무리 죽을 만큼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그의 앞길에 드리워진 짙은 어둠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천마의 힘에 대해서는 그도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그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닐 테니까.
“후우.”
깔끔하게 몸을 씻고 체력도 회복한 오진은 미리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오… 졸려 죽겠네.”
수력친화 스킬이 회복시켜 주는 건 어디까지는 외상뿐.
지나친 마력 사용으로 인한 내상과 육체적인 피로까지는 해결해 주지 못했다.
“어디 보자… 지금 자면 그래도 한 3시간은 잘 수 있겠네.”
피로를 회복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면 시간이었지만, 어쩌겠는가.
하늘 산맥으로 향하는 일정을 망치면서까지 몸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뽀삐가 있으니까 이동하면서 좀 자도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텐트에 다가갔을 때.
“…응?”
텐트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오진은 몸을 씻으러 가면서도 챙겼던 단탈리안을 움켜쥐며 조심스럽게 텐트를 열었다.
누가 튀어나오던 바로 대응할 만만의 준비를 마친 오진의 눈에 들어온 건.
[와, 와, 와, 왔느냐?]흔히 ‘바니걸’이라 부르는 복장을 착용한 베가의 모습이었다.
높은 힐에 검은색 스타킹, 몸을 쫙 달라붙는 레오타드.
새하얀 어깨를 과감하게 드러낸 이 복장은 지구에서도 할로윈이나 코스프레 샵 같은 특수한 곳이 아니면 현실에서 마주하기 좀처럼 어려운 복장이었다.
그런데 설마 지구도 아닌 마경에서 바니걸 복장을 보게 될 줄이야.
머리에 토끼 귀 머리띠를 쓴 채 깡총깡총 뛰어오르는 여신님.
작은 의체 상태가 아닌 본래의 모습이었기에 움직임에 따라 무언가 크게 요동쳤다.
오진은 눈을 비비며 침낭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오늘 많이 피곤했나 보네.”
설마 헛것까지 보일 줄은 몰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