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87
187. 너를 위하여(10)
살기 위해 털을 부풀리며 눈곰 행세를 하던 눈여우가 편하게 긴장을 풀었다.
데온은 팔의 피를 발견하고 호들갑을 떠는 벤의 고집에 못 이겨 돌아서며 흘리듯 말했다. 편한 말투와 달리 그의 걸음은 그새 습관이 밴 듯 기품이 서려 있었다.
“지금부터 약속한 한나절을 계산할 거야. 오래 쉬고 싶다면 빨리 정리하는 게 좋겠지.”
“……!”
얼어있던 마족들의 움직임이 다시금 바빠졌다.
데온은 정리가 끝나면 대충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쉬라는 말을 남긴 채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빈민들이 미처 도달하기도 전에 제거될 정도의, 구경하기에 딱 적당한 자리.
상자는 여전히 품에 꼭 낀 채 단이 손수건을 깔아준 돌 위에 앉은 그가 담배를 꺼내들….
“약은 안 됩니다, 데온 님!”
…었다가 압수당했다.
붉은 눈동자가 황당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벤을 향했다.
“내 팔 살피러 온 거 아니었어? 대충 봐도 괜찮다는 거 알 텐데, 이만 가지?”
“아, 용사가 되시면서 육체가 탈바꿈된 탓에 마력석 목걸이의 신호가 끊겼습니다. 새로 피를 추출해서 다시 만들어야….”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다쳐봤자 금방 나아서.”
어깨를 으쓱하며 단이 닦아주고 있는 팔을 턱짓했다. 피가 닦이며 드러난 상처 없는 팔에 벤이 움찔했다.
“……저는 데온 님의 주치의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이전만큼 내게 매달리며 치료할 필요는 없어졌지.”
“그래도 결국 데온 님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것은 같으므로, 환자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알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바뀌지 않습니다.”
“뭐… 마음대로 해.”
헛걸음하지 않게 기껏 생각해주었더니만.
어지간한 상처는 벤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아물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게 우긴다면야, 내가 말릴 수는 없지.
순순히 깔끔하게 닦인 팔을 내밀었다. 기세 좋게 작은 칼로 쿡 찌른 벤이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피가 나오기도 전에 바로 아무는군요.”
“말했잖아.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상처를 조금 깊게 내겠습니다.”
그렇게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간신히 피를 채취할 수 있었다. 지혈할 것도 없이 바로 아문 팔을 확인하는데, 가는 줄 알았던 벤이 대뜸 바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한쪽 허벅지에 놈의 손이 닿았다.
“제가 없는 내내 약을 하셨겠죠.”
“…….”
“최소한 몸에 지져 끄지는 말아달라 말씀드렸는데, 확인해 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
“…….”
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셨군요.”
“용사가 되면서 다 아물었으니 된 거지.”
“데온 님.”
벤이 드러난 팔을 잡아 올렸다.
상처는 없지만 무수히 많은 흉터가 새겨진 팔이 빛 아래 노출됐다.
“이걸 보니, 용사가 될 때 입은 상처들은 흉터를 남기지 않고 아물었을지 몰라도 이전의 흉터들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가정이 세워집니다만.”
아마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으시겠죠.
눈빛으로 뒷말을 전한 그가 돌아오지 않는 답에 흐린 한숨을 내쉬었다.
“흉터가 하나 더 늘었겠군요. 아니, 하나가 아니라 몇 개일까요.”
“그래 봤자 흉터야. 널 만나기 전부터 흉터 많던 몸인데, 거기에 몇 개 더 얹어진다고 뭐가 그렇게 달라지겠어.”
솔직히 말해서 벤이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상처라면 주치의로서 예민하게 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다 아문 흉터이지 않은가. 그것도 아주 작은, 담뱃불 자국.
그런 데온의 의문을 눈치챈 것일까.
“데온 님.”
벤이 눈살을 찌푸렸다.
“흉터는 기억입니다.”
“…….”
“흉터가 남으면 볼 때마다 그 상처를 입었을 당시의 상황과 감정이 떠오릅니다. 흉터이니 썩 좋은 기억도 아니겠죠.”
하물며 데온 허벅지에 남은 흉터는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 스스로가 남긴 것이다.
무슨 생각과 감정으로 그랬는지, 절대 잊지 못하겠지.
감히 데온 님의 속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벤은 데온 하르트의 육체와 정신 건강을 걱정하는 주치의로서 과감히 말을 이었다.
“좋지 않은 생각과 감정에 의한 상처는 마음에 남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사실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버거울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육신에까지 흉을 남기지 마십시오. 저는 좋지도 않은 기억이 데온 님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
침묵이 흘렀다.
진작에 자리를 피했어야 했는데. 단이 곤란하다는 듯 벤과 데온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스터는 생각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구나.’
본인은 혼자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렇게 벽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사랑을 받다니, 실로 대단하다.
데온 하르트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기에 저를 향한 타인의 애정과 호의를 인식하지 못하고, 믿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그 애정과 호의를 돌려주지 못하는 것이고.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감정을 퍼주던 상대도 지쳐 나가떨어지므로, 결국 정말 사랑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데.
‘어쩌면… 마스터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던 것도 이들 덕분이 아닐까.’
이러한 애정과 배려 덕분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입을 다문 채 벤을 쳐다보던 데온이 이내 눈을 감으며 손을 내저었다.
“좀 쉬고 싶은데.”
“……잠시 자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
힐긋 단을 본 벤이 물러간다.
그가 말소리가 닿지 않을 곳까지 멀어지고 나서야 단이 눈을 굴려 다시 데온을 보았다. 그는 품에서 검은 손수건을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분위기도 바꿀 겸,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또 말투가 바뀌셨습니다.”
“원래대로 돌아온 거지. 강해졌잖아. 그냥 무력도 아니고 무려 용사가 되었는데, 품위고 나발이고 집어치워도 상관없지 않겠어?”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답니까?”
“선배님.”
“역시…….”
단이 침음을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스티그마 그 양반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서…….’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만약 내가 압도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다면 황궁 연회장 샹들리에에 매달려서 그네를 타도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한다고 했어.”
“……그분의 말은 적당히 걸러 듣는 게 좋겠습니다.”
아예 친하게 지내지 말라 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라도 말해야지.
타인의 인간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은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기에 단은 나름 조심스럽게 순화시켜 말했다. 속내를 읽은 데온이 피식 웃었다.
“좋은 사람이야.”
“마스터에게만 좋은 사람이겠죠.”
“뭐, 그건 맞지만.”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그가 만지작거리던 검은 손수건을 꾹 쥐었다.
“……불.”
“태우시려고요?”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손수건의 용도는 다양합니다. 혹시 모르니 갖고 계시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정 내게 손수건이 필요하다 판단되면 네가 따로 주든가. 일단 난 이걸 태울 거야.”
“……고집은.”
툴툴거리듯 비꼬면서도 단이 착실히 불을 내민다. 그 끝에 손수건을 갖다 댄 데온이 활활 타오르는 그것을 가만히 쥐고 있다가 기겁하며 쳐내는 단에 의해 눈 바닥 위에 떨어뜨렸다.
손수건의 잔재가 눈 위에서 타닥거리며 볼품없이 꺼져간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적안이 제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는 단에게 향했다.
“미치셨습니까?! 아주 용사가 되었다고 몸을 막 다루십니다!”
“……뭐.”
깔끔하게 태우려면 들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더 잔소리를 듣겠지. 데온은 그간의 경험과 본능에 따라 변명 대신 말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그보다, 넌 좋겠네.”
“……예?”
“나의 가치가 확정되었잖아. 마왕의 편에 선 용사. 이보다 완벽한 재앙이 어디에 있겠어.”
넘어가지 않으려 입매를 단단히 굳히고 있던 단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군요. 생각하고 보니 재앙이라는 것이 확정된 상황이네요.”
“……설마 이쪽으로는 생각도 안 한 건가?”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네가 바라는 존재가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글쎄요. 의미 없는 가정이잖습니까. 현 상황에서 마스터와 재앙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마스터를 모시든 재앙을 모시든 결국 같은 대상을 모시는 것이니까요.”
적당히 말을 넘기기 좋은 발언을 하고 멈췄다.
굳이 ‘만약’이라는 가정까지 들어가며 캐묻거나 따질 종류도 아니었기에 데온은 별말 없이 시선을 돌려 정리된 상황을 눈에 담았다.
조금 전 소란이 거짓인 것처럼, 고요함을 배경으로 시신 위에 소복이 눈이 쌓이고 있었다.
“……종교를 이렇게 이용할 줄은 몰랐는데.”
“확실히… 지독한 방법입니다. 구원교는 공작이 구원이라는 사상이 박혀 있다던데, 지금을 위한 세뇌였을까요?”
“본인이 구원이라고.”
너무 뻔하잖아.
솔직한 사이비스러움에 헛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일단 제 명령이 무엇이든 충실히 따르게 하기 위한 밑밥이었겠지. 그걸 이렇게 톡톡히 사용한 거고.”
지독하지만 유용한 방법이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이 깔아두었던 손수건을 거둬가고, 데온은 그를 돌아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만 쉬는 게 좋을 거야. 이 휴식이 끝나면 정말 쉬지 않고 달릴 거니까 되도록 푹 쉬어두는 게 좋겠지.”
“……여기까지 오는 것도 장난 아니었는데, 그것보다 더하다고요…?”
“당연하지. 여기까지 오느라 시간을 지체했잖아? 공작이 시간을 끌려는 기색이던데, 뭔진 몰라도 뜻대로 되게 할 수는 없지. 잠도 안 자고 달릴 테니까 각오하도록 해.”
“맙소사.”
단이 신음했다.
어째서 저놈이 괴로워하면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소리 없이 절규하는 단을 두고, 데온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본래 꺼내려던 말을 했다.
품에는 상자를 꼭 안은 상태였다.
“그게 싫으면 마계에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끝까지 마스터를 따르…… 하, 이건 빈말도 안 나오는군.”
제 주둥이를 찰싹 때린 단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돌아가는 편이 다른 의미로 제 생존에 도움이 될 것 같긴 합니다만, 이런 식으로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저도 자존심이 있어서요.”
“시킬 일이 있어.”
“아, 그러시다면야.”
사양 않고.
히죽 웃은 단이 명하시라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데온은 곧장 명령하는 대신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일전에 그는 르웨체 국왕의 동생의 머리가 든 상자를 받아드는 것을 질색한 적이 있다. 잠깐 들면 되는 것이었음에도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보였지. 그런 녀석이 과연 내가 시키는 것을 제대로 행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이 녀석밖에 없어서.
“……이걸 마계의 내 방에 안전하게 가져다 둬.”
품에 안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운반 과정에서 손상이나 문제가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어떠한 충격도 가해져선 안 돼.”
“…….”
“아, 그리고 간 김에 드벨라니아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크루엘 하르트의 몸을 찾으라고 전해주고.”
그의 마지막을 본 사람이자 그 덕분에 살게 된 사람이며, 또한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으로서, 데온은 크루엘 하르트의 시신만큼은 확실하게 수습하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의 수도까지 이걸 들고 갈 수는 없다. 자칫 잃어버리거나 손상이라도 입으면 스스로를 절대 용서하지 못할 일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니까. 그땐 정말 무너질지도 모른다.
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철저하게, 이 상태 그대로.”
그가 손을 뻗어 상자를 받는다. 꺼리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마스터의 방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래.”
단은 정중히 상자를 들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마스터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이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들어서 알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머리가 든 상자’라고 거부감을 표할 리 없지 않은가.
절대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단은 최소한의 선과 예의를 지킬 줄 알았다.
“고맙다.”
데온이 속삭이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