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25
25. 들춰진 베일(8)
“우리는 적들의 기세를 끌어내린다.”
그제야 병사들의 표정이 알 것 같다는 얼굴로 변했다.
‘나’는 잠시 누그러뜨렸던 광기를 다시 드러내며 웃었다.
온전한 시체를 남기지 못할 우리의 적에게 진혼곡을.
싸우다가 바닥을 굴러 흙이 묻었다면 피로 씻어낼 것이며.
적에게 집착하고 피에 미쳐라.
그게 우리가 살 유일한 길이 될 터이니.
“적들에게 공포를.”
잔인한 손속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저렇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온전한 시신을 유지하지 못할 미래의 제 모습을 상상하며 느끼는 공포.
이러한 감정들은 망설임을 부를 것이고, 망설임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힘들겠지. 광기에 먹히고 벗어나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
“정 맨정신으로 힘들다면 술과 약에 의지해도 좋아.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고, 후에 있을 처벌보다는 현재의 생존이 우선이니.”
아, 저건 ‘댁이 그러고도 지휘관입니까?’라는 눈빛이군.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나도 지휘관 따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일반적인 지휘관이라면 하지 않았을 말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다.
“우리를 이런 사지에 몰아넣은 게 제국이니 ‘제국에 영광을’ 따위의 구호는 외치지 않겠다.”
윗대가리들이 직접 지켜보지 않는 한, 앞으로 우리 부대의 구호는 이거다.
어떤 짓을 저질러도 죄책감을 덜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말.
앞으로의 우리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합리화의 끝을 보여주는 추잡하지만 가장 쓸모있는 말.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해.”
***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낯설지만 어쩐지 본 적 있는 것 같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이곳이 도시이고, 지금 누워있는 곳이 관리자가 내준 방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꿈?’
꿈을 꾸었다.
뭔가 엄청난 내용의 꿈이었던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사실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느낀 것은 입가가 축축하다는 것과, 누군가 입가를 손수건으로 계속 닦아주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게 피라는 걸 깨닫기가 무섭게 나는 몸을 크게 들썩이며 속에 고여 있던 핏덩이들을 뱉어내기 시작했으니까.
“우웨에에에엑! 웨에엑! 커헉, 끅.”
정말 발작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옆에서 피를 닦아주던 에드가 허둥거리더니 급히 양동이를 받쳐주었다.
그리고는 많이 당황했는지 벤에게 마력석 목걸이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그를 불러오겠다며 방을 뛰쳐나갔고,
─역시나 금방 마주친 듯, 얼마 안 있어 벤과 함께 사이좋게 서로의 멱살을 잡고 나란히 들어왔다.
착각이 아니다. 아파서 헛것을 본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서로의 멱살을 잡고 들어왔다.
‘뭐하냐, 너네.’
황당함에 말도 나오지 않는다.
사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정답이지만.
“커흑, 웨에에에엑!”
양동이를 가득 채울 기세로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그런 내 꼴이 가히 심상치 않았는지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멱살을 놓고 내게 다가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데몬 님.”
에드가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주고, 벤이 내 몸을 진찰한다.
벤이 피를 확인하겠다고 하자 에드가 양동이를 기울여주는 센스도 발휘했다.
저렇게 손발이 척척 맞으면서 들어올 때는 왜 서로 멱살을 잡고 들어온 건지.
내 몸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보며 마력석을 들여다보고, 질척한 핏덩어리를 확인한 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치료는 누워계신 사이에 전부 끝냈습니다. 지금 나오는 건 속에 고여 있던 피입니다. 쓸모없는 나쁜 피를 뱉어내는 것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치료라니, 무엇을?
도대체 내가 취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영문도 모른 채 열심히 피를 토하는 나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은 에드였다.
“그러고 보니 꽤 강하게 부딪치셨지요. 2m를 튕겨 나가셨으니 내출혈이 심했을 만도 합니다.”
“그래, 무려 2m였지.”
역시 대답은 벤이 했다.
들어올 때의 멱살잡이를 했던 악감정이 남아 있는 듯, 그는 잔뜩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데몬 님께서 그렇게 되실 때까지 부관이란 작자가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거냐?”
“……하, 네놈이야말로 데몬 님께서 이렇게 피를 토하고 계시는데 뭘 준비하느라 재깍재깍 안 온 거냐?”
“치료는 진즉에 끝냈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놈은 마왕님의 주치의였던 나를 의심하는 건가?!”
“그래도 전례 없이 이렇게 많은 피를 토하시는데 후딱 달려오지 않았잖은가! 아, 설마 마왕님이 아니라서 그렇게 소홀한 건가?”
“네놈!”
벤이 에드의 멱살을 와락 잡는다. 그에 질세라 에드도 벤의 멱살을 잡았다.
슬슬 잦아드는 토악질을 느끼며,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둘이 싸우든 말든 상관 안 할테니 그 ‘2m를 튕겨 나갔다’는 사건이 뭔지 좀 설명해주지그래?’
나 새끼는 도대체 술 먹고 무슨 짓을 했길래 내출혈이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는 거야?
아, 이제야 피가 멈췄다.
입안에 고인 마지막 피를 뱉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기척 하나는 기가 막히게 읽은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몸을 뒤로 빼려던 것을 간신히 멈춘 나는 나름대로 단호히 말했다.
“일단 설명부터 해주시죠. 내가 취하고 나서부터 전부.”
취해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있었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실현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기분이랄 것도 없다.
그저 어이없을 뿐이지.
“……그러니까 내가, 술을 잔뜩 먹고, 때마침 쳐들어온 마물들을 상대로, 신나게 달려나가서 싸웠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물과 부딪쳐 2m나 나가떨어졌고.”
“정확합니다.”
“…….”
그러니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미쳤군.’
그래, 미쳤다.
나란 새끼는 도대체 정신머리를 어디에 둔 거야? 뒤에 숨어도 모자랄 판에 뛰쳐나갔다고?
차라리 잘못 들은 거면 좋으련만, 저들의 표정을 보니 그럴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저 초롱초롱한 눈을 보라.
사실상 설명에는 내 무용담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전부였다. 정말 굉장했다면서 그렇게 극찬을 하는데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물론 그런 무용담은 자의적으로 걸러 들었다. 뭔가 착각을 했을 것이 분명하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술에 취해 나대다가 마물에게 한 방 맞고 골로 갈 뻔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멀쩡하게 일어나서 싸운 터라 당시엔 아무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전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내가 쓰러졌다고 한다.
‘아니, 그럼. 다른 것도 아니고 공격 의도를 가진 마물에게 부딪쳐 2m나 날아갔는데 멀쩡할 것 같냐?’
아무튼 벤이 급하게 살펴보니 속이 엉망이 되어 있었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응급조치를 취한 뒤, 방으로 옮겨 완전히 치료를 했댔는데… 내가 일어나자마자 피를 콸콸 쏟았으니 에드의 심정이 어땠겠는가.
직속 상관씩이나 되는 이가 죽으면 그 책임은 제게 돌아갈 테니 속으로 ‘이 돌팔이!’를 외치며 달려나갈 만도 했다.
그 결과, 복도에서 벤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에드가 ‘도대체 뭘 하길래 꾸물대냐’며 멱살을 잡았고, 벤은 벤 나름대로 ‘어딜 감히 환자를 홀로 두고 나왔냐’며 에드의 멱살을 잡았단다.
물론 내 상태가 우선이니 서로 멱살을 놓지 않은 상태로 나란히 뛰어 내 방에 들어왔고, 그게 바로 피를 토하던 내가 본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다는 것.
“아무튼 그래서 마물 사냥은 성공적으로 끝냈습니다. 나중엔 공포에 질린 녀석들이 도망가더군요. 그런 놈들은 군단원들이 최대한 정리했습니다.”
“아, 네.”
다 끝났다고 하니 좋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한데….
앞으로는 주량을 지켜서 마셔야겠다.
자칫하다간 자각도 못 한 사이에 죽어버리겠어.
‘……그러고 보니 내 주량은 다섯 병 아니었나?’
너무 칼 같은 주량이라 똑똑히 기억한다.
인간계에서 대중적인 술. 제법 독한 그 술로 정확히 다섯 병의 마지막 잔을 마시면서 기억이 끊겼었지.
그런데 이번에 기억이 끊긴 시점은 한 병도 채 못 되었을 때였다.
‘뭐, 하도 술을 안 마셔서 면역이 없어진 모양이지.’
그렇다 해도 너무 극단적인 변화이지만, 그리 심각한 문제도 아니다. 별것도 아닌 것에 굳이 심력과 두뇌를 소모할 필요는 없지.
그리 생각하며 남아 있던 약간의 의혹을 지워버린 나는 어느새 눈앞에 등장한 에드의 통신석을 보며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희미한 한숨과 함께 그 빌어먹을 것을 받아들었다.
물론 곧바로 사용하는 대신 손에 꼭 쥔 채 에드의 눈치부터 살폈다.
“……조금만 쉬었다가 보고하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10분도?”
“죄송합니다. 하지만 보고가 우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데몬 님의 부상으로 보고가 늦어졌으니 더 미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쉬는 것은 그 뒤에 하셔도 충분할 겁니다.”
그러니까 어째 지금이 아니면 쉬지 못할 것 같다고. 이걸 사용하게 되면 또 새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내가 무슨 힘으로 저들을 이기겠나.
결국 나는 힘없이 통신석을 활성화했다.
목록에서 마왕의 통신석 각인을 찾아 연결하니, 이윽고 통신석 너머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왜.
모, 목소리가 평소와 너무 다른데? 아무래도 타이밍을 잘못 잡은 듯싶다.
쫙 깔린 목소리.
누가 듣기에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한 그 목소리에 하마터면 그냥 통신을 꺼버릴 뻔했다. 사실 지금도 그러고 싶다는 충동이 실시간으로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내 생명도 꺼지겠지. 이미 통신이 연결된 이상 피할 방법은 없다.
나는 결국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0군단장입니다.”
-아, 어! 데몬! 무슨 일이야? 아니지, 설마 벌써 일을 끝낸 거야?
다행히도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빠르게 풀리는, 아니 풀렸다기보다는 확 밝아진 목소리. 그에 덩달아 긴장이 풀려, 나 역시 조금은 풀린 목소리로 답했다.
“예.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는 무슨! 겸손도 적당해야지. 이렇게 빠르다니, 역시 너는….
낯간지러운 공치사와 함께 마왕의 수다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폭풍과도 같은 수다에 휘말려 그저 ‘네, 네’거리며 대답하던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제국과 전투 중이라는 최전방에 와 있었다.
피가 잔뜩 튄 옷을 입고 있는 1군단장이 미미한 미소와 함께 악수를 건넨다.
나는 굳어질 대로 굳어져 펴지질 않는 표정을 풀려 애쓰며 손을 마주 잡았다.
물론 속내는 엉망이었다.
‘빌어먹을 마왕 놈. 아주 날 죽이려 작정했구나!’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왕과 통신을 하던 때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듯, 실컷 수다를 떨던 마왕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물 흐르듯 위화감 없는 화제 전환이었다.
-막 일을 끝낸 사람에게 미안한데, 한 가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목소리에는 약간의 망설임과, 그럼에도 꼭 해줬으면 한다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미안하면 말하지 말든가.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여기서의 끄덕임은 수락의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향한 끄덕임이었다.
거봐, 내 감이 맞잖아. 보고가 끝나면 쉴 수 있다고?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네.
“무엇입니까?”
-1군단장 쪽에 지원하러 갔으면 해.
“1군단장 쪽이면… 최전방?”
-그래. 긴급 지원 요청이 들어왔어. 영웅 후보 따위가 아닌, ‘진짜 영웅’이 참전했다더라. 마음 같아서는 다른 녀석들을 보내고 싶긴 한데, 알다시피 영웅과 마족은 상성이 안 좋잖아?
내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시발, 분명 받아들였겠지. 수락했으니 여기 있는 거 아니겠어.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마왕이라는 지위에 눌려 반강제로 왔겠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미끼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그 선택에는 내 의사도 일부 들어가 있겠지.
누가 마왕 아니랄까 봐, 수법이 더 영악해졌다.
‘하지만 ‘새로운 영웅’이라니. 솔직히 수락할 수밖에 없잖아.’
도저히 와보지 않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는 새 영웅이라니.
‘물론 도착하고 나서 뒤늦게 정신 차리고 후회했지만….’
새로운 영웅이라는 미끼에 정신이 팔려 전장의 상황을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와버린 것을 어쩌겠어. 기왕 온 김에 그 영웅의 얼굴이라도 봐야 덜 억울하지.
그리 생각하자 반쯤 나가 있던 넋이 되돌아오는 기분이다.
나는 마주 잡은 손에 적당히 힘을 주며 1군단장 제이카르를 향해 마찬가지로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