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62
62. 소탕(1)
“백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네.”
“그래, 수고했네. 이만 나가봐도 좋아.”
레멤베르는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을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감추며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기사단이나 리엔 경에게 전해도 될 것을 굳이 자신을 통해 전하려 한다.
레멤베르는 유능한 집사고 그의 주인은 제국의 영웅이다. 그는 곧바로 하르트 명예 백작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전쟁까지 겪은 이가 아무 이유 없이 이리도 비효율적인 방법을 통해 말을 전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존경하는 그의 주인은, 단이란 사내를 감시하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대뜸 외부인을 머물게 할 리가 없으니.’
아마 적으로 의심되는 상대를 가까이에 두고 지켜보기 위함이리라.
근거는 충분하다. ‘딱 검술만 가르치도록 하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살인귀 기사단원들이 단이라는 사내에게 약을 먹이려 들까 걱정한 말이지만, 파고 들어보면 검술 이상의 것을 가르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적일 수도 있으니 적당히 경계하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영웅의 집사 된 자로서 이런 곳에 주인이 신경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야겠지.’
그것이 집사의 도리이니.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노집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단기간에 강해지고 싶다는 거지? 검술을 배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
“그럼 우리가 딱이긴 하지. 운이 좋네. 다른 기사단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텐데.”
일반적인 기사단은 체계적인 훈련과 교육하에 ‘검술’을 배운다. 그렇기에 늦게 검을 잡은 이들은 목표로 한 바까지 강해지지 못하는 것이고.
연무장 한구석 나무 그루터기에 앉은 클레터가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단이 순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며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 기사단에 대해 알아?”
“살인귀 기사단이라고… 아주 강한 기사단으로…….”
“자식, 아부 떨 줄 아네. 뭐, 우리가 유명하긴 하지. 어느 정도 강한 것도 맞고. 그럼, 우리 중 거의 대부분이 강제 징집된 일반인, 그것도 빈민 출신이라는 것은?”
“그건…… 몰랐습니다.”
“그래? 이것도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뭐, 모를 수도 있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우리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었어. 그것도 검을 배우기엔 너무 늦은 성인.”
“맞아! 특히 저기 저 아저씨, 보여? 저 사람 올해로 마흔여섯이야. 징집되었을 땐 서른여섯이었지!”
“……밀란…….”
클레터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쩐지 이 새끼가 조용하다 했더니, 길게는 못 가는 모양이다.
잠시 쫓아낼까 생각했으나 그러면 더 시끄럽고 진득하게 달라붙을 것이 뻔해 포기하고 다시 단을 돌아봤다. 밀란의 말이 인상적이었는지 그는 ‘마흔여섯…’ 하고 작게 읊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응?”
“어떻게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겁니까?”
“뭐… 사실 이유는 별거 없어.”
몸을 뒤로 젖히고 앉아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바라보며, 클레터가 천천히 말을 뱉었다. 아니, 뱉으려 했다.
먼저 끼어든 밀란만 아니었다면.
“일단, 약한 놈들은 전부 전쟁 중에 뒈졌거든.”
“밀란!”
“왜? 맞잖아.”
처음 자신들은 고기방패로서 선봉에 섰다. 당시 대장이었던 데온 하르트의 말과 지휘가 있었다지만 제 인간성을 버리지 못해 결국 그의 지휘를 따르지 못한 자들은 모조리 죽어버렸다.
물론 클레터도 이를 말하지 않으려던 건 아니었다. 단지 조금 순화시켜 말하려 했는데, 이 새끼가 선수를 칠 줄이야.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전부 포기한 표정으로 나머지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이지. 한때 ‘부대’였던 기사단 치고는 그 수가 적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 여기 남은 이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 뿐이야.”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몸을 사리게 된다. 전쟁터에서야 방법이 하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죽음이 두렵지 않은 척 굴어야 했다지만, 모든 것이 끝난 지금까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삶에 미련이 있는 자들은 자연히 기사단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물론 전쟁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돌아오는 자들도 여럿 있었지만, 돌아오는 이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저 8년이라는 긴 시간 사이 돌아갈 곳이나 지킬 것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생각하고 보니 우습긴 하다.
전쟁 중에는 죽는 것이 두려워 그 지랄을 떨었는데, 이제는 죽고 싶어서 이 지랄을 떠는 셈이니.
‘뭐, 사실 죽어도 전쟁 중에는 절대 죽지 않겠다는 오기 때문이었으니 다르다고 칠까.’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던 클레터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처음부터 불안불안하다 했더니만, 밀란 이 빌어먹을 새끼가─
“그리고 마지막 이유로는 우리가 약쟁이이기 때문이야.”
“……약쟁이, 요?”
“그래, 말은 거창하게 하긴 했지만 결국 우린 약 없으면 사람 하나 제대로 못 죽이는 반푼이거든. 그런 의미에서…….”
“……?”
“하나 먹어볼래?”
“밀란!!”
굳이 소리쳐 부를 필요가 없었다.
클레터가 언성을 높임과 거의 동시에 퍼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밀란이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본래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단장 리엔 라이너.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는 대신 터벅터벅 밀란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가슴팍을 꾸욱 밟으며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 봤다.
이윽고, 열린 입술 사이로 차디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했더니 정말 약을 권할 줄이야. 네놈, 미쳤나?”
“아야야야……. 단장, 아픕니다. 나 죽어요…! 크학!”
“단장이 아니라 단장님이다.”
“다, 단장님! 단장님!”
“그래.”
“저 죽습니다!”
쯧, 낮게 혀를 찬 리엔이 천천히 발을 물렸다. 그에 기다렸다는 듯 기침을 터트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밀란이 너무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본다.
그 와중에도 누워있던 몸은 행여나 또 밟힐까 착실히 일으키고 있었다.
그 귀엽고도 괘씸한 행태에 리엔은 한 번 코웃음을 치고는 시선을 돌렸다. 조금 더 저 불손한 녀석을 교육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지금 그녀는 이곳에 온 목적이 명백히 있었다.
그리고 지금 굳이 뭐라 하지 않아도…….
“클레터.”
“예, 단장님.”
“준비하도록.”
“아…! 옙!”
“자, 자, 잠깐! 단장! 아니 단장님! 지금 임무 갈 사람 뽑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쟤만…?! 나도 심심한데!”
역시나 물을 줄 알았다. 예상했던 질문에 리엔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약간의 유쾌함과 통쾌함을 담아 얄미운 얼굴로 친절하게 답했다.
“주군께서 ‘그나마 정상적인’ 놈들로 10명을 뽑으라 하셨으니까.”
“아… 망할!”
반박은 또 안 한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헛웃음을 흘린 리엔이 이내 표정을 달리하고 근처 나무를 쳐다봤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긴가민가했지만, 이젠 확실히 알겠다.
“나오십시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확신했다. 고저 없이 사무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생각이셨습니까. 주군께서 친히 데려온 사람이 약을 먹을 뻔했는데도 가만히 계시다니요.”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어 장정들을 말리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말리기도 전에 리엔 경께서 먼저 막으셨지 않습니까.”
헉, 클레터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밀란도 놀란 듯 ‘어? 어?’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래도 8년간 전쟁터에서 고생했던 터라 기척 파악엔 도가 텄는데, 그런 자신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에도 평범한 집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휘하 단원들의 반응은 싸그리 무시한 리엔이 레멤베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백작님의 전언을 전하러 왔지요. 하나…….”
레멤베르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단원들을 향해 말했다.
“단을 데리고 잠시 자리를 피해 있도록.”
***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봤자 몇 분 안 늦었는데, 뭐.
리엔은 내가 딱 차 한잔을 다 마시고 얼마 안 있어 찾아왔다.
애초에 명확한 시간을 제시한 것도 아니고 내가 차를 빨리 마시기도 했으니 딱히 늦었다고 볼 수 없다만, 리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정말 괜찮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었겠죠. 이를테면 검을 가르치랬더니 약부터 권하는 기사가 있어 조금 교육을 했다던가…….”
“어, 어떻게 그걸…!”
뭐야, 진짜였냐? 찍었는데?!
그나저나 그런 이유로 늦은 거라면 더욱 사과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지.
“잘했습니다.”
“예?”
“단이 약을 먹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아주 잘했습니다.”
리엔이 세상에 미친놈이 하나 더 등장하는 걸 막았다!
대륙 평화에 기여했는데 늦은 게 대수랴. 나는 진심을 담아 재차 강조했다. 잘했습니다.
“그럼 이제 가죠.”
시선을 돌려 앞에 서 있는 이들의 면면을 훑었다. 미친개들과 리엔, 그리고 주술사 란.
음, 빠진 사람은 없는 것 같군. 그런데 수가 좀 많은 것 같다.
빈민가는 새로운 사람의 유입이 적다고 한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의 얼굴에 익숙해져 있어 새로운 사람이 유입되면 곧장 알아차리겠지.
한두 명이면 모를까, 그런 곳에 갑자기 처음 보는 얼굴들이 우르르 몰려간다면 당연히 소식이 금방 그쪽으로 전해지지 않을까.
“……아무래도 나뉘어서 가야 할 것 같은데…….”
“들키지 않으려면 번거롭지만 둘에서 셋으로 묶는 것이 안전할 것 같습니다.”
동감한다. 셋도 좀 위험하지. 둘이 그나마 안전하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이곳의 지리를 모르는 사람?”
“…….”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지? 내 말을 못 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건가?
에이 설마, 말도 안…….
“없습니다.”
“……음?”
“저희 모두 이 근처 출신이라…….”
“상황의 여건을 고려하여 이 지역 빈민 출신만 차출했습니다.”
담담하게 사실을 늘어놓는 목소리 위로 뿌듯한 목소리가 겹쳤다.
역시 리엔. 유능하구만. 내가 인재복이 좀 많긴 하지.
‘그 인재복, 마계에서만큼은 좀 없었으면 좋겠지만…….’
서글픈 생각은 재빨리 넘겨버리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사들은 둘씩 짝을 지어 각기 다른 경로로 이동한다. 집결지는 구원교 근처. 위치 모르면 리엔 경에게 물어보고, 대충 눈치껏 걸리지 않을만한 곳에 모이도록.”
“예!”
“리엔 경과 주술사는 저와 함께 이동합니다.”
“알겠습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놈들을 지켜보다 이내 서둘러 걸음을 뗐다.
조금은 느긋하게 움직여도 될 것 같지만 크루엘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그놈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설마 나보다 더 빨리 움직인 것은 아니겠지?
차라리 같이 다닐 걸 그랬나. 아니 그래도 역시…….
…….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 지역 출신이라는 것이 거짓말은 아닌지 각기 다른 방향 – 심지어 한 팀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기까지 했다 – 으로 움직였음에도 기사단원들은 모두 나보다 앞서 도착해 있었다.
살인귀 기사단원들 중에 빈민 출신의 비율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지역도 아니고 같은 지역 출신의 빈민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아- 그건 이곳 빈민가가 제일 규모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력을 충원할 때 제국이 여기부터 털었댔죠.”
“아주 늙거나 아주 어리지 않은 이상 남자는 죄다 끌고 갔는데, 덕분에 규모가 많이 줄었습니다. 예전엔 사람도 더 많고 그랬어요.”
이게 규모가 줄어든 거라고? 예전엔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간다.
“아무튼 이제 돌격하면 되는 겁니까?”
“얘들아 약 먹자!”
“……그거 아니니까 약 내려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