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86
86. 휴가 아닌 휴가(2)
데온 하르트의 주량은 알코올 함량이 25%인 술을 기준으로 다섯 병이다. 정확하게는 다섯 병의 마지막 잔을 마시며 기억이 끊긴다.
술기운이 어느 순간 확 올라오는 타입이기에 그전까지는 조금의 취한 기색도 없음은 물론, 정신도 멀쩡하곤 했다.
그것은 처음 술을 마셨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렇다면 취하지도 않았는데 왜 성격이 바뀌느냐─
손에 들린 술병을 입에 가져가며 데온이 피식 웃었다.
‘열쇠로 잠근 문에 다시 열쇠를 집어넣는데, 그럼 열릴 수밖에 없지.’
술과 약은 일종의 ‘열쇠’다.
전쟁터에서 데온 하르트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극단적으로 나뉜 두 가지의 성격을 부여했다. 그 과정의 매개체는 다름 아닌 술과 약이었고.
술과 약으로 세운 벽이 술과 약에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 탓에 데온 하르트는 술을 마시면 그 양이 소량이라 할지라도 제가 나누어 둔 두 성격이 벽을 넘어 범람하는 것을 제어할 수 없었다.
결국 ‘양’이 문제가 아니라 ‘술’이 문제였던 것이다.
딱히 숨기려 한 적도 없고, 숨길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니 다른 이들이 눈치채고 이용하려 드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이야.’
보나 마나 마왕이겠지.
왜 이렇게까지 한 것인지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뻔하니까.
시간이 아까웠으리라. 황제는 생각보다 더 빨리, 과감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용사의 탄생 시기는 가까워졌다. 거기에 더해 마물들은 점점 더 빠르게 늘어나고만 있으니….
그렇다고 마물들을 무시했다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버리면 정작 움직여야 할 때 발목이 붙잡히게 될 것이다.
당장 지금도 다른 이종족들에게서 마물 좀 어떻게 해 보라는 항의가 들어오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데온을 보내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복귀시켜 대기 전력의 구멍을 최소화하는 수밖에.
그러니까 데온 하르트는.
‘이용당한 거지.’
마왕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기분이 더럽지만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능숙히 그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뤄 둔 데온이 짐짓 눈을 내리깔았다.
‘드벨라니아가 저렇게 움직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야.’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가 저 마물들을 처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마왕이 바라는 것이고, 판은 이미 완벽하게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와장창!!
빈 술병을 마차 바닥에 내던지고 단검을 빼 들었다. 산산이 부서져 형편없이 튀어 오르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을 밟고 튀어 나가 벤의 몸을 마차 벽에 밀어붙였다.
왼팔로 벤의 가슴을 짓누른 채 오른손의 단검으로 목을 겨눈 데온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간의 공도 있고, 노력이 가상하니 이번만은 봐주지. 다음은 없어.”
“…….”
“언제 나설지는 내가 정해.”
미친놈 특유의 기운에 젖은 새빨간 눈동자가 노골적인 불쾌함을 담고 번들거린다.
차라리 자신이 휘두르면 휘둘렀지, 누군가 저를 휘두르게 둘 생각은 없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리 드러나는 기분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더러웠기에, 데온의 눈은 얼핏 살의까지 담고 있었다.
잘못 건드렸다간 제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벤이 눈동자를 덜덜 떤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제 목에 단검을 들이댈 때 반응조차 하지 못해 바짝 굳은 몸에 힘이 더 들어갔다.
데온은 맹렬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천천히 물러났다.
“네가 누구의 주치의인지 잘 생각해.”
마왕이 양도한 주치의라 할지라도 결국 현재 벤은 데온의 주치의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담당 환자에게 술을 권하는 주치의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지금, 자신이 보살펴야 할 담당 환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친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듯 벤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굳어 가는 그의 표정을 같잖다는 듯 내려다보던 데온이 코웃음을 치며 물러섰다.
“뭐…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벤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으나 데온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마차 문을 열고 나갔다.
넓은 평야에 어마어마한 수의 마물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2군단의 활약으로 수많은 마물들이 고깃덩어리가 되고 있지만, 그보다 더한 수가 밀려오는 모습.
그를 발견한 드벨라니아가 허공을 수놓았던 실을 거두며 목소리를 높였다.
“데몬 님, 계산 실수예요! 마물들이 생각보다 더 많아요! 어떡하죠?”
붉은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가 후두둑 떨어지는 마물의 잔해를 보고는 다시 올라간다.
그대로 드벨라니아를 한 번.
“일단 물러나야겠죠? 두 번째 도시가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는 것은 어때요? 이대로면 도망치는 것도 힘들 것 같긴 하지만….”
“…….”
마물들을 한 번.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그러니까… 지금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가며 이 마물들을 뚫고 두 번째 도시로 가자고? 녀석들이 뒤에 쫓아오든 말든, 남은 마물들이 이종족의 영역을 넘든 말든 그냥 두고?”
“아,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녀의 말대로 도망치면 피해는 피해대로 입고, 임무는 수행하지 못했으며, 타 도시에 같이 죽자고 폭탄을 달고 오게 되는 셈이다. 그러다 그 도시마저 위험해지면 그야말로 최악이고.
새빨간 눈동자를 마주한 드벨라니아가 희게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두, 두 번째 도시에 군단장이 있어서! 아, 아니. 죄송해요, 데몬 님.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급한 마음에 그만….”
“도시에도 군단장을 배치했다는 건 들었지.”
하지만 한 군단장이 두 개의 도시를 맡은 탓에 군단을 나눠서 배치했다고 했다. 제아무리 군단장이 있다 한들 이 많은 수를 상대로 반토막 난 군단이 도움이 되어 봤자 얼마나 될까.
“왜 굳이 해결책을 그쪽에서 찾는 거지?”
“네?”
“벤, 통신석 있지?”
“네? 아, 아아, 네!”
마차에서 내려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에드가 데몬 님 잘 모시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눈앞에서 짐을 싸 준 탓에 확실히 기억한다. 그러니까 여기, 이쯤에 통신석이… 아,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이걸로 마왕님께 영상 통신을 걸 수 있나?”
“네? 가능은 하지만… 이건 매개체고 또 따로 마법을 사용해야 해서….”
“그게 왜?”
“마왕님께서 마법 금지령을 내리셨습니다.”
아, 하는 짧은 탄성도 잠시, 데온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지금은 위급한 상황인데도?”
“……걸겠습니다.”
“전 가서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을게요. 상황이 좀 힘들어 보여서….”
눈치를 보던 드벨라니아가 다시 난장판에 뛰어들고, 벤이 통신석에 마법을 건다. 이윽고 허공에 마왕의 얼굴이 나타났다.
-벤? 무슨 일이지? 네가 마법을 함부로 쓸 녀석은… 데몬?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벤, 마왕님께 저쪽을 좀 비춰 드려.”
벤은 순순히 각도를 틀었다. 끝도 없는 마물의 파도를 본 마왕이 입을 다물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수가 더 많습니다.”
-그러게… 군단장 둘에 군단 한 개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저걸 그냥 둘 수도 없으니… 지원을 보낼게. 15분만 버텨. 할 수 있지?
“해 보겠습니다. 위치는….”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통신이 끊겼다. 데온은 고개를 돌려 마물들을 봤다.
다시 봐도 징그러울 정도로 많다. 죽이거나 물리치기는커녕, 살아남는 것조차 요원할 수준의 수.
여기서 15분을 버텨야 한다니.
모처럼의 먹이의 등장에 흥분한 듯 죽여도 죽여도 광야를 가득 메우며 달려오는 마물들의 모습은 절망을 느끼고 주저앉기에 충분했지만, 데온은 되레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웃었다.
‘이런 상황은 오랜만인데.’
고작 이 정도에 절망을 느끼고 포기할 것이었으면 8년 전쟁 때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절망적인 전황 속에서도 데온은 끝끝내 살아남았다.
상대가 마물이라는 것 외에는 그때와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이다. 아니, 오히려 마물은 인간보다도 더 쉬운 상대이니.
데온은 이번에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저벅.
한 치의 움츠러듦도 없이 태연히 걸음을 내디뎠다.
엄호하겠다는 듯, 드벨라니아가 휘둘렀던 실을 거두며 소리 없이 옆에 내려선다. 그러나 데온은 곧장 날뛰지 않았다.
‘앞뒤 안 가리고 저 사이에 뛰어들었다가 고립이라도 되면, 난 분명 죽어.’
미친 것과 제 역량을 파악하는 것은 별개다.
자신은 살기 위해 미쳤지, 죽기 위해 미친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
지금도 전선은 느리지만 착실히 밀리고 있다.
내 특기는 죽이는 것이 아닌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 본능에 충실한 마물들이라면 공포가 허기를 압도하는 즉시 도망칠 것이다.
‘마물들이 도망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당장은 살 수 있으니 좋겠지만 후일을 생각하면 절대 좋지 않다.
새빨간 눈동자가 빠르게 전황을 훑어내린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며 순식간에 계산을 세웠다.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며 마물들을 이곳에 묶어 두어야 한다.
양손에 단검을 꺼내 쥔 데온이 침착을 가장한 목소리로 드벨라니아를 불렀다.
“덫을 놓을 거야. 네 군단에게 전해.”
…….
물고기 덫이라고 있다. 출입구가 깔때기 형태로 생겨서 들어오기는 수월한데 나가기는 힘든, 심지어 물살의 방향조차 들어오는 물고기를 돕고 나가려는 물고기는 억눌러 포획하는 말 그대로의 덫.
마물들은 물고기인 동시에 물살이다.
“드벨라니아.”
“시작해!”
2군단이 일제히 실을 펼쳤다. 각 실들이 엮이고 엮이며 거대한 형체를 이룬다.
닿으면 베이는 실이다 보니 멍청한 마물들이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특정 위치에 가면 몸이 조각나 죽는다는 것만 인지한 듯 자연히 실의 유도를 따라 유일한 입구로 들어온다.
조금 있으면 놈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겠지. 하지만 그때가 되면 늦었다. 유일한 출구는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는 마물들로 막혔으니까.
덫의 가장 안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데온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간다. 몇 발자국 걸었을까, 드벨라니아를 돌아본 그가 발로 바닥에 선을 직 그었다.
“이쯤에 무작위로 실을 설치해. 목적은 네가 서 있는 곳까지 마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 우리도 안전한 공간은 있어야지.”
이건 배수진이다. 마물들도 이 덫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우리 역시 나가지 못한다.
마물들을 잡아두기 위한 이 장소가 도리어 마물들에게 먹히기 위한 장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해 두어야지.
“실이 부족해서 한 마리도 못 들어오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굳이 촘촘하게 설치할 필요는 없어. 간격은 딱 우리가 드나들 정도면 충분해.”
“네? 하지마안….”
이 안과 밖을 오가며 마물을 처리하겠다는 데온의 의도를 읽은 드벨라니아가 난색을 표했다.
“숙련된 자가 아닌 이상 설치된 실을 발견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아, 물론 데몬 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고, 난전에서는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쓰기 번거로울 테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어어….”
어떻게?
막무가내인 것 같은 그녀도 실은 분위기를 보고 발을 뻗을 줄 안다. 무심코 던질 뻔한 질문을 꾹 삼킨 드벨라니아가 데리고 온 2군단에 명령을 전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함부로 되묻는 것은 자칫 죽음과도 연결될 수 있다.
제 무례를 꼬집히기 전에 서둘러 움직이려던 드벨라니아가 예상치 못하게 돌아온 대답에 멈칫했다.
“난 운이 좋거든.”
“네…?”
얼빠진 되물음이었다. 데온은 대답 대신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씩 웃었다.
더 이상의 이성은 사치라는 듯 침착함이라는 막이 벗겨진 새빨간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튕기듯 마물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그새 2군단이 설치한 실 따위는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며, 가장 만만한 녀석을 짚어내고 달려든다.
들고 있는 단검을 냅다 놈의 안면에 꽂아 버리며 데온이 입꼬리를 길게 늘여 웃었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웃음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보통의 이들이라면 실을 찾기 위해 극도의 집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데온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것도 운이라면 운이겠지.’
선천적으로 빛과 열에 약한 그의 눈은 외부에의 노출을 자제한 터라 빛보단 오히려 어둠에 익숙했다.
빛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빛에 예민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이들이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2군단의 실이 달빛을 미세하게 반사하는 순간을 그는 예민하게 잡아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