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5
세 번의 봄 (4)
오늘의 주인공이자 오늘의 술안주가 된 클레이오는, 친구들의 입을 막을 수 없음을 예감하고 리오그네스 샴페인의 향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여전히 디오네의 미의식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클레이오 역시 키가 큰 것은 나름 괜찮게 여겨졌다.
물론, 인생에서 성장통을 두 번 겪는 꼴을 당한 것은 진짜로 괴로웠다. 무릎에다 녹인 금속을 부은 것 같은 통증을 이틀 걸러 시달렸다.
오죽했으면 제베디가, 골골대는 제자를 보다 못해 [경감] 마법을 걸어줄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결과, 이전 생의 체격과 흡사해져 움직이기가 한결 편해졌다.
한때는 눈높이나 팔다리의 가동범위가 인식과 괴리되어 있어 자주 넘어지거나 몸을 잘못 가눴지만 그런 일도 없어졌다.
‘부차적이긴 하지만 블라드 자식을 내려다보게 된 것도 좀… 고소하긴 했지.’
기디온을 닮은 클레이오는 텔마를 닮은 블라드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키가 더 컸다.
메리디에스의 교역소 총책임자로 영전하는 블라드를 전송하던 밤에, 자신의 동생을 이젠 살짝 올려다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블라드가 지은 표정은 꽤 보기 좋았다.
“저저, 레이 딴청피우는 거 봐.”
“그나저나 도련님이 기사예비생 여러분의 아침훈련을 따라갈 수 있었나요?”
“아! 레이디 디오네, 아침훈련을 같이 한 건 아니고 아침훈련 전 몸풀기랑 달리기까지만 같이한 거죠.”
“그것만 해도 레이가 죽으려고 했어요, 으히히히.”
“죽는소리, 우는소리.”
“리피, 레티샤… 그래도 너희가 성장통 때문에 고생할 때 내가 걸어준 [경감] 마법이 있는데, 내 명예를 조금만 생각해 줄 수 없을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맞아.”
클레이오가 훤칠하게 자라난 만큼 두 쌍둥이도 사슴처럼 기다란 청소년들로 자라났다. 이제는 이시엘과 눈높이가 조르르 비슷했다.
쌍둥이들 역시 그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성장통에 시달려야 했고, 클레이오는 저녁나절마다 두 사람의 무릎과 발목에 번갈아 [경감] 마법을 걸어주곤 했다.
‘양육비를 청구해도 될 판에, 날 사람값 못하게 생겼다고 그랬단 말이지… 안젤리움 자작, 그 인간.’
“내 정신 좀 봐. 더 취하기 전에, 이 서류 챙겨 놔요.”
“뭡니까, 레이디 디오네?”
“특허료 정산 서류랑 마도구 제작비 영수증이요. 지레식 와인오프너는 인기가 좋아서 동역 앞에 새로 연 라센티 백화점에도 입점했거든요. 올해도 특허료가 쏠쏠하네요. 레비 씨가 무척 기뻐하더군요. 어디서 그런 생각을 다 해내냐구요!”
“그냥, 운이 좋았죠.”
이전 세기의 이세계로 간다고 해서 에어컨을 설계하거나 페니실린을 발명해 낼 순 없었지만 지레식 와인오프너 정돈 만들 수 있었다.
오로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본인이 쓰려고 만든 게 추가적인 용돈벌이가 되어 주니 클레이오로서도 기분이 좋았다.
“아 근데 이 마석 은판으로 만드는 ‘순간 초상’이며, ‘메아리의 증폭’은 또 뭐예요? 상품화하려는 건 아닌 거죠? 멀리서 나는 소리를 듣겠다고 마석 마노를 쓰는 건, 자산가이면서 마법사인 도련님이나 벌일 만한 도락이네요.”
디오네가 클레이오의 지출 항목을 쫙 꿰고 있으니 변명할 수도 없었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레이디가 호되게 비난한 물품은 사실, 클레이오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프란이 실용화시킨 마도구들이었다.
‘순간 초상’이라 이름 붙인 폴라로이드 카메라도, ‘메아리의 증폭’이라 이름 붙인 단거리 무선 도청기도 모두 프란의 천재적인 두뇌에 힘입어 만들어졌다.
클레이오는 설계도를 봐도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 원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할 의지도 없었다.
‘어차피 프란만 잘 쓰면 되니까.’
프란의 에테르 레벨은 여전히 2였다. 그는 마법사로서 수련할 의지가 전혀 없었기에 능력을 보정할 마도구가 필요했다.
그가 레벨을 높이지 않는 이유는 명백했다. 3레벨로 등급이 오르면 거주지 신고의 의무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니까. 어쩌면, 아주 먼 훗날엔… 반드시 레벨 높은 마법사가 좋은 것만도 아니고.’
그래서 클레이오는 아무런 불평 없이 프란에게 막대한 자금과 자원을 지원했다.
“다 필요가 있어서 만든 거니 너무 책하지 마십시오. 아무튼 늘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하다고 레비 씨에게 전해주시고, 보너스 지급할 테니 처리 부탁드립니다.”
는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해당 업무를 주관하던 디오네의 비서 레비는 그레이어 상회에서 나와 레비 유한회사를 차렸다.
바이제 레비가 대표를 맡고 출자자는 디오네와 클레이오였으며, 주요 업무는 클레이오의 특허와 출판 수입 총괄이었다.
부동산 수입은 여전히 디오네과 관리했지만, 다른 분야도 점점 오가는 금액이 커져서 그런 결정이 필요했다.
‘딱 때맞춰서 레비 씨와 에테르 계약서를 쓸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지.’
마리아 교수의 책을 여러 판본으로 펴내며 검토하던 중, 시험 삼아 에테르 순환을 따라해 보았던 레비는 그걸 계기로 에테르 감응력이 발현되었다.
이 세상의 에테르 감응자는 등록된 기사와 마법사의 머릿수만 보고 짐작한 것보다 더 많았다.
다만 감응력이 지나치게 약하고 훈련이 안 되어 있어 본인이 감응자인 줄 모르고 살던 이들이 대다수였던 것이다.
나이 서른이 넘어 자질을 찾아낸 레비 덕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레비가 비록 레벨은 낮았어도 에테르 계약서 작성은 가능했다. 디오네와의 것처럼 생명을 거는 대신 금전적 배상 의무를 크게 지우는 종류의 계약서였다.
건사해야 할 아이가 셋인 레비가 그 계약서를 어기지는 않으리란 계산이 클레이오에겐 있었다.
드러내 알리지 않을 뿐, 여러 방면에서 상당한 수익을 올리게 된 클레이오는 스스로의 처지가 좀 아연하게도 느껴졌다.
‘지적재산권이랑 땅은 나중 돼도 안 없어지는 거니까, 있으면 좋긴 한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나도 몰랐지.’
바틀비 앤 부바르 인쇄소 역시 결국엔 레비 유한회사의 관리하에 들어왔다.
바틀비 씨와 사원들의 조합에 의해 운영되어 클레이오는 경영에 거의 손을 안 댔지만, 이런저런 인쇄물을 찍을 때 일정 맞추는 덴 꽤 도움이 됐다.
‘뭐, 돈이 돈을 부르고 또 돈이 돈을 굴리는 게 이런 건가 봐.’
올해 초 룬데인 동역의 개장과 함께 룬데인의 지가가 한 차례 더 상승했다. 자고 일어나면 연일 최고가를 갱신해서, 자기 재산이 정확히 얼마인지 본인도 모르는 상황을 다 겪어 봤다.
드 네쥬 에스트 호텔의 대단한 성공으로 끌어올 수 있는 자금이 상당해진 카타리나는 두어 차례 호텔 부지 매입 의사를 밝혔다.
디오네는 카타리나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아주 신나했다.
그렇듯 카타리나 탕페트 드 네쥬와 디오네가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는 관계이긴 하지만, 아서와 클레이오를 사이에 두고 첼과는 다른 인연이 쌓였다.
그때 자신 앞의 물그릇을 다 비운 베헤못이 거만하게 노비를 불렀다.
“웨옼!(술 더!)”
클레이오는 숙련된 시종의 솜씨로 베헤못의 물그릇에 차가운 샴페인을 조르르 따라주었다. 그릇 가장자리로 이는 흰 물거품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베헤못이 다시금 술을 핥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 말라 여러 방향으로 뻗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아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못이 원래 이런 색이었나? 털이 좀 샌 것 같은데?”
“몰라. 그 전에 저게 고양이이긴 해? 만날천날 술을 저렇게 퍼마시고도 쌩쌩한 거 봐.”
물그릇에 코를 박고 햝챱챱챫 샴페인을 핥고 있는 베헤못을 내려다보던 첼은, 동물에겐 알코올 섭취를 하게 해선 안 된다는 상식이 도전받는다고 중얼거렸다.
클레이오는 첼의 타당한 의문 제기를 모르는 척했다.
‘아무튼 고양이로 보이고, 퉁퉁하고 뚠실해서 귀엽긴 하니까 된 것 아닌가.’
이전에 베헤못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세계가 아홉으로 나뉜다는 건 무슨 뜻이며, 네 정체는 뭐냐고.
대답을 해 주려던 베헤못은 그 후 일주일 동안 사람의 말을 못 했다. 명백히, 억지력의 작용이었다.
늘 베헤못과의 실랑이로 아침을 시작하는 클레이오에게 그 일주일은 엄청나게 쓸쓸한 시간이었다. 언제까지고 사람의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인지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종류의 질문은 안 하게 됐다.
언젠가 그가 이 세계의 온전한 일원이 된다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클레이오에겐 별로 상관없었다.
이 세계의 사람에게는 각자의 자리와 소명이 주어져 있고, 인간의 의지가 가진 가능성은 과대평가되지 않는다. 그 ‘가능성 없음’은 역으로, 불안 없는 삶의 토대가 되었다.
그뿐만일까.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라고. 학교에 살며 애들이랑 부대끼니까 생각까지 단순해지고 정신연령도 낮아지는 것 같네.’
그도 그럴 것이, 쌍둥이들이 이제 열을 올리고 있는 화제는 학교 숙제였던 것이다.
안젤리움 자작은 엄격한 부친이었고 쌍둥이들은 성적을 잘 내야 했다. 늘 그렇듯 이시엘이 극히 정확한 공지사항을 전해주었다.
“실습이 길어진 걸 감안해, 전공과목은 중간고사 실기시험만 보면 된다고 한다. 공통과목과 선택과목의 경우 한 달 동안 수업 빠진 건 과제로 출석을 대체하고, 시험범위는 다른 학생들과 같다. 과제 내용은….”
15살에 4레벨인 쌍둥이들, 19살에 5레벨인 이시엘과 첼, 같은 나이에 무려 6레벨인 아서는 전공 시험이야 겁날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과목들이 있어 쌍둥이를 울상 짓게 했다.
이시엘은 어디서나 밤중까지 공부를 하니 임전 무패였고, 첼은 성적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아서는… 그 무위에도 불구하고 필기 과목 성적은 여전히 바닥이었다.
“그럼 무슨무슨 과목 과제를 해야 하지?”
“역사, 고전, 카롤링거어, 지리….”
“으아앙, 첼, 나 카롤링거어 번역 좀 도와줘.”
“안 되지. 숙제는 자기 힘으로 하는 거야.”
클레이오로 말할 것 같으면 의무복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성적은 좋았다.
마법총론과 마법 실습은 말할 것도 없었고, 카롤링거어 역시 그랬지만, 역사와 지리 역시 애들 따라가서 멍하니 수업을 듣다 보니 성적이 잘 나왔다.
전적으로 수능을 친 한국 사람의 짬바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도 암기과목은 잘했지만 ‘약속’을 낀 클레이오는 그야말로 암기과목의 전문가가 되어버렸다.
클레이오의 성적에 깊숙한 도랑을 내는 과목은 여전히 고전이었다.
고전 과목 선생 게빈 바드는 클레이오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과제 재제출 같은 것도 안 시켰다. 그냥 낙제만 안 당할 성적을 줬다.
수학이나 독도법(讀圖法)에선 단연 뛰어나지만 암기 과목 시험은 엉망으로 치는 아서의 경우, 클레이오가 자신처럼 바닥을 까는 과목도 있다는 데 은근히 기뻐했다.
“아, 꽃이 이렇게 예쁜데 과제를 해야 하다니.”
“리피, 난 한 잔 더 마실래.”
“레티샤, 나도.”
“얘들아 그러다가 저 왕자 놈이나 저 마법사 놈 같은 꼴 되는 거야.”
“몰라, 첼! 따라 줘.”
“흥.”
바람이 중정을 훑자 연보랏빛 라일락 꽃잎이 흩날린다. 디오네의 레이스 모자가 꽃잎처럼 바람에 따라 솟아오르자 이시엘이 재빠르게 잡아 돌려주었다.
거나하게 취한 베헤못은 올리브 한 알을 할짝할짝 핥으며 바닥에 늘어졌고, 리피와 레티샤가 고양이의 풍성한 꼬리를 간질이고 있었다.
술은 향기롭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듣기 좋으며, 느슨한 친애가 어린 시간은 다정하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이전에도 있었고, 운이 좋다면 이후에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