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34
세 번의 봄 (3)
“그거야말로 놀라운 일인데요!”
“놀랄 일인가요?”
“마담 드 탕페트 네쥬는 귀족 중의 귀족이셨지 않나요? 미용 기술을 아신다니 놀라울 만하지요.”
“이런, 디오네 당신이 모르는 게 다 있군요. 할머니는 원래 탕페트 드 네쥬 가문의 레이디스 메이드 출신이에요. 재봉 하녀로 저택에 취직했지만 탁월한 머리 손질 실력 하나로 마나님의 드레싱 룸을 꿰찼고, 요절한 마나님의 자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가 차지하게 됐죠. 곧 어머니가 태어났고, 백작은 오래 살지 못했어요.”
희귀한 가십을 듣게 된다는 예감에, 디오네의 옅은 하늘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관객의 호응에 힘입어 첼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리는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옷맵시가 좋고 손재주가 빼어난데다 미모는 엄청났다. 신분을 세탁한 뒤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신비로운 남색 머리카락과 은빛 눈을 가진 젊은 백작부인은 혁명 전 카롤링거의 사교계를 호령한 끝에 왕의 정부가 되었다. 상복을 입은 채로.
이 대목에서 디오네가 헙, 숨을 삼키자 가위를 내려놓고서 면도칼을 손잡이에 끼우던 첼이 웃었다.
“왕의 정부쯤 되었으니 에텐셀 왕가의 그 많은 은닉재산을 맡은 거죠.”
“장담컨대 이 이야긴 제가 올해 들은 사교계 비사 중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거예요.”
“즐거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자, 이시엘 봐봐. 다 됐어.”
단발을 짧게 치고 뒷목덜미의 머리카락까지 깔끔하게 다듬은 첼이 이시엘에게 손거울을 쥐어주었다. 그러고는 도구함에서 사각형의 거울을 하나 더 꺼내 뒷머리를 비춰볼 수 있도록 뒤편에서 들었다. 정말로 능숙한 솜씨였다.
“늘 신세를 지는군.”
“나야말로. 장미 꽃잎처럼 아름다운 머리를 다듬을 수 있어서 기뻐.”
생활인의 도구라기엔 지나치게 고급이고, 과도하게 장식된 가위와 빗이 세트로 맞추어진 상자로 되돌아간다.
첼은 깨끗한 무명으로 이시엘의 머리털을 털어준 후 가운을 걷어냈다. 산뜻하고 어여쁜 모양새였다.
고르릉 거리는 베헤못의 턱 아래를 살살 긁어주며 디오네가 말했다.
“저도 이다음엔 단발을 해볼까 싶어요. 이제까진 기사도 아닌데 머리를 자르기는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였으니까요.”
기사들은 검을 쓰기에, 지난 세대에도 제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치는 여성들이 있었다. 하지만 기사가 아닌 사람들에겐 흔하지 않은 차림새였다.
스스로가 기사였던 카르멜라 여왕 치세 이전까진 에테르 감응력이 있는 여성은 대개 마법사가 되었다.
최초의 마법사라 불리는 이솔트 왕비의 영향도 있어, 그 시절까진 에테르 감응력 있는 여성이 기사가 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 알비온에서 그런 구분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제비꽃 클럽에서도 요즘엔 종종 단발을 한 아가씨들이 보여요. 그 어떤 스타일이든 디오네에겐 그림처럼 잘 어울릴 겁니다.”
제비꽃 클럽은 비행 클럽 다음으로 첼이 가담한 모임으로, 직업을 가진 여성과 학생 모두 가입이 가능한 단체였다.
회비를 모아 서로를 돕고, 소책자와 주간지를 제작해 참정권 확대 운동에 힘을 보탰다.
“하하, 입에 발린 말은. 첼 당신이야말로 옛날부터 항상 이렇게, 날렵한 짧은 머리였죠.”
“정확히는 일곱 살 때부터이죠.”
디오네에게 이야기를 하느라 과거를 떠올려서일까, 첼은 자신이 처음으로 머리를 잘랐던 날을 떠올리게 된다.
카타리나라고 처음부터 자신의 딸이 남들과 다름을 인정했던 건 아니었다. 드레스도 리본도 긴 머리도 싫다고 분노하는 아이와 그녀는 오래 기싸움을 했다.
분란을 종식시킨 사람은 마리였다. 일곱 살 난 손녀의 머리를 손수 짧게 잘라주고, 원하는 대로 반바지와 검은 구두를 맞춰 주었다.
마리 탕페트 드 네쥬는 첼에게 두 가지 유산을 물려주었다.
하나는 풍족한 재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어디서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는 가르침이었다.
“아, 그러니까 이시엘, 너도 너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인생을 좀 즐기고 살아. 응? 만날 공부니 수련이니 아서 호위니 이런 데에만 얽매이지 말고!”
“나는 충분히 내 뜻대로 살고 있는 중이다. 오히려 첼 너는 인생을 좀 덜 모험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일전처럼 몸을 사리지 않고 무모한 비행에 뛰어든다든지. 로사 교수님처럼 지극히 뛰어난 검사라도 심한 부상을 입으면….”
“앗, 설교는 그만~.”
첼은 지난해 비행 클럽에 가입했다. 비행 클럽은 [강화]를 쓸 수 있는 성인 에테르 감응자만 가입할 수 있었다.
클럽에선 목제 글라이더를 탔는데 기계의 안전성이 형편없어서 세 번 비행 중 한 번은 추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사람이 타면 곧바로 인명사고였고 [강화]를 쓴다 하더라도 높은 고도에서 떨어지면 결국엔 다쳤다.
지난달 첼에게 견갑골을 쭉 가로지르는 상처가 새로 생긴 걸, 하우스 메이트인 이시엘은 알았다. 마법으로 상처를 치유할 수는 있어도 흉터를 지우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에 5레벨로 올라갔잖아! 엄청난 성과 아냐?”
“첼레스테스.”
본격적으로 이시엘의 설교가 시작되려던 차, 귀를 쫑긋 세운 베헤못이 발딱 일어났다. 고양이는 디오네의 품을 벗어나 입구를 향해 우다다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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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와 클레이오가 연구제자 연구실 입구에 다다랐다. 아서가 자전거에서 짐을 내리는 동안, 클레이오가 에테르를 일으켜 문의 잠금을 해제했다.
“[위대하신 학예의 영묘 베헤못을 찬양하라.]”
딸랑딸랑. 찰칵.
“그 마법 자물쇠는 기능은 훌륭한데… 진언 좀 어떻게 바꿀 수 없냐?”
“이미 정해진 거라 못 바꿔.”
티플라움 판에 알비온 마도과학의 정수를 들이부은 음성인식 자물쇠는, 베헤못의 지혜가 80%, 지혜를 이끌어낸 술기운이 15%, 클레이오의 아이디어가 5%쯤 작용하여 제작된 물건이었다.
그리고 주 제작자인 베헤못의 의견에 따라 문을 여는 진언은… 저렇게 됐다.
아서는 문을 열 때마다 툴툴댔다. 여전히 베헤못에게 아래 서열로 취급당하는 게 영 불만인 모양이었다.
‘이제는 다 커서 어딜 봐도 청년인데 저럴 땐 또 어린애 같다니까.’
우다다다다다!
“왜애애애애오옹! 우웨에에에엥!(기다리다 날 다 새는 줄 알았다! 네놈 보기가 왜 이리 힘든 것이냐!)”
전력으로 달려온 베헤못이 뒷발 두 발로 일어서서, 앞발 두 발로 허벅다리에 매달리자 클레이오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실습에서 돌아와 연구실 문만 따놓고는 샴페인을 가지러 간다며 쫄래쫄래 빠져나간 것이 분한 모양이었다.
샴페인 박스를 짊어지고 들어오던 아서가 혀를 쯧쯧 찼다.
“못, 못. 살살해. 레이 잡겠어.”
“웨옼!(닥쳐라!)”
“뭐지, 왜 고양이 놈에게 욕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디오네는 처음부터 그랬지만, 아서와 다른 아이들도 갈수록 베헤못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 같았다.
클레이오는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기분 탓이겠지. 빨리 술이나 챙겨서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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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님의 가장 귀중한 자산을 그렇게 관리하는 꼴은 볼 수 없어요.’라는 디오네의 으름장에, 아서는 엄청난 속도로 면도와 세신을 마치고 왔다.
물에 젖어 더 진한 황금색이 도는 머리를 뒤로 넘긴 아서가 간이 테이블 위에 테이블보를 깔고, 클레이오는 샴페인을 박스째로 서클에 넣어 [냉기] 마법을 걸었다.
5레벨에 오른 지 2년이 지난 지금 클레이오의 에테르 조정 능력은 한없이 발전하여, 술의 주종별로 온도를 다르게 맞출 수준에 이르렀다.
‘리오그네스는 드미 섹 정도의 당도라서 브뤼보다 좀 더 차갑게 하는 편이 맛있지.’
장래의 대마법사로 불리는 그가 자신이 구사하는 마법 중 가장 높은 만족도를 가진 게 [냉기]라는 사실을,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잘 알았다.
아서와 클레이오에 이어 도착한 쌍둥이들은 샬럿 부인이 준비해준 간식 바구니를 열었다.
오리가슴살과 오렌지, 피스타치오가 들어간 파테 엉 크루트, 얇게 썬 잠봉, 달걀과 트러플을 넣은 한입 크기 샌드위치, 숙성한 콩테 치즈, 양파 처트니, 올리브와 피클이었다.
첼과 이시엘이 짝 안 맞는 간이의자와 야외용 의자를 사람 수에 맞추어 늘어놓았다. 베헤못은 일찌감치 일광욕용 선베드에 착 자리를 잡았다.
봄의 중정에는 따듯한 해가 쬐이고, 포석을 들뜨게 하며 뿌리를 뻗은 라일락이 꽃잎을 흩뜨린다.
쌍둥이들은 자신들 몫의 샴페인 잔에 뜬 자그만 연보랏빛 꽃잎을 보며 꺄르륵 거렸다.
“낮술이 이렇게 좋은 건 줄 이전엔 몰랐지. 레이가 왜 그렇게 술, 술 하나 했어.”
“한낮에 샴페인 한 잔, 완전 좋다.”
쌍둥이들의 대화를 들은 첼이 다리를 반대로 바꿔 꼬아 앉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으흥, 우리 안젤리움 아가씨들이 어엿한 어른이 되었네.”
“괜찮을까요? 저희 도련님이 너무 교육적으로 나쁜 존재였던 것 같아 전(前) 후견인으로서 다소 양심이 쓰라리네요.”
“괜찮아요, 레이디 디오네. 우린 딱 한 잔씩만 해요.”
“맞아요. 나랑 리피는 아서랑 레이처럼 술 먹고 등나무 아치를 날려버리거나, 연못의 물을 죄다 공중으로 치솟게 하진 않을 거니까요.”
“아니 저 등나무 이야긴 처음 들었는데, 그건 뭐죠 도련님?”
각자의 잔에 술을 더해 주던 클레이오는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레이디 디오네, 리오그네스를 즐길 수 있는 드문 기회니 술이나 마십시다. 제 생일이잖습니까.”
“흥, 자라더니 귀염성이 없어지고 있어요? 오늘만은 넘어가 드리죠.”
디오네는 자신의 생일을 언급하는 클레이오의 무던한 말투가 마음에 든다.
캔튼 부인이 슬며시 귀띔한 적 있다. ‘도련님은 생일을 한 번도 제대로 축하받아 본 적이 없어요. 생일 다음 날이 마님의 기일이라서요.’
그래서 작년엔 디오네가 꾀를 내 클레이오의 연구실에서 생일 파티를 열었다. 모두가 즐거워해, 그건 곧 아서와 친구들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생일 축하의 말, 선물 상자, 몇 차례의 건배가 지나갔다.
디오네가 준비해 온 새하얀 케이크는 최근 룬데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과점의 것으로, 가벼운 스폰지 사이사이에 레몬 크림을 넣고 위에는 새하얀 아이싱을 씌운 것이었다.
샴페인 기운에 뺨을 발그레하게 붉힌 디오네가 말했다.
“말려 놓은 생선 같던 도련님이, 이렇게까지 잘 자라줄 줄이야. 저 디오네 그레이어는 감격뿐이랍니다.”
“으하하. 말려놓은 생선이래. 들었어, 리피?”
“응응. 근데 지금은 가로등 같잖아. 잘 자란 건가?”
“어머어머, 안젤리움 아가씨들 모르는 소리 마세요. 도련님은 아세르 준남작님 젊은 시절과 꼭 닮았다구요. 눈과 머리색이 좀 더 옅어서 유약해 보이는 면이 있지만… 키는 아서 님만큼이나 훤칠하게 크고 말이죠.”
디오네의 의견이 첼, 리피, 레티샤 모두에게 강경한 반박을 당했음은 물론이다.
“흐응, 저렇게 크니까 영 어색하지 않습니까. 전엔 나보다 작았는데.”
비실이 주제에 자기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게 못마땅한 첼과,
“또 키만 크면 뭐해요. 우리 아버지가 있죠, 레이 보더니 사람 한 명 값도 못 하게 생겼다고 그랬어요. 길게 편 종잇장이 걸어 다니는 것 같다나?”
“아냐, 레티샤. 그래도 이제 편지지 같은 건 아니고 카드보드 정돈 된 것 같애.”
“으음, 그건 그렇다. 전엔 정말 사람 같지 않게 불쌍하고 비루먹었는데, 이제 빼빼 마른 사람 모양새긴 해.”
진실의 입이 열려버린 두 쌍둥이였다.
재빠르게 두 잔의 샴페인을 비운 아서가 세 잔째를 따라선 쌍둥이와 첼, 디오네 사이로 끼어들었다.
“레이가 그나마 건강해진 건 저희 친구들의 공인 것 같습니다. 아침마다 쟤를 깨워가지고 아침훈련에 데리고 나갔거든요.”
“맞아요. 저희가 다섯 명이니까, 월화수목금 딱이었어요.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