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43
알비온의 목가 (5)
숨겨지지 않는 격정이 카타리나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왔다.
팔짱을 낀 채 창틀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던 첼레스테스는 모친의 비난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깟 무모한 병정놀이에 허비하라고 나와 네 외할머니가 그 고생을 한 건 줄 아니? 부를 이룩하는 데는 삼 대가 걸렸는데, 허비하는 덴 한 세대면 충분하겠구나!”
키시온 영지의 사병 양성 자금원이 첼이었던 건 내무보안국의 조사로 드러났다.
아직까지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정보이지만, 인맥이 대단한 카타리나는 남보다 빨리 그 소식을 접하고 말이 퍼질 만한 경로를 모두 틀어막았다.
딸이 갑작스레 밖으로 나돌 때에도 워낙 별난 애였으니 하고 사업에 바빠 놓아둔 게 패착이었다.
심지어 그 망할 일을 도운 건 카타리나가 신뢰하던 유능한 회계담당자 소피아 르페브르였다.
까딱했다간 반역죄를 뒤집어쓸 참이었으니 담대한 카타리나로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 그 냉정한 회계사를 어떻게 꼬여낸 거니? 딸과 심복이 내 등 뒤에서 반역 공모를 하고 있었다니, 못 알아챈 나의 불찰이구나!”
“꼬여내기는. 조피도 그저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평민원으로 보내는 데 권한을 행사하고 싶었던 거야.”
짝!
참지 못한 카타리나가 딸의 뺨을 갈겼다.
첼은 무예를 익힌 적 없는 사람의 움직임 따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분이라도 풀리라고 그냥 맞아 주었다.
헌데, 카타리나의 손은 제법 매서웠다.
도드라지게 세팅된 반지의 다이아몬드가 첼의 뺨을 길게 파헤쳐 놓았다. 이내 피가 또르륵 맺혔다.
“넌 1급 반역죄가 장난으로 느껴지니?! 그 빨간 머리 검사 애와 친구의 정에 휩쓸려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증언하렴. 내가 보증인은 구해 주마. 지금까지는 키시온 자작이 모든 것을 자기 책임이라 증언하고 있으니 무마가 가능해.”
카타리나는 알비온의 상원의원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왔다. 이때껏 그들의 편의를 봐주고 금전까지 먹여 두었으니, 지금이 뿌린 것을 거둘 때였다.
첼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카타리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첼의 혐의만은 벗겨줄 것이다. 이시엘이나 아서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되든 간에.
“알잖아, 엄마.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건 내 명예의 값이자 무게로서, 내가 치러야 하는 몫이야.”
“하, 명예! 지금 명예라고 했니? 살아 있어야 명예도 있는 거란다. 리베르테 광장에 내걸린 에텐셀 왕가의 일곱 수급에 무슨 명예가 남았단 말이니? 가로등에 목 매달린 내 첫 남편의 주검 앞에서 명예에 대해 말해 보렴!”
카롤링거를 떠나올 때 카타리나는 이미 스물다섯 살이었다. 마리의 데릴사위이자 첼의 단명한 부친은, 카타리나에겐 두 번째 남편이었다.
첼은 카타리나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일의 상세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반듯한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엄마….”
사납게 일어난 카타리나는 조급한 손길로 책상 서랍의 잠금을 풀었다. 흥분해서 열쇠가 잘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나 헛손질을 했다.
드르륵. 덜컥.
서랍 속에서 팸플릿 한 뭉치를 꺼낸 카타리나는 그것을 첼의 무릎 위로 내동댕이쳤다.
제비꽃 클럽에서 펴낸 참정권 확대 운동 선언문과 월간 소식지였다.
“가정교사 따위와 어울려 그깟 팸플릿 나부랭이를 찍어내고, 철모르는 계집애들과 사회운동 흉내를 내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니? 재산이 없었으면 네 처지는 다른 망명자들 딸들과 똑같았을 거란다. 졸부 집안의 구석방에서 하녀장 눈치를 받으며 어린애들 카롤링거어나 가르쳐야 했겠지!”
검은 실크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가 가쁘게 들썩였다. 카타리나는 숨을 고르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차피 세상을 움직이는 건 오로지 지위와 재산이야. 천 년 전에도 그랬고, 천 년 후에도 그럴 거다. 정치놀이가 하고 싶다고? 적당한 집안의 차남이나 삼남을 골라 네 성을 주면 되잖니! 투표권이든 감투든, 결혼을 하고 나이만 먹으면 가질 수 있는 건데 왜 이런 난장을 치는 거니!”
카타리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10만 디나르 이상 재산을 가진 35세 이상 기혼 여성이면 투표권을, 100만 디나르 이상 재산을 가진 40세 이상 기혼이라면 원칙상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다.
재산은 모자람이 없는 첼이니 누가 상대이든 결혼만 한다면 쉽게 얻을 권리였다.
그러나 그건 첼이 선택할 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여성이 정식으로 단독 재산권을 행사하게 된지 아직 10년밖에 안 된 시점에서, 실제로 그 정도 로 부유한 여성은 대부분 귀족이었고, 귀족은 평민원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었다.
세습되는 귀족원 의원 지위 역시 딸보다는 데릴 사위에게 물려주는 쪽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평민원 의원이 된 여자가 있어? 아직 한 명도 없잖아! 엄마도 82년 재산법 통과 전엔, 호텔 운영권을 엄마 명의로 두려고 온갖 로비를 다 했으면서! 나는 거짓을 둘러쓴 채 살고 싶지 않고, 나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지도 않아. 내 의지를 실행할 가능성을 가진 자를 택해 [언약]했고, 그건 나의 믿음 아래에서 삶과 죽음을 함께 하겠다는 의미였어.”
“너, 설마 그 삼 왕자 상대로 [언약]을 했단 말이니?”
첼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답변이 되어주었다.
경악한 카타리나는 입술을 조금 떨었다.
“…미쳤구나.”
침통하게 이마를 짚었던 카타리나가 가만히 일어나 첼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도 중년 여성들 사이에선 두드러지게 키가 큰 축이었지만 첼보다는 눈높이가 낮았다.
“나는 네 언니를 잃었을 때 눈물조차 말라붙어버렸단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드 네쥬 호텔의 여제는 우아한 두 팔을 뻗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자식을 품에 안았다. 마치 화해를 청하듯이.
같은 눈동자, 같은 머리카락 색을 가진 두 모녀는 외모가 흡사해서 태도의 상이함이 더욱 두드러졌다.
머리를 짧게 쳐 이제는 군인들처럼 드러내놓은 딸의 뒷덜미를 쓸어보던 카타리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제 내게 남은 유일한 기적인데.”
첼은 자신보다 작아진 어머니를 살짝 마주 껴안아 주었다. 깊은 밤의 하늘 같았던 고운 남빛 머리에 어느덧 새치가 섞여 있었다.
철컥.
일이 벌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첼과 마주 안은 채 뒤편의 캐비닛에 손을 뻗은 카타리나는, 딸의 목에 제압구를 채웠다.
첼이 어른스럽다 한들, 난세를 맨몸으로 겪고 살아온 카타리나에게는 이길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충격적인 고백과 감정적인 호소에 휘둘려 방심한 새 에테르가 묶였다.
첼은 어머니가 한 짓이 믿기지 않아 자신의 맨 목을 감싼 금속 링을 더듬어 보았다.
금속에서 새어 나온 은은한 금빛이 셔츠 깃을 밝히고 있었다. 티플라움이었다. 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또 같은 일이 일어날 걸 눈뜨고 좌시하겠니? 자식을 잃는 건 인생에 두 번 겪을 만한 일은 아니란다. 사비네, 파울라. 이 못돼 처먹은 딸내미를 4층 구금실에 가둬. 사태가 끝날 때까진 절대 밖으로 못 나오게 해.”
“알겠습니다, 마님.”
“명 받들겠습니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건장한 하녀 둘은 카타리나의 목소리를 듣고서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왔다.
첼은 카타리나를 밀치고 하녀들 사이를 재빠르게 벗어났다. 막 문고리에 손이 닿은 순간, 하녀들의 억센 손이 그녀를 붙들었다.
“아, 엄마 진짜…!”
말을 끝맺기도 전에 첼의 눈이 부자연스레 감겼다. 길고 단련된 팔다리가 이따금씩 경련했다.
“좀 자렴. 자고 다시 이야기하자. 혹시 몰라 제압구에 수면분을 발라놓길 잘했구나. 내 딸이지만 정말 어디서 저런 게 나왔는지 원.”
어지럽혀진 집무실 소파에 카타리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각성용 향수병을 열어 조금 향을 맡은 그녀는 다시금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일단 사건의 원흉을 붙잡아 놨으니 다음은 수습이었다.
“네, 잘 지내셨지요, 캐소본 판사님? 일전에 말씀하셨던 공탁금에 더해서, 기부금 건 말이죠… 네, 왕세자 저하의 근위대에 납부하고 싶습니다. 제 선량한 충심과 근위대의 헌신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말이에요. 그럼요. 가능한 한 빨리 말이에요.”
멜키오르가 칼을 빼 들었다면, 딸을 구명하려는 카타리나로서는 적극 숙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병 양성 자금을 대다니. 저걸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놓을 수도 없고. 미치겠어.’
다시금 열이 치솟아 뺨과 귀가 홧홧하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첼을 낳은 후로는 없어졌던 증상이었다.
딸의 혐의를 가능한 한 축소하기 위해 편지를 작성하면서도, 카타리나의 다른 한 손은 연신 부채질을 해야 했다.
정말이지 끔찍한 날이었다.
***
초조한 하루가 흘렀다.
클레이오는 감옥에서의 피로 때문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화들짝 깨었다.
얕은 잠이었던 탓에 피곤함은 그대로였지만 적어도 아서가 심각한 생명의 위협은 받지 않았다는 증거라 적이 안심이 됐다.
그는 침실 테이블에 비척비척 가 앉은 뒤 진하게 내린 커피를 들이켜 일단 뇌를 각성시켰다.
초대하지도 않은 아서가 종종 기어 올라오곤 하던 테라스가 보이자 심란함이 한층 더했다.
“후우우우우.”
절로 시름 어린 한숨이 나왔다.
이쪽 세상에선 늘 잘 잔 데다, 아침에는 기본적으로 홍차가 나와서 잊고 있었던 그 느낌. 커피의 카페인이 신경중추를 강제로 깨우는 감각이었다.
‘기분 좆같네. 하.’
기디온은 콜포스로 돌아가지 않고 수도 저택에 머무르며 룬데인 지부로 출근 했다. 클레이오가 탈주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게 명백했다.
아침저녁 식사시간에도 꼭 식당으로 내려와 기디온 자신과 함께 식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거 가택 연금이잖아.’
지금도 부친은 사무실로 나가서 없을 시간이었지만, 문밖에는 기디온이 고용한 감시원들이 지켜서 있었다. 교대를 해 가며 24시간 내내 그랬다.
기세로 보아 레벨이 낮은 검사들 같진 않았다. 그들은 클레이오를 밀착 감시하며 욕실과 침실 말고는 어디든 따라붙었다. 잠시 쉬라는 에두른 명령 같은 건 씨알도 안 먹혔다.
‘준남작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이니, 도련님께서는 편히 일 보십시오.’ 따위의 대답만 돌아왔다.
즉, ‘네가 뭐라 하든 우린 널 감시해야 하니 안 될 시도는 그만하라.’는 메시지였다.
클레이오는 발이 묶인 자신을 대신해 내보낸 베헤못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신문을 폈다.
‘뭐라도 지금 상황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할 텐데.’
오늘 자의 주요 기사는 단연 운송조합과 수도상인조합 간의 노동시간 단축 협의안 타결이었다.
평민원의 게스톤 팔라흐 의원이 운송조합의 의견을 표명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고, 평민원 의장 벤자민 비튼이 소수정당인 인민연합당의 손을 들어준 덕이 컸다.
파업도 일단락된 룬데인은 초여름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신문에 실린 기사들은 한갓지기 그지없었다. 혹시나 싶어 단신과 박스기사까지 샅샅이 훑어도 그랬다.
파스슥.
클레이오의 손 안에서 신문지가 구겨졌다.
키시온 영지에 관한 소식은 한 줄도 없었다.
애초에 중앙지의 기자들 중 지금 키시온 영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자작령 전체가 사흘째 봉쇄, 동북 수비군의 지휘관이자 자작령의 영주가 구금돼 있는데… 정치 기사야 못 낸다 쳐도 물류가 막혔다든지 기차 운행의 문제라든지 단신이라도 한 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뭐 이래!’
기본적으로 알비온은 수도에 인프라가 집중된 국가였다. 인쇄물은 수도에서 찍어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동북쪽 신문은 좀 다르려나? 구할 방도도 없고… 아니 애초에, 어떤 소식이든 전국지에 안 실려선 큰 영향력이 없어.’
지방에서 전국지를 구할 순 있지만, 수도에서 지방의 신문을 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멜키오르의 언론통제 기술에서 뛰어난 점은 누군가의 입을 막느니, 애초에 주의 자체가 쏠리지 않도록 정보의 원천을 봉쇄해 버리는 부분이었다.
‘나 역시도 아세르 상사 조사부로 전달된 비밀 서신이 없었다면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몰랐을 테니까.’
그렇다 한들 기디온 아세르가 자신의 정보를 언론에 흘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더 나아가 클레이오가 그 내용을 제보한다 하더라도 근거 없는 익명제보를 믿고 왕세자와 그의 근위대를 깎아내리는 기사를 실어줄 만한 언론사는 생각나지 않았다.
토톡.
톡.
“문!”
벌떡 일어난 클레이오는 얼른 테라스 문을 열었다. 못이 돌아왔다.
“못!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다녀왔어.”
첼이 갇혀 있는 카멜리아 관까지는 전차로도 여섯 정거장은 떨어져 있었다. 고양이 발로 가능한 왕복 속도가 아니었다.
고개를 쳐든 베헤못은 거만하게 응수했다.
“전차를 탔다.”
“전차라고?”
“그래 전차. 정류장에서 좀 떨어져 있다가 출발하기 직전 뒷문으로 올라타면 되지 않느냐?!”
흔한 전차 부정승차 팁이었다. 베헤못은 범법행위 그거 뭐 어떠냐는 태도로, 뽕 튀어나온 주둥이를 옴직거렸다.
“영묘님의 총명함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첼에게 편지는 전했어?”
“전했다. 본묘의 천재적인 후각으로 고 고까운 녀석의 냄새를 맡아 딱 찾아냈지. 이 노쇠한 몸을 카멜리아 관 사층까지 기어오르게 하다니 너는 나중에 큰 값을 치러야 할 거다.”
“이 일만 해결되면 뭐든. 원하는 대로. 어떤 와인이든 오크통째로 사입해 바치겠습니다.”
“좋은 각오다. 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