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42
알비온의 목가 (4)
흘러간 지난날은 이날의 파탄을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토록 평온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날들이야말로 지금을 헤쳐나갈 힘을 주었다.
아서와 아이들은 약하지 않다. 분명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클레이오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새로이 얻은 정보를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태서턴이 처음부터 국왕 대리의 이름을 내세워 들이닥쳤다면 키시온 자작은 반격을 명령하지 않았겠지. 그림을 만들려고 부러 새벽에 기습을 한 거야.’
불법 사병양성.
1급 반역죄로 취급될 수 있는 사안의 조사에 순순히 응한다면 누명을 씌우기에 모양새가 좋지 않을 테니까.
물론 신분 높은 수도방위대의 기사들이었다면 야습을 불명예스럽다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들이 언약한 공작을 법으로 여기는 기사들은 그렇지 않지. 태서턴이 멜키오르의 검이 되고자 하는데 무슨 의심을 하겠어.’
트리스테인의 충성스런 기사들은, 1892년 기준으로도 몹시 기묘하게 여겨지는 구시대의 유산이었다. 개인적 친애와 토벌 사이에서 아무런 갈등을 못 느끼는 이들.
‘매혹’이나 ‘프로파간다’는 스킬 시전자의 행동이나 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들에게 더 큰 영향을 발휘했다.
이쯤 오면 트리스테인 기사단은 자신들이 가진 충심이 스킬의 영향인지, 진정한 본심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태서턴은 작년에 그렌델을 잡았을 때도 이미 검기 색이 변할락 말락 하고 있었으니 레벨업이 놀랍진 않지만… 그게 신의 뜻일 리는 없겠지.’
이전에 쓰인 원고에서는 전쟁 중의 일인데, 평화 시인 지금 벌써 레벨업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해 상당한 도야가 필요했을 터.
‘레벨 올리느라 얼마나 무식한 개고생을 했으면 머리색이 다 바랬냐고. 후.’
이제 왕국에는, 다시 네 명의 소드마스터가 있다.
그중 가장 젊은 한 명은,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난 왕세자의 명령을 철저히 수행한다. 조건도 판단도 없이, 오로지 그들 사이에서만 유효한 내밀한 인과에 의거하여.
잠잠하던 멜키오르가 바로 이때 키시온 자작령을 습격한 것도, 이르게 손에 넣은 소드마스터가 얼마나 효과적인 무기인지를 가늠해 보는 시험 같았다.
태서턴은 충분 이상으로 잘 해냈다.
‘멜키오르에게 사용상의 제약 없는 미사일 발사버튼을 쥐여준 거 아냐. 미쳐버리겠군.’
심지어 그 미사일은 자기 발로 걸어서 발사 위치에 도달할 줄도 알았다. 아주, 죽도록 혁신적인 전술 병기였다.
‘다른 소드마스터에겐, 내무보안국 요원들까지 데리고서 저런 지저분한 뒤처리를 하고 다니라고 명령할 수 없잖아. 피어스 같은 자를 움직이려면 명분을 들먹이고, 이권을 주어야겠지만… 멜키오르에게 태서턴은 그럴 필요 없는 존재이지.’
촙촙촙.
샤르르르.
“에오옭, 에우우우웅?(이놈아, 표정이 썩는다?)”
베헤못은 난처한 처지인 클레이오가 걱정되는지 비쩍 마른 발목을 꼬리로 휘감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기디온과 클레이오가 궁성을 벗어난 직후, 마차에 낼름 올라타 저택으로 함께 돌아온 천재묘 다운 직감이었다.
클레이오가 베헤못을 끌어안아 고양이의 염려를 잠재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응접실의 상석에 앉은 기디온은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반듯한 자세로 클레이오를 응시하고 있었다.
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 뺨이라도 한 대 맞는 편이 덜 부담스러울 것 같은 상황이었다.
계속 가만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들은 말에 대한 응답을 했다.
“파리사 시가 제아무리 변경이라 해도, 그 정도 강도의 봉쇄를 내내 지속시키긴 어려울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구귀족 최고의 명가 후계자에겐 네가 알지 못할 수많은 권한들이 있다. 그의 즉결 심판권을 폭넓게 해석하면 무슨 일이 가능할지 모르겠나?”
트리스테인 공작의 즉결 심판권.
이전에도 생명을 위협받으며 들먹여진 적 있었는데, 참 엿 같은 상황에서만 튀어나오는 권한이다 싶었다.
‘태서턴은 그저 우직한 충신으로만 처신해도 상대하기가 까다로운데, 범접할 수 없을 만치 고귀한 구귀족 뭐시기까지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소위 21세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대중은 끊임없이 숭배하고 조아릴 존재를 원했다.
심지어 이곳은 엄격한 신분고하가 존재하는 왕정제 사회. 여기에서 오래된 핏줄의 품위는 더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바로 지금처럼, 제대로 된 명분 없이 다른 영지를 털거나 갈아엎을 때에 아주 딱 적절한.
“트리스테인 공작은, 이미 키시온 영지에서 자신의 즉결 심판권을 행사한 것이 아닙니까? 소드마스터의 무력을 사용해서 말입니다.”
“정확히는 왕세자의 소드마스터로서 그렇게 한 것이다.”
“네. 그 차이를 이해합니다.”
클레이오의 대답을 들은 기디온의 표정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자신의 차남이 철모르지도, 계산이 약하지도 않다는 것을 재차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르면서 행한 일이라면 무지의 핑계를 댈 수나 있겠지. 하지만 너는 이 사태의 의미를 알면서 그렇게 구는 것이냐?”
애먼 고양이 잔등만 쓸고 있는 클레이오를 한참 쳐다만 보던 기디온이 어울리지 않게도 불안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한순간 몇 살은 나이 먹은 듯, 기디온의 섬세한 옆얼굴에서 짙은 피로가 묻어나왔다.
“왕세자의 오른팔이 트리스테인 공작이고 왼팔이 광산국의 프리다 박사라면, 그림자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팔이 베스나 드리스콜이지. 그 광신적인 고문기술자가 너를 직접 심문한다고 들었을 때, 나는 모든 일이 다 끝났으리라 여겼다.”
클레이오는 감탄했다. 과연 아세르 상사 조사부의 능력은 끝 간 데가 없었다.
‘베스나가 미친 인간인 것까지 조사부에서 알아냈나 보군.’
아세르 상사 조사부의 정보력이 너무도 아쉬워 기디온을 포섭할 방도는 없을까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 어떤 기준으로도 아서는 기디온이 택할 만한 패가 못 됐다.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클레이오가 생각에 빠진 새, 다가온 기디온이 클레이오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기디온의 날카로운 시선이 클레이오의 초췌한 꼴을 낱낱이 파고들었다.
가혹행위의 증거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너무도 어색해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지나고 기디온은 이내 아들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텔마가 생명을 살라 낳은 아이는 다 자랐는데도 여전히 날짐승처럼 뼈가 가늘어 기디온의 손 안에 불안한 감촉을 남겼다.
일 돌아가는 꼴을 눈치 빠르게 파악한 클레이오는 재빨리 해명을 했다.
“저는 무사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베스나 드리스콜이 직접 심문했는데도, 북문 아래서 무사히 걸어 나온 사람은 네가 처음일 게다. 저 타락한 신녀는, 암살집행마저 겸하고 있는 자이다.”
“그럴 만한 인물 같긴 하더군요.”
“신의 도우심인지 악마의 변덕인지는 모르지만, 이 행운이 두 번 있진 않을 거다. 넌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거냐?”
기디온이 일으킨 기운은 숫제 살기 같고, 그의 손에 쥐인 지팡이는 마치 칼처럼 느껴진다.
이때 클레이오가 고민하던 건 대답의 내용이 아니었다. 「이격」을 켤까였다.
‘에테르 감응력이 전혀 없는데도 어지간한 마법사나 검사 뺨 때리실 분이시네. 하기야 보통으로 해서 그 사업을 다 일굴 수 있겠냐마는….’
몇 번 눈을 깜빡인 클레이오는 현실도피 욕구를 집어치우고서 똑바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안다면, 지금 네가 해야 할 선택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누가 들어도 분명할 것이다. 이건 사업가 기디온이 아니라 클레이오의 부친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너와 탕페트 드 네쥬 영애는 보석금을 지불한 덕에 겨우 풀려난 거다. 키시온 자작의 영애 역시 외가인 멜라미드 가문에서 신병을 인수해 가, 연금 중이지. 행동을 자중해야 할 거다.”
“하지만 아버지, 아직 아서 님이 지하에 붙들려 있습니다. 그 분을 빼내올 수는 없겠습니까? 실상이야 어떻든, 그와 키시온 자작의 인연은 영지의 여름 궁전에서 자라난 일 정도이지 않습니까.”
“안 된다. 삼 왕자가 키시온 자작에게 사병 양성을 권하고 자금원을 연결해 주었다는 결론은 미리 나 있고, 그에 걸맞은 증거는 지금 만들어지는 중이지.”
클레이오는 빠르게 사실들을 조합해냈다.
베헤못의 말에 따르면 왕세자는 수도에서 이 반역 사건을 진두지휘 중이라 했고, 편지에 따르면 키시온 자작은 영지에 구금 되어 있었다.
‘멜키오르는 키시온 자작을 상대로 간파의 구조시를 아직 안 쓴 거야. ‘순종’같은 추가기능을 퍼붓기 전까진 기회가 있어!’
“아마, 왕세자 저하가 직접 심문하지 않는 이상 키시온 자작은 사병 양성에 반역의 의도는 없었다는 일관된 주장을 할 겁니다. 그렇다면 아서 님도 무한정 잡아둘 수는 없겠지요. 그는 더 이상 무명의 사생아가 아니니까요.”
“그래. 고지식한 무인인 슐리만 키시온은 목을 벤대도 같은 대답밖에 하지 않을 게다. 하지만 왕세자가 이 모든 일을 벌인 목적이 삼 왕자인 이상, 그를 빠져나가게 두겠느냐? 당장 브룬넨에서 키시온 영지를 침공해오지라도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기디온은 알비온의 사람이었다.
역사와 과거를 아는 동시에, 현재의 시류를 읽는 데에도 뛰어났다. 그가 아는 왕위계승은 평화로운 이양일 때보다 폭력적인 소란일 때가 더 많았다.
왕세자가 아슬란을 처리하기에 앞서, 은근히 세를 불린 아서를 먼저 치워두려 한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요아힘 카스틸리엔이 급병을 얻은 지금, 브룬넨은 무력 도발을 저지를 여력이 없다. 그러니 슐리만 키시온의 선제 방비론도 공허한 변명으로 들릴 뿐이다.”
기디온은 들릴 듯 말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클레이오, 너도 알잖느냐. 이제 시작된 거다. 살아남은 한 명만이 왕관을 쓰게 되겠지.”
“…더 이상 아서 님과 연루되지 말라는 거군요.”
“아직 그럴 수 있을 때에 말이다.”
그 단호한 말은 이상하게도 명령보다 애원처럼 들렸다.
클레이오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자,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한 자에게 기묘한 감정을 느낀다. 일종의 죄책감, 혹은 기만을 저지르는 자의 가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이오는 제가 해야 할 대답을 고수한다.
“그럴 수 있을 때 같은 건, 제게는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아서 님을 구명해야 합니다.”
“왜지? 설마 삼 왕자와 언약이라도 맺은 거냐?”
“아니오.”
“그러면 뭐가 문제란 말이냐.”
“신의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제가 제 이름으로 맺은 온전한 약속이고, 세계를 온당한 형태로 나아가게 할 도리입니다.”
클레이오의 말투는 워낙이 담백해 주의주장을 말하는 듯한 열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태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디온은 자신의 아들을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인지한다.
순간의 정열, 호기로운 영웅주의와 달리 저러한 믿음은 외부적 강압으로 허물 수 없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알비온의 세 왕자 중 가장 왕재에 걸맞은 이는 그 셋째일지도 모르지. 고귀한 핏줄을 가졌으나 잔인한 자나, 능란한 매혹을 휘두를 줄 아나 성정이 냉혹한 이보다는. 하지만 왜 네가 그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거냐? 왜 하필 네가 정의를 실천해야만 하는 거지?”
기디온의 어조에는 평소보다 짙은 감정이 서려 있다. 저이를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클레이오는 진실을 답한다.
“그게 바로 지금의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니까요.”
툭.
기디온이 쥐었던 지팡이가 힘을 잃은 손에서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클레이오는 깜짝 놀랐다.
동토의 북벽 같던 사내가 뺨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갈비뼈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헤집어놓은 것처럼, 아연하고도 충격적인 얼굴이었다.
얼굴의 핏기가 다 빠진 기디온이 한탄처럼 텔마의 이름을 되뇌는 것 같기도 했는데, 너무 작은 소리라 정확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기디온은 곧 표정을 바로잡고 평소의 평정을 되찾은 듯 행동했다.
“하지만 클레이오, 나는 삼 왕자를 구명할 수 없다. 내 이름 아래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생계가 걸려 있다. 네 정의에 아세르 가문과 상사의 명운을 거는 건 불가능하다.”
“네. 아버지의 입장 역시 이해합니다.”
클레이오의 반응은, 호의를 기대하지 않은 자 특유의 담담한 것이었다. 자신을 타인처럼 대하는 아들 앞에서 기디온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도록. 이렇게 된 이상 네가 운신할 범위는 좁으니, 잘 생각해 행동해야 할 거다.”
클레이오가 뭐라 붙잡기도 전에 기디온은 쌩하게 응접실을 나섰다. 쫓기듯 빠른 걸음이라 지팡이를 집어줄 틈도 없었다.
그가 나가자마자, 처음 보는 건장한 호위 둘이 응접실로 들어와 클레이오를 침실로 올려보냈다.
사실상의 가택 연금이었다.
마법으로 뿌리쳐버리고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기디온과의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질 것 같았다. 아세르 가문은, 척을 지기에는 너무 큰 세력이었다.
게다가 빠져나간들 당장 아서를 구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옥 부수고 데리고 나온다고 쳐. 그러면 현상수배가 걸릴 텐데… 그 방법은 정말 최후의 수로 남겨놔야 해.’
아서가 왕관을 목표로 한다면, 국외도망자 신세가 되어선 안 되었다. 그걸 알기에 아서와 이시엘 역시도 저항하지 않고 소환에 응한 것이리라.
클레이오는 자신과 함께 침실로 올라온 베헤못에게 몇 가지 부탁을 했다.
그동안 비싼 와인을 바친 공을 치하 받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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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오가 부친과 대치하고 있던 시각.
비슷한 사태는 카멜리아 관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챙그랑!
카타리나는 분을 못 참고 찻잔을 내동댕이쳤다.
그녀의 49년 인생에서, 이토록 분노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첼, 너는 지금 세상에 맞서 싸우는 투사의 기분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네가 벌인 짓은 우리 가문 전체를 절벽으로 떠미는 짓이었단다. 알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