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53
영구하지 못한 평화를 위하여 (4)
아서 역시도 다급해져선, 어설프게 클레이오의 눈을 가렸다.
‘예측’의 글이 쓰인 종잇장을 건드릴 수 없으니 차라리 클레이오가 읽지를 못하게 만들려는 시도였다.
“손 치워, 아서 리오그난.”
“야, 그만 봐. 이런 게 어딨냐고! 반칙이야, 치사해!”
아서의 전방위적인 방해 속에서도 클레이오는 요령 좋게 버티며 필요한 구절을 모두 읽어냈다.
아서가 감내해야 했던 칠일 밤 동안의 고난을.
베스나 드리스콜은 끔찍하도록 잔혹한 인간이었다. 아서의 신체와 정신을 찢고 부수던 시간이, 그녀에게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녀의 신을 핍박하는 자를 제 손으로 벌할 수 있었으니.
때로 왕세자는 통기구가 뚫린 고문실의 얇은 벽 너머로 거하며 베스나가 하는 일을 모두 보고 들었다.
그럴 때면 환희의 저릿저릿함이 베스나의 손끝을 맴돌았다.
어두운 열정을 지닌 베스나가 아서의 육신과 정신을 바수기 위해 늘어놓았던 말은,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에테르를 일으켜 [강화]를 쓸 때마다 아서 때문에 친구들이 모진 고초를 겪는다고 속삭이는가 하면, 첼은 어머니의 회유에 넘어가 그들을 배신했다질 않나, 더 나아가 클레이오는 빈사의 상태로 같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암시를 주기도 했다.
‘거기에… 베스나가 아서의 어머니랑 같은 신전 출신이었다니… 이건 또 무슨 함정이냐고.’
대신관을 두 명이나 배출한 명가 이그레인 가는테오필라와 베스나 사이에서, 더 신성력이 강했던 테오필라를 택해 양녀로 삼았다.
그 역시도 신의 뜻이라 여기며 분을 삭였던 베스나에게 두 번째 철퇴는 그로부터 십 년 후, 진자처럼 되돌아왔다.
정결의 서약을 깬 테오필라는 신녀의 자격도 이그레인의 성도 모두 하찮게 취급했다.
베스나가 평생을 바쳐왔던 모든 가치를.
신의 선택을 저버리고 왕의 아이를 낳은 테오필라로 인해 베스나는 믿음을 잃었고, 잃은 믿음의 보상을 청구하듯 아서에게 분을 풀었다.
‘하는 짓이 필요 이상으로 지독하다 했어. 개인적 원한까지 있으니 아서를 더더욱 지독하게 몰아붙인 거였어…!’
아서의 머리채를 잡은 베스나는 웃는 표정으로 친절하게 속살거렸다.
귓가의 솜털에 숨이 스칠 만치 가까이 입술을 대고 아이에게 자장가라도 불러주듯.
‘[언약]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마법사의 성대를 자르고, 그 여린 손끝을 갈아 뭉개 다시는 책장을 넘길 수 없도록 만들 수도 있겠지요. 왕자님, 그건 당신의 죄가 될 거랍니다.’
장래의 대마법사이자 아세르 상사의 차남을 정말 그런 식으로 다루진 않을 거라는 합리적 판단이 아서에겐 있었다. 하지만 베스나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부스러졌다.
잠도, 에테르 순환도, 휴식도, 어둠도 전혀 허락되지 않으니 아서의 명철한 판단력조차 흔들릴 지경이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면 모르겠으되, 적절할 때 마법을 써 정신을 놓지도 못 하게 했다.
그 상태에서도 아서는 베스나의 농간에 함락되지 않고 칠 일을 버텼다.
손톱이 다 빠져버릴 때까지 타일이 깨져나간 바닥을 긁으면서, 자신이 흘린 피에 무릎이 푹 젖으면서, 쇼크로 경련을 일으키면서.
마침내 긴 고초도 막바지에 다다른다.
베스나는 검기랄 것도 못 되는 어설픈 에테르 전도를 알비온의 육군 제식 단검에 일으킨다.
에테르 부하를 못 견뎌 덜그럭대는 공산품 무기의 움직임은, 6레벨 기사에게는 너무나도 느리게 느껴진다. 마치 시간이 억지로 늘려진 것 같이 고통의 구간을 연장시켜 놓는다.
아서의 팔목이 베스나의 단검에 베이는 장면을 기록한 문장은 달군 활자로 누른 듯 클레이오의 뇌리에 새겨졌다.
스스스슷―
[―남은 시간 / 제한 시간:00:00:01 / 00:05:00]
‘편집자 권한’의 제한시간이 끝나자 원고와 펜은 판면 바깥으로 사라졌다.
세상과 아서의 기억, 그리고 그의 육신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원고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정의 목적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읽기만을 위해 귀중한 ‘성흔’을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다.
여러 문단에 걸쳐 가지런히 기술된 지독한 행위, 아서가 겪어야 했던 고난을 수정하려 들었다간 더 큰 균열이 일어날 테니까.
아서를 이 이상으로 상처 입힐 순 없었다.
분노가 넘치지 않도록 눌러 참고서 클레이오는 아서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걸 버텼어. 널 도와줄 동료들은 모두 다 끌려갔다고 들었으면서.”
“그냥 버틸 만해서. 아직 환시의 시기도 안 됐는데, 고작 이런 데서 죽어 나자빠지진 않겠거니 한 거지 뭐.”
클레이오가 아서를 염려했던 것 이상으로 아서도 클레이오를 염려했다.
지금도 그랬다.
얼핏 보기에는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치수가 맞지 않는 옷이나, 푸른 기가 짙어져 거의 검어진 눈 아래, 느닷없이 머리를 잘라 휑해진 목덜미까지.
장래 대마법사의 꼬락서니도 지하에서 고문당하던 자신보다 크게 나아 보이진 않았다.
“말이라고 그런 소릴.”
말은 퉁명스레 하지만 클레이오의 등은 떨리고 있었다. 아서는 자신이 짐작한 바를 좀 더 제대로 설명했다.
“아니, 진짜로. 변경 군영의 사령관들 사이에서 인망이 생긴 키시온 자작을 국왕대리의 명령으로 영원히 묶어놓진 못할 거 아냐.
주어진 시간이 많았다면 베스나 국장이 직접 달라붙어 무식하게 사람을 몰아붙일 리 없고. 오히려 그래서 머잖아 풀려날 거라고 생각했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말야.”
아서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의 마법사를 다시 무사하게 만날 수 있어서 정말로 안도했다.
내무보안국의 요원들이 기숙사로 들이닥친 그 밤, 아서는 자신의 악몽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았다.
지위도 명예도 원하지 않고 좋은 술과 고양이면 족한 저 앤, 그저 신의 뜻을 따랐던 탓에 자신과 같은 지하까지 끌려왔다.
아서는 그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 이 정도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양호한 결말이었다.
클레이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지만 말이다.
“[강화]를 못 쓰게 하면 ‘전경화’라도 써서 몸을 빼지 그랬어.”
“…한 시간 남짓 위기를 모면하면 나야 편하겠지만, 베스나가 다른 사람 목숨을 걸고 지독한 말을 해 대니까 그러기가 어렵더라.”
“네 팔을… 그렇게 한 건, 성흔을 망가트리려던 건 아니고?”
“아, 맞아. 팔목이 없어지면 성흔은 위로 이동하던걸? 그 기세등등한 내무보안국 국장도 그건 몰랐던 모양인지 벙쪄 갖고, 피우던 담배를 떨어뜨리더라고. 바보같이.”
베스나의 담배는 아서가 흘린 피에 젖어 불씨가 꺼졌다. 매캐하고 비린 냄새를 남기며.
하지만 클레이오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성흔도 모든 걸 다 알려주진 못한댔으니까. 팔 잘린 일을 들킨 건 뼈아프지만.’
물론 부상을 당한 건 엄청나게 아프고 충격적이었다.
그렇지만 성흔을 제거할 수 없다는 걸 확인한 베스나가 곧바로 치유마법을 써 주어, 움직이는 덴 지장이 없었다.
자신이 겪는 일에 ‘왜’ 혹은 ‘왜 나만이’ 따위의 생각을 하는 건 어머니가 살해당한 해에 그만두었다.
모든 박탈과 고통에 올바른 원인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그 생각에다 현실을 끼워 맞추다 보면 사람은 미치고 만다.
핏줄이라 불리는 자들의 눈 안에서 감도는 광기를, 그 지독한 허기와 열망을 아서는 반면교사로 삼았다.
부상을 입은 노병들을 군영에서 많이 보고 자랐다. 검을 쥐었으니 언젠가 자신도 몸이 상하게 되겠거니 생각하고 살았다.
상처의 아픔은 별것 아니었다.
오히려 클레이오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니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폐활량이 형편없는 클레이오는 말을 똑바르게 전하기 위해 호흡을 가라앉히려 노력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래 봐야 베스나는 3레벨인데, 어떻게 그걸 다 당해주고 있었냐. 제압구를 안 채운 것 같기에 안심했는데, 이 요령 없는 자식아.”
“제압구 그거 책상 위에 내내 놓여 있긴 했어. 아주 잘 만든 고급품이던데.”
클레이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제압구를 그런 식으로 사용했단 사실은 원고에조차도 쓰여 있지 않았다.
클레이오는 ‘약속’의 기능 따위에 의지해서, 아서가 겪고 있는 지옥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가 아닌데도 누구에게인지 모를 화가 마구 치솟아 속을 검게 태우는 것 같았다.
정서와 신체 모두 한계까지 학대당한 아서. 그러고서도 제 동료의 안위부터 챙기려 하는 저 애는, 아직 열아홉 살 생일도 지나지 않은 나이였다.
세계는 그 대적자에게 잔인한 것만큼이나 그의 적자에게도 잔인했다.
신이 원하는 역사를 이 땅에서 이룩하기 위해, 저들의 희생이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베스나의 원한, 멜키오르의 확신, 신의 과실.
이 모든 요소가 웅변한다. 이곳의 신은 무오류의 존재가 아니라고.
그런데도 당장 기댈 수 있는 것이 그들 뮤즈의 자매로부터 받은 마법밖에 없다는 것이, 자신은 신의 계획 밖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뼈아팠다.
아서는 친구의 어깨를 툭 쳤다.
“레이, 너 그러다 울겠다. 앞으로 오십 년은 놀려 먹을 수 있겠는데?”
“너는 진짜… 후, 그냥 좀 닥쳐 봐.”
평소의 느릿한 움직임과 달리 전광석화처럼 팔을 뻗은 클레이오는 어깨에 닿은 아서의 오른팔을 콱 붙들었다.
단추를 뜯고 소매를 걷자 드러난 참상에 클레이오는 침음을 삼켰다.
‘무한의 전경화’ 성흔으로부터 한 뼘쯤 위에 붉은 절단선이 있었다. 원고에서 읽은 대로 막 팔이 잘렸다 붙은 자국이었다.
마법으로 이어 붙여 놓은 상처는 감염을 일으키지도, 상처 주변의 조직을 괴사시키지도 않아 오히려 더 기괴해 보였다.
“…아프겠다.”
“아니, 별로 안 그런데.”
“이런 때까지 흰소리냐.”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문 마법사는, 붉게 선명한 절단의 흔적 위에 [경감][치유] 그리고 [수복]의 마법식을 겹쳐 올렸다.
파아앗―
손바닥 두 개 크기로 집중된 에테르는 이중 발진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정오의 태양처럼 밝았다.
시린 빛에 눈은 감겨도, 열린 귀로는 클레이오의 진언이 잘 들렸다. 가늘면서도 낭랑한 목소리였다.
“[친애가 우리를 온전케 하니,
죽음에 속한 파멸의 힘 미약하도다.
소년들에게 낮잡힌 무력한 죽음,
그 죽음은 흔적을 남기지 못하리, 병사의 영혼에
수선화의 금빛, 석양의 광맥에
청궁(靑穹)의 순수와 환열에.]1)”
클레이오가 마법을 발동하는 진언의 재료는 우리의 언어이다.
아서도 모두 아는 단어를 엮어 클레이오는 항상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출해낸다.
사람들의 혀 위에서 낡은 말들이 저 맑은 목소리를 거치면 마법의 언어가 되는 것이, 아서는 못내 신기했다.
감은 눈 안을 분홍빛으로 밝히며, 빛은 아서의 상처 위에 오래 머물렀다.
곧 아픔과 열이 가시고 지끈대던 위화감도 모조리 씻겨 나간다. 지하에서의 일곱 밤을 정화하듯.
따스한 잔광 속에서 아서는 눈을 뜬다.
마법식이 다 꺼졌는데도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한 친구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모른다. 클레이오는 이중발진의 결과를 감사하듯 아서의 팔을 살피고 있을 뿐이다.
억지로 떨어낼 수 없어서, 아서 역시도 제 오른팔을 들여다본다.
클레이오가 붙든 팔꿈치 아래에는 고문의 흔적뿐 아니라, 아서가 일생동안 입었던 모든 상처가 씻기듯 사라져 있었다.
자신의 것 같지 않게 매끄러운 손등 위에서 에테르를 입은 성흔만이 고유의 색을 발했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다.
이 순간 아서는 신의 대리인이 자신과 함께함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순전한 기쁨도 의지를 조정당하는 불쾌만도 아닌, 이상하면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아직 그가 가진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
그리하여 판단은 조금 더 유예된다.
아직도 눈꺼풀 안쪽을 아릿하게 밝히는 환열의 빛 안에서.
1) 「England The Mother」, Sonnets 1917 연작에서, Ivor Gurney,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