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95
만개한 여름날 (2)
수영 시합은 의외로 레티샤의 승리였다.
그 상품으로 꼴찌를 한 첼이 겨울에 노반테스에서 굴을 실컷 먹여주기로 했다.
바닷물을 해변가의 펌프에서 대충 씻어내고 비치 타월을 두른 아이들의 머리에선 짠 기도 안 가신 물이 뚝뚝 떨어졌다.
레티샤는 신이 나 손짓, 발짓을 해가며 떠들었다.
“안젤리움 영지에선 아버지가 자꾸 뭐라고 해서 이렇게 놀러 온 적 없었단 말야. 전함이 침몰하더라도 결전할 수 있도록 수영 실력을 몸에 익혀라, 이딴 소리나 해 대고!”
“그냥 물에서 노는 꼴을 못 봐주지. 영주의 자녀가 보일 품위와 모범이 어쩌고저쩌고. 더워죽겠는데 우린 못 놀게 하고 억울했다고!”
클레이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서남 수비군은 해군이었다. 스무 명 남짓한 기사단원들 역시 승조원으로서의 훈련을 함께 받았다.
지난겨울에 안젤리움 자작령을 실습지로 배정받아 갔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함대라고 해도 연안을 수비하는 정도고 전함 딱 한 척에 구축함 몇 척 수준인데. 애들을 잡는 것만은 무슨 대함대의 지휘관같이 했네. 내참.’
브룬넨은 내륙에 위치하고, 카롤링거는 해군력을 유지할 여력이 없다. 그나마도 알비온 해군이 규모가 있는 편이나 해전이 벌어지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되었다고 들었다.
건군 때부터 알비온의 함대는 카르메인 항에 주둔했다. 안젤리움 초대 자작은 본래 어부의 아들이었다. 클로토강 유역 전투에서 강물의 흐름을 이용해 대승을 거두고 작위를 받았다.
어설퍼 보여도 서남의 함대는 나름 이름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함대를 유지할 유인이 적은 세계였기 때문이다.
일기가 안정적인 편이라 데르니에 대륙의 해안선을 따라 동쪽 끝으로 가는 항로도, 메리디에스 방면 항로도 극히 안전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페드르 왕국과 알비온이 해상 무역의 경쟁자였으나, 포리고와 페드르 사이에서 30년 전쟁이 벌어진 동안 메리디에스 대륙과의 교역 전체가 알비온의 손에 넘어왔다.
여기까지가, 실습차 갔던 안젤리움 자작가에서 만찬 때마다 자작에게 붙들려 들은 알비온 해군과 안젤리움 자작가의 역사였다.
“레이, 안 먹을 거면 네 앞의 딱새우 내가 먹어도 돼?”
그리고 장래의 제7대 안젤리움 자작 후보 중 하나인 리피는 클레이오 앞에 놓인 딱새우 카르파치오 한 점을 열렬히 탐내는 중이었다.
클레이오는 그릇 채로 리피에게 밀어주었다.
“히힛, 고마워.”
딜 한 가닥, 올리브오일 한 방울 안 흘리고 포크로 그러모아 쏙 입에 넣는 것이 어찌나 야물딱진지 몰랐다.
‘뭐, 그럴만한 맛이긴 했지.’
딱새우 살을 발라 넓게 편 뒤 그 위에 케이퍼와 딜, 레몬제스트와 신선한 포리고산 올리브오일을 뿌린 카르파치오는 달콤하기까지 했다.
문어를 데쳐 삶은 감자와 파프리카 파우더에 마늘로 향을 낸 요리, 갓 짠 레몬즙과 신선한 이탈리안 파슬리를 뿌린 갑오징어 튀김, 해산물을 듬뿍 올린 사프란 파에야가 연달아 나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온몸의 열량을 불태우며 바다를 온통 휘젓고 다닌 아이들이었다. 배가 고프다며 아우성이라, 해변가에 연 식당에 들어와 지금 되는 전 메뉴를 다 시킨 참이었다.
포리고인 남편과 페드르인 부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음식점에서 내오는 음식들은 저렴한 가격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맛이 좋았다.
콜포스가 무역항이라 그런지 외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모양이었다.
클레이오에게는 지극히 반가운 일이었다.
분홍색 깅엄체크 테이블보 너머로 보이는 선반엔 절인 토마토와 파프리카, 초록색 올리브를 넣은 유리 단지가 쭉 늘어서 있었다.
‘아무래도 콜포스 이남이 올리브유 문화권인 모양이지. 전에 안젤리움 영지에선 뭘 먹고 놀 여유가 없어서 몰랐잖아.’
알비온 중부나 브룬넨은 명백히 버터 문화권이었다.
그런데 서남으로 내려오니 신선한 해산물과 산지에서 막 도착해 산패되지 않고 상큼한 올리브유가 든 요리를 만날 수 있어 기뻤다.
곧 테이블 위엔 음식 부스러기도 안 남고 말끔히 사라졌다.
쌍둥이들은 부른 배를 통통 두드렸다.
“아, 너무 맛있어. 우리 못이도 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자기 구역 떠나는 걸 싫어한다잖아. 어쩔 수 없지!”
베헤못까지 데리고 올 마음이 만만이었던 쌍둥이는 자기들의 팔을 쏙 빠져나간 고양이를 그리워하며, 맛있는 것을 나누지 못해서 아쉬워했다.
“게다가 굴도 못 먹어서 두 배로 아쉽고.”
첼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쌍둥이들을 달랬다.
“다음에 굴이 나올 철에는 노반테스에 갈 거니까. 겨울 방학을 기다려 줘.”
대화를 듣던 안주인이 갈색 테라코타 그릇에 데운 오일 절임 굴을 잽싸게 한 접시 내왔다.
“손님들, 지난 철에 절여뒀던 굴인데 한 점씩 맛들이나 봐요. 워낙 잘들 드셔서 기분이 좋네요~.”
비수기에 큰 매상을 올려 즐거운 주인의 서비스였다.
“와아! 고맙습니다!”
아이들은 전투적으로 그릇에 달려들었다.
굴 절임이 들었던 제법 큰 보울이 몇 분 지나지 않아 휑 비었다.
원래도 열량 소모가 엄청난 애들인데 가을이 다가오는 차가운 물에서 놀다 보니 더더욱 칼로리를 불태운 모양이었다.
알면서도 걱정이 돼 염려의 말을 하고 마는 게, 클레이오의 늙은이 같은 점이었다.
“저녁에 만찬도 있는데 그렇게 먹어서 괜찮겠어?”
콜포스에 도착해서 이틀째인 오늘 저녁엔 아이들의 환영 만찬이 예정되어 있었다.
늘 바쁜 기디온이 시간을 냈고, 기디온만큼이나 바쁜 몸인 저택의 총집사장이 직접 은쟁반을 받쳐 들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만찬 초대장을 전달했다.
그런 부담스런 만찬을 앞두고도 쌍둥이들은 전혀 긴장하지 않아서 어떤 의미로는 참 한결같았다.
굴이 담겨 있던, 핑크 페퍼와 페페론치노 섞인 오일에 빵을 찍어 먹으며 두 명의 안젤리움이 종알거렸다.
“만찬은 밤 아홉 시에 시작하는걸. 멀었잖아.”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그때 되면 배 다 꺼져.”
비 온 뒤 죽순도 아닌 것이 어째 슬슬 이시엘보다 살짝살짝 눈높이가 더 높은 것 같기도 했다. 식욕이 왕성할 수밖에.
“먹을 수 있으면 많이 먹어. 쑥쑥 커야지.”
“그러엄. 우리가 열아홉 살이 되면 레이 너보다 더 클지도 몰라.”
“그래. 기대할게.”
.
.
.
몇 시간 전.
프란 역시도 은쟁반에 담긴 부담스러운 초대장을 받았으나, 당연한 듯 만찬에는 불참 의사를 밝혔다.
‘이 미천한 실험보조인은 블랙 타이 따위 갖추지도 않았다고 너희 그 태도 뻣뻣한 총집사장에게 전해줘.’
래서, 클레이오를 은근하게 웃겼다.
자신의 출신 계급을 일종의 약점으로 생각하는지, 묘한 데서 고집스럽게 구는 녀석이었다.
프란은 콜포스 무역조합 도서관 출입증이 나오는 내일부터 아글라오에 대한 보고서와 메리디에스 탐사기록 등을 열람할 계획이었다.
출입증 발급 때문에 하루 시간이 비어 초조해하는 프란을 위해 클레이오가 아세르 가의 도서실을 열어주었다.
물론 그들을 맞이한 건 낭만적인 내용의 시집과 장정이 고상한 고전 작품들뿐, 아글라오 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없었다.
아세르 상사의 조사부가 제아무리 출중하단들, 천정에 서사의 여신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아름다운 가정 도서실에 그런 조사 결과를 놔두었을 린 없었다.
허탕을 친 프란은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는 규율의 사나이답게 만찬 시간이 되기도 전에 침실로 사라졌다.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에서 늦게까지 잔을 기울이는 일은 딱 질색이라고 못 박고서.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저택에 도착한 후 모자를 제대로 벗은 적도 없고, 남들 앞에선 안경을 빼놓고 다니는 걸 보니 인상착의를 기억되지 않으려는 의도도 엿보였다. 만찬 같은 데 굳이 참여해 얼굴을 팔 이유가 없는 것이다.
‘뭐, 게다가 좋은 자본가는 죽은 자본가뿐이긴 하지. 기디온에겐 좀 억울할 소린가?’
정작 콜포스에 와서도 클레이오는 기디온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는 거대한 아세르 상사의 수장이었고, 직접 일해서 소득을 얻어야 하는 계급의 사람이었다.
제아무리 부유하단들 물려받은 영지와 신탁에서 꼬박꼬박 수익이 들어오는 구 귀족들과는 처지가 다른 셈이다.
‘그래도 요즘 메리디에스 교역은 블라드가 아세르 상사 부대표 직함을 가지고 전부 책임지고 있으니 일이 덜어졌다고 하더니만.’
덜어진 게 월 1회 휴무인 모양이었다. 역시 사업 따윈 할 게 못 된다고 생각하는 클레이오였다.
당장은 블라드가 없어 신경 거슬림은 덜했지만 골칫덩어리가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아슬란과 유착해 히드라의 독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을지도 모르는 블라드 아세르의 존재는 심각한 변수였다.
그가 히드라의 독을 아는지, 그가 재료 대는 것을 기디온이 아는지, 어디까지 이야기를 건네도 좋을지, 애초에 기디온을 완전히 믿어도 될는지… 하나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휴우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클레이오는 낯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며 더블 브레스티드 웨이스트 코트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갔다.
유모와 떨어진 뒤로는 내내 지내온 방이라는데, 어째 손님용 객실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침실은 제법 컸지만 붙어 있는 옷방인 캐비닛에도 개인 소지품은 거의 없었다.
분위기도 껄끄럽고, 만찬 역시 별로 안 내켜서 그런지 옷 차려입는 것도 미적미적했다.
마분지처럼 빳빳하게 다린 윙팁 칼라 셔츠 목에 보우 타이를 매려니 자꾸만 모양새가 비뚤어져서 리본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어쩐지 어색해 하인의 도움도 거절했다.
하인들이 본래의 ‘클레이오 아세르’를 알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저택에서 나고 자란 클레이오를 마치 저택의 손님처럼 정중하고 거리감 있게 대하는 점이 묘하게 껄끄러웠다.
“타이 다 구겨지겠다. 내가 매 줄까?”
어느샌가, 캐비닛 룸 입구의 기둥 아래 첼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쟁반을 받쳐 들고 다리는 가볍게 꼰 채 기둥에 기대고 있으니 그림처럼 자세가 멋진 그녀였다.
“첼, 너는 금세 다 입었구나.”
“이 정도야.”
남색 머리를 시원스레 뒤로 넘겨 우아한 이마와 긴 목을 드러낸 첼은 차림새 때문인지 그 중성적인 매력이 극대화되었다.
검은색과 흰색, 한 치 어긋남 없이 차려입은 턱시도에 행커치프의 접은 모양까지 완벽했다.
이미 풀이 죽은 타이를 클레이오는 선선히 첼에게 내밀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쟁반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첼은 솜씨 좋게 타이를 매듭지었다. 그리고는 클레이오의 어깨를 거울 앞으로 떼밀었다.
두 겹으로 리본을 매고 앞부분에 뽀족, 토끼 귀 같은 꼬랑지가 나온 포인티드 보우였다.
클레이오의 표정은 대변에 구겨졌다.
“야, 이건 좀….”
“뭐, 귀엽잖아. 이시엘이 좋아하겠는데.”
“저기 내 의견은?”
“혼자선 타이도 못 매는 작자에겐 항의할 권리가 없는데.”
“그러면 아서에게 가서 꽃무늬 장식이라도 해 주고 올래? 걔야말로 헤매고 있을 텐데.”
“그쪽은 시종이 따라붙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내참.”
“자, 불평은 그만두고 칵테일이라도 한잔하라구. 아직 만찬 시작까지는 시간도 있고. 해는 넘어갔으니, 칵테일 정돈 시작해도 좋겠지.”
첼은 총집사장에게 미리 준비시켰다는 쟁반을 클레이오에게 들이밀었다. 식은 잔에서 진과 베르무트 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응접실로 나와 적당히 앉은 두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캔튼 부인의 실력도 대단했지만 이쪽의 총집사장이 조주에 있어서는 한 수 위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굉장한걸. 너는 그 딱딱한 총집사장을 잘도 부려 먹네.”
“후후. 난 손님이니까.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돌아온 도련님처럼 집사장이 어색하지 않지.”
“…알았어?”
예의 바른 무표정을 갑옷처럼 두른, 거의 노년에 이른 집사는 더없이 정중한 태도를 보였으나 클레이오는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 가끔은 집사장의 시선이 자신에게 다소 오래 머물지 않나 싶을 때도 있었다.
“유령 같던 아세르 가의 막내 도련님이 수도의 영웅이자 기사가 되어 나타났으니, 그 딱딱한 총집사장이라도 눈길이 두 번 갈 수밖에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