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98
축복, 별리 (2)
식사 땐 잠긴 문을 기사가 열었고, 그자의 감독하에 겨우 식사가 들어왔다.
식사를 날라 온 시종은 공포에 질린 듯 움직임이 삐걱거렸다. 그는 클레이오 쪽으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음식을 내려놓은 뒤 간단하게 방 정리만 하고서 재빠르게 나갔다.
그렇게 앓으며, 시종이 가져다주는 물과 묽은 빵죽만 겨우 삼키며 버티기를 사흘.
오늘에서야 클레이오는 일어나 앉을 기력이 생긴 거였다.
침대 옆의 탁자엔 점심께에 받았으나 아직 반도 못 먹은 빵죽이 놓여 있었다.
일단은 일어났으니 뭘 삼켜야 움직이겠다 싶어 억지로 떠먹어 봤지만 제정신으론 삼켜지는 음식이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식어빠진 빵죽의 밀가루 풋내를 못 참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 꼴을 보던 베헤못이 눈을 가늘게 떴다.
“더 먹어라, 이놈아.”
“맛없어서 못 먹겠어… 감각을 재우는 ‘딸깍’이 안 돼.”
에테르가 싹 걷혀버리니 「지각」 안 꺼져서였다.
알비온에 온 후 첫해, 에테르 레벨이 한참 낮은 시절에나 겪었던 곤란이었다.
술도 못 마시고 남의 발소리에 잠이 깨고 모든 음식의 향과 간이 지나치게 세게 느껴졌었다.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쯧. 쯧쯧쯧. 에잉.”
널찍한 창틀 위에 올라가 식빵을 굽고 있던 베헤못이 친히 아래로 내려와 클레이오의 무릎 위에 앞발을 올려놓고 쭈욱 기지개를 켰다.
클레이오는 그릇을 밀어놓고서 따끈한 베헤못을 살살 쓰다듬었다.
아픈 시종을 닦달하기도 그런지 고양이는 그르르르르 소리만 냈다. 그가 식사를 더 하지 않는 게 불만스러운 모양새였다.
고양이의 귀 뒤를 양손으로 살살 긁어주며 클레이오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주워섬겼다.
너무 말을 안 해서 목소리 내는 법을 까먹을 것 같아 목을 트는 거였다.
“제압구라는 게 대단하기는 해. 새삼 제베디 스승님이 존경스럽군.”
“지금 태평스럽게 그런 소리나 할 때냐아아앙?”
옴찔거리던 귀를 삽시간에 비틀어 눕힌 베헤못이 웨옼웨옼 화를 냈다.
클레이오는 손을 좀 더 뻗어 영묘님의 등을 정방향으로 쓸어내리며 비위를 맞추었다.
“안 태평하게 있음 어쩔 거야.”
“네놈은! 위기의식이! 없다! 축 늘어진 네놈 모습이 시체처럼 보여서 그걸 남들 눈에 숨기려고 마차를 마련해 망정이지, 놈들이 내내 말을 바꿔 타고 달렸으면 본묘라도 추적이 용이치 않았을 것이다! 네놈은 구사일생으로 본묘의 눈을 벗어나지 않은 터!”
“에, 뭐. 내가 말 뒤에 묶여 와도 버틸 만한 체력이 있어 보였으면 그렇게 했겠지. 근데 그랬다간 그대로 숨이 넘어갈 거 같아서 마차 쓴 거 아닐까? 골골대는 것도 쓸모가 있네.”
또 아무런 거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다 말했다가 코앞에서 앞발 연사 싸대기를 맞았다.
그래 봐야 발톱도 다 집어넣은 솜방망이 싸대기라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그래도 고마워. 네 덕에 살았어, 못. 날 구해주려고 해서 진짜 감동했어.”
클레이오는 자신을 때리던 두툼한 고양이 발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분홍 발바닥 사이에 흙먼지가 끼인 게 애처로워서 살금살금 털어주다 보니, 옆으로 누운 베헤못은 클레이오의 코끝을 핥아주는 형국이 됐다.
고양이와 사람이 서로를 그루밍 해주니까 졸음이 쏟아졌다. 줄줄 녹아서 한참 고롱거리려던 베헤못이 갑자기 파다닥 일어나 클레이오의 팔을 벗어났다.
“이래서는 될 일도 안 되겠다. 네놈에게 맡겨둘 것이 아니라 본묘가 나가 열쇠라도 찾아서―.”
그대로 창을 넘어 나가려는 베헤못을, 클레이오가 허둥지둥 붙잡았다. 서두르다 침대에서 퍽 엎어진 꼬락서니가 퍽 애처로웠다.
“아니, 아니아니아니아니. 잠시만, 잠시 못! 나한테 계획이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줄 수 없을까? 딱히 지내기 나쁜 것도 아니잖아.”
어제저녁, 제압구를 스스로 풀 방도가 없다는 걸 안 후엔 바로 ‘편집자 권한’을 쓸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당장 고문을 하거나 취조를 하거나 죽여서 파묻을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마음을 달리 먹었다.
형식을 중시하는 아슬란 측은 예상보다 신사적으로 클레이오를 대했다.
아파서 끙끙대고 있으니 물과 환자식도 넣어주고, 자다 깨다 앓는 사이 시트와 베갯잇도 갈아두었다.
일단 일신의 편안함이 지켜지니 딴생각이 나는 거였다.
기왕 적진의 심장에 들어 것, 이참에 아슬란의 속셈은 무엇인지, 패로는 뭘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기를 기회로, 라 이거야. 그러다 수틀릴 것 같으면 얼른 편집자 권한 써서 룬데인으로 돌아가야지.’
물론 ‘편집자 권한’의 정확한 기능을 모르는 베헤못은 불만이 가득했다.
반은 걱정이었고 반은 울화였다.
“나쁘지가 않아? 네 신세가 풍전등화인 건 그렇다 치자. 본묘는 매 끼니 수고롭게 주방이나 마을로 나가 임시 식사 시종과 교섭을 해야 하건만 무엇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냐! 와인 한 방울 못 마시고 말이다! 이 병따개 놈아, 얼른 회복을 해라. 본묘의 영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미안미안, 못. 조금만 참아 줘. 그래도 여기도 사람 사는 데라고 못 너한테 밥 주는 사람이 있구나. 다행이네….”
고기 앞에선 사랑스러워지는 이 뚱묘의 마성에 홀린 주방 근무자 혹은 동네 미트파이집 직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식사 시종 1호였다.
클레이오는 정말로 안심이 되어 다시 베개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그거 앉아있었다고 벌써 힘들었다.
이쪽은 무려 역사의 여신의 화신씩이나 된다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골골거리는 몸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고플 배가 안 고파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 겪어 봐서 아는 일이지만, 베이면 피가 나고 실혈하면 생명 반응을 잃는 육신 자체는 보통 사람과 별다를 게 없었지 않은가.
“아이고, 죽겠다.”
“에휴우, 츳. 쯧쯧!”
자기 한몸뿐이라면 얼마든 빠져나갈 수 있는 영묘는 한숨을 폭폭 쉬었다.
또 무슨 꿍꿍이를 꽁꽁 숨기고서 게으르게 누워 있는 식사 시종의 꼴을 보니 한숨이 안 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영역은 한참 벗어났다. 요 어설픈 식사 시종을 두고 어딜 갈 순 없었다.
“네놈은 꼭 이렇게 본묘의 수고를 들이도록 만든다. 에잉, 모자란 놈.”
“전에 끌려간 지하 취조실에 비하면 여긴 궁전 아냐, 궁전? 아니지. 진짜 궁전이구나… 니네베 여공작의 궁. 야아, 여길 이렇게 와 보네.”
“지금 네가 관광이라도 온 줄 아느냐?!”
“이런 말이 있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본묘 천 년의 생애 듣도 보도 못한 소리건만 어디서 갖다 붙여 우기느냐! 이 미련한 놈아!
“못.”
샐샐거리는 클레이오가 양팔을 스르르 벌렸다.
“모오오옷.”
커다랗고, 커다란 만큼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결국엔 클레이오의 뼈가시 같은 팔에 폭 안겨왔다.
긴 털 안쪽으로 얼굴을 기대며 클레이오는 소리 죽여 웃었다.
고양이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나른하고 징징 울리는 머리를 베헤못의 옆구리에 파묻고서, 클레이오는 지난 사흘간 일어난 일을 정리해 봤다.
어찌된 사정인지는 크게 궁금해할 것 없이 곧 다 알게 됐다.
이 역시 「지각」이 안 꺼지는 덕분이었다.
서클 범위 정도 안에선 남의 말이 아주 잘 들렸다. 전화 통화나 숨죽인 속삭임까지도 모두 말이다.
‘그리고 니네베 호수의 궁전은 말이 궁전이지 아담하니 자그맣잖아. 내 서클에 다 들어오겠네.’
시종과 시녀들은 거의 공포에 질린 듯 조용하고, 처음에 클레이오를 건져 왔던 동남수비군 띠를 두른 기사들은 아예 말이 없었으며, 명령은 늘 전화로 전달돼 대화를 온전히 포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클레이오는 그간 세 왕자들 틈바구니에 껴 정치판을 구르며 눈치가 백오십 단이 됐다.
‘아세르 상사의 후계자가 손을 보태….’
‘그럼 저희가 기다리는 게 그 흑적의 마법사란 말입니까? 아세르 가문도 형제간에 그래서는.’
‘병자의 행색이라 그리 중요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보게, 입을 다물게. 저주받은 일왕자의 발작을 쉬쉬하던 그들이 찾아낸 유일한 수가 아닌가?
이렇듯 절로 들려오는 단편적 대화만 엿들어도 충분했다.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이 맞춤식 납치의 주범은 자신의 큰형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이 범인이기도 어려울 것이다.
‘거슬러 가보면 마차가 물에 빠진 게 시작인가.’
사건은 어이없게 벌어졌다.
룬데인을 벗어나, 밀밭이 펼쳐진 제믈리의 개활지로 접어든 시점.
카라파스가 지나가며 초토화된 자리에, 임시 목제 다리를 놓은 강을 건너는 도중이었다.
푸싯, 하는 작은 소리가 먼저 귀에 박히더니 돌연 다리 전체가 부서져 마차와 함께 강물에 수몰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위적으로 폭약 따위가 터졌다기보다는 다리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구조물을 미리 약화시켜 둔 것 같다.
‘기찻길과 떨어진 소로를 차도 아니고 마차로 달렸으니, 요즘 흔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루트는 아니란 거지. 그래서 다리에 미리 손을 써 둘 여유가 있었을 거고. 석교나 철교도 아니니 부서져도 의심을 덜 사.
블라드 자식 썩어도 준치라고, 제법 재벌 2세 다운 쪼가 있네. 앞뒤를 많이 따져 본 설계잖아.’
지금이야 시일이 지났으니 이렇게 냉철한 척 분석을 할 수 있지만 사흘 전엔 아니었다.
마차가 템푸스강 지류에 처박히는 순간엔 완전히 얼이 빠져있었다.
기절하듯 자다가 물에 자빠뜨려버리니 대마법사 소릴 듣는 그로서도 대응이 쉽지 않았다.
물.
공포는 상당 부분 극복했지만, 그렇다 해서 강물 속이 편안하게 느껴질 리가. 익사하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블라드는 분명히 클레이오가 ‘이전과 달리’ 물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았고 그 사실에 의혹을 품었다.
그리고 결국에 그 정보를 이용하여 클레이오를 사로잡도록 아슬란에게 진언한 것이다.
정말 경제적으로 행동하는, 장사꾼의 훌륭한 장남이다.
그렇게 물에 빠져 패닉을 일으킨 클레이오를, 동남수비군 복색을 입은 기사들이 건져 올렸다.
클레이오를 데리러 왔던 사무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혼자서만 니네베 호수로 끌려 왔다.
중간의 기억은 없었다.
납치 당시의 일은 모두, 안간힘을 써 클레이오를 추적해온 베헤못이 알려준 내용이었다.
‘그래. 물에 빠진 게 시작이 아니지. 따지자면 시작은 아세르 저택 앞의 그 사무원부터겠군.’
레지나를 만난 뒤 충격으로 정신이 확 나갔었다. 그렇게 넋을 널어놓고 있었으니 얼레벌레 처음 보는 작자의 마차에 탄 거다.
잘 생각해보면 기디온이 그런 식으로 움직일 리 없는데.
그리고 블라드라면 기디온의 인장을 빼돌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터이다.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중 누군가가 이렇게 잔머리 굴려 해를 끼치리라 생각지 않고 산 벌이다. 휴.’
이를테면 멜키오르는 그냥 자기 밑의 소드마스터를 부려서 클레이오를 직배송 시키는 편이었고, 살해나 구금도 배송원에게 추가적으로 지시할 수 있으니 본인이야 편하게 살았다.
하지만 꼭 일을 꼬는 아슬란에게 붙은 블라드는 저 역시도 일을 배배 꼬아버렸다.
그날 밤, 무작정 레지나를 만나기 위해 나선 클레이오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이전 두 번의 가출 때처럼 짐을 챙기지도 않았고, 여름 정원의 코트마저 걸어둔 채.
캔튼 부인도 모르는 새 자다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이다.
기차를 타지도 않았으니 추적이 쉽지 않을 터. 기가 막힌 아세르 상사 조사부가 움직인대도 찾을 수 있는 건 다리가 부서진 사고 흔적 정도일 것이다.
‘블라드 아세르는 처음부터 약삭빠르게 처신을 하는 놈이었지. 그 결과가 안 좋을 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 아슬란에게 아양 떨다가 정작 그 엄청난 재산을 못 물려받게 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지? 그 정도 머리는 있는 놈인 줄 알았더니.’
블라드의 행동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제비꽃 사탕 상자에 아글라오를 밀수한 건을 걸린 게 아세르 상사의 후계 구도에 영향을 줄 만한 일이었을까?
처음 걸렸을 땐 메리디에스 교역소 책임자 자리에서 경질된 걸로 끝났다.
그러나 두 번째로 같은 과오를 범하는 걸 알았다면 기디온 아세르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기디온 아세르가 고의로 저지른 잘못을 두 번 봐 줄 성격은 아닐 것 같은데.’
신의를 제일로 치는 기디온이라면 사업체를 꼭 친자식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 시니어에게 물려줄 법도 하다.
굳이 경영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보다 상사의 수명과 안정성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상당히 냉정한 합리주의자이고, 장남에겐 차남에게보다 더 엄격했거나… 그렇다고 블라드가 믿고 있는 상황이잖아?’
몇 년 전, 트리스테인 영지에 실습을 나갈 즈음 블라드가 마석 루비를 가져다주던 날, 아버지가 두 아들을 차별했네 마네 운운하며 징징거리던 게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오히려 먼저 움직여 부친을 치는 것도 선택해봄직 한가? 그래, 그렇다면 왕자의 난 충분히 가능성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