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6
17세에 등기를 친 클레이오 아세르 (2)
“안 일어나나 프란시스?”
“뭐,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꼭 일어나서 소개씩이나 해야 합니까?”
듣기만 해도 사람을 긁는 목소리였다. 그 소년의 말 전체가 빈정거림을 엮어 만든 것 같았다.
창가 쪽 맨 뒷자리에 앉은 클레이오는 목을 쭉 빼고서 대답의 주인을 찾았다.
잿빛 머리칼의 소년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건들건들 앉아있었다.
소년의 꼬라지는 가관이었다.
재킷은 어딘가로 달아났고, 웨이스트코트도 단추가 몇 개 없었다. 아무렇게나 접힌 소매는 잉크로 얼룩덜룩했다. 끼고 있는 금속 테 안경 역시 렌즈가 얼룩덜룩 더러웠다.
“한 번 더 말한다. 일어나서 네 소개를 해라. 넌 한 번 더 낙제하면 퇴학당할 처지인 건 아느냐?”
“잘 압니다. 이런 학교는 때려 쳐도 좋고요.”
“일어나라!”
제베디 교수가 강단을 쾅 내리친 뒤에야, 소년은 미적미적 몸을 일으켰다. 의욕이라곤 하나도 없는 태도였다.
“프란 와이트라고 불러 줘. 보다시피 2학년 마법반 유급생이다. 에테르 레벨은 2. 마법엔 재능이 없다. 이상.”
수업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크게 하품을 한 소년은, 안경을 벗어들고선 느릿느릿 닦기 시작했다.
‘저놈이 왜 저기에 있어?!’
바로 옆에서 도롱도롱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아서와 삐딱선을 탄 프란시스를 번갈아 쳐다보며, 클레이오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지금 저의 장래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르고 아서는 쿨쿨 잘만 잤다. 그 태평함에 뒤통수를 확 때려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미 ‘약속’의 「기억」은 두 차례나 돌려 봤다.
프란시스 가브리엘 하이드-와이트는 18살인 지금, 왕립과학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알비온 광산국의 신입관료가 되어 있어야 했다!
‘모든 인물의 설정이 에서 조금씩 변경되었대도, 첼이나 안젤리움 자매는 괜찮아. 걔들이야 검사이고 이 학교를 같이 다녀도 전개에 문제가 없어. 그렇지만 프란시스는…!’
예상치 못한 개정에 맞닥뜨려,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던 클레이오는 교수의 부름조차 못 듣고 있었다.
“클레이오. 클레이오 아세르!”
“네, 네?”
“듣고 있나? 이리 나와서 네가 시범을 보여 보거라. 내가 몇 번을 보여도 답이 없으니,동급생에게 자극을 얻는 것도 좋겠지.”
‘윽, 뭘 시키는 건지 모르겠잖아.’
주춤추줌 일어난 클레이오는 일단 교수에게로 갔다.
“자 다들 주목. 방학이 지났는데도 아직 서클을 여는 방법이 깜깜하다면, 에테르 순환의 방법을 재점검해봐야 한다. 여기 클레이오 아세르의 시범을 좀 보도록.”
“에테르 순환의 시범… 말이지요.”
“그래. 지난 번 기말시험 때 보니 네 순환법은 완벽하더구나. 검사 지망인 1조이든, 마법사 지망인 2조이든 에테르 순환 방법은 똑같다.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게다.”
주목받는 데 익숙지 않은 클레이오는 뻣뻣한 태도로 아이들을 향해 돌아섰다.
설명할 게 많진 않았다. 베헤못이 해준 말을 그대로 주워섬겼을 뿐이다.
“다들 이미 배워서 알겠지만, 에테르를 외부로만 퍼트리는 게 아니라… 심장을 한 바퀴 두른 뒤 내보내는 겁니다. 들어온 방향으로 다시 나가게요. 심장을 빠져나온 에테르를 가늘게 뽑아내 서클의 외부 반경을 상상하며 둥글게 돌릴 때―.”
클레이오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학생들은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다. 몇몇 학생은 키득키득 농담을 던졌다.
“야 교과서 그대로 읊어봐야, 읊는다고 그대로 되면….”
“크크, 말도 마라.”
지난번 마법 시험에서 1등을 해 부정입학생의 오명은 벗었다지만, 마법을 쓰지 않을 때의 클레이오는 여전히 매가리 없는 동급생이었으니까.
오로지 이시엘과 쌍둥이들만 학구열에 불타는 태도로 클레이오의 설명을 경청했다.
“에테르는 서클을 이루고, 그 서클은 다시 신체 내부의 에테르 맥을 확장하며….”
강단 앞에 선 클레이오를 중심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한 에테르는 서서히 원의 형상을 갖추어나갔다.
교실을 감싼 빛의 아지랑이에 놀라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릇을 넓혀가는 겁니다.”
파아아아앗―
순식간에 강의실 전체가 클레이오의 서클에 낙낙히 감싸였다.
이른 석양처럼 짙은 금색의 에테르가 서클의 가장자리를 따라 피어올랐다.
넘쳐흐른 에테르는 천장에 닿을 듯 치솟아 찬연한 광채를 학생들 사이로 흩뿌렸다.
아무런 마법식이 더해지지 않은 서클 전개였다. 순수한 에테르만으로 클레이오는 이토록 강렬한 빛을 범람시킨 것이다.
교실의 모두가 일순 숨을 멈췄다.
어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전조처럼, 클레이오의 서클은 그 안에 든 사람들을 압도시켰다.
서클에 휩싸인 몇 초가 영원처럼 길었다.
빛의 잔상이 소멸한 후에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교수까지도 일언반구가 없어 클레이오만 당황했다.
40명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내리꽂혀 영 불편했다.
‘서클까지 열 생각은 없었는데 늘 그렇게 하다 보니….’
부자연스런 침묵을 흩어낸 것은 제베디였다.
“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당장 에테르 레벨을 다시 등록해야겠구나.”
“아, 네….”
“공인하겠다. 이제 너는 4레벨 마법사다.”
‘레벨 등록 하는 걸 잊고 있었는데, 여기서 딱 걸렸네.’
지레 찔린 클레이오는 제베디의 눈치를 살폈지만 등록이 늦었다고 나무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교수는 건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열일곱 살에 4레벨에 도달한 마법사는 천 년의 마법 역사에서도 겨우 세 번째다. 정말로 놀랍구나.”
사실적시로만 이뤄져 있는 문장이었다. 그렇지만 말의 여파는 컸다.
쥐죽은 듯 조용하던 교실은 순식간에 시끄러운 웅성거림으로 뒤덮였다.
어젯밤에도 클레이오의 마법으로 놀았지만, 최대 규모 서클 전개는 처음 마주한 안젤리움 쌍둥이들이 흥분해 떠드는 소리 역시 더해졌다.
미적미적 일어나 하품을 하던 아서는 박수치는 시늉을 보탰다.
클레이오는 이 모든 일의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제베디는 옅은 친애와 염려의 감정을 담아 어린 소년을 들여다본다.
이제 노년에 이른 마법사는, 젊은 시절 자신에게 디밀어졌던 너무나도 위험천만했던 선택지들을 떠올린다.
필리프와 에드워드의 내분, 브룬넨과의 국지전… 죽어간 기사와 마법사들 사이로 걸어온 가늘고 좁은 길.
제베디가 택한 평화주의는 신념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을 따름이었다.
‘어떤 힘은 때때로 그것을 소유한 자들을 너무 먼 곳까지 데리고 가지.’
그는 이 연약한 소년에게 주어진 운명 역시 순탄하지 않으리라 예감한다.
‘자질이 늦게 발현된 것도, 힘을 내보일 의지가 약했던 것도 이 아이 나름의 방비였을지 모르겠구나.’
클레이오가 알았다면 이 어마어마한 오해에 기가 막혔을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겐 사람의 마음을 읽을 능력이 없었다.
주름투성이 손을 들어 클레이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제베디는, 로브를 휙 젖히며 학생들을 향해 돌아 섰다.
“먼저 기본적인 걸 하나 돌아보자. 서클이란 무엇이냐?”
“마법의 장 아닌가요.”
“원형의 형태라 서클이고요.”
“그래, 그게 일반적인 서클의 정의이다. 그러나 거기엔 더 깊은 의미가 있지. 선인들은 이 세계와 우주를 ‘오르비스 테라룸’이라 불렀다. 원형의 지구란 뜻이지. 즉 서클이란, 마법사 자신을 중심에 두고 창설된 한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서클 안에서는 일반적인 과학적 법칙이 모두 무용해지지. 그곳에서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학생 하나하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제베디는 찬찬히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좋은 경험을 했다. 살면서 평생 한 번도 보기 어려운 대단한 서클 전개를 구경했으니. 이 녀석이 설명한 방법대로 부단히 수련하도록. 그리고 클레이오 너는 하면 이리 잘 하면서 왜 딴생각에 정신을 팔고 있었느냐?”
“어제 저녁에 잠이 좀 모자라서 말입니다….”
“핑계도 좋다. 늦게까지 논 탓 아니냐? 수업 중에 딴청을 피운 벌로 너는 프란시스를 좀 이끌어 주거라.”
“네? 제가 말입니까?”
“저 놈은 자질은 뛰어나면서도 노력을 게을리 해 유급을 당했다.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될 테니 주 1회 날을 정해 오후의 자유연구 시간을 함께 보내도록.”
술렁이는 교실에서 혼자만 냉정한 온도를 유지 중이던 프란시스가 얼굴을 구겼다.
“싫습니다.”
“싫다니? 프란시스 네게는 거부권이 없다. 결과는 한 달에 한 번 확인하겠다. 이상. 수업을 마친다. 클레이오 너는 날 좀 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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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에게 이끌려 교내 우체국부터 들렀다.
왕립 수도방위대에 에테르 레벨과 거주지를 등록하는 전보를 보내고 나서, 두 시간 내리 면담이 이어졌다.
‘아니 평소엔 성질만 팩팩 부리던 양반이 죽을 때가 다 됐나? 왜 사람을 살살 구슬리고, 무슨 손주 어르듯 어르고.’
월반을 해야 한다고 타이르는 제베디에게 마법 외의 다른 과목은 높은 학년 내용을 따라가기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그런 변명으론 설득이 안 되기에, 아예 ‘친구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다’고 우겼다.
말 자체는 100% 사실이었다.
‘난 아서 옆에 꼭 붙어있어야 할 처지라고. 혹시라도 세계 멸망이 일어나지 않도록.’
논리적 설득은 모두 다 거부하던 학장에게, 의외로 어린애 같은 우김이 잘 통했다.
“그래, 한창 친구가 좋을 나이이긴 하다.”
허연 수염을 쓰다듬던 제배디는 혼자서 뭔가를 납득한 듯 클레이오의 1학년 재학을 허했다.
“물론 조건이 있다. 1학년 수업에 배울 것은 없겠지만 수업 중에 졸지는 말고, 앞으로 프란시스를 잘 이끌도록.”
전혀 내키지 않는 조건이었지만 일개 학생이 학장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마법에 관해선 모르는 부분이 생기면 언제든 물으러 오거라. 학장실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네, 감사합니다.”
하나도 안 감사한 감사인사를 남기고 클레이오는 행정동을 빠져나왔다.
진이 다 빠져 흐느적흐느적 기숙사를 향해 걷는 클레이오의 모습은 흔들리는 허수아비 같았다.
콰콰쾅―
그 때, 연병장에서 들려온 커다란 파공음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연속적인 폭발이 일어나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였다.
난간을 붙잡고 등나무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었던 클레이오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채캉― 키이이익―
콰아아앙―
‘이게 칼싸움 하면서 나는 소리라고?!’
대련 중인 아서와 로사 교수였다.
실로 엄청난 무위의 경연이었다.
클레이오의 동체시력으로는 두 사람의 잔상과 검기의 번뜩임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싸움은 보이지도 않는데 ‘약속’의 「이해」만 열일을 했다.
[8레벨 검사칭호: 장미의 기사] [5레벨 검사]
‘장미의 기사라, 로사 선생과 정말 잘 어울리네.’
이전 원고와 마찬가지로 상급 검사에게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나머지 하나, 5레벨이 아서일 것이다.
‘근데 저 놈은 고작 한 달 만에 또 레벨을 올린 거야?’
분명 지난 번 습격 때 아서의 에테르 레벨은 4였다.
싸움에 이끌려 난간에 온 몸을 기댄 클레이오는 할 수 없이 「지각」을 켰다.
익숙한 어지러움이 닥쳐왔다. 첫 순간만 버텨내면 됐다. 피어오른 흙먼지 너머로 선명한 시야가 펼쳐졌다.
두 사람의 검은 빛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채채챙!!!
한 번 한 번 날이 맞부딪칠 때마다, 무기는 충격에 못 이겨 바르르 떨렸다.
연습용 검은 상등품인데도 너무 과도한 힘을 머금어 곧 깨져나갈 것만 같았다.
슈슉!!
로사가 찔러 넣으면 아서는 놀라운 속도로 공격을 비껴냈다.
혹은 비껴내지 못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어깨며 허벅지가 피로 물든 아서는 베이는 것 따윈 아랑곳 않고 로사의 품을 파고든다.
‘야아… 저 자식, ‘힘을 숨김’은 이제 완전 때려치워버렸잖아.’
로사의 선홍색 검기는 달포 전 밤에 보았던 암살자들의 어둡고 검붉은 검기와 차원이 달랐다.
주인의 성정처럼 맑고 선명했다.
아서 역시 제 머리카락 색처럼 짙은 황금빛 검기를 발출하며 거센 일격을 내질렀다.
채캉― 챙챙챙!!!
아서는 용맹하고도 무모했다.
로사의 백발이 아서의 검기에 한 움큼 잘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