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78
내가 속하고 내게 속한 곳 (4)
“고맙습니다. 신세 질 일이 생기면 염치 불고하고 무조건 갖다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백의의 천사 등 뒤에 기꺼이 숨을 생각이 있거든요.”
“아, 잠시, 내가 좀 곤란하게 했다고 당장 날 곤란하게 만들 거예요? 처언사? 다섯 살 이후로는 들어본 적도 없는 옛날얘기에 나오는 그거?”
“그렇지만 레이디께서 전쟁 동안 군사병원에 후원도 하고 종종 봉사도 나갔다는 이야길 모르는 사람이 없던걸요.”
“그거야말로 뭐라고 동부까지 소문이 다 났어요?”
“룬데인엔 어디나 보는 눈이 있고, 또 레이디처럼 아름다운 자원봉사자라면 어떤 병사든 잊을 수 없을 테니까요. 사업을 꾸리느라 몹시 바쁘셨을 텐데 어떻게 그 일을 다 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계속 대화가 빙빙 돈다. 도련님, 자기야말로 어떻게 그 일을 다 해냈는지 모르겠어요. 이 팔목 봐, 나보다 가늘잖아요. 사람 죽겠어. 안 그러니, 못 선생?”
“우에에에엥, 웨우우우우웅.(몹시 그러하다. 매우 동의한다.)”
.
.
.
평일 낮이라 한산한 왕의 공원을 바짝 마르고 키가 멀대 같은 청년과 자그마한 아가씨가 함께 걷고 있었다. 디오네와 클레이오였다.
잘 조경된 공원의 낮은 울타리 안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디오네가 살살 속살거렸다.
“봐, 내 예상이 맞네요. 어차피 아무도 얼굴 못 알아보잖아요. 나에 대해선 불쌍한 병자를 돕는 상냥한 간호원이라고 생각할걸요?”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게 아니라 레이디에게 에스코트를 받듯 구무적구무적 걷는 클레이오에게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연한 하늘색 드레스 위에 흰 케이프를 입고 챙이 짧은 보닛을 쓴 디오네는, 과연 얼핏 보면 간호원이나 간호보조원 같기도 했다.
측은지심이 있는 좋은 집안 아가씨들이 병원이나 고아원에서 봉사를 하는 건 제법 흔한 일이 된지라, 누가 보아도 그런 부류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새 구두는 발꿈치에 닿는 단단한 느낌이 싫다며 제일 닳은 구두를 신고, 재킷 대신 두툼한 울 스웨터 카디건을 걸친 클레이오의 행색은 형편이 좋지 않은 병자처럼 보였다.
게다가 마지막 [정화] 마법을 쓸 때 끊겨 나간 머리카락은 쥐가 파먹은 듯한 모습으로 비죽비죽 길었는데, 본래도 끝이 바랬던 머리카락엔 이르게 난 새치까지 조금씩 섞여 있었다.
디오네는 한숨을 속으로만 숨기고 생기 있게 재잘거렸다.
“저택의 정원이 아름답긴 해도 역시 집 안이잖아요. 종종 이렇게 바깥 산책이라도 해요. 또 겨울엔 여기서 스케이트를 타요. 지난해는 전쟁 때문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지 않았지만, 올해는 다시 열 거예요. 스케이트는 탈 줄 아나요?”
“그렇게 썩 잘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내가 가르쳐 줘도 되고요. 난 잘 타거든요! 빙판의 권위자죠, 하하. 그렇게 한참 얼음을 지친 다음엔 끓인 와인이나 코코아를 마시면 얼마나 기분이 좋게요? 물론 지금은 봄이니까 사이클링이나 테니스도 좋겠죠. 뭐든 해요. 폐에 공기를 집어넣고 팔다리를 뻗고 심장이 가슴을 두드릴 때까지 움직이다 보면 의외로 많은 고민이 없어진다구요.”
디오네가 운동예찬론자라니 놀라운 반전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실루엣만 가느다랄 뿐, 밤샘 파티나 업무에도 거뜬한 체력을 보여주던 그녀였다. 믿는 코어나 믿는 근력이 있던 것이다.
규중의 아가씨라도 테니스와 사이클링 정도는 무난한 취미로 취급되는 시대인데, 디오네는 원래도 검을 다룰 줄 알 정도로 신체 능력이 좋은 편이었다.
결국 공원 입구로 돌아왔을 때 조금만 더 천천히 움직여 달라고 부탁하는 쪽은 클레이오였다.
혀를 차던 디오네는 자기가 타고 가려던 마차를 돌려 클레이오를 오 분 거리의 자택까지 곱게 모셔다주고는, 마지막 깜짝 선물을 발표했다.
“참, 주방에 사르르하게 매운맛이 올라오는 칠리 파우더 한 부대도 보내두었어요. 전에 세리카산 식재료로 지옥같이 새빨간 요리를 만들면서 훈연하지 않은 칠리 파우더도 구해 줄 수 없냐고 했잖아요? 세리카 동북부 어디서 온 칠리 파우더라고 하는데, 그때 말한 거랑 비슷한 느낌이지 뭐예요? 역시 당신이나 좋아할 것 같은 그런 맛이요. 가서 살펴봐요.”
클레이오의 숙였던 허리가 절로 쭉 펴졌다. 그는 미련 없이 멀어져가는 디오네를 배웅하고서 성큼성큼 부엌으로 내려갔다. 마침 가엘이 새로 받은 식재료를 부엌 조리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두툼하고 빵빵한 자루를 열어보니 싸하게 매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잘 빻은 고춧가룬데? 같은 품종은 아니겠지만 색이 고운 게 태양초 같기도 하고.’
한참 고춧가루를 살피던 클레이오의 머리 위로 느낌표 세 개가 떠올랐다.
묘하게 향과 질감이 튀는 칠리 파우더가 아니라 진짜 태양초를 구했다면,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제대로 김치를 담가볼 때가.
잎이 크고 물이 많은 이곳의 배추라도 백김치를 담가 보면 대충 꿩 대신 닭은 됐다. 빨간 김치도 충분히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배추는 잘 물러지니까 소금엔 가볍게만 절이고 마지막 킥은 콜라투라 디 알리치다.’
김치는 발효식품이라 녹말풀에 향신 채소와 고춧가루만 넣는 게 아니라 젓갈을 꼭 넣어줘야 했다.
앤초비를 정제한 서양식 멸치 액젓, 콜라투라 디 알리치로 김치를 담으면 제법 까나리 액젓 넣은 김칫소와 비슷한 맛이 난단 이야길 먼 옛날 이탈리아에서 미술사 학위를 딴 저자에게 들었다.
우선은 캔튼 부인에게 부탁해 페드르산의 질 좋은 콜라투라 디 알리치를 큰 병으로 주문 넣었다. 식재료상에선 오후에 바로 가져다준다고 해 클레이오를 설레게 했다.
‘밀가루 풀에 액젓이랑 고춧가루, 마늘과 생강을 넣어서 깍두기 담고, 거기에 당근과 래디시도 채 썰어 버무려가지고 배추 김칫소도 만들고. 따로 겉절이도 할까? 돼지고기를 사오라고 해야겠군.’
“가엘 씨, 팔각과 정향, 펜넬 씨를 좀 준비해 줄 수 있겠어요? 시나몬도 반 뼘 정도 있으면 좋겠고요. 거기에 후추, 마늘, 양파, 릭, 세 개의 호수 한 잔도 같이 물에 담가 큰 냄비에 넣어줘요.”
“뭘 만드실 생각입니까?”
“세리카풍 향신료 육수에 삶은 돼지고기 같은 걸 할 생각인데, 푸줏간에 연락해서 베이컨 만드는 부위를 좀 크게 끊어다 주겠어요?”
“알겠습니다. 조합을 들으니 풍미 좋은 고기 요리가 될 것 같군요.”
“저 고추 페이스트를 넣은 배추 요리와 함께 먹으려고 합니다. 기름진 부위에 매운 야채 절임을 곁들이면 썩 조합이 괜찮을 거예요.”
“나쁘지 않게 들립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가엘은 믿음직스럽게 지시를 수행해 나갔다. 클레이오의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팔각과 정향과 회향이 아니스와 클로브, 펜넬이었다. 오향 보쌈이 별거인가? 저렇게 삶으면 오향 보쌈이 됐다.
‘배추 숨이 다 죽으면 겉절이부터 얼른 무쳐보자.’
갓 담근 김치와 수육을 먹을 생각에 절로 입 안 가득 침이 고이고, 없던 의욕이 솟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가 가진 영혼의 일부는,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바이코누르까지 그 어떤 험난한 환경에서도 김치를 담던 사람들의 후손이 아닌가.
그런 클레이오의 모습을 주방 문 너머로 살피며 캔튼 부인이 함박 미소를 지었다. 식욕이 곧 생의 의욕이었다. 도련님의 기력이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날 저녁 클레이오는 포식을 했고, 입가에 빨간 양념을 묻힌 고양이가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면서 화를 냈다.
고양이 주인이 고양이에게 [경감]을 걸어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로 메이지 마스터의 집에서만 벌어질 법한 사건이었다.
***
며칠 후.
잘 먹고 쉬며 제법 체력을 회복한 클레이오는 이발사를 불러다가 머리를 깨끗하게 다듬고, 전선에 떠나기 전 맞추는 바람에 아직 한 번도 못 입은 새 옷을 말쑥하게 갖춰 입었다.
마지막으로 캔튼 부인의 도움을 받아 머리끈도 야무지게 맨 클레이오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한 달 전에 비해서는 보다 나은 사람 꼴로 보여서, 이 정도면 스승에게도 걱정을 덜 끼칠 것 같았다.
오늘은 스텔라 방벽의 핵이 될 수도방위대 학교의 내부 결계를 살피기로 한 날이었다.
그저께 클레이오가 건 전화를 받은 제베디는 스텔라 방벽은 완벽하다면서, 벌써부터 나다녀도 되냐고 걱정과 호통이 반쯤 섞인 말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슬슬 클레이오가 수도에 체류한다는 소식도 숨길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고, 스승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나가 볼 필요가 있었다.
‘연구제자 연구실 역시 언제까지고 방치할 수 없고. 한번 정비를 해야지.’
제자가 도착한다고 알린 시간보다 한참 앞서 본관 앞을 서성이던 제베디는 마차에서 내리는 클레이오를 발견하자 체통도 잊고 로브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이 녀석, 정말 이 녀석아… 후우우우. 어찌 이런 모습이냐, 원.”
이제는 자신과 같은 메이지 마스터의 위(位)를 지녔으며 여러 이명을 가진, 전쟁 영웅인 제자의 모습은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창백하고 앙상한 그 얼굴을 들여다보던 제베디는 바닥이 출렁이는 듯한 어지럼증을 느낀다.
대마법사의 직관이 잔인한 진실을 포착해낸다.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클레이오는, 어쩌면 지금 여기에 살아 있지 못 할 뻔한 클레이오이다. 이것은 확률이 아니라 비율의 문제이다.
피는 생명이며, 피를 잃은 존재는 결국 생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한때 기적을 보이던 여신들은 사라져 가며 물질성을 잃었고, 부피의 상실은 소멸의 전조이다.
이 아이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가? 온전하게 살 수 있는가?
제베디 퓌시스는 순수하게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대마법사가 된 당대 유일의 존재였으므로, 그가 그러한 눈을 가지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클레이오는 스승의 떨리는 어깨를 도닥이듯 짚었다.
“스승님.”
“그래.”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그것이 기쁘다는 게 느껴지긴 하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됐다.”
두 사제는 봄이 한창인 교정을 가로질렀다. 학기 중의 학교는, 학도병 징집이 중지되어 돌아온 학생들까지 더해져 활기차게 북적였다.
제베디 학장에게 인사를 하려던 학생들, 그중에서도 마법반 소속의 아이들은 노인의 곁에 선 키 큰 청년을 발견하고서 모두 하나같이 가던 길을 잊은 채 멈추어 섰다.
마법사를 키워내는 알비온 유일의 기관에 속한 학생들은, 거의 숭배에 가까운 표정으로 클레이오 아세르를 우러러보았다.
마법을 익힌 아이들에겐 삽화나 흐릿한 사진이 실제의 클레이오 아세르와 닮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록 연일 신문에 다뤄지거나 하루 세 시간씩 정기 송출을 시작한 라디오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진 않았지만, 두 번째 메이지 마스터에 관련된 사항은 적어도 수도방위대 학교에서는 비밀이 아니었다.
그런 에테르를 거느리는 자가, 두 사람이 있을 수는 없었다.
전설적으로 정밀한 마법식을 따라 이 세상에 힘을 드러낼 준비가 된 백금의 물결이 차분한 분위기의 청년 주위에 도사리고 있었다. 언제고 들불처럼 일어날 파랑의 전조로서.
‘은총의 마법사.’
‘은총의 마법사다.’
‘두 번째 메이지 마스터.’
그러나 그것은 클레이오의 정식 칭호가 아니다.
레벨 높은 마법사나 기사는 상대의 칭호를 볼 수 있다 하나, 기실은 아서조차도 클레이오의 칭호는 읽을 수 없었다.
은총의 마법사는 천상의 신이 아니라, 지상의 인간이 자신을 살리려 하는 한 인간에게 붙인 헌사였다.
정작 그 경외의 중심에 선 클레이오는 어쩐지 슬금슬금 자신에게 쏠리는 어린애들의 시선이 불편했는지, 결계의 관찰은 높은 곳에서 하는 게 어떻겠냐며 스승에게 제안했다.
메이지 마스터에 이르면 결계 정도야 바로 옆에 붙어 서서 보든 멀리 높은 탑에서 내려다보든, 그 구조와 완성도를 살피는 데엔 차이가 없었다.
제베디는 학생들이 모여드는 진짜 이유를 알았지만 클레이오에게 아이들을 하나하나 소개시켜 줄 시기로는 이른 듯싶어 잠자코 제자의 제안에 따랐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는 인적이 드문 기숙사 북측 탑 망루에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의 안부를 챙기는 다정한 한담이 오갔으나, 나중에는 ‘나보다 오십 년 늦게 태어난 네가 나보다 먼저 기억의 강물을 건널 노릇이구나.’ 하는 제베디의 한탄만 울렸다.
#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