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38
17세에 등기를 친 클레이오 아세르 (4)
“그런 일은 몇 번이나 일어났지. 열두 살 때, 본래 이시엘이 쓰던 후계자의 방에서 모르는 남자아이가 문을 열어주던 날 역시.
난 그 앨 처음 봤는데도 얼굴이 익숙했어. 이시엘의 방에서 나오는 안색 나쁜 꼬마의 유령이 바로 그렇게 생겼었거든.
꼬맹이는 이시엘의 육촌이자 누구도 원치 않던 ‘남자’ 후계자였어. 내가 보던 건 유령이 아니라 그저 미래였던 거야.”
아서는 자신이 보는 ‘환시’의 상세에 대해 설명했다.
무표정 아래에서 클레이오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워버린 이전 원고가 새로 쓰인 내용과 뒤섞여 이상한 내적 일관성을 일궈낸 거 같은데. 오히려 미래를 알기 때문에, 더 이르게 ‘아서 리오그난’이란 인물이 완성된 거라고 봐야 하나?’
“…그렇군. 그 일들이 일어났다면, 다른 환상 역시 언젠가 반드시 실현될 거라 예측할 수 있겠군.”
“그래.”
아서의 대답은 결의와 체념이 절반쯤 섞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왕자들에 관한 미래의 기억도 존재하는 건가?”
“아하, 미래의 기억! 그 표현이 딱 알맞네. 맞아. 두 번째로 오래된 ‘미래 기억’은 멜키오르에 관한 거야. 핏물 가운데 선 그가 손을 들어 날 지목해. 그리고는 확언하지. ‘운명은 반드시 실현된다. 너는….’ 항상 이 부분에서 환시는 뚝 끊겨 버려.”
표정 연기에 자신이 없는 클레이오는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 역시 원고의 후반부에 존재하는 장면이다.
‘아주 스포일러 지뢰밭이구만.’
“이 꿈을 꿀 때마다 너무 무서워서 어머니의 방문을 두드리곤 했어. 그래서 오히려 다음 건 덜 무섭더라고.
세 번째로 오래된 환상에서 내 눈앞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고 아슬란은 온 힘을 다해 내 목을 졸라. ‘너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라고 말하면서.
뭐 그런 소린 아슬란이 실제로도 몇 번이나 해대서 타격감이 약하지!”
말을 마친 아서는 아슬란에 대한 자신의 농담이 재미있다는 듯 짧게 웃었다.
왕자는 정말로 진실만을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열일곱 살 소년이 담담하게 술회할만한 내용은 전혀 아니었지만.
오로지 순서가 바뀐 기억 때문에, 의 주인공이 겪어온 인생 난이도는 지난 버전보다 훨씬 높아지고 말았다. 팔림프세스트의 열화 역시 내용의 개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리라.
클레이오는 속에서 우러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미 다 자라서 여기까지 왔는데 저걸 어떻게 바로잡아. 그저 앞으로 일이 일어날 때 한 번에 확 부닥치지 않도록 조금씩 쿠션을 넣어 주는 거나 가능할까.’
“레이, 나는 대답을 다 했으니 너도 하나만 답해 줘. 그 성흔은 ‘예언’에 관한 건가?”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지.”
디오네에게 한 것과 똑같이, 아서에게도 말을 맞췄다. 거짓말을 다양하게 하면 나중엔 자신이 기억이 안 나니까.
‘‘편집자 권한’같은 게 있단 게 들키면… 별로 좋은 일이 생길 거 같지가 않아. 혹시 이놈이 마음을 나쁘게 먹어 세계멸망이라도 닥치면 그 무슨 바보짓이야? 일단 둘러댈 수 있을 때까지는 둘러대 보자.’
“하여간 확답은 절대 안 해줘요.”
“아서 너라면 누구보다 잘 알겠지. 예언은 항상 불완전한 형태로만 게시돼. 내가 읽을 수 있는 미래 역시 군데군데가 비어 있고, 맥락을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이야. 실제로 일이 닥치기 전에는 뭘 말하려는 것인지조차 모호해.”
“‘읽다’라. 네 고유 스킬은 읽기의 형식으로 발현되나보구나.”
“…그래.”
디오네나 아서나 말꼬리 캐기의 귀재들이었다. 또 허를 찔린 기분이 된 클레이오였다.
“말해줄 수 있어? 너는 무엇을 읽었지?”
이번에는 말을 지어낼 필요가 없었다. 그 대신 「기억」이 불러일으킨 원고의 문장을 그대로 읊었다.
“두 왕자 사이와 두 강 사이의 분쟁이 올 것이라는 예언을. 전란의 시대가 다가오리라는 예견을.”
“…….”
‘그리고 그건 너의 시대이지. 네 고난은 네가 선택받은 ‘인물’이라는 증거이고.’
태풍의 핵이 될 ‘주인공’은 무엇에 놀랐는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리고는 클레이오의 말을 곱씹는 듯, 엄지로 턱 아래를 문질렀다.
깊이 생각에 빠질 때의 버릇. 이것만은 지난 원고로부터 변치 않은 세부이다.
석양의 잔광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숲에선 풀벌레소리가 울린다. 평화로운 세기의 마지막을 송별하듯.
클레이오는 에테르를 끌어올려 말 위로 덧씌웠다.
“‘신의를 담아 말한다.’ 나 클레이오 아세르는 필요한 곳에서 반드시 네 곁에 서겠다.”
‘신의를 담아 말한다.’는 오래된 관용어로, 검술 기초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간단한 에테르 운용식이었다.
그것은 그저 신의의 표현. 마법식을 쓰지 않았으니 어겼을 때의 제약이 없고, [언약]이 아니니 충성을 보증하지도 않는다.
거기 있는 것은 순수한 믿음에만 기반한 선언이다.
“나는 네 목적과 의지를 안다. 네가 뜻을 이루도록 나는 전심전력을 보태겠다.”
“약속은 언제까지 지속되지?”
“아서 리오그난이 알비온 왕국의 유일한 왕이 될 때까지.”
어떤 우회도 비유도 없는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나직하지만 단호한 클레이오의 확언에 아서는 눈을 크게 뜬다.
입에 올리기만 해도 반역이며 불경인 말을 클레이오는 가벼이 발화한다.
이 의욕 없고 존재감이 약한 친구는 늘 이렇다. 그럴 수 없는 구간을 어느 샌가 휙 지나쳐 앞서 나가 버린다.
아서가 놀라움에 휩싸여 있는 동안 클레이오는 ‘약속’의 고지를 기다린다.
평소보다 한 박자 늦게 문자열이 산란했다.
[—사용자의 서사개입도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저자는 이 전개를 바란다 이거지. 이번에는 아서 역시도.’
“[언약]은 하지 않는 거냐?”
[언약]은 기사들이 정식 서임을 받으며 왕에게 하는 맹세.이시엘 키시온이 열두 살 나이에 아서 리오그난에게 했던 것. 같은 나이의 아서가 이시엘에게 했던 것.
그러한 평생의 맹약을 아서는 자신에게 바란다.
비록 같은 [언약]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클레이오는 아서의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응. 싫어.”
“!!!”
에테르로 [언약]한 말은 거역할 수 없는 맹세로 남는다. [언약]을 파기할 시 제약에 의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기억을 잃게 된다.
지난 원고에서도 언약을 파기한 기사들이 등장했다.
‘이전 원고만 읽어선 그 사람들이 왜 그 꼴이 됐는지 몰랐는데, 장미의 난 얘길 듣고 나니까 딱 앞뒤가 맞잖아. 기억을 잃은 기사들은 선왕 에드워드에게 한 충성의 [언약]을 어기고 대신 필리프를 옹위해서 페널티를 받은 거지.’
잃은 기억의 종류는 사람마다 달랐다. 사소하게는 자신이 기르던 말이나 수집한 무구에 대해 잊었지만, 어떤 이들은 가족이나 연인에 관해 잊었다.
문제는 뭘 잊게 될지 닥칠 때까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그건 ‘김정진’으로서 결코 지불할 수 없는 대가였다.
클레이오로 남을 것이며 클레이오로 살아가기로 결심했지만, 기억을 잃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어차피 난 저자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데, 굳이 이중으로 굴레를 쓸 필욘 없잖아. [언약] 안 하면 아서, 이놈만 불안하지 난 상관없거든?’
혹여 앞으로의 여정에서 아서가 죽는다면 그와 함께 모든 게 소멸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기억이라도 온전히 가진 채 멸망을 맞이하고 싶었다.
‘헛된 짓인 거야 알지. 여기서 눈을 뜬 순간부터 나 같은 NPC는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도. 근데 뭐 어쩌라고. [언약]은 안 해.’
저자는 이 세계의 신이나 다름없고, 세계의 주인공은 신의 적자이며 대적자이다.
인물이 플롯에 복종하길 원하는 저자의 뜻과, 생명력을 가진 인물의 뜻.
전자와 후자가 대립할 때 세계는 분열되지만, 그 두 의지가 함께할 때 전개의 강제력은 강력해진다.
스스로가 이야기의 장기말이라는 사실은 잘 안다. ‘클레이오’는 결코 아서에 비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외피를 입은 ‘김정진’에게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쯤은 있었다.
어머니의 거칠지만 따듯한 손, 잠이 든 동생의 평화로운 숨소리 같은 것. ‘김정진’이 잊으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힐 사람들의 기억이.
그뿐이었다.
‘김정진’의 생애는 남루했으며 그의 32년 인생에 드리웠던 고난에는 목적도 의미도 없었다.
‘이 세상’의 중심인 아서 리오그난의 생애와는 달리.
“아서, 언젠간 알게 될 거야. 지금 이 세상은 널 위해 돌고 있어. 그건 지극히도 부당한 일이지만, 동시에 당연한 일이지.”
‘너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니까.’
왕권신수설이 보편적인 관념인 세계에서, 클레이오 자신의 말은 그저 평범한 비유로 들릴 것이다. 왕좌를 바라보는 아서에게는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이오는 말하기를 택한다. 쓰이고 있는 이야기의 경계에 선, 한 ‘사람’으로서.
“그렇지만 나는 결코 네 신하가 되지 않겠어. 대신 조력자가 되겠다.”
클레이오는 악수를 청하며 아서에게로 손을 뻗었다. 동등한 관계의 두 사람이 하는 인사였다.
그에겐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기분의 문제를 넘어서, 사람이 화장실 갈 때랑 올 때 마음이 다르잖아. 어차피 이놈은 앞으로도 자기 사람이 쭉쭉 늘어날 텐데, 받을 거 다 받아내려면 전속계약은 안 하는 게 맞지.’
왕자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밀어진 클레이오의 손을 아서가 굳건히 맞잡았다.
“‘신의를 담아 말한다.’ 나 아서 리오그난은 클레이오 아세르의 수락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아서의 답 역시 신의의 관용구였다.
여기에는 계약도 강제도 없으므로 이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늘 새로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앞으로 나한테 왕자 대접 받을 생각은 마.”
“이제껏 한 번이라도 왕자 대접을 해준 적 은 있는 것처럼 말하네?”
“시작이 그따위였잖아. 설마 극존칭 따윌 원하는 거냐? 어?”
“윽, 생각만 해도 어색해… 아무튼, 그건 그렇고 넌 나에게 뭐 바라는 거 없어?”
“언제 물어보나 했다. 당연히 있지.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나서 제베디가 은퇴할 나이가 되면 왕실마법감 자릴 내게 줘.”
“뭐? 그건 아무 권한 없는 명예직이야.”
“대신 연금이 나오잖아. 교수 연봉 세 배던데.”
“너는… 소박한 건지 욕심이 많은 건지 모르겠다.”
“난 안 소박해. 마석과 마도구와 현금 세 가지는 항상 환영이다. 기회가 생기면 팍팍 뜯어낼 거니까.”
“장래의 대마법사를 모시는데 그런 게 아깝겠냐만은, 너 지금 나 개털인 건 알고 하는 소리냐? 지금 내 손엔 마도구는커녕 마땅한 검 한 자루도 없어.”
“그건 두고 볼 일이고. 나중에 말 바꾸지나 마.”
‘일단 던전이 열리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테니까.’
“알겠어. 그런데 레이, 그것도 네 예언의 일부인가?”
“질문 하나당 1만 디나르. 무료로는 답변 안 해.”
“아하하하. 야 이 농담은 진짜 웃겼다.”
아서의 맑고 힘찬 웃음소리가 어둠을 헤쳤다. 그래서 ‘농담 아닌데’라고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어서 삐죽삐죽한 표정이던 클레이오 역시 아서를 따라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순간, 다시금 떠오른 ‘약속’의 문자열은 처음 보는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사용자의 서사개입도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서사 개입도의 누적 비율을 계산 중입니다 (□□%)]
‘뭐야, 서사개입도라는 게 비율로도 표시가 되는 거였어?’
‘누적 비율’이라는 낯선 항목에 눈을 빼앗긴 클레이오는, 등 뒤에서 므네모시네의 문이 이채를 발한 것을 보지 못했다.
희미한 빛은 텅 빈 문틀 가운데 소리도 없이 솟았다가 금세 꺼졌다. 이어, 부서져버린 벽 가장자리가 여리게 진동했다.
인간보다 먼저 이변을 감지한 새들이 멀리 날아가 버리고, 그것을 모르는 소년들이 숲을 떠난다.
구구궁―
쿠쿵
이계의 문 너머에서 전해진 진동이 잠든 땅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