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452
공현과 내전 (4)
균열에 대한 니네베 연대의 통신을 방수한 멜키오르는 클레이오가 괜한 행동을 한다고 코웃음 쳤지만, 그를 도우라는 명령은 철회하지 않아 태서턴은 이의 없이 클레이오를 수행했다.
클레이오의 코트 자락은 템푸스 강물에 젖어 있었다. 물속에 에테르를 풀어내느라 내내 잠겼던 손은 쪼그라들어 불고 색 없이 창백했다.
첼은 그 흐릿하지만 유장한 에테르의 흐름을 더듬어 클레이오에게로 도달했다.
“무너진 세계는 우리의 시도를 감당하지 못해. 어쩌면, 진짜로, 사람의 힘으로 소멸을 저지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올바른 결괏값을 찾기 전에 세상이 먼저 끝날 거야.”
이 부서져 가는 세계에서 지속 가능성을 시험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단 것을, 첼레스테스는 인정해야만 했다.
아직도 첼레스테스의 손안에는, 떠나는 그녀를 만류하는 이시엘과 검을 맞대었을 때 무기로 전해져오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단호함과 떨림, 슬픔과 각오.
그런 감각적 기억은 어쩌면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재앙이 물러난 새벽, 가장 먼저 첼의 변모를 알아챈 이는 막 간이 침상에서 일어난 이시엘이었다.
첼은 오직 이시엘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가, 그 초록빛 눈을 들여다보고는 ‘더 쉬어, 엘.’이라고 말하고 막사를 나서려 했다.
그런 그녀를 이시엘이 붙들었다.
‘첼레스테스. 너 역시 낯빛이 나쁘다. 숨을 돌리며, 조금만 더 곁에 있어 주겠나?’
첼은 막사 입구를 붙잡은 채로 뻣뻣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도무지 요령 좋게 행동할 수가 없어서 숨 쉬는 것조차 어색한 순간이었다.
이시엘은 고요하나 형형한 녹빛 눈으로 첼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홉 살에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됐다. 첼은 그 불꽃 같은 여자아이와 학생 검술대회의 결승에서 만난 순간 알았다.
이 애 때문에 난 살거나 죽게 될 거야.
이렇게 선명하고 이토록 똑바르게, 오로지 저 높은 곳만을 바라보는 눈길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신들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올곧게, 항상 미지인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인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스물여섯 해 인생에서 그들은 서로를 안 시간이 서로를 모르던 시간보다 길었다.
곁에 있어 달라는 건, 그 오랜 세월 동안 결코 이시엘이 먼저 입에 담은 적 없던 부탁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그리 청한다면 반드시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요청.
그러나 정작 때가 오자 첼은 이시엘의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강물에 흐르는 클레이오의 에테르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균열이 잦아들었으니 힘을 거두고서 다시 호수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균열이 벌어진 직후인 만큼 막대한 인원이 므네모시네의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 무고한 사람들을 전부 희생시키며 문으로 돌입할 클레이오가 아니었으니, 그를 만나기 위해선 지금 움직여야 했다.
첼은 막 깨어난 자각으로 인해 들끓는 감정을 갈무리하기도 힘겨웠다. 누군가에게 말해야만 했다. 이 전회를, 결심을, 그녀가 잃은 세계의 기억을.
그런데도.
첼이 대답하지 않자 이시엘은 머리맡에 풀어두었던 멜라미드의 검을 쥐었다. 평생을 수행해왔기에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첼이 이시엘을 아는 만큼 이시엘도 첼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기 전 자신을 구하러 왔던 건 첼이었다. 그녀의 기동이 아서의 이형보다 빨랐다.
반쯤 의식을 잃은 채로도 첼이 신을 저주하다가, 결국에는 애걸하기 시작하는 말은 이해가 됐다. 그렇다면 그녀의 선택은 한 가지일 것이다.
붙들리지 않으려는 듯 물러나는 첼을 끌어당기기 위해서 이시엘은 검을 들었다.
이시엘이 발검하자 담대한 항공대장은 거의 공포에 질린 얼굴로 또다시 뒷걸음질 쳤다. 그녀 역시 패검하고 있었다. 차마 발검하지 못한 바스타드 소드를.
이시엘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친우 앞에 가 섰다.
키시온 백작은 검을 처음 쥐었을 때 부친 앞에서 맹세했다. 자신은 용맹하고도 충성스런 기사가 되리라고.
그 결심은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는.
첼조차도 몰랐지만, 이시엘은 아주 잠시 망설이다 검 위로 대적의 불을 옮겨 붙였다.
항공대장을 적진으로 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대체가 불가능한 인력이며, 천공을 다스리는 성흔의 소유자였다.
그녀 없이 인간이 어떻게 재난을 막아낼 수 있을까?
‘첼레스테스. 가지 마라.’
‘이시엘, 나, 나는….’
첼은 벌벌 떨면서 간신히 제 검을 쥐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해지는 순간.
키시온 백작은 그때에, 우정보다는 신념, 동정보다는 충성을 택한다. 그녀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는 택함이었다.
스으으읏―
불의 검기는 첼의 퇴로를 막으며 펼쳐졌다.
이시엘 키시온, 알비온에서 가장 고귀한 기사는 일생 중 유일하게 가져보았던 독점적인 친애를 자각했다. 양자택일을 강요받은 순간에야.
그리고 그녀는 그 감정을 인정과 동시에 베어 내기로 결정한다.
동료, 친우, 주군이 아닌, 갑옷에는 들어가지 않는 종류의 친애를. 충성과도 다르고 신의와도 구분되는 감정을.
그러나 불의한 것은 이시엘 키시온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 중 하나만을 택하도록 강제하는 세계이다.
목숨을 노리지 않는다 해서 대결이 격렬하지 않으리란 건 잘못된 예측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검을 맞대었고, 승부는 아서가 마지막 균열 지점에서 귀환하기 전에 났다.
첼은 이시엘과의 전투 중에 마스터로 거듭났으며, 제 성흔까지 빌어서야 그녀를 상처 없이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항공대장은 완전히 탈진한 채로 클레이오에게로 왔다.
그 비탄을 도무지 위로할 수조차 없어서 클레이오는 그저 첼의 어깨를 쓰다듬기만 했다.
첼은 머잖아 눈물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남은 게 있지. 누굴 데려왔는지 봐.”
첼이 우는 동안 멀찍이 서 있던 기젤라는 자신이 몰고 온 항공기의 뒷좌석에서 대형 나무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커다란 검은 고양이가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베헤못은 상자 뚜껑이 열리자 그제야 꿈뻑꿈뻑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웨엥?”
이번엔 클레이오 쪽이 바짝 굳어져서는 뻣뻣하게 굴었다.
베헤못. 진짜 베헤못이었다.
기젤라는 ‘저도 대장님과 같은 이유로 전향합니다.’라고 말하던 것과 똑같은 어조로 설명했다.
“대장님과 합류하기 전, 미리 상의했던 대로 캔튼 부인이 묵는 네쥬 에스트 호텔에 찾아갔더니, 이 고양이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던걸요.”
아세르가의 고용인들 대부분은 콜포스 본가로 돌아갔지만 미라와 캔튼 부인은 임시로 고용 계약을 해지하고서 룬데인 동편에 머무르며 수도의 수복을 기다렸다.
캔튼 부인에게는 클레이오가 근처까지 와서 베헤못을 데려다줄 거라고 해명했는데, 설마 믿어줄까 의심한 것이 무색하게, 베헤못의 반응을 보고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이 고양이는 도련님이 계신 곳을 압니다. 자기 뜻에 어긋나는 짓을 남이 하게 두지도 않고요. 데리고 가시지요. 그리고 모쪼록 도련님께서 건강하시길 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곤 잠들기 전까지 안에서 계속 뭐라고 소리를 치는데 제가 고양이 말을 알지는 못해서요.”
“캵. 므에에에에엨, 먀오오오오옭.(답답한지고. 네놈이 지근거리까지 왔는데, 본묘가 안 나설 수 있나.)”
클레이오는 상자의 옆면을 짚은 채 바닥으로 무너졌다. 상자 밖으로 나온 거대한 고양이가 펄떡 주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마법사는 따듯한 짐승을 껴안고 고개를 파묻고선 조금 울었다.
기젤라가 보니 고양이는 연신 에웅에웅 울어댔다. 그리고 첼과 클레이오에게는 그 울음소리가 이렇게 들렸다.
“이 괘씸하고 고얀 놈. 두고 가면 본묘 홀로 영화를 누리리라 여겼나? 무슨 선택을 하든 본묘는 네 뜻을 따른다. 신을 벗어난 세계는 존속할 수 없도다.”
“너는 세상이 창조될 때 여신이 함께 빚어낸 흑요석의 영물이니까, 역시 신의 뜻을 따르는 거구나. 그래도 좋아. 너무 보고싶었어.”
괜히 아련하게 굴던 클레이오는, 베헤못의 앞발에 투다닥 연속으로 뺨을 얻어맞았다.
“본묘 앞에서 개소리를 하고 싶으냐? 에잇, 에잇! 내리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놈. 본묘가 이곳에 있는 것은 이 몸이 너를 지극히 귀애하기 때문이다. 네가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네 뜻이, 이 세상이 계속 이어지길 원하는 네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본묘가 여신에게서 난 영물이라 그렇다고?
하지만 본디 이 세상의 생명은 모두 여신의 피조물이 아니냐. 본묘는 그 모든 창생물 가운데에서 너를 구분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너는 내게 단 하나뿐인, 오직 하나뿐인, 다시없을 시종이다, 이 미련한 놈아.”
눈물의 재회를 무뚝뚝하게 내려다보던 첼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야, 설마 이제까지 진짜로 저 자식, 사람 말을 하던 거야? 네가 고양이에 미친놈이라서 대화를 하던 게 아니고?”
여신이었던 전생을 자각하며 귀가 트인 탓에 그녀도 베헤못의 말을 알아듣고야 말았다.
“어….”
그렇다고 고양이에 미친놈이 아닌 것도 아니었지만, 클레이오는 첼의 내면에서 일어난 자신에 대한 미미한 인식 개선을 굳이 격하하지 않았다.
기젤라만이 약간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선배님들은 고양이 말이 사람 말로 들린단 말입니까?’라고 물으며 그들의 현실 인식을 재고시켜 줬다.
충실한 항공대원으로서는 천공을 다스리는 항공대 대장이 전생에 우주를 관장하는 여신이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고양이 말을 알아듣는다고 주장하는 쪽이 조금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참, 그리고 경황이 없어서 못 전했는데 대장님 모친께서 사고 좀 작작 치라고 하시네요.”
신으로서의 전생이 기억났든 말든 지금 첼레스테스 탕페트 드 네쥬는 카타리나의 외동딸이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눈물자국을 머플러로 자연스레 닦아내며 첼은 눈을 굴렸다.
“…그건 좀 들어드리기 어려운 부탁이네.”
“언제는 뭐 모친 부탁을 들어준 적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음, 예리하군. 과연 항공대의 에이스.”
룬데인 동역 부근은 물류의 심장으로서 철저히 지켜졌고 이번 균열에서도 무사했다.
덕분에 네쥬 에스트 호텔은 룬데인 동역을 거치는 루트로 물류를 이송하는 사업가, 룬데인 균열을 지켜보는 외국의 정보 요원들, 고향의 완전한 수복을 기다리는 주민들로 항상 만실이었다.
사실 캔튼 부인과 미라는 투숙객이 아니라 근무자로서 호텔에 자리를 얻었다. 숙련된 인력이 태부족이었기에, 노련한 관리인과 운전사는 크게 환영받았다.
이 상황에서도 카타리나 탕페트 드 네쥬는 자신만만했다.
비록 토지 이용료는 압류 중이었지만 카타리나로선 정부에 내나 지주에게 내나 나가는 돈은 같단 입장이었다.
그녀는 악조건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개장 이래 최대 매출을 능숙하게 끌어냈다.
‘혁명이 못 멈추었던 사업을 재난과 내전이라고 멈출 수 있을 것 같나요? 세상이 뒤흔들려도 사람들은 자고 먹고 마시고 샴페인을 터트리고 밀담을 나누고 위스키를 음미할 곳을 필요로 해요.’
그렇지만 하나뿐인 딸의 행보에 대해서는 절대, 그 어떤 공식적인 평도 하지 않았다.
기젤라가 베헤못을 데리러 갔을 때 1층 로비 앞에서 손수 배웅해주며 얼굴을 찡그리기는 했다.
‘클라인 중위는 내 딸의 부관이었죠? 붙어 있을 거면 사고 좀 작작 치게 애를 써 봐요. 부친께도 중위님 소식을 전해주죠.’
기젤라는 그저 밤중의 방문객으로 캔튼 부인을 찾았을 뿐인데, 인사를 나누고 고양이를 데려 나오는 그 짧은 사이 이미 내막을 다 파악한 카타리나의 능력에 약간 놀랐다.
과연,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첼레스테스 대장의 모친이었다. 외모가 그리 닮았는데 내면이라고 안 닮았을까.
‘부탁드립니다. 또 뵙겠습니다.’
‘다시 볼 땐 이보다는 좋은 상황이었으면 해요. 몸조심하길.’
***
빛의 축제를 앞둔 연말, 알비온을 반으로 가른 대립은 나날이 격화됐다.
신군을 따르는 이들은 더 이상 세상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신의 계시를 따라 균열 없는 세계에 살기를 간곡히 원했다.
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신의 뜻을 따른다는 이의 행동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희생이 다음 희생을 또 부르면 어떻게 할 겁니까?’
‘내 목숨을 신께서 요구한다면 나 역시도 내어놓겠소. 나는 나의 자식과 손자들이 균열 없는 세계에서 살길 원하오. 세계의 심연이 닫힌 세상을.’
반대 의견이 형태를 갖춰갈수록, 아서를 지지하는 이들의 뜻도 굳건해졌다. 대립은 이념적 지향을 선명하게 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그 모호한 계시, 측량할 수 없는 신의 축복에 매달려 살아야 한단 말인가? 신의 계획에 의해 생사가 매달린 채로? 나는 그럴 수 없네. 나는 나 자신의 의지로 살고 죽는 삶을 원하네.’
‘순교를 할 의지가 있든 없든, 누군가를 희생해서 이어지는 세계에는 의미가 없어. 첫 번째 실험이 실패했다고 해서 바로 꼬리를 내릴 텐가! 오히려 내전 상황을 조성한 이들을 처벌해야 옳아.’
의견 대립은 첨예해졌다.
수많은 탄원서와 연서명한 선언들로 인해, 아서는 타협안이 나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2차 회담을 계획해야 했다.
알비온 사람들에게 아서는 ‘우리의 손으로 왕위에 올린 이’였기에, 그의 행보는 민의를 따라야 했다.
아서 스스로 만든 제약이었고 저버린다면 그 역시 동의된 원칙을 지키지 않는 전제 군주임을 자인하는 행위가 됐다.
아서는 안젤리움 자작을 밀사로 삼아 신군 측과 입장을 조율했다
자작은 서남수비군의 지휘관 자리를 자신의 부관에게 임시로 맡기고는, 리피 안젤리움에게 위임했던 상원 의결권을 되돌려 회수했다. 그 이상의 조처는 없었다.
두 자식이 각각 신군과 아서왕의 지지자로 갈라선 자작은 처음에는 침울하게 근신했고, 나중에는 중립을 선언했다.
아서는 자작의 선택을 존중했다.
리피의 소식을 듣고 급히 상경한 안젤리움 제독은, 자신은 어버이로서 어느 한 자식의 입장에 힘을 실을 수 없다며 아서 앞에서 울먹였다. 그 강인한 바다 사나이가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하고 오열하며 무너졌다.
접견장에 함께 있던 레티샤는 입을 삐죽이곤 ‘아버진 센 척은 다 하더니 결정적인 데서 무름.’이라고 평했다.
아마 리피의 반응도 크게 다르진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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