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12)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으나 덜 아픈 손가락은 있다. 이씨 사 남매 중 이한생이 그러했다.
‘막내 오빠랑 사이 진짜 별로였는데…….’
아련하게 회상하기엔 꽤 살벌했다. 이보배는 막내 오빠와의 과거를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한생과 이보배는 견원지간이었다. 서로를 악랄하게 물어뜯고 진심으로 한심해했다.
이보배의 집 앞에 균열이 생기기 전까지는.
‘막내 오빠…….’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은 이한생이 무의식적으로 소망하고 떠올린 것들의 집합체가 아닐까?
“계집! 저건 뭐지?”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짠해지면서, 망나니의 망나니짓도 봐줄 만했다.
“아아, 저건 햄버거라는 음식입니다. 맛있죠.”
“흥! 입과 손에 다 묻히고 먹는 걸 보니 아주 천박하고 품위 없는 음식이로군!”
“막내 오빠가 제일 좋아하던 건데, 재활 치료 성실히 받으시면 사다 드릴게요.”
이한생이 깨어나면 균열과 각성에 대해 설명하게 될 줄 알았다. 현실은 ‘계집, 저건 뭐냐!’, ‘아아, 그것은 ~입니다’의 연속이다.
“나를 뭘로 보고! 난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 체키빙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다. 치료랍시고 날 고문하려는 걸 모를 것 같으냐? 너도 날 모시게 되었으면 눈치를 키워라! 언제까지 흑마술사에게 속을 것이냐!”
“고문이 아니라 치료라니까요.”
“힘들고 재미없는 일을 강제로 시키는데 어찌 고문이 아니란 말이냐! 심지어 아무 의미 없이 같은 행위를 반복시키던데. 아니면 흑마술사에겐 그 정도는 고문 축에도 못 낀다는 말이냐? 잔혹한 놈들.”
‘에휴.’
이보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재활 치료가 힘들긴 해서 포장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부족한 근육을 쥐어짜는데 당연히 아프고 힘들지 않겠는가. 지켜보는 보호자도 할 수 있다면 대신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에잇! 이 성가신 것!”
열심히 TV를 보던 망나니가 다시 발작했다. 환각과 환청 증세가 시작된 것이다.
망나니는 그나마 수월하게 움직이는 팔로 허공을 휘저었다. 손등과 연결된 링거가 같이 흔들렸다. 이보배는 그러다 망나니가 다칠까 싶어 만류했다.
“갑자기 움직이고 그러지 말라니까.”
“감히 나를 납치하고 감금한 것도 모자라 이따위 잡술을 걸다니……. 내 몸만 되찾으면 반드시 네놈들을 찢어 죽여 돼지 사료로 줄 것이다……!”
“제발 빨리 몸 되찾고 막내 오빠 돌려주면 좋겠네요.”
이한생이 정신을 차린 후 하루에 열 번은 반복하는 대화가 끝났다.
슬슬 면회 시간이 끝나갔다. 이보배가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망나니가 또 욕했다.
“또 주인을 버리고 가는구나! 충심이라곤 햄스터 꼬리만 한 것.”
‘막내 오빠 햄스터 좋아했지. 특히 햄스터 궁둥이.’
그래서 판타지 세계에도 햄스터가 있나 보다.
“버린다뇨.”
버린다는 말에 이보배는 울컥했다. 귀여운 햄스터를 떠올려도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 막내 오빠를 버리지 않아요. 내 인생에서 가장 볼품없고 무능했던 시기에도 난 오빠를 버린 적 없어요. 억지로 포기할 뻔한 건 사실이지만 운이 좋아 더 버틸 수 있게 되었죠. 난 계속 돈을 벌 거고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 안 버릴 거니까 두고 봐.”
이보배는 기억 잃은 막내 오빠에게 당당하게 선언하고 가방을 들었다.
“미리 말했듯이 내일 못 와요.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 말씀 잘 듣고 식사 나오는 대로 챙겨 먹고요. 제발 부탁이니 재활 치료받읍시다. 이상!”
욕이 쏟아질 게 뻔하기에 이보배는 후다닥 튀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난감 매장에서 떼쓰는 아이도 지르지 못할 법한 초음파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이 무엄한 년! 감히 주인에게 명령하다니! 당장 엎드려 죄를 빌지 못할까아악!”
저러고도 목이 쉬지 않는 건 체키빙 공작가에 내려온다는 성신의 가호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이보배는 민망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 * *
견물생심이라. 햄버거 얘기를 했으니 햄버거가 먹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보배는 햄버거 가게에 들러 햄버거를 샀다.
10세트 주문했더니 직원이 혼자 들고 갈 수 있겠냐 걱정했다. 이보배는 인벤토리가 있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문제는 햄버거가 나온 이후에 발생했다. 인벤토리 수납공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비상시를 대비해 이것저것 넣어둔 게 많아 햄버거 세트 10개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압축시키면 들어가겠지만 짓눌린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기는 싫었다.
“배달로 변경해 드릴까요?”
직원에게 사과하고 배달로 변경하려던 것도 잠시, 세트에 딸린 콜라가 페트병으로 제공된 게 이보배의 눈에 띄었다.
햄버거 가게를 나오는 이보배의 양손엔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들려 있었다. 콜라는 인벤토리가 허용하는 만큼만 챙기고 나머지는 받지 않았다.
배달을 시켜도 되지만 맛있는 냄새 솔솔 나는 봉투를 들고 집으로 가고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
‘이런 게 가장이 누리는 권리지.’
집에는 배고픈 오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 온 햄버거를 보면 벌떡 일어나 반겨주겠지?
“나 왔어!”
“막내 왔, 햄버거다!”
“햄버거 사 왔어? 굿.”
“막내 오빠랑 TV 보다가 광고 보니까 먹고 싶더라. 음료는 여기. 밖에 내놨었는지 안 시원해. 콜라 냉장고에 또 있지?”
“있어. 형이 물 대신 마시잖아.”
“운동도 안 하면서. 저러다 당뇨 같은 거 걸리면 어떡하지?”
“괜찮을 거야. 미래에도 당뇨 걸렸단 각성자 얘긴 들은 적 없다.”
“흐응, 흐응, 참깨빵 위에 순 쇠고기~ 이건 우리 막내 거! 이건 둘째 거!”
이귀한은 봉투를 뒤져 이보배와 이해기에게 햄버거를 하나씩 건넸다. 그런 후 자신이 먹을 햄버거 포장을 벗겨 베어 물었다.
집에 돌아온 첫날 치킨 다리를 양손에 들고 먹던 것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나아지고 있어.’
이한생이 깨어난 후 이귀한은 조금 의젓해졌다. 걱정하던 셋째 동생을 본 게 많은 영향을 미친 듯했다.
“내일 검사받고 결과 정상이면 셋째 보러 가도 되는 거지?”
“응, 같이 가자.”
“와아, 셋째 본다.”
이귀한이 활짝 웃었다. 이보배도 흐뭇하게 따라 웃었다. 이해기 혼자 훈훈한 분위기에 끼지 않고 묵묵히 햄버거를 씹어 삼켰다.
“다 먹었다!”
햄버거 두 개를 해치운 이귀한이 손을 씻기 위해 일어났다. 이보배는 깜짝 놀랐다.
“너무 적게 먹은 거 아니야? 나 10개 사면서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냐, 충분해.”
이보배는 그간 이귀한의 식사량을 따져보다 짚이는 것이 생겨 물었다.
“큰오빠 요즘 먹는 양 줄지 않았어?”
“모르겠는데.”
본인 얘기를 하는데 이귀한은 전혀 모르겠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내 햄버거만 씹던 이해기가 처음으로 대화에 참가했다.
“덜 먹는 거 맞아.”
종목을 햄버거로 한정했을 때 귀환 전의 이귀한이 세운 최대 기록은 세트 3개였다. 돌아서면 배고픈 중학생 시절 세운 기록이었다.
귀환한 후의 이귀한이면 8세트도 너끈했을 것이다. 먹은 게 어디로 가는지 뱃살은 그대로였지만.
이보배는 이귀한의 먹성을 생각해 10세트를 사 왔다. 그런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즘 이귀한의 식탐이 귀환 초기만 못했다.
한 입 크기로 남은 햄버거를 먹어치운 이해기가 입가를 닦은 뒤 말했다.
“전보다 덜 먹는 거 맞아. 한생이 보고 온 날부터 야식도 끊었고.”
“내가? 그랬어? 잘 모르겠어.”
“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내 말을 믿겠어, 형이 느끼는 걸 믿겠어?”
“당연히 널 믿지! 나 덜 먹는구나!”
“…….”
역시 이귀한의 폭식은 정신적인 문제였다. 이보배는 마음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먹는 양이 줄었다니 다행이다, 큰오빠. 집도 낡은데 화장실 변기 막히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니까.”
이보배가 농담 삼아 한 말에 이귀한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시선을 피했다.
‘밥 먹은 사람에게 하기에 소재가 더러웠나. 아니, 큰오빠 비위 좋은데. 아니면 진짜 막혔었나?’
집을 비운 사이 변기가 진짜 막혔었냐고 물으려는데 이해기의 상태가 이상했다. 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이해기가 경악했다.
“형, 설마.”
“먹으면 싸야지. 그래, 그게 맞지. 깜빡했지 뭐야.”
이귀한이 화장실을 보며 아련하게 웃었다. 척 보면 척이었다.
‘변비가 심하구나.’
“젠장.”
이해기가 스스로를 질책하듯 작게 뇌까렸다. 보아하니 작은오빠도 변비 징조가 있는 듯했다.
‘각성자가 변비라니.’
이보배는 듣도 보도 못한 소리에 혀를 찼다. 평소의 식습관이 얼마나 안 좋고 움직임이 적으면 각성자가 변비에 걸리냐 이거다.
“물 대신 콜라를 마시니까 변비가 생기는 거야. 내일부터 하루에 물 2리터씩 꼭꼭 마셔.”
“먹을 필요도, 마실 필요도 없는데 허기와 갈증이 나를 괴롭혔어. 오직 흐르는 피와 썩은 살점, 죽음을 앞둔 공포와 타락한 혼의 귀곡성만이 날 달랠 수 있었는데…….”
이귀한이 눈을 감았다. 그가 배를 슬슬 문질렀다.
“이젠 밤에도 배고프지 않아.”
‘변비 때문에 아랫배가 더부룩하니 배가 부르겠지.’
이보배는 집에 있는 구급상자에 변비약이 있나 기억을 더듬었다. 각성한 이후 포션을 만들 수 있게 되다 보니 구급상자는 텅 빈 상태였다.
“괜찮, 이젠 괜찮은 거지, 형?”
이해기가 이마를 바닥에 박고 떨었다.
“작은오빠,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
“어디 아파? 병원? 포션 필요해?”
“아니야, 그런 게 아니다. 형이 나아지고 있다는 실감이 들어 잠깐 울컥했다. 정말 괜찮으니 보지 마라. 동생 앞에서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
보지 말라고 해도 집이 좁아 거실에서 저러고 있으면 볼 수밖에 없다. 이보배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이해기의 말에 따랐다.
“형, 정말 괜찮은 거지?”
“응, 괜찮은데 너 좀 오바인 듯.”
이귀한이 동생들 눈치를 살피더니 방으로 슬금슬금 들어갔다. 이귀한은 익숙한 자세로 곰 인형을 껴안고 게임 방송을 시청했다.
내가 못하면 빡치지만 남이 못하면 꿀잼이라나 뭐라나.
* * *
이보배가 씻고 나오자 이해기가 캔 맥주를 들이밀었다. 싱크대에서 세수했는지 얼굴이 축축했다.
“큰오빠는?”
“방에. 자려고 노력해 보겠대.”
둘은 소파에 앉아 캔 맥주를 마셨다. 심심해서 켠 TV에선 재밌는 걸 안 했다. 신라 길드 갑질이 논란인 듯했지만 사계절이 아니면 이보배의 관심 밖이었다.
‘공략 성공해야 할 텐데.’
스킬 등급이 올랐고 막내 오빠도 깨어났으니 전처럼 회사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5년간 몸 바쳐, 젊음 바쳐 일한 곳이라 그런지 성공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해기는 뉴스를 보는 것 같았지만 이보배는 무심하게 채널을 바꿨다. 이게 리모컨을 쥔 가장의 특권이다.
“셋째는 오늘 어떻더냐.”
‘아, 말투.’
종종 튀어나오는 이해기의 기괴한 말투에 이보배는 기겁했다. 어떤 의미에선 망나니 말투가 나았다. 기억상실은 진짜고 각성 하이는 컨셉이기 때문이다. 찐과 짭이 붙으면 찐이 승리하는 게 정의 아닌가.
“똑같지 뭐. 망나니 설정은 왜 붙인 건지 모르겠어. 차라리 진짜 조선 시대 백정 설정이면 이해라도 하겠네.”
웃으라고 한 얘기에 이해기가 설핏 웃었다. 웃긴 웃는데 진짜 웃는 건 아니었다.
이해기는 이귀한이 돌아왔을 때도 그러더니 이한생의 각성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이귀한이 이한생의 각성으로 안정을 되찾은 것과 반대였다.
불안해하면서 숨기려 든다. 이보배 눈엔 다 보이는데 계속 감추려 들었다.
면회만 해도 그렇다. 이해기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고 형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단 핑계로 첫날 이후 면회를 미뤘다. 이한생을 피하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휴간데 쉬지도 못하고 고생이 많다. 원래는 널 쉬게 두고 내가 다 챙겼어야 하는 건데.”
이해기가 절반 남은 캔 맥주를 흔들었다.
“작은오빠가 집안일 하면서 큰오빠 돌봐주고 있잖아. 덕분에 내가 맘 편하게 병원 가는 거지.”
이보배는 캔 맥주를 야금야금 마시면서 이해기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막내 오빠 보기 불편해?”
“미안하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다오.”
“나는 잘 모르겠네. 남매랑 형제가 그렇게 다른가? 아니면 나한텐 오빠고 오빠한텐 동생이라 그래?”
이해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표정만 봐도 죽을 것처럼 괴로워 보이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이보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해기가 먼저 캔을 비우고 일어났다.
“내일 형 검사랑 나 등록 마치면 가족회의 한 번 하자.”
“그렇지. 작은오빠 본격적으로 헌터 일 하고 나도 휴가 끝나면 큰오빠 돌봐줄 사람이 없어지니까. 막내 오빠 퇴원한 다음 일도 생각해야 하고. 이것저것 의논할 게 많네.”
이해기는 그게 아니라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미래가 너무 많이 변했어…….”
이보배도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했으면 그냥 개털 되었다고 하면 될 것을. 투자 망했다고 밑밥 한번 거창하게 깔았다.
* * *
“안녕하세요.”
최요한이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의 뒤에 선 박마노가 묵례했다. 이보배는 그대로 문을 닫을 뻔했다.
경찰이 있어도 깜짝 놀랄 판에 관리국 헌터님이 와 계시니 놀람이 두 배, 심장 덜컹도 두 배였다. 그것도 박마노가!
“마력 차단복은 반납했어요! 택배도 되신다고 하셔서 다음 날 바로!”
“네,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왜 오셨지? 역시 그건가?’
슬프게도 이씨 남매는 결백하지 않았다. 이해기가 지은 죄가 있었다. 각성한 지 한 달이 되어가는데 여태껏 등록을 안 한 것이다.
“오늘 등록하려고 했어요! 같이 가서 등록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벌금만은 막아야 했다. 벌금만은!
인류를 대표하는 S급 헌터 검성은 무수히 많은 업적을 쌓았다.
비각성자야 검성이 공략한 균열이나 최단기간 공략, 세계최강 등에 열광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각성자는 약간 다르다. 대한민국 한정으로 검성이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은 각종 특별법 도입이었다.
이 땅에서 헌터들을 울부짖게 만드는 법 대부분이 검성 덕분에 탄생했다. A급 헌터의 벌이 수준이 아니면 감당 못 할 만큼 벌금 액수가 커졌다.
변제 능력이 없으면 끌고 가 강제 노동을 시킨다는 소문이 있다. 이자가 붙는 건 물론이요, 그 이율이 콩팥 캐릭터가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광고하던 시절에 필적한다나 어쩐다나.
당연히 헌터들은 반발했다. 그 반발을 무력으로 짓누르고 준법정신 투철한 헌터 업계를 만든 것이 박마노의 업적이었다.
애국 헌터 박마노 가라사대, 벌금이 비싸면 법을 지키면 되잖아, 하시니. 법 조항 자체는 틀린 게 없었기에 헌터들이 납득했다 하더라.
그리고 여기, 누추한 이씨 남매의 집에 귀하신 박마노가 오셨다. 왜 오신 걸까. 한 번 봐준다고 했는데 다음 날 바로 등록하지 않은 이해기를 벌하러 오셨는가?
이보배는 전신의 핏기가 싹 가시는 걸 느꼈다. 그녀는 일단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무릎 꿇고 싹싹 빌려는 이보배를 보고 최요한이 깜짝 놀라 일으켰다.
“저희가 미리 연락드리지 않고 불쑥 찾아와 놀라셨나 보네요. 벌금 때문에 온 것 아니에요. 오늘 검사랑 등록하신다는 얘기 듣고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요.”
최요한이 말했지만 이보배는 믿지 않았다. 천하의 박마노가 오는 길에 들렀다고? 한 번이면 모를까 두 번이나 이런 핑계에 속을 리 없다. 이보배는 울고 싶어졌다.
‘어떡해. 오빠들 찍혔나 봐.’
박마노가 이보배의 오빠들을 찍은 게 분명하다. 범죄 예비군이나 사고 칠 꼴통, 뭐 이런 리스트에 올려놓고 정황을 살피러 온 것이다.
“…….”
이보배와 같은 생각인지 밖으로 나온 이해기가 얼굴을 굳혔다. 이해기는 박마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최요한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이해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뵙네요, 이해기 씨.”
“안녕하십니까.”
이해기는 최요한이 내민 손을 무시했다. 이보배가 무슨 무례냐고 등을 후려쳤다. SS급 스킬에 힘입어 그녀의 손속엔 거침이 없었다.
“끄악!”
이해기는 눈물을 삼키면서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최요한은 머쓱해하며 손을 거두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박마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박마노의 인명사전 이해기 항목에 ‘싹수없음’이 추가된 게 틀림없다.
이해기는 박마노의 표정 변화를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길 막고 뭐 해?”
화장실 간다고 꾸물거리던 이귀한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박마노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이귀한 씨! 저 기억해요?”
보나 마나 모른다고 말할 것 같아 이보배가 필사적으로 눈짓했다. 이귀한이 막내의 눈빛에 쫄아 공손하게 말했다.
“저는 힘을 숨기지 않음.”
“오, 기억하시네. 오늘이 검사일이죠? 첫 발견자의 인연이 있으니 검사까지 지켜볼까 싶어서 왔어요.”
“저는 절대 힘을 숨기지 않음.”
이귀한은 그렇게 말하고 이해기의 뒤로 숨었다. 그는 고개만 내밀어 추가로 말했다.
“인연도 다한 것 같음.”
“음……. 아니야, 형. 의외로 깊고 진한 인연이…….”
“맞아. 이해기 씨랑은 아무 연도 없지만 이귀한 씨와 나는 균열 내 던전 보스 방에서 마주친 놀라운 사이 아닙니까.”
이해기가 비틀거렸다. 누가 때리지도 않았는데 꼭 맞은 사람처럼 굴었다. 박마노는 별 싱거운 놈 다 본다는 얼굴로 이해기를 훑어보고 이귀한에게 집중했다.
“솔직히 나 아니었으면 바로 공격했습니다. 나 정도 능력 받쳐주고, 눈 좋고, 촉 산 사람이 첫 발견자라 지금까지 편히 지낸 것 아닙니까? 첫 발견자의 연을 소중히 이어가죠. 여기서 이러지 말고 탑시다. 관리국까지 태워 드릴 테니.”
“저는 힘을 숨기지 않았지만! 선빵 안 한 건 고마움…….”
박마노는 구구절절 옳은 말만 했다. 실제로 여러 편의를 봐줬고, 귀환한 후 가족 다음으로 많이 본 사람이기 때문인지 이귀한도 낯을 덜 가렸다.
“도로 쪽에 밴이 있습니다. 타세요.”
최요한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남매를 인도했다. 이보배는 얼떨결에 밴이 주차된 장소까지 따라갔다.
‘이대로 얻어 타면 집에 갈 땐 택시를? 큰오빠 상태가 괜찮으면 대중교통을 시도해 볼까?’
최요한이 문을 열자 이귀한이 냉큼 올라탔다. 이해기가 따라 타고 이보배가 오르려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병원에서 이보배에게 전화할 이유야 하나밖에 없었다. 이한생 문제였다.
“오늘 안 간다고 말했는데 난리 치나 보다. 까먹은 건 아니겠지?”
정말 뇌에 문제가 있어 기억력이 감퇴한 거라면 큰일이었다. 이보배는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밴에 탄 사람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네, 이보배입니다. 네? 오빠가 저를 찾는다고요?”
이보배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녀는 안도하여 한숨을 쉬었다. 이귀한과 이해기도 의자에 편히 앉았다.
“아……. 꾀병까지 부리면서 심하게…… 물건도 던지고. 죄송합니다. 맞은 분은 안 계시죠? 성함 알려주시면 제가 직접 찾아뵙고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식구 중에 천지 분간 못 하는 망나니가 있으면 가장이 고생하는 법이다. 이보배는 보이지 않는 상대방에게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통화가 끝난 후 이보배는 목덜미를 잡았다. 정수리와 어깨가 뻐근했다. 이귀한이 이보배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막내야, 오빠가 가서 셋째 혼내줄게.”
“쓰읍, 후우. 난 괜찮아. 병이 나쁜 거니까. 작은오빠.”
“안 돼.”
그녀가 꺼내려는 말을 알아챈 이해기가 다 듣지 않고 반대했다. 이보배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꾸 작은오빠한테만 맡겨서 미안해. 그렇지만 내가 가봐야 할 것 같아.”
“너 혼자선 안 된다. 가려면 같이 가자.”
“그럼 나도 갈래!”
“안 됩니다.”
이귀한이 외치자 박마노가 당당하게 가족 대화에 끼어들어 반대했다.
“저번에도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껴들었던 거 같은데 정말 인연이 있긴 있나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대표 던집니다. 이귀한 씨, 오늘 검사받읍시다. 빨리 검사받아야 동생도 편하게 보겠죠?”
박마노의 시선이 이귀한에서 이해기에게로 옮겨 갔다.
“그리고 이해기 씨. 내가 봐주는 건 한 번만이라고 말했을 텐데? 기억력 나쁜가 봐? 바쁜 사람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말고 좋게좋게 갑시다? 안 그럼 인벤토리 탈탈 털어보라고 할 건데. 그때부턴 안 봐드릴 겁니다. 이귀한 씨 동생이래도 짤 없어요.”
이해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보배는 괜한 고집을 부리는 작은오빠를 이해할 수 없어 난처했다.
“그냥 나 혼자 가면 되는데, 작은오빠.”
“넌 항상 그랬지. 셋째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내가 몇 번을 말해도 그 버릇 못 고치더니 결국 한생이보다 네가 먼저…….”
‘내가 언제 뛰어들어?’
막내 오빠는 식물인간으로 8년 동안 병원에 잘 누워 있었다. 그녀가 막내 오빠 일로 호출받아 달려간 건 요 며칠 사이가 전부였다.
“어쨌든 혼자는 위험하다. 나랑 같이 가자.”
‘여태껏 나 혼자 잘 다녔는데 이제 와서?’
한 대 팍 때려주면 정신 차릴까 싶어 이보배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귀한은 이귀한대로 자기만 따돌린다 여겼는지 이해기에게 달라붙었다.
“뭐야, 뭐야. 나 혼자 보낼 거야? 형만 따돌리는 거야? 너희 없으니까 안 참아도 되는 거야?”
여차하면 관리국에서 생떼를 쓰겠다고 이귀한이 경고했다.
“작은오빠, 갑자기 왜 이래!”
“미안하다, 보배야. 기우인 걸 알지만 트라우마가…….”
이보배는 답답해서 가슴을 쳤다.
“됐어! 나 혼자 갈 거니까 작은오빠는 큰오빠나 잘 챙겨!”
“혼자는 안 된다!”
“들었지? 혼자 아니면 괜찮단다. 가라, 최요한.”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박마노가 심드렁한 얼굴로 최요한에게 이보배를 가리켜 보였다. 최요한이 상냥하게 웃었다.
“제가 이보배 씨와 함께 병원에 가겠습니다. 안전은 걱정 마세요.”
“이것도 싫다면 등록 거부 의사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마노가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보배는 작은오빠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고 밴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해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최요한을 응시했다.
“혹시 제가 못 미더우시다면 다른 헌터에게 부탁할까요?”
“……천벌 콤비가 못 미더울 리 있겠습니까.”
“와, 제 이름을 아시더니 과장님이랑 제 별명도 아시네요?”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유명한 분들을.”
“이상하다. 양지 분들은 모르셔야 정상인데. 저희가 불철주야 나라를 위해 노력하는 걸 시민분들이 알아주시는 것 같아 정말 기쁘고 영광이에요.”
최요한이 순수한 기쁨을 표현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해기는 똥 씹은 표정을 짓고 내민 손을 잡아 거칠게 흔들었다.
“보배, 잘 부탁드립니다.”
“과장님 모시듯 모시겠습니다.”
최요한 대신 박마노가 운전대를 잡았다. 이씨 형제와 박마노를 태운 밴이 먼저 출발했다. 최요한이 이해기에게 받은 차 키를 들고 이보배에게 다가왔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덕분에 귀찮은 일 하나 해결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네?”
“저희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그럼 가실까요?”
최요한은 남의 차도 능숙하게 몰았다. 공무 집행을 하다 보면 다양한 차종을 몰게 되어서 운전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나 뭐라나. 병원에 거의 도착하자 이보배가 전화를 걸었다.
“네, 이한생 씨 보호자입니다. 거의 도착했습니다. 네? 병실이 아니라 재활 물리치료실로 오라고요?”
이제껏 이한생은 재활 치료를 거부해 제대로 치료에 임한 적이 없다. 게다가 전화를 받는 병원 관계자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이 느껴지지만 다급하진 않았다.
백문이 불여일견. 어차피 병원에 다 왔다. 이보배는 더 물어보는 대신 얼른 가보는 게 낫단 판단을 내렸다.
이보배나 최요한이나 재활 물리치료실 위치를 몰라 병원 지도를 보고 치료실이 있는 층수를 확인했다.
병원 엘리베이터는 이용자가 많았다. 다행히 로비에서 우르르 내려 엘리베이터엔 둘만 남았다.
‘막내 오빠 상태 설명해 둬야겠지.’
이보배는 일단 관리국 헌터님에게 망나니의 상태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망나니가 망나니짓 하다 관리국 헌터님 심기에 거슬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환자에게 관대하다. 하지만 망나니는 겉만 봐선 환자가 아니다. 혼자선 거동이 어렵지만 살과 근육이 붙었고 혈색도 좋았다. 겉으로만 봐선 약간 마른 체형의 청년으로 보였다.
그러니 사전에 망나니가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반드시 알려야 했다.
“미리 말씀드릴게요. 저희 막내 오빠 상태가 썩 좋지 않아요.”
“알고 있어요. 저도 깨어나실 때 같이 있었잖아요.”
“그때는 바로 쓰러졌는데 지금은 3시간, 4시간은 깨어 있거든요. 그때 상태 그대로 4시간.”
“아.”
최요한이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고생 많으십니다.”
“아뇨, 제가 뭘.”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혹시 많이 힘드시면 술 한잔 사드릴게요. 아, 사심 없이 순수한 호의입니다.”
‘동정이겠지.’
사심이 하나도 없는 순수 100퍼센트 연민과 동정이다.
이보배는 각성한 범죄자 잡으러 다니면서 어지간한 막장은 다 보았을 관리국 헌터의 동정을 사는 데 성공했다. 이게 다 오빠를 잘 둔 덕이다.
* * *
“야 이 새끼들아!”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약속한 것처럼 거친 욕설이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보배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최요한을 제치고 치료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최요한은 금방 그녀를 앞질러 먼저 문을 열고 가로막았다.
“음?”
“간악한 흑마술사 놈들! 사술을 풀어라아아아아!”
위험 요소가 없다고 판단한 최요한이 이보배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이보배는 치료실 안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들려오는 소리가 요란해 문 열면 물건 날아올 것도 각오했다. 그런데 소리만 요란하지 치료실 내부는 평화로웠다.
“허억, 허억, 허억, 시이발.”
딱 한 명, 러닝머신 위에서 쌍욕을 뱉으며 달리는 이한생만 빼고.
혼자선 거동이 어렵던 이한생이 어떻게 뛰는가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자. 지금 눈앞에서 뛰고 있으니까.
환자복이 땀에 젖을 정도로 열심히 달리던 이한생이 갑자기 러닝머신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쓰러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3분 후, 발작하듯 일어나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 내게 어떤 마술을 건 거야!”
격렬하게 섀도복싱을 하던 이한생과 이보배의 눈이 마주쳤다. 이한생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했다.
“네 이년! 주인이 사악한 저주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놀고 있느냐!”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막내 오빠. 진짜 환청이라도 들려? 누가 운동 안 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해?”
“아악!”
5분이나 지났을까. 여전히 어깨를 위아래로 들썩이며 거칠게 호흡하던 이한생이 사지를 퍼덕였다. 그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식물인간 1년 차엔 보배가 열심히 관리하고 이후엔 간병인에게 추가금까지 줘가며 관리한 귀한 치아였다. 그걸 깨 갈듯이 빠득빠득 갈더니.
“훅! 훅! 후욱!”
느닷없이 제자리에서 팔 벌려 뛰기를 시작했다.
“말려야 하지 않을……. 몸이?”
최요한이 꽤 걱정스러운 눈으로 다가가다 멈췄다. 이보배가 말리려 하자 지켜보던 간호사가 그녀를 붙잡았다.
“운동 중에 말리면 발작해요.”
“네?”
“처음엔 평소처럼 환청과 환각 증세를 호소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끔찍한 통증을 몇 차례 호소하고, 그 뒤엔 갑자기 재활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우겨서 이리로 오게 된 거예요.”
“그렇지만 저건 재활 치료라기엔 너무…… 과격한데요. 지금 오빠 수준에 저렇게 과격한 운동을 해도 되나요?”
“원래라면 저렇게 뛰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죠. 이한생 씨 진정되면 정밀 검사 들어갈 예정입니다.”
간호사가 보호자 서명이 필요한 용지를 건넸다. 때맞춰 이한생이 100을 크게 외친 후 바닥에 쓰러졌다. 이보배는 서명보다 막내 오빠부터 챙겼다.
“무슨 일이야! 왜 이러는데!”
“무, 무슨 일이냐니. 너희가 내게 저주를 걸지 않, 후욱, 허억허억, 걸지 않았느냐! 시끄럽고 난잡한 것이 내 주위를 떠돌더니 이젠 아예 명령까지! 내 비록 오늘은 고문에 굴복했지만 내일은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젠장! 안 하면 또 고문한다고? 반복? 바안복?”
이한생이 입에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갔다. 이보배는 막내 오빠가 쓰러지는 줄 알고 상체를 받쳤다. 이한생이 믿기 힘든 힘으로 사지를 퍼덕였다.
“이 잔인한 놈들!”
그가 신고 있던 삼선 슬리퍼가 허공을 날아 이보배의 정수리로 수직 낙하했다. 최요한이 떨어지는 슬리퍼를 가볍게 낚아챘다.
“이해기 씨가 걱정할 만하네요. 막내 오빠분 행동이 주위를 배려하지 않으시는 게 꼭 성장기 대형견 같습니다.”
개 같다 이 말이다.
너 개 같단 말에도 망나니는 조용했다. 그대로 쓰러져 잠든 것이다.
의료진이 이한생을 침대에 눕히고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이제 검사실로 가면 된다. 이보배는 간호사가 줬던 용지에 서명을 하려 했다.
화르세인지 드 체키빙 공자는 정밀 검사가 시급했다. 이건 기억상실보다 안 좋았다.
“잠시만요, 이보배 씨.”
“네?”
“제가 눈으로 봤을 때 이한생 씨는 아주 건강하세요. 혹시 뭔가 떠오르는 게 없으신지?”
최요한이 이한생의 발에 슬리퍼를 신기는 걸 보며 이보배는 그의 말을 되짚었다.
떠오르는 거. 떠오르는 거야 많다.
화르세인지로 깨어난 이후 지속적으로 호소한 환청과 환각.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 같다는 시끄럽고 반복적인 소음. 사람과 대화하거나 무언가에 집중할 땐 괜찮지만 집중이 흐트러지면 그를 괴롭히는 정신 사나운 환각.
의사가 깜짝 놀란 회복 속도와 오늘 보여준 놀라운 모습. 갑자기 벌인 기행과 누군가에게 기행을 명령받았다는 주장까지.
‘설마.’
짚이는 게 있었다. 이보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최요한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막내 오빠가.”
“네. 각성하신 것 같습니다.”
“환각은 시스템 알림창, 환청은 알림음. 그러면 이야기가 맞네요. 그렇지만 이상한 게 남았어요.”
감히 공작가 후계자인 그에게 명령하는 흑마술사의 사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행해지는 고문. 몸에 이상이 없어 꾀병 소리를 듣게 만드는 고문은 각성으로도 해명되지 않는다.
그 의문의 답, 이보배는 모르지만 최요한은 알고 있었다.
“퀘스트를 아십니까?”
퀘!
스!
트!
그것은 각성자 사이에서 도시 전설로 떠도는 시스템의 기능 중 하나이다. 시스템이 각성자에게 특정 임무를 내린 후, 각성자가 임무를 달성하면 적절한 보상을 준다.
실제로 받은 사람도 있지만 못 받는 사람이 더 많았다. 퀘스트 받는 놈만 계속 받는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특히 최근엔 퀘스트를 받았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이 줄어들어 패치로 삭제되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 퀘스트를 막내 오빠가 받았다고요? 그렇지만 통증은…….”
“퀘스트 중엔 실패 시 페널티를 주는 것도 있습니다. 이한생 씨의 경우엔 고통이 페널티였던 거죠.”
“그럼 얘기가 딱딱 맞아요.”
이보배는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벌렸다. 이한생의 회복이 기이할 정도로 빨랐던 건 각성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깨어난 것도 각성 덕분일지 몰라.’
각성자는 각성하는 순간 체력과 근력, 민첩 등의 신체 능력치가 건강한 20대 청년 수준으로 고정된다. 직업과 스킬에 따라 세부 능력 변화는 있지만 최저 능력치는 그 정도 수준이었다.
병약했던 사람도 건강해지는 것이다. 감기에 걸렸다면 씻은 듯이 완쾌하고 중병에 걸린 사람도 나았다는 기록이 있다.
각성해서 각성했다. 말이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럴싸한 가정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대로 이한생 씨가 깨어나길 기다리실래요? 아니면 관리국으로 가시겠어요?”
“기다릴래요. 막내 오빠가 언제 깨어날진 모르겠지만 깨어나면 물어볼 것도 많고요. 아, 막내 오빠가 각성한 게 맞다면 등록은 반드시 하겠습니다.”
“별말씀을요. 관리국이 그렇게 야박하진 않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좀 진정된 후에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보다.”
최요한이 복도를 가리켰다. 환자용 엘리베이터 쪽에서 괴성이 들렸다.
“크아아악! 이 천벌 받을 흑마술사 놈들! 이 새끼들아!”
“이한생 씨가 금방 깨셨네요.”
사람이 한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이보배는 터덜터덜 걸으며 이해기에게 문자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