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71)
“우리가 생존자 수색하려고 해서 그렇지 보스 찾으러 가는 건 어렵지 않아. 할 만해.”
던전 구조가 변경될 시점이 되자 미약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인접한 방에 분산돼 있던 길드원이 한데 모였다.
석실에 꽉꽉 들어차 광역 공격에 취약한 구성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방의 통로에 탱커가 배치되고 마법사들은 즉시 방어 마법을 발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지도 스킬을 보유한 길드원은 집중해서 스킬을 사용했다.
방이 움직일 때마다 3D로 구현된 지도 속 파티의 위치가 동시에 움직였다.
진동이 멎었다. 사방에 난 통로는 고요했다.
어둠 속의 급습을 대비했던 헌터들은 아무 일도 없자 탱커를 앞세워 각자 정해진 방으로 이동했다.
개중 한 명이 외쳤다.
“길드 마스터! 생존자를 발견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빙제 옆을 지키고 있던 질풍 방패가 생존자를 발견한 방으로 이동했다. 전투 연금이 자연스레 뒤따랐다.
생존자는 놀랍게도 이해기였다. 사진보다 많이 말랐지만 이목구비와 일부 복장이 일치했다.
방구석에 기대앉은 그는 일어날 기력도 없는지 눈만 굴려 사계절 길드원을 응시했다.
입을 벌리긴 했지만 입술은 물론이고 입안과 목도 바싹 말라 바람 새는 소리만 들렸다.
사계절 길드원은 기적적으로 생존한 생존자에게 바로 접근하지 않았다. 확실한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균열 내에서 조우한 이를 신뢰해선 안 됐다.
추효풍 뒤에서 [현자의 외알 안경]을 장비한 한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계절 길드원들은 그제야 이해기에게 달려들어 이온 음료를 건네고 부상을 살폈다.
“이해기 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저흰 사계절 길드입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질풍 방패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살아 있었을 줄이야.”
“각성했어요.”
[현자의 외알 안경]으로 이름과 상태만 확인한 한현우가 말했다.추효풍이 혀를 내둘렀다.
“각성했어도 혼자서 이렇게 버티다니. 근성이 장난 아니네. 하긴 동생 쪽도 근성 장난 아니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보석 씨였나?”
“보배요.”
“보배 씨도 이제 한시름 놓겠네.”
한현우는 직접 다가가 이해기의 부상을 살폈다.
이해기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을 정신으로 붙잡은 상태였다.
동생의 이름을 들었는지 약간의 적의와 경계가 뒤섞인 시선이 한현우에게 닿았다.
“안녕하십니까, 이해기 씨. 저는 사계절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 한현우입니다. 이보배 씨의 부탁으로 구하러 왔습니다.”
“보배는…….”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죠. 약속을 지켜서 보배 씨가 아주 좋아하겠네요.”
남매가 나눈 약속을 언급하자 이해기의 눈에 있던 경계가 풀렸다.
한현우는 이해기가 기절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계속 버텼다.
“다른 사람들은?”
“저희가 묻고 싶은 말이군요. 왕도훈 씨의 행방을 알고 계십니까?”
“사망했습니다. 시신은 제가 인벤토리에…….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현우는 던전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온 퓨처 기업 도련님과 소수를 제외하면 전멸임을 알렸다.
이해기는 전멸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
“그렇습니까. 다들…….”
던전을 헤매면서 인간쓰레기의 시신을 확인했으나 다른 헌터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 걱정하고 있었다. 짐꾼을 일부러 낙오시키는 것이 인간쓰레기의 독단적인 행동이라면 괜찮으나 동료들도 묵인하거나 동의했을 경우 혼자 살아남은 이해기를 살인 멸구하려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전부 죽어서 다행이다.’
나쁜 생각이지만 이로써 동생은 안전해졌다.
이해기의 얼굴에 미약한 안도가 스쳐 한현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다시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해기는 눈을 감더니 그대로 기절했다.
기절한 와중에도 한 손에 쥔 검을 놓지 않았다.
두 달 넘는 기간 동안의 고초가 짐작 가기에 사람들은 검을 억지로 떼지 않았다.
* * *
이해기는 눈을 떴다.
집은 아니지만 꽤 익숙한 천장이 그를 반겼다. 천장보다 더 익숙한 공기가 그가 깨어난 장소를 알려주었다.
“병원…….”
“그래, 병원이야.”
이해기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 거기 있었다.
동생의 눈가는 붉었지만 울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해기는 안다. 하나뿐인 동생은 눈물을 잊은 지 오래였다.
“느낌 좋다고 설레발 치더니 아주 꼴좋다.”
이보배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동생의 퉁명스러운 얼굴을 보니 던전에서 빠져나왔다는 실감이 났다.
“너는 어떻게 오빠가 사지에서 돌아왔는데 울지도 않냐. 사람 섭섭하게.”
“약속 먼저 어긴 게 누군데 그래?”
“돌아왔잖아.”
“내가 집으로 돌아오랬지 병원으로 돌아오랬어?”
이해기가 생사를 넘나드는 동안 동생은 마음 졸이며 그를 기다렸다. 얄팍한 희망 하나 붙잡고 견디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해기도 알았다.
이해기가 아무 말 않자 동생은 대놓고 그를 타박했다.
“도대체가, 느낌이 좋긴 뭐가 좋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힘은 힘대로 들고, 이렇게 비쩍 말라서는 막내 오빠랑 똑같네. 우리 길드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죽을 뻔했잖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러니까 거길 왜 들어가냐고. 다른 짐꾼들은 다 던전 밖에서 기다렸다는데 뭐 얻어먹을 거 있다고 거길 들어가서 개고생을 해.”
말하면서 화가 치밀었는지 이보배가 계속 눈가를 문질렀다.
이해기는 동생의 잔소리를 들으며 속을 다스렸다. 사실 그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나 죽을 뻔했어.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살해당할 뻔했어. 세상에 왜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몬스터에게 죽는 상상은 몇 번 해봤는데 사람이 날 죽이려고 하니 정말 무섭더라. 그것 말고도 무서운 게 많았어. 식량과 물이 줄어들 때마다, 몬스터와 조우할 때마다, 주기적으로 던전이 움직일 때마다, 시체를 발견할 때마다, 숨 쉬고 뱉는 순간순간이 무서웠다.’
기껏 각성해 놓고 던전에서 아사하는 건 아닐까. 사실 이 모든 일이 몬스터에게 잡혀 죽기 전에 꾸는 백일몽이면 어쩌나.
쉬지 않고 움직이는 동생의 입처럼 이해기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털어놓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이해기는 그러지 않았다. 던전에서 탈출한 다음 그가 동생에게 해줄 말은 처음부터 딱 한 문장으로 정해져 있었다.
“느낌이 좋긴 뭐가 좋아. 두 번 느낌 좋았다간 오빠 죽고 나도 죽겠네. 또 균열 들어간다고 하면 도시락 싸서 말릴 거야.”
“그건 안 되겠다.”
“이 난리를 당해놓고 균열에 또 들어가겠다고? 오빤 무섭지도 않아?”
이해기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주스병을 잡았다.
주스병을 인벤토리에 넣었다가 빼내니 동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오빠가 느낌 좋다고 말했잖니. 나 각성했어.”
“뭐? 정말? 진짜야? 이거 진짜지? 진짠 거지?”
동생이 놀라다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친 동작에 의자가 넘어져 뒤로 넘어졌다.
이보배는 이곳이 병실이란 사실을 잊고 비명을 질렀다. 펄쩍펄쩍 뛰었다.
“꺄아아아아악!”
좋아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반응이 이해기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보배는 체면과 장소를 무시하고 기뻐했다. 비명을 듣고 온 경비원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이 터지라 외쳤다.
“우리 오빠가 각성했어요!”
“마음은 알겠는데 정숙해 주세요.”
“각성했다니까요!”
“정숙!”
“우리 오빠가, 작은오빠가요. 각성하고 싶어서 위험하게 자꾸 균열 들어가다가. 이번에 진짜 죽을 뻔했는데. 나만 혼자 두고 갈 뻔했는데. 각성했어요. 흐윽.”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하던 동생의 말이 늘어지다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이해기는 화들짝 놀랐다. 이한생이 쓰러진 이후 여동생은 울지 않았다. 가끔 몰래 울었지만 요 몇 년 사이엔 그나마도 없었다.
“보배야, 왜 울고 그래.”
“너무 좋잖아아아.”
이해기는 동생을 달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동생은 내민 손을 사양하지 않고 그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데 왜 울어. 웃어야지.”
“흐윽흐윽.”
“계열은 전투계고 직업이랑 스킬도 꽤 좋아.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니까 울지 말자.”
“으아아아앙!”
이해기의 동생은 아주 오랫동안 눈물을 잊었었다.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울지 않았다. 하지만 기쁨의 눈물까지 잊지는 않았나 보다.
큰불 뒤에 쏟아지는 장대비처럼 이보배는 눈물을 쉽게 그치지 못했다.
뜨거운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져 이해기의 손바닥에 고였다. 이해기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물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의 형은 강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이해기는 형을 닮지 못해 동생을 내내 고생시키기만 했다.
남동생처럼 목숨 걸고 동생을 지키지도 못했다.
그치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형처럼 남동생처럼 막내를, 하나 남은 가족을 지킬 것이다. 호강시켜 줄 것이다.
공주처럼 모시고 여왕처럼 떠받들어 줄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자는 형과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
이해기는 손을 적시는 동생의 눈물에 걸고 맹세했다.
* * *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각성 전의 이해기와 각성 후의 이해기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다른 삶을 살았다.
용사는 이해기가 걱정한 어중간한 잡캐가 아니었다. 유니크한 직업만큼이나 스킬은 사기적이었고 성장 속도도 남달랐다.
이해기는 헌터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가파르게 성장했다.
대형 길드의 러브 콜이 이어졌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헌터 랭킹에 그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해기의 독주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사람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천재에게 열광했다.
무서울 정도로 인생이 쉬웠다.
꼭 이 균열 난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운이 따랐다. 부와 명예는 감사한 게 아닌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바뀌었다.
통장에 들어보지 못한 액수의 돈이 쌓였고 반지하 전세에서 마당 딸린 삼층집을 구매해 이사했다.
돈 때문에 야근을 자처하던 동생이 직장을 그만두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조금 바빴지만 이해기는 만족했다.
그가 움직일수록 강해지고, 동시에 균열로 인해 발생할 불행을 막을 수 있다.
강해지면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니 실로 과분한 행운이었다.
균열과 몬스터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류에게 천재 헌터는 영웅 그 자체였다.
이해기가 각성 직업을 밝히지 않았어도 이미 그는 인류의 용사고 영웅이었다.
숨 쉴 틈 없이 질주하는 와중에도 운명은 그를 찾아왔다.
“구해줬는데 고맙다는 말을 못 했죠. 고맙습니다.”
관리국의 박 과장, 박마노는 이해기에게 구출된 후 한 달이 지난 뒤 불쑥 찾아왔다.
그녀는 피로한 안색으로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널리 알려진 호탕하고 오만한 웃음과 거리가 멀었다.
이해기는 박마노의 변화를 이해했다. 아끼던 부하가 죽었으니 상심이 클 것이다.
“요한이 장례식 때도 와주셨는데 그때도 인사 못 하고. 미안해요, 그때 제가 경황이 없어 가지고.”
“괜찮습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용건은 이게 단데. 바쁜 사람 보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박마노는 인사치레용으로 가져온 멜론을 두고 일어났다.
“그럼 이만. 혹시 관리국에 관심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시고.”
박마노는 밝게 말했지만 일부러 그러는 티가 났다.
밝은 미소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자책과 후회가 이해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니, 실은 균열에서 그녀를 구한 후부터 줄곧 박마노를 잊을 수 없었다.
세상 두려운 것 없이 오만하던 웃음이 사라지고 쓸쓸한 미소만 남은 게 마음에 걸렸다. 자꾸 이해기의 속을 뒤집었다.
그래서 이해기는 저도 모르게 박마노를 불러 세웠다.
“박 과장님, 식사하셨습니까?”
박마노는 고개를 돌려 이해기와 눈을 마주쳤다.
이해기는 떨지 않도록 노력했다. 어지간한 균열의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보다 더 떨렸다.
“아직 식전이면 저와 같이 드시죠.”
박마노는 대답하지 않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나 연애보다 일이 우선인 사람인데, 그래도 괜찮아요?”
“네.”
“적도 엄청 많은데. 그래도?”
이해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기는 그에게 찾아온 운명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워낙 적이 많은 사람이라 이해기도 덩달아 적이 늘었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단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모든 것이 완벽하진 않았다.
이해기가 정신없이 가파른 성장 계단을 뛰어오르고, 나쁜 악당과 싸우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와 우정을 나누고, 운명적인 연인과 사랑을 키우는 동안 하나 남은 동생과의 사이는 소원해졌다.
이해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탓은 아니었다.
동생의 고집이 문제였다.
세계에서 제일 강한 헌터를 오빠로 뒀으면서 동생은 고행을 자처했다. 직장을 그만둔 동생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포션을 제작하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이해기는 그런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배야, 언제까지 한생이에게 집착할 거니?”
“작은오빠야말로 왜 요즘은 막내 오빠에게 안 가봐? 일이 바쁘더라도 잠깐 들를 수는 있잖아.”
“벌써 몇 년째니. 이제 한생이를 놔주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막내 오빠를 버리겠다는 거야? 돈 많잖아, 잘 벌잖아! 이젠 병원비가 부담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솔직히 저건 억지로 숨만 붙여둔 거지 살아도 산 게 아니다. 한생이도 저 상태로 있는 게 괴로울 거야. 난…… 한생이를 우리 욕심에 억지로 살려두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
“우리가 아니겠지. 내 욕심이겠지. 작은오빤 막내 오빠 살릴 마음이 없는 거잖아.”
“어떻게 그런 말을 해? 한생이도 내 동생인데 내가 살리고 싶은 마음이 없겠니?”
“그러면 날 도와줘야지! 말리지 말고 도와야지!”
“내가 무작정 널 말리는 게 아니잖니. 솔직히 난 네가 한생일 놔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막내 오빤 안 죽었어!”
“솔직히 이만하면 할 만큼 했어. 이제 그만 한생일 놔주고 네 삶을 살아야지.”
“내가 어떻게 그래!”
이보배가 이해기를 밀쳤다. 그녀는 초췌한 얼굴로 강철보다 단단한 이해기의 가슴을 때렸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감히! 막내 오빠가 나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보배야, 진정하고 우리 침착하게 대화 좀 하자. 너도 나도 바빠서 제대로 자리 잡고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잖아.”
남매는 대화가 필요했지만 세상은 이해기에게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긴급 연락용 핸드폰이 울렸다.
이해기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이보배는 회복 포션을 던지며 일갈했다.
“꺼져! 가서 사람이나 구해!”
이해기는 이보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릴 때 큰일을 겪어 강제로 조숙해진 동생이 안타까웠다. 어려서 많이 힘들었으니 앞으로 남은 인생을 즐겨도 모자랄 판에 왜 고행을 자처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꼭이다.”
남매 회의는 계속 미뤄졌다.
이해기는 바빴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그를 찾았다. 그가 거절하면 누군가 죽는다. 시스템상의 직업이 용사지 진짜 용사인 것도 아닌데 이해기는 책임감을 갖고 균열에 진입했다.
집에 박혀 연구하는 동생은 안전하고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그런 생각에 자연스럽게 남매 회의를 뒤로 미뤘다.
그래도 안달하지 않았다. 친구, 동료, 지인, 애인이라면 사이가 멀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보배는 괜찮았다. 동생이니까, 가족이니까. 이해기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관계를 복구할 수 있다. 세상에 둘만 남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동생이 많이 삐쳤더라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면 금방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것이다. 이해기가 그렇듯 이보배도 절대 그를 등질 수 없을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에.
“…….”
이해기는 떨리는 손으로 협박장을 집어 들었다. 협박장엔 피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성은 협박장을 만져선 안 된다고 외쳤다.
당장 관리국과 경찰에 신고하고 협박장을 조사해 이것이 진짜 혈흔인지 알아내고, 사람의 피가 맞다면 피의 주인이 누구인지 검사해야 한다.
“…….”
이해기는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가락으로 혈흔을 건드렸다. 말라붙어 굳은 피임에도 불구하고 닿은 부위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아직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으나 이해기는 확신했다.
이건 동생의 피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 묻은 자리가 불에 덴 듯 화끈거릴 리 없다. 손바닥에 동생의 눈물이 고였을 때보다 뜨겁고 더 고통스러웠다.
이해기는 새삼 깨달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불보다 뜨거웠다.
일주일 뒤 납치범이 붙잡히고 동생이 돌아왔다.
정정하자. 살인범이 붙잡히고 동생의 몸이 돌아왔다.
이해기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지만 돌아온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범인은 이보배나 이해기와 일면식 없는 타인이었다.
돈을 노린 납치였다고 진술했지만 협박장과 일치하지 않았다.
협박장을 받은 날부터 내내 이해기는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아주 질 나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도무지 이것이 현실임을 믿을 수 없었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해기 대신 애인인 박마노가 모든 일을 처리했다. 누가 봐도 쓰다 버린 패인 범인들을 취조해 거슬러 올라 살인 교사범을 찾기 위해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