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martial artist RAW novel - Chapter 31
제1화 대흑마괴와 흑골
발록.
언제나 전의에 불타는 마왕급 악마다.
산양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산양의 뿔과는 다른, 어찌 보면 피가 잔뜩 묻은 망령의 창 같은 뿔이 머리에 박혀 있다. 거대한 검은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마기가 뿜어져 나와 높게 치솟아 오른다.
양손에 들고 있는 화염의 채찍은 가르지 못할 것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공기까지 증발시키니 그 주위는 언제나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그림자로 덮여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안면에서 유난히 번쩍이는 붉은 섬광. 그것은 마주치는 자마다 죽음의 공포로 소스라치게 만드는 눈빛이다.
쉭
한 번 휘둘러진 채찍이 신관들의 몸을 절단하고 도시를 화염으로 휘감았다.
“어리석은 인간들…….”
어느 누가 악마의 목소리는 매혹적이라고 했던가?
공포의 심연 저 끝에서 끌어내는 목소리.
목소리는 사방으로 울려 퍼져 사람들을 공포로 내몰았다.
소리는 매우 소름 끼쳤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살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괴기한 흑빛의 해골이 움직이고 있었다.
킹스켈레톤!
“으악!”
킹스켈레톤은 마검을 휘둘러 백성들을 베기 시작했다. 강력한 힘이 실려 있는 마검은 거침이 없었다.
드드득 드드득
뼈 마찰음이 들릴 때마다 어김없이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잇따랐다. 그의 발밑에 급격히 시체가 늘어나고 있었다.
“즐거운 파티군요.”
마족 아르메이스가 발록 옆에 서며 웃었다.
긴 머리칼이 허리까지 닿아 얼핏 여자로 오해할 만도 하지만 그는 엄연히 남성성향의 마족이었다.
상당한 미남형의 얼굴이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에 조각 같은 얼굴선, 그리고 살짝 드러난 하얀 목.
모두 매혹적이다. 몸에 딱 맞는 검은 제복을 입은 그는 마족이라기보다는 에드먼 제국의 교양 있는 청년귀족 같은 모습이었다.
아르메이스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미소 역시 부드러웠지만 간간히 살짝 보이는 눈동자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교, 교황님!”
대신관 홈은 죽은 교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화염이 떨어졌다. 아니, 화염의 채찍이 떨어졌다.
주위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홈은 화염 속에서 일말의 비명도 없이 쓰러졌다. 고통으로 인해 흔들거리는 그의 눈에 주변풍경이 들어왔다.
이곳은 낙원이 아닌 지옥이다.
그것을 끝으로 그는 정신의 끈을 놓쳤다.
화락
발록이 날개를 펄럭였다. 큰 바람이 불어 주위를 파괴하던 불길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어둠 속에 녹아든 발록.
허공에서 적색의 눈을 중심으로 불타오르는 두 개의 채찍이 춤을 추었다.
채찍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땅이 갈라지고 흔들거렸다. 신전들과 건물들은 모래성처럼 부서져갔다.
“모두 도망치십시오! 빨리!”
살아남은 아홉 명의 대신관은 백성들과 함께 후방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런 그들 앞으로 아르메이스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성기사들이 대신관들 앞에 서며 그를 경계했다.
“아, 아르메이스인가.”
대신관 에스힐이 경악하며 말했다.
고문서에 나와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더군다나 고문서에 ‘그의 미소에 현혹되지 말라’고 적혀 있을 만큼 그의 미소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대신관들은 백성들 앞을 가로막았다. 함께한 신관들도 모두 메이스를 뽑아 들고 아르메이스를 경계했다.
그런데도 그는 도저히 발록이나 킹스켈레톤처럼 사악한 존재로 보이지 않았다.
“역시 전 유명하군요.”
아르메이스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어, 어째서 너희들이 내려온 것이더냐!”
에스힐이 외쳤다.
“저런, 저런……!”
아르메이스는 집게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랑스러운 우리 신도님들께서 간곡히 원하시는데 어찌 군주님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군주 발록님께서 내려오실 때 저 역시 내려오고 싶다고 간곡히 청했지요.”
“닥쳐라!”
대신관 라이트핸드가 소리를 질렀다.
“저런, 우리 신도님들이 이렇게 입이 험하시다니. 참 슬픈 일입니다.”
아르메이스는 피식 웃었다.
“내 죽어도 기어이 저놈을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모두 빨리 수도에서 벗어나십시오.”
라이트핸드가 모두에게 말하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에스힐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늦었다. 라이트핸드는 이미 훌쩍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강한 성기사단 ‘율’단 100여 명이 라이트핸드를 따르고 있었다.
“그자에게는 안 됩니다, 라이트핸드님.”
에스힐은 중얼거렸다.
“인간계에서 말하는 결투를 신청하는 것입니까?”
아르메이스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검은빛이 감도는 그것은 레이피어처럼 가늘었고 레이피어보다 더 길었다.
챙
100여 명의 성기사들도 검을 뽑았다.
“내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라이트핸드가 두 손을 모았다. 고집스러운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모여야 할 성력이 모이지 않는다.
아르메이스가 라이트핸드를 보며 웃자 그제야 라이트핸드는 ‘아!’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마계에서 사악한 수법으로 발록을 강림시켰다 해도 율리안님이 존재하시는 한 성력은 여전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성력은 조금도 모이지 않았다. 이 뜻은…….
“정녕 율리안님께서는 존재하시지 않는단 말인가.”
“율리안은 엔테과스토님께서 지하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오랜만에 신도님들과 대화를 나눈 것은 즐거우나 이미 검을 빼 들었니 제가 먼저 들어가도록 하죠. 큭!”
“말도……안 돼.”
라이트핸드는 고개를 저었다.
발록이 강림하여 대륙을 파괴한다 해도 주신 율리안님이 있는 한 대륙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하지만 그분께서 계시지 않는다.
애초부터 마신의 술수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동안 내려왔던 부드러운 그 음성은 마신이 뻗는 죽음의 손길이었다.
“갑니다!”
아르메이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성기사단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긴 검이 성기사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는 순식간에 라이트핸드 앞에 도달했다.
동시에 100여 명의 성기사들이 아쉬운 생명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아아…….”
라이트핸드는 뒷걸음쳤다.
아르메이스의 레이피어가 라이트핸드의 가슴을 찔렀을 때 대신전 주위에선 큰 소리가 울렸다.
킹스켈레톤이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이마에 박힌 마신의 인이 붉게 빛났다.
대신전 뒤에는 수많은 묘비가 있었다. 죽은 신관들의 공동묘지였다.
드드득 드드득
킹스켈레톤의 뼈 마찰음이 묘비를 진동시켰다.
묘비의 땅이 흔들거렸다.
팟
살은 전부 썩어 문드러진, 뼈만 남은 팔 하나가 땅속에서 뛰쳐나왔다.
그 현상은 주위로 번졌다. 묘비 속에서 흙을 파헤치며 해골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킹스켈레톤이 백성과 신관들을 향해 검으로 가리켰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시미타 한 자루씩을 쥔 해골들은 백성들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수백 마리의 스켈레톤!
이따금씩 반항하는 성기사의 칼 앞에 부서지는 게 보였다. 그러나 곧 뼈들은 움찔거리며 본래의 형태로 붙었다.
스켈레톤의 등장으로 백성들의 비명 소리는 더욱 애절해져갔다.
발록의 시선이 옮겨졌다. 도망치는 대신관들 쪽이다.
발록은 검은 두 날개를 펄럭이며 그들에게 날아갔다. 대신관과 주위 백성들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덮쳤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 위를 올려다보니 발록이 있다!
“꺄아아아악”
사나 대신관은 비명을 질렀다.
발록은 기다렸다는 듯 채찍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는 가볍게 휘두른 것이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사나를 중심으로 수십 명의 백성들이 화염에 휩싸여 광란의 춤을 추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발록은 무리 속에 착지했다.
대신관 에스힐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땅에 떨어진 메이스 하나를 주워들어 발록을 노려보았다.
에스힐보다 서너 배 이상 커다란 발록. 그는 에스힐을 내려다보며 음침한 음성을 흘렸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너희들의 청에 따라 엔테과스토님의 명을 받들어 나 검은 군주가 내려왔다.”
“아, 악마! 썩 마계로 돌아가라!”
“인간이여, 네게 마계로 갈 수 있는 특권을 주겠다.”
발록의 어깨 뒤에서부터 휘둘러진 채찍이 주위로 몰아쳤다.
에스힐은 일말의 반항도 못했다. 화염 속에서 온통 빨개진 세상을 보며 숨을 거둘 뿐이다.
신성대국 율리안의 수도 세크리드는 순식간에 파괴되었다.
검은 군주 발록. 그리고 그와 함께 강림한 킹스켈레톤과 웃는 마족 아르메이스.
이 세 존재가 벌이는 피의 향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열기가 더해갔다.
낙원을 기대했던 백성들은 지옥을 보며 죽어갔고, 더 이상 내려지지 않는 성력에 절규하던 신관들이 스켈레톤들의 시미타 앞에 목숨을 잃어갔다.
세크리드 대신전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뿐이랴!
수많은 역사적 유적과 건물들…… 무매하게도 신성하다고 여겨졌던 그것들 또한 발록의 채찍 아래 녹아내리고 말았다.
시간이 지났다.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그곳에 정적이 흘렀다. 시미타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스켈레톤의 발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웃는 마족 아르메이스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탑 위에 앉아 밑을 내려다보았다.
파괴된 세크리드의 거리.
스켈레톤들이 숨은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한 번씩 거리 저편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스켈레톤에게 발각되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아르메이스는 한숨 잘 자고 일어난 듯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밑으로 뛰어내려 킹스켈레톤과 함께 발록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르메이스…….”
“예.”
“문을 막고 있는 네 개의 봉인물을 찾아라.”
“예.”
아르메이스는 빙그레 웃었다.
“킹스켈레톤…….”
킹스켈레톤의 눈빛이 번쩍였다.
“너는 나와 같이 대륙을 파괴한다.”
승천하는 용 같은 눈썹을 가진 청년.
그는 용좌에 앉아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일로가 수라혈마 스승님에게서 도망칠 방법이 없다.
손이 닿자마자 사라지다니!
필히 누군가 도와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라혈마 스승님의 말에 따르면 도와준 자는 없다고 했다.
그럼 어떻게?
더군다나 ‘나는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라니? 그가 들고 갔던 마법서가 어떤 단서가 될 수 있을까?
주첨기는 생각을 마치고 실리아를 불렀다.
“부르셨나요?”
실리아는 주첨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말했다.
“그가 본래 마법을 쓸 수 있었는가?”
“그라면……?”
“이번에 도망친 네 동료 말이다.”
“아니요. 머리가 안 좋아서 마법은 전혀…….”
“그럼 그가 가지고 도망친 마법서들이 무엇인지 아는가?”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의 마법서와…….”
“잠깐!”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라고 했는가? 그가 누구지?”
들어본 이름이다.
“자세한 것은 밝혀진 바가 없지만 역사상 9서클의 한계에 도달한 몇 안 되는 마법사입니다.”
실리아는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주첨기와 대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 문초를 당하는 듯한 기분은 무척이지 싫었다.
“네 동료는 사라지기 전에 자신을 대마도사 루소베르테스라 칭했다고 한다. 실리아, 짐작 가는 것이 있는가?”
“예? 파일로가 자신을 루소베르테스라 했다고요?”
주첨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리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주첨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한 가지 전설을 떠올렸다.
루소베르테스가 죽을 때 한 가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 루소베르테스는 불사의 몸으로 페이지가 펼쳐질 때 어둠과 함께 돌아오리라.’
여러 마법사들이 그의 말을 연구했다.
‘페이지가 펼쳐질 때’란 ‘봉인한 것이 열리다, 혹은 세상이 난세로 치닫다’ 두 가지로 해석했다.
그런데 그런 표현이 아니었다. 단지 문구 자체로 페이지가 열릴 때로 해석하면 되는 것이었다.
애초에 루소베르테스가 마법서를 남겼다는 사실이 알려지지도 않은 그 상황에서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생각으론 빙의된 것 같다.”
주첨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맞아요. 그 마법서를 열면 빙의되는 것이었어요.”
실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순간 실리아는 뒤통수가 싸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표지와 제목을 보면서 마법서를 구분했다. 만약 페이지를 열었다면 빙의된 건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일로는…… 어떻게 된 걸까?’
“신기하군.”
말과 다르게 주첨기는 화가 난 표정이다. 자신의 황성에 어떠한 것이 존재하는지 지금껏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주첨기는 실리아에게 명했다.
“분명 이번과 같은 희귀한 마법서들이 존재할 터. 실리아, 그것들을 분류하여 내게 보고해 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짐은 파일로에 대한 그대의 죄를 눈감아주겠다.”
실리아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답했다.
“예!”
“우리는 마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불길이 치솟는 수도를 바라보는 신관들과 성기사들의 마음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동안 믿고 따랐던 신이 마신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재앙과 같은 사건이었다.
발록과 스켈레톤들에 의해 파괴되는 수도를 뒤로한 채 속수무책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킹스켈레톤이 소환하는 스켈레톤들의 수도 점점 늘어났고, 발록의 힘도 점점 강대해졌다.
그들이 강해짐에 따라 수도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더욱 커지고 이내 사라졌다.
무너져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린 대신전은 이제 역사속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것도 재앙의 역사 속에서!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수도의 후방 케인 지역에서 대열을 가다듬었다.
“…….”
그 누구 하나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어린 세피로스 대신관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얼굴을 들었다. 그의 조그마한 입술이 조몰락거렸다.
“이번 재앙으로 인해 수도는 파괴되었고, 에스힐 대신관님과 라이트핸드 대신관님 그리고 지리움 대신관님이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분들의 죽음을 추모하기 전에 이 사태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피로스는 성력이 사라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성력, 아니 마력이 사라진 신관들과 대신관들은 이제 한낱 평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오히려 마력을 신력으로 여기고 섬겼던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죄인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 사나 대신관님! 현재 정비한 병력은 어떻게 됩니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사나 대신관님!”
“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죠?”
“지금의 병력이 얼마나…….”
세피로스는 말꼬리를 흐렸다.
“수도에서 도망친 성기사단의 수가 2만입니다. 그러니까 1만은 수도에서 잃었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수도의 후방을 둘러싼 케인에 2만의 성기사들이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모두 전의를 상실했다는 데 있다.
“그렇잖아도 각 지역의 성기사와 신관들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 수를 모두 합치면 10만은 넘을 것 같은데…… 문제는 시간입니다. 우리 성기사들이 대열을 갖추기도 전에 저 마물들이 이곳까지 공격한다면…….”
고민하나 마나 결과는 하나뿐이다. 케인이 마물에 의해 장악당하면 그 후 마물들은 율리안 전 지역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각 지역의 성기사단들은 파훼당하고 울리안은 마국(魔國)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군요.”
“그렇습니다, 세피로스 대신관님. 이 2만의 병력으로 적어도 3일은 이곳을 지켜내야 합니다. 아니,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입니다. 믿음의 존재가 부정당한 저희와 신관들 그리고 백성들은 모두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믿음이 사라진 이때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이곳을 자결로써 미련 없이 떠나느냐, 아니면 어떻게든 살아보느냐…… 그런데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럼 타국에 파병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에드먼이나 신명국이라면…….”
세피로스가 반문했다.
담담히 말을 듣고 있던 대신관 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살아난다 하더라도 우리가 대륙에 재앙을 강림했다는 사실, 마신을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수치, 치욕…… 어떠한 단어도 대신할 수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이 일은 우리들만으로 수습해야 합니다. 우리들만으로 말입니다. 에드먼이나 신명국에서 이 사실을 알면 우리를 매우 비웃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홈이 모두에게 물었다.
어린 세피로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이 재앙은 본국의 일입니다. 아무리 다급해도 타국에 손을 내밀 순 없습니다. 저까짓 발록 따위는 본국의 성기사단만으로도 충분하지요. 굳이 이 수치를 떠벌리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사나 대신관이 말했다.
얼굴을 붉히고 있던 세피로스는 가냘픈 손으로 등 뒤의 메이스를 꺼내 들었다. 상대적으로 메이스가 크게 느껴져 세피로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세피로스가 메이스를 들자 모두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무너지면 수백만 백성들이 마물의 손아래 농락당하게 됩니다. 모두 어리석은 우리 때문에…… 그래서 꼭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조금이나마 사죄해야겠습니다. 그런 저는 본국의 수치가 알려질까 두려워 타국에게 파병을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 세피로스님…… 우리는 백성들에게 죄인이지요. 저 역시도…… 하지만 타국의 병력까지 끌어들인다면 그야말로 우리는 우리의 부정을 인정하고 그동안의 인생을 완전히 부정하는 셈입니다. 부정되는 삶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 살고 싶으시다면, 백성들에게 사죄를 하시고 싶으시다면 마물에게 대항하여 우리의 손으로 저들을 무찌르는 것입니다.”
사나도 메이스를 빼 들었다.
“모든 분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성력이라 추앙하던 더러운 힘까지 사라진 마당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무거운 메이스를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는 일입니다. 모두 성기사단에 합류하여 곧 쳐들어올 마물들에 대항합시다. 타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말입니다.”
세피로스가 비꼬는 듯한 말을 툭 내뱉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메이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기우뚱거리는 걸음걸이는 우스꽝스러웠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이 웃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천막 밖에는 수많은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운집하여 대신관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관님들께서 나오셨다!”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외쳤다.
모두들 대답을 요하는 표정이었다.
“대신관들은 마물에게 대항하기로 했습니다. 떠나고 싶으신 분들은 그렇게 하셔도 어느 누구도 책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떠나지 않으실 분들은 저희와 함께 마물을 수도에 가둬 버립시다!”
대신관 사나가 앙칼진 목소리로 메이스를 치켜 올렸다.
전의를 상실한 신관들과 성기사단들의 환호를 기대한 것은 망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모두들 체념 어린 눈으로 사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사나는 머쓱해져 조심스레 메이스를 든 팔을 내렸다. 그들의 무리 속에서 문득 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정녕 율리안님께서는 존재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정녕 우리가 믿고 따랐던 그분은 마신이었던 것입니까?”
“무엇도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앞에 지금 마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도망치시겠습니까? 대항하시겠습니까?”
“…….”
조용했다.
그때 한 성기사가 검을 치켜들었다.
“저는 제가 믿는 그분을 위해 검술을 배웠고 성기사단에 입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부정된 이상 이 검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대신관님!”
성기사는 당장이라도 검을 버릴 듯했다.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경은 살고 싶나요?”
“…….”
“살고 싶다면 검을 버리지 마십시오. 저 역시 이렇게, 이렇게 메이스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검을 버린 그대는 한낱 도망자로 전락하여 언젠가는 마물의 이빨이 목에 박힐 것입니다. 마물의 이빨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메이스와 검입니다. 반대로 마물에게 대항한다면 그분께서 빛을 내려주시겠지요.”
“예? 그분께서 존재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성기사들은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예, 그분은 존재하지만 우리는 마신에 속았던 거지요. 더욱 잘된 일입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는 길. 경건한 마음으로 믿음이 변치 않는다면 그분께서 빛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사나는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성기사와 신관들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천지시당의 일원인 방자는 당주의 명을 받아 최근 율리안의 수도에 도착했다.
“육시랄! 이놈의 망자들은 꾸역꾸역 잘도 올라오는구먼!”
방자는 투덜거리며 봉으로 스켈레톤을 내리쳤다.
잘못하면 오늘 끼니를 다 굶게 생겼다. 보름달이 뜬 어제 천신의 강림인지 뭔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통에 구걸에 있어 상당한 이득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밤이었다. 갑작스레 땅이 흔들리더니 뭔가가 내려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게 아닌가.
건물들이 무너지고 화염줄기가 허공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고…….
그때부터 계속 이놈의 망자들과 싸웠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리려 내력을 터트려도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 다시 붙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기가 막히는 건 그 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야, 이놈의 망자들아! 그만 지랄염병하고 저승으로 돌아가라!”
방자가 휘두른 봉이 연속으로 스켈레톤 셋을 부셨다.
끼리릭
그러나 스켈레톤은 다시 붙었다.
방자의 관자놀이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혔다. 어젯밤 이후로 줄곧 봉을 휘둘러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방자는 허리춤의 신명검을 바라보았다. 칼자루에 손을 가져가다가 중간에 멈추었다.
신명검은 황제폐하가 내려주신 보검. 망자를 베기엔 너무 과분하다.
방자는 스켈레톤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면서 대신전 쪽을 곁눈질로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곳에 있는 거대한 대흑마괴(大黑魔怪)는 아직 이쪽을 향하지 않고 있었다.
드득 드드득
스켈레톤의 시미타가 방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방자가 옆으로 고개를 흘기자 스켈레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방자는 스켈레톤의 안면을 봉으로 타격한 후 더욱 후방으로 몸을 날렸다.
이곳은 이계다.
저번에는 철갑거인이 나타나더니 이번엔 대흑마괴가 나타났다. 이번에 나타난 대흑마괴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마기를 가지고 있었다.
화염 같은 채찍이 지나갈 때마다 태산 같은 불길이 치솟으며 건물들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을 태워버린다.
그뿐이랴!
뼈만 남은 망자들을 이끌고 다니는 흑골(黑骨)도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대흑마괴와 흑골이 슬슬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
“육시럴! 왜 이쪽으로 오고 지랄이여? 저쪽으로 가라고.”
방자는 침을 퉤 뱉으며 뒤로 내달렸다. 거리를 가득 메운 스켈레톤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방자는 높게 뛰어 스켈레톤들의 머리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애꿎은 시미타가 뒤늦게 휘둘러졌다.
“대흑마괴…… 흑골…… 도대체 어디서 저따위 지랄 맞은 것들이 튀어나온 겨? 어쭈? 저것들 보게. 살판났네. 살판났어.”
뒤쪽으로 고개를 돌린 방자는 인상을 구겼다. 흑골은 그렇다 쳐도 대흑마괴의 괴력은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폐하도 산중턱을 날려버릴 힘을 가지셨다. 그런데 저 대흑마괴는 산중턱이 아니라 산 자체를 날려 버리고도 남을 듯 보인다.
“조금만 더 있으면 석가세존까지 튀어나올 판이고만. 어이쿠, 이런 육시랄 놈!”
시미타가 방자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느리긴 해도 워낙에 많은 시미타를 눈앞에서 놀려대니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검상이 깊지 않았다. 스친 것뿐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방자는 스켈레톤의 머리 위에서 땅으로 뛰어내렸다. 발이 지면에 닿자마자 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냄새나는 머리가 산발이 되고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드드득
스켈레톤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가득하다. 방자는 사방으로 날뛰었다.
그야말로 살위봉법이다. 형리가 죄인을 두들겨 패듯 마구잡이로 휘둘러진 봉은 스켈레톤들을 마구잡이로 부셔댔다.
푸른 내기를 일렁거리며 무시무시하게 휘둘러도 스켈레톤들은 한결같이 달려들었다.
“후우, 후우!”
방자가 거칠게 숨을 뿜었다.
이를 악물었다.
“이놈의 지랄 맞은 것들은 끝도 없어! 대체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는 겨?”
방자는 머리를 굴렸다.
그제야 저 멀리 뼈만 남은 망자들을 이끄는 흑골이 눈에 들어왔다.
방자는 흑골이 있는 그쪽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흑골은 시미타를 휘두르며 건물을 파괴하고 있었다. 한 번의 칼부림에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 모습을 본 방자의 안면근육이 어색하게 굳었다. 괜스레 식은땀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땅으로 떨어졌다.
방자는 생각할 것도 없이 냅다 지면을 박찼다.
막 수도 끝에 도착했을 때, 바닥엔 죽은 이들로 가득했고 강을 이룬 피들이 화염 속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망자들은 저승에 처박혀 지랄염병이나 하고 있을 것이지 왜 기어 올라와서는 애꿎은 양민들만 죽이고 지랄이여!”
방자가 분노의 폭갈을 터트렸다.
그때 저편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피난민들이다.
방자는 스켈레톤들이 밀려드는 경계까지 온 것이다.
“대체 사제들과 성기사란 놈들은 어딜…… 육시랄!”
방자는 어처구니가 없어 턱을 벌렸다. 안력에 내력을 집중시키자 희미한 모습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제일 앞장서서 도망치는 자들은 성기사들이 분명했다.
말을 탄 자나 신관들은 백성들을 버리고 이미 먼 곳으로 도망친 것이 틀림없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눈앞이 핑 돌았다.
“으악!”
스켈레톤들의 시미타가 도망치는 백성들의 등을 갈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뒤엉켰다.
한 번 넘어지면 스켈레톤의 시미타가 아닌 사람들에게 짓밟혀 죽을 판이다. 실제로 그렇게 죽었다고 예측되는 시신들이 즐비하다.
“헛!”
방자는 바로 백성들 앞으로 몸을 날렸다. 아비를 잃은 어린 소녀가 엎어졌다. 스켈레톤의 시미타를 본 소녀의 엄마가 소녀를 감쌌다.
시미타는 엄마의 등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소녀의 엄마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녀를 끌어안았다.
드드득
기이한 소리만 들릴 뿐이다. 소녀의 엄마가 슬그머니 눈을 떠 등 뒤를 돌아보았다.
배가 불룩한 거지가 자신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거지는 봉을 휘둘러 스켈레톤을 부숴 버렸다.
“뭐 하시는 겨! 어서 피하지 않고!”
방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소녀의 엄마는 소녀를 업고 도망쳤다. 정신이 없던 도중이라 감사인사조차 못했다.
“모두 서북쪽으로 피하시오! 서북쪽으로 쭉 가다보면 신명대국이 나올 것이오! 신명대국으로 피하시오! 어서, 어서!”
방자가 내력으로 음성을 널리 퍼트렸다.
신명대국!
검국이라 불리는 곳.
그곳이라면…….
사람들의 방향이 틀어졌다. 목적지는 신명대국이고 방향은 서북쪽이다.
일대 혼란 속에 비명 소리가 가득하다. 방자가 아무리 스켈레톤을 막아서려 해도 소용없었다. 혼자서 몇 리나 이어진 스켈레톤의 돌격을 막을 방법이 없다.
방자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계속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방자의 입술은 벌써 벗겨져 피가 줄줄 흘렀다.
파파팍
희한한 일이다. 수도 쪽에서 스켈레톤을 부수며 자신을 향해 뭔가 돌진하고 있었다.
“형제!”
반가운 소리!
방자의 동공이 주먹만 해졌다.
방자도 소리를 질렀다.
“형제들, 왜 이제 오는 겨! 까딱 잘못했으면 뒈질 뻔했잖여.”
다행히 개방형제들이 율리안 수도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총 여섯 명의 형제들이 율리안의 정보를 모아올 것을 명받고 다 같이 수도까지 동행한 것이 바로 어제다.
“수도에 있는 대흑마괴는 무엇이고 뼈만 남은 망자들은 무엇인가, 형제?”
개방고수가 뒤에서 달려든 스켈레톤을 부수며 물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야겠구먼! 피난민들이 본국까지 무사히 피난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혀. 모두 넓게 퍼져서 최대한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아보자고. 이 육시럴 망자들은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니께 고생깨나 해야 할 것 같여!”
그렇잖아도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부셔도 무슨 사술을 행했는지 다시 붙어 악착같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방자와 개방고수들은 최대한 넓게 퍼졌다. 여섯의 개방고수들 앞으로 스켈레톤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개방고수들은 포위되어갔다. 팔방에서 난무하는 시미타들과 정곡을 찌르는 개방고수들의 봉이 요란스럽게 교차했다.
“이놈들, 끝이 없당게. 허벌나게 지랄 같여!”
방자가 빼악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의 시선에 잡히는 한 존재가 있었다.
개방고수들은 사악한 기운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거대한 흑골(黑骨)!
이 악착 같은 망자들의 대장 격인 놈이다.
“저놈은 뭐야! 퉤!”
한 개방고수가 성질이 나 스켈레톤의 얼굴에 침을 뱉고 봉을 휘둘렀다.
“어서 피해야겄어. 저놈은 왠지 불길한 놈이란 말이여.”
방자는 눈으로 퇴로를 찾으며 외쳤다. 이 망자들을 상대하기도 정신이 없는데 흑골까지 상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다.
다른 개방고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새 겹겹으로 스켈레톤에게 포위되어 있어 부숴도 부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얼어 죽을! 안 되겄어. 기냥 타구진으로! 좀 싸워보고 다시 퇴로를 찾든가 하자고!”
드드득
턱뼈가 부딪치는 소리.
칼날 같은 붉은 섬광이 움푹 파인 눈구덩이에서 발산되었다. 킹스켈레톤이 어느덧 가까워졌다.
스켈레톤들은 길을 내주었고 킹스켈레톤이 드드득 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한 손에 들린 검은 시미타에서는 피인지 사악한 기운인지 모를 것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큭!”
방자는 신음을 흘렸다. 서둘러야 했다.
개방고수들이 막 타구진을 완성했다. 중심을 기준으로 육방을 빠르게 밟았다. 진에 휩쓸린 스켈레톤들은 어김없이 몇 조각으로 부서져 멀리 나가떨어졌다.
킹스켈레톤이 타구진의 공격범위 안까지 들어왔다.
개방고수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서로들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으로 보이는 흑골을 죽이면 수많은 이 망자들도 저승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악운을 기회로 삼고자 개방고수들은 힘을 모았다. 스켈레톤들이 길을 비켰다. 킹스켈레톤과 개방고수들 사이에 길이 생겨났다.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때였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개방고수들이 지면을 박찼다. 푸른 내력이 감싸인 봉을 앞으로 쭉 내뻗었다. 여섯 개의 봉은 얼굴, 양어깨, 양 다리, 가슴을 노리며 질풍같이 날아갔다.
‘아주 가루를 만들어 버리겄어.’
“으아아압!”
타구진 중 비광구치(飛狂狗齒)의 수법!
이 수법에 걸려든 자치고 사지가 멀쩡한 자를 보지 못했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는 고수라 할지라도 피할 곳이 없는데 어쩌랴!
개방고수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욱 봉을 움켜잡고 마지막 기합을 토해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미친개의 이빨이닷!”
킹스켈레톤은 비광구치의 수법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범위에 이르렀다.
방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때 킹스켈레톤의 시미타가 위로 치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시미타에서 검은 기운이 터졌다.
팟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고 몸이 뒤로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몸이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개방고수들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간신히 바닥으로 착지함과 동시에 밀려드는 스켈레톤들을 부술 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개방고수들은 어리둥절하여 흑골, 즉 킹스켈레톤을 노려보았다. 강한 기운이 내력을 상까지 끌어올린 자신들을 날려버렸다. 하나도 아닌 여섯을 아주 간단히!
“형제, 상대가 안 되겄어. 재주껏 피하는 수밖에.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당게.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황제폐하께 말씀드려야 혀. 이런 엄청난 개놈들이 나타났다는…….”
드드득
방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킹스켈레톤이 입을 쩌억 벌리며 그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뒤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스켈레톤들도 달려온다.
킹스켈레톤의 시미타에서 흘러내리는 피들은 흡사 개방고수들을 보며 흘리는 탐욕스러운 침처럼 보였다.
“토껴!”
방자의 말이 터져 나왔다.
개방고수들은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힘이 달렸던 것일까? 아니면 천운이 따랐던 것일까?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던 놈이 갑자기 쫓는 걸 포기했다.
본래 개방의 경공이 유명하긴 하다만 순간적으로 공간을 이동하는 흑골의 실력도 상당하다. 그렇기에 포기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로 인해 중단한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중요한 건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토록 강한 존재가 있을 줄이야!
방자를 비롯한 개방고수들은 꾀죄죄한 몰골로 신명대국에 도착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이곳까진 망자들이 도달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망자들의 느린 걸음이라 할지라도 확장하는 그들의 세력을 보면 마음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건 다 뭐시여?”
단 며칠 동안 신명대국의 모습이 꽤 바뀌었다.
난쟁이 장인들이 황성 주위로 가옥을 만들고 있었다. 상당히 큰 규모로 진행되고 있었다. 개방고수들이 지나가자 신명대국의 몇 안 되는 백성들이 허리를 굽혔다.
“누구시오?”
모용휘의 목소리가 성문 안쪽에서 들렸다.
“나 개방의 방자요. 아주 급한 일이 있응게 빨랑 문 좀 열어야겄소.”
방자가 서둘러 말했다.
쿵
커다란 황성문이 열리기 무섭게 개방고수들은 안으로 몸을 날렸다.
모용휘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코를 부여잡았다. 이제는 개방고수들의 악취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문득 모용휘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혈향?”
피비린내다.
그것도 한두 명의 것이 아닌 수십, 수백 명의 것!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모용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성문을 닫는 그의 마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만세, 만세, 만만세!”
개방고수들이 소리를 모았다.
주첨기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무슨 일들인가?”
신성대국 율리안으로 보냈던 천지시당의 당원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곳곳이 찢긴 전투의 흔적.
주첨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갔다.
“큰일입니다. 폐하. 율리안에 망자들이 침입했습니다.”
“망자들?”
주첨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라혈마가 코웃음을 쳤다. 진천도 괜한 헛기침을 하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망자는 죽은 이들이다. 간혹 사술로 강시를 만들어 망자를 이승에 붙잡아두기도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화에 불과하다. 망자들은 결코 이승에 해코지를 할 수 없다.
“낄낄, 망자들이라니. 이봐, 거지야. 감히 뉘 앞이라고 망발을 하느냐?”
수라혈마가 손톱을 세웠다. 손톱은 칼날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방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참말입니다. 여기 있는 형제들 모두 보았습니다.”
개방고수들이 고개를 심하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좋다. 무엇을 보았는가?”
방자는 우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대흑마괴와 흑골 그리고 망자들…… 그 괴이한 모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족히 10척은 넘어 보이는 대흑마괴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어깨에 날개가 달렸으나 새는 아니었습니다. 양손에는 기다란 화편(火鞭)을 쥐고 휘두르자 땅이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지며 세상이 불타올랐습니다. 율리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대흑마괴가 일으킨 화염 속에서 처절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흑골도 있었습니다. 살덩어리들은 어디다 팔아치웠는지, 또 뼈다구는 어디서 그렇게 그을리고 왔는지 검은 뼈다구만 남아서는 검을 들고, 마찬가지로 뼈만 남은 망자들을 조종했습니다. 부셔도 부셔도 다시 붙어서는 달려드는 게 참 악착같이 지랄 맞……!”
방자는 깜짝 놀라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폐하 앞이라 말을 조심하긴 하는데 좀처럼 맘대로 되지 않았다.
“계속하라.”
주첨기가 말했다.
방자는 수라혈마의 맹렬한 시선을 받으며 말을 계속 이었다.
“망자들의 수는 적게 잡아도 수천 마리…… 이상하게도 그 수가 점점 불어나는 듯했습니다. 지금도 대흑마괴와 흑골 그리고 망자들이 율리안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율리안에서는 속수무책이고 벌써 수도는 완전히 파괴된 상태입니다. 그들의 세력은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폐하.”
방자의 장광설이 끝났다.
“이곳은 이계다. 우리 중원인들이 모르는 일들이 무수히 벌어지는 곳.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고 하여 당황하기보다는 더욱 자세히 알고 대처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 천지시당이 필요한 것이다.”
“예, 폐하.”
“망자들이 부셔도 부셔도 다시 붙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슨 말인가?”
“그게…… 뼈다구만 남은 망자들인데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도 신기한데…… 저희들의 힘으로 부숴 버려도 다시 붙어버립니다, 폐하.”
“신기한 일이군. 그들의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예, 폐하.”
방자의 말에 따르면 매우 경계해야 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마괴…… 흑골…….’
요괴들이다.
아무래도 이계에는 저승의 요괴들까지 기어 나오는 모양이다.
갑자기 나타난 대흑마괴와 흑골 그리고 망자들.
그 요괴들이 율리안을 정복하는 것도 대세의 흐름에 어긋나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율리안을 정복한 후 신명대국으로 침입해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또한 요괴가 인간세상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
그 요괴들이 지금 인간들을 죽이고 육질을 씹으며 피를 마시고 있다.
“그 말이 사실이렷다?”
“예, 폐하!”
방자와 개방고수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주첨기는 용좌에서 일어났다.
“수고했다. 그대가 말한 일은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짐이 직접 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저희들이 따르겠습니다, 폐하.”
“아니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군. 쉬도록! 짐은 두 대장군과 동행할 것이다.”
주첨기가 수라혈마와 진천 쪽으로 눈빛을 보냈다.
수라혈마는 씨익 웃었다. 진천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주첨기는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황제의 황금빛 망토가 펄럭였다.
은은히 빛나는 적색과 푸른색 망토가 펄럭이며 뒤따랐다.
주첨기와 두 대장군이 나가자 개방고수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방자는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입을 열었다.
“형제들, 이계는 육시랄 곳 같여. 망자들이 저승에서 기어 나오질 않나, 대흑마괴가 지랄발광을 하질 않나. 후우, 폐하의 말씀처럼 우리 거지들이 더욱 열심히 해야겄어. 원 괴상하고 모르는 것투성이니…… 이계인들의 똥구녘엔 털이 몇 개가 났는지조차 알 때까지 열심히들 하자고. 아, 오늘은 황명을 받들어 좀 퍼 자고 말이여. 으으, 대흑마괴와 흑골 놈이 자꾸 떠오르네. 그 개놈들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지 의문이여.”
다른 개방고수들과 다르게 방자는 아직도 사선(死線)을 넘어왔다는 게 실감이 되지 않았다.
개방고수들은 잔뜩 얼어붙은 표정이었다. 지옥 같은 그곳이 자꾸만 떠올랐다.
수천의 망자들을 이끌고 자신들의 뒤쫓아 오는 검은 해골!
꿈에서도 나타날까 두렵다.
“형제들, 걱정들 말드라고. 왜 이렇게 바짝 똥 씹은 표정들을 한디야. 황제폐하께서 직접 가셨으니 다 끝이여. 그때 봤지? 저어기 산도 날려 버리시던 거.”
물론 그 대흑마괴도 채찍질로 산을 날려버렸다.
“아……!”
방자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깜빡 잊고 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잖여.”
지금 이 시각, 수많은 피난민들의 행렬이 바로 신명대국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