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14
014 북망산
안으로 들어선 진무앙은 화섭자를 꺼내 준비해 온 횃불에 불을 붙였다.
사방이 밝아졌다.
찍찍.
푸드덕. 푸드덕.
난데없는 불빛에 놀란 쥐와 박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날았다.
이곳에 묻힌 자는 살아생전 대단한 부와 권력이 있던 자임에 틀림없었다.
지하로 향한 복도의 길이만 이십여 장에 달했으니까.
복도가 끝나는 곳에서 진무앙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옛 동료의 딸을 볼 수 있었다.
소화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빈민촌에서 그녀로 위장하고 있던 살수와 겉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소화는 뼈에 거죽만 씌운 것처럼 앙상한 몰골로 누더기 같은 천을 몸에 두른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의 기척을 느꼈을 것임에도 아이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움직일 기력이 없는 듯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희미한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아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으리라.
진무앙은 눈살을 찌푸렸다.
장운은 소화가 선천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고는 했지만, 상태가 이렇게 나쁘다고는 하지 않았었다.
아이의 앞에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름이 많은 노인 한 명이 검게 말라붙은 피 구덩이에 누워 있었다.
쩍 벌어진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내장 속에 꿈틀거리는 벌레들이 보였다.
사망한 지 적어도 사흘 이상 지난 시신이었다.
진무앙은 이들 노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눈으로 본 것처럼 알 수 있었다.
노인은 추적하던 자들로부터 소화를 보호하던 조력자였을 것이다.
아이를 보호하려다가 살수들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것을 치료하지 못한 채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리라.
강석초는 소화와 조력자에게 별일이 없는 것 같다고 했지만, 그의 정보에도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목내이(木乃伊:미이라)처럼 누워 있던 소화의 얼굴 근육이 굳었다.
두려움이 뼈만 남은 얼굴을 빠르게 뒤덮고 있었다.
진무앙의 기척을 알아차린 것이다.
“누… 누구세요?”
겁에 질린 소화의 음성은 얼마나 작은지 개미가 기어갈 때 나는 소리도 그보다는 클 것 같았다.
진무앙의 눈빛이 깊어졌다.
소화의 눈엔 초점이 없었다.
기력이 너무 없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듯했다.
“난, 진무앙이라고 한다.”
소화의 얼굴에서 두려움 대신 놀람과 반가움의 기색이 확 떠올랐다.
극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변화.
“아… 무앙 아저씨…….”
소화의 말에 진무앙은 미간을 찡그렸다.
“나를 아느냐?”
“아버지께서 보내신 서신에 아저씨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었어요.”
진무앙이 투덜거렸다.
“말 많은 놈.”
그는 잠시 소화를 내려다보았다.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진무앙의 눈길이 아이의 전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소화와 단 두 마디밖에 나누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를 가장했던 살수의 위장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소화의 해골처럼 마른 얼굴의 윤곽선은 놀라울 정도로 고왔다.
살만 조금 붙는다면 보기 드문 미소녀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외모보다도 더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분위기였다.
소화에게는 어린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신비로우면서도 암울한 분위기가 있었다.
뭔가를 더 말하려던 진무앙이 입을 닫았다.
그는 잠시 밖의 기척을 살핀 후 말했다.
“얘기는 나중에 해야겠다. 밖에 나를 따라온 불청객들이 있거든.”
그는 소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등에 업었다.
아이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인형을 업은 것처럼 가벼웠다.
진무앙은 요대를 풀어 소화를 자신의 몸에 묶었다.
소화는 두 팔로 진무앙의 목을 감아 안았다. 하지만 팔을 얹어만 놓았을 뿐 잡지는 못했다.
그럴 힘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눈을 돌려 바닥에 누워 있는 노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지그시 무는 그녀의 눈가에 맑은 이슬이 방울방울 맺혔다.
업고 있는 소화의 가슴 기복이 살짝 커진 것을 느낀 진무앙은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무앙은 소화에게 애도의 시간을 주는 대신 바로 걸음을 옮겼다.
빨리 단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만들어야 했다.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진무앙이 입구 근처에 도착했을 때 늪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의 흐름이 확 변했다.
스슷!
모기 날갯짓보다도 작은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진무앙의 정수리를 향해 한 자루의 칼날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동시에 바닥이 쩍 갈라지며 진무앙의 사타구니로 시퍼런 칼날이 솟아올랐다.
은밀하고 빠른 기습.
진무앙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왼쪽으로 움직였다.
아래위로 날아들었던 두 자루의 칼은 텅 빈 허공을 베고 찔렀다.
칼을 쥔 흑의인들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상대는 그들의 눈이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저처럼 느린 속도라면 칼날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그는 피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의 살행을 수행한 경험자들이었다.
때문에 자신들이 해석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칼의 궤적을 비틀며 진무앙을 베어갔다.
진무앙의 눈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무림에서 본인의 실력이 적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물러나지 않고 공격을 잇는다는 건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평소 그들이 얼마나 혹독한 수련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래의 실력이 갑자기 배로 늘어나는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진무앙의 오른발이 무서운 속도로 아래쪽 칼날의 면을 올려 찼다.
쨍!
칼날의 중동이 엿가락처럼 부러졌다.
동시에 흑의인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울컥!
그는 한 덩이의 검은 핏물을 토해내며 비틀거렸다.
진무앙의 발에 실린 막강한 경력이 칼을 부러뜨린 후에도 소멸하지 않고, 그의 팔을 통해 내부로 들어와 오장육부와 내부 경락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흑의인이 몸을 채 가누기도 전에 진무앙의 발끝이 벼락처럼 그의 턱에 꽂혔다.
콰작!
흑의인의 머리가 화탄에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그는 저항은커녕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저승 문턱을 넘었다.
다른 흑의인의 사정도 그보다 낫지 않았다.
스윽.
진무앙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칼날의 끝을 붙잡았다.
칼날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자진해서 들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한 수였다.
하지만 당하는 흑의인의 입장에서는 절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눈으로 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자연스럽겠는가.
“헉!”
흑의인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진무앙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챙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칼날의 끝이 세 치가량 부러졌다.
진무앙은 그것을 아무렇게나 손가락으로 튕겼다.
팟!
짧은 파공성과 함께 칼날은 흑의인의 입을 관통했다.
콱!
칼날은 그의 뒤통수를 뚫고 튀어나와 천장에 박혔다.
흑의인의 눈에서 빛이 꺼지며 허공에 떠 있던 몸이 화살을 맞은 기러기처럼 지면으로 뚝 떨어졌다.
털썩.
두 구의 시신을 뒤로하고 진무앙은 무덤을 나왔다.
밖은 아직도 환했다.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반 시진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동굴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그의 머리 위로 강철로 만든 갈고리가 잔뜩 달린 그물이 덮쳤다.
파팟!
갈고리는 독이 묻어 있는 듯 음산한 녹색빛을 발하고 있었다.
진무앙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자들은 손자병법을 한 번도 안 읽어본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그를 심각하게 무시했던지.
적들은 그도 모르고, 자신들의 역량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곳에서 그물을 사용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무앙은 손가락을 호조수(虎爪手:호랑이 발톱)로 만들어 앞으로 쭉 뻗었다.
갈고리들의 빈틈을 미꾸라지처럼 파고든 호조수가 그물코를 와락 움켜잡았다.
그는 힘을 주어 그물을 잡아당기며 미끄러지듯 뒤로 다섯 자를 물러났다.
그가 다시 고묘의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그물은 역바람을 맞은 우산처럼 반대 방향으로 훌떡 뒤집혔다.
힘을 잃은 그물이 얌전한 강아지처럼 통로 속으로 끌려 들어와 축 늘어졌다.
천구독망(天鉤毒網)이라는 이름의 그물은 고래의 힘줄과 백련정강, 그리고 혈련사의 극독으로 만든 기물이었지만, 진무앙의 간단한 한 수에 무력화되었다.
진무앙의 이목에 어수선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극히 미미했지만 방금 전까지는 들리지 않던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한 수가 적을 당황하게 만든 듯했다.
진무앙은 그물을 질질 끌면서 입구를 벗어났다.
스슷!
쇠털처럼 가느다란 암기가 진무앙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와 함께 머리 위와 좌우, 정면, 바닥까지… 다섯 방향에서 서슬이 시퍼런 칼날이 그를 베어왔다.
빠르고 정교한 방위의 배합은 공격자들이 얼마나 합공에 숙련되어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곧 온몸이 산산조각으로 난자당할 것 같은 상황이었음에도 진무앙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의 강인한 정신력은 강한 무공이 아니라 수많은 실전경험의 토대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무림에서 그보다 무공이 높은 고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싸움 경험이 많은 사람을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인 자를 찾는 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진무앙은 장난처럼 허리를 비틀었다.
반투명한 은침 십여 개가 그의 목을 스치며 지나갔다.
동시에 그는 물고기를 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에 쥐고 있던 그물을 휙 던졌다.
쑤와악!
천구독망은 방금 전 그를 공격할 때와는 수준이 다른 파공음을 내며 활짝 펼쳐졌다.
무서운 기세로 펼쳐진 천구독망이 태풍 같은 기세로 사방을 휩쓸었다.
촤라라라라라라라-
완전히 펼쳐진 천구독망의 직경은 오 장에 달했다.
그를 공격하던 흑의인들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천구독망의 질김과 위험함을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무공으로 천구독망을 파훼하는 건 불가능했다.
선택은 회피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세를 바꾸기도 전에 이미 천구독망은 피할 방위를 모조리 차단한 채 그들을 덮치고 있었다.
그들이 피하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장검이 먼저 천구독망의 그물코에 휘말렸고, 뒤이어 수백 개의 갈고리가 해일처럼 흑의인들을 쓸어버렸다.
찌이익! 쫘악!
흑의인들의 몸이 산산이 찢겨 나가며 진무앙의 앞에 피와 살점이 뒤섞인 혈우(血雨)가 쏟아졌다.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 키가 크고 마른 흑의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석 자 길이의 호수구(護手鉤)를 들고 있는 그의 왼쪽 가슴에는 똬리를 튼 붉은 뱀이 혀를 날림거리고 있었다.
진무앙을 보는 복면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손도 떨렸다.
살수가 두려운 건 무공이 아니라 은신술 때문이었다.
앞에서 보이는 칼날은 막아도 뒤에서 날아드는 화살은 막기 어려운 법이니까.
그런데 진무앙에게는 은신술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은 살수들이 은신하고 있는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튀어나올지 모른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복면인이 보는 진무앙은 초인적인 오감을 타고났거나, 은신술을 무용지물로 만들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른 절정의 고수였다.
이런 상대에게 암습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복면인은 그것을 알아차렸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묵묵히 진무앙을 바라보던 복면인이 입을 여는 대신 복면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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