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RAW novel - Chapter 86
086 그림보다 백배는 더 예쁘구나
진무앙과 영채신이 노군객잔을 떠난 건 반 시진 정도 후였다.
먹구름은 여전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영채신의 몸 상태는 정상에 가깝게 회복되었다.
음식을 먹은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진무앙이 그의 양기를 북돋워 준 덕분이었다.
영채신은 길을 가면서도 연신 진무앙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이모님이 진 호위님을 제게 보내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일을 좀 많이 잘하긴 하지.”
“진 호위님이라면 섭 낭자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 믿어라. 옛말에 믿는 사람에게 복이 온다고 그랬다.”
“그런 말이 있어요?”
“그렇다니까.”
두 사람이 노군산에 접어들 즈음 해가 지면서 숲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영채신은 갖고 온 등롱에 불을 켰다.
빛이 일어나자 주변은 길을 분별할 수 있는 정도로 밝아졌다.
우오오오오오-
여기저기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꿀꺽!
영채신은 침을 삼키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진 호위님, 이 근처에 늑대들이 많아요. 조심하세요.”
그를 보며 진무앙은 속으로 혀를 찼다.
‘겁도 많은 녀석이 요괴가 산다는 곳에 가고 싶어 안달을 하다니. 이 녀석은 귀신에 홀린 게 아니라 여자에 홀린 거야.’
남자는 귀신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세상이 열린 후로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건 남자의 숫자는 헤아리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많다.
진무앙은 영채신이 등에 지고 있는 행랑에 시선을 주었다.
그곳엔 족자의 끝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가 영채신에게 물었다.
“채신아, 섭소천이라는 여자하고 어떻게 만난 거냐?”
영채신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사람들이 난약사에 가면 공짜로 잘 수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갔어요. 빈방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방 하나를 잡고 쉬면서 세금 장부를 다시 썼어요. 비에 젖어서 내용을 알아볼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장부를 작성하는데 어디선가 거문고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거문고?”
“예.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까… 난약사 뒤편에 호수처럼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가운데 불이 환하게 켜진 정자가 있었어요. 그곳까지 연결된 다리도 있었고요.”
“정자에서 거문고를 켜고 있는 여자가 있었고, 그녀가 섭소천이었다는 말이냐?”
“예.”
영채신은 그날 밤 자신과 섭소천이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직후 험악하게 생긴 초로의 검객에게 얼마나 쫓겼는지를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물론 섭소천과의 사이에 있었던 미묘한 신체접촉과 그녀가 비단에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 절 찾지 마세요’라는 글을 써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뺐다.
“그 검객은… 섭 낭자는 그를 굉장히 두려워했어요. 그도 그녀를 잡으려고 엄청나게 날뛰었고요”
진무앙의 눈이 깊어졌다.
그가 물었다.
“검객의 생김새를 말해봐라.”
“나이는 오십대 정도였고, 키는 저보다 별로 크지 않았어요. 상투를 틀었고, 얼굴엔 굵은 수염이 무성했고요.”
“흠… 그가 사용했던 검초 중에 기억나는 게 있냐?”
영채신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너무 빨라서…….”
안법을 단련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숙련된 검수의 검초를 맨눈으로 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영채신이 생각난 듯 갑자기 탄성을 토하며 말했다.
“아! 그때 어디선가 남녀가 구분되지 않는 괴악한 음색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 검객을 ‘취도사’라고 불렀던 거 같아요.”
진무앙이 미간을 확 찡그리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그놈일 거 같더라니… 하긴 노군산에서 제멋대로 칼을 휘두를 놈이 그 녀석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영채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진 호위님이 아는 사람입니까?”
“만나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아마 내가 아는 그놈이 맞을 거다.”
영채신이 고개를 갸웃하며 진무앙이 눌러쓴 죽립 속을 힐끔거렸다.
“그놈이라고 하기엔… 진 호위님이 잘못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아무리 봐도 그 사람하고 진 호위님은 나이 차이가…….”
그는 아직 진무앙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나이도 알지 못했다.
진무앙이 죽립을 눌러쓴 데다 머리카락까지 늘어뜨려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나이에 따라오는 분위기라는 게 있다.
진무앙의 나이가 자신보다 많은 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서른 살을 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볼 때 난약사의 검객과 진무앙은 최소한 이십 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났다.
진무앙은 영채신의 말을 무시하고 연이어 물었다.
“아침이 온 후에 그들을 찾아봤냐?”
“예. 하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속으로 꺼졌는지, 어디에서도 그들을 발견할 수가 없었어요.”
진무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약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반 시진쯤 걷자 황량한 절 하나가 진무앙의 눈에 들어왔다.
처마가 허물어진 폐찰의 대문 옆에 세워진 비석에는 세 개의 글자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었다.
난약사.
비문의 글을 읽은 진무앙이 중얼거렸다.
“어떤 미친놈인지 몰라도 도교의 본산이나 다름없는 곳에 절을 지을 생각을 하다니. 그러니 망한 거겠지만.”
난약사는 언뜻 전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거대했다.
한창 흥했을 때는 신도의 수가 엄청났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폐찰일 뿐이었다.
폐찰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디에도 불이 켜진 곳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돌아보는 진무앙의 눈이 깊어졌다.
난약사 전체를 소름 끼치는 사기(邪氣)가 휘감고 있는 게 느껴졌다.
‘천살귀문진… 역시 이곳에서 귀신 놀음하고 있는 놈들은 유명전의 떨거지들이었군. 그런데 귀문진의 사기가 이 정도로 강했었나? 너무 센데…….’
진무앙은 영채신을 앞세워 그가 머물렀었다는 방으로 갔다.
바닥과 벽 절반이 무너진, 방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곳이었다.
그나마 천장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비는 피할 수 있어 보였다.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연못 정자에 다녀오마.”
영채신이 놀란 얼굴로 다급하게 말했다.
“저도 함께…….”
진무앙은 고개를 저었다.
“너하고 같이 가봤자 방해만 된다. 섭 낭자가 그곳에 있다면 내가 반드시 데리고 오겠다. 그러니 꼼짝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
“…예.”
방을 나온 진무앙은 휘적휘적 절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일각 정도 걷자 영채신이 말한 연못과 다리, 그리고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방은 어두웠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정자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자로 이어진 다리의 길이는 십여 장.
스슷.
진무앙은 단 한 걸음으로 다리를 건너 정자에 들어섰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거문고도 없었다.
‘여기엔 없군. 어디 숨어 있으려나… 영채신의 몸에 남아 있던 흔적은 열락색혼공(悅樂色魂功)과 환몽안(幻夢眼)이었어. 그것들은 유명전(幽冥黨)의 떨거지들이 쓰던 사공. 내 기억으로 그곳의 마지막 후예는 음혼마군(陰魂魔君)과 음양반인귀(陰陽半人鬼), 그 덜떨어진 놈들이었는데…….’
진무앙이 속으로 중얼거린 이름들은 하나같이 강호에서 사라진 지 오십 년이 넘은 것들이었다.
대혼돈시대 당시 유명전은 사악한 사술과 음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다가 대혼돈시대가 저물자 소리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서 오육십 세 이상의 노고수가 아니라면 들어보지도 못했을 과거의 이름들이었다.
그때, 멀리서 아름다운 음율이 들려왔다.
진무앙의 눈이 번뜩였다.
‘거문고를 탄주하는 소리다!’
그의 신형이 일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
작금의 소림사에서도 익힌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는 능공천상제의 절정 경공.
수직으로 오 장 가까이 날아오른 진무앙의 눈에 불이 켜진 전각이 하나 들어왔다.
그곳까지의 거리는 대략 사십 장가량.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전각의 문 앞에 얼쩡거리는 영채신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더럽게 말 안 듣는 녀석이네. 꼼짝 말고 있으라니까.’
그 순간, 전각의 문이 열리며 순백색의 나삼을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자, 일곱 치가 넘는, 장신의 아름다운 여인.
그녀가 족자 속의 여인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본 진무앙의 눈이 번뜩였다.
여인은 사마휘나 주설란에 비해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저 여자가 섭소천이군. 그림보다 백배는 더 예쁘구나. 채신이 자식이 저 난리를 피울 만하네.’
섭소천이 당황한 얼굴로 영채신과 말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진무앙은 즉시 유성탄영을 펼쳤다.
쉬이이잇-
그의 신형이 한 줄기 유성처럼 사십 장을 가로질렀다.
그사이, 영채신이 섭소천에게 하는 말이 진무앙의 귀를 파고들었다.
“섭 낭자, 탄금 소리를 듣고 왔어요.”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맑고 고운 목소리.
“나는 섭 낭자가 걱정돼서……. 그 수염 난 검객은 살인범이에요. 내가 마을의 수배자 벽보에서 그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전단을 봤어요.”
섭소천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겁에 질린 얼굴로 영채신의 팔목을 잡아 안으로 끌었다.
“빨리 들어와요.”
영채신이 안으로 들어오자 문을 닫으려던 섭소천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진무앙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와 눈이 마주친 섭소천은 말끝을 흐렸다.
진무앙은 죽립을 등 뒤로 넘기고 머리카락까지 위로 올려 얼굴을 다 드러낸 상태였다.
어스름한 황 촛불 빛에 드러난 그의 조각처럼 수려한 외모는 섭소천이 말을 잇기 힘들 만큼 아름다웠다.
진무앙이 가지런한 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섭소천 낭자, 맞죠? 나는 채신이와 함께 온 진무앙이라고 합니다.”
섭소천의 이상한 태도에 고개를 돌렸다가 진무앙을 본 영채신도 눈을 크게 떴다.
그도 진무앙의 진면목을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진 호위님……?”
“그래, 나다.”
영채신이 진무앙을 아는 듯하자 섭소천은 급하게 그를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았다.
그녀는 진무앙을 보며 탄식했다.
“하아, 두 분, 여기 오시면 안 되는데…….”
진무앙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채신이의 말로는 섭 낭자가 크나큰 위험에 처해 있다고 했소. 무공을 익힌 자로 연약한 여인이 위태롭다고 하는데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소. 이제 염려하지 마시오. 내가 구해주러 왔으니까. 함께 갑시다.”
그의 말에 섭소천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진무앙이 말하는 투가 영락없이 강호에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는 햇병아리 정도 문파 제자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영채신은 진무앙과 섭소천을 번갈아 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왠지 자신이 소외된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진무앙이야 그럴 수 있다손 쳐도 섭소천조자 그에겐 눈길 한 번 주고 있지 않았다.
“섭 낭자, 나와 함께…….”
섭소천이 단칼에 영채신의 말을 끊고 진무앙에게 말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두 분 모두 어서 이곳을 떠나세요. 이곳은 너무 위험…….”
말을 하던 그녀의 안색이 확 변했다.
동시에 진무앙의 시선도 복도 쪽으로 난 문을 향했다.
그곳에서 인기척이 났기 때문이다.
스르르르륵-
긴 옷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사부님이 오신 것 같아요! 저분 눈에 띄면 두 분 정말 큰일나요!”
섭소천은 옷에 불이라도 붙은 여자처럼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진무앙과 영채신을 확 잡아끌었다.
그녀가 두 남자를 데리고 간 곳은 창문 아래 놓인, 서너 명이 들어가도 자리가 남을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목욕통이었다.
목욕통은 물이 가득 차 있었고, 수면엔 꽃잎이 깔려 있었다.
섭소천이 두 사람을 목욕통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어서, 어서! 여기 들어가 있어요. 빨리요!”
진무앙은 순순히 그녀의 말을 따라 목욕통으로 들어갔다.
반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영채신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섭소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통 안으로 쓰러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누군가 방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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