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supply by myself! RAW novel - Chapter 122
나 혼자 무한 보급! 122화
무려 두 달 만에 단체 채팅방을 통해 지시가 내려왔다.
내용은 이동 명령. 목적지는 불명.
내일까지 거점을 버리고 만반의 준 비를 할 것.
“역시 민수 형님이야! 드디어 한 판 해볼 생각이군!”
“하긴 그 형님 성격에 너무 시간 끈다 했지!”
병운과 태환 입장에선 쌍수를 들고 반길 수밖에 없는 지시였다.
아무리 목숨을 건 ‘게임’이라고 하 지만 그들 또한 피 끓는 청춘.
오랜 시간 동안 산속에 유리되어 살다 보니 슬슬 좀이 쑤셔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이길 각이 나왔으니까 이런 지시 를 내린 거겠지?’
‘이제 이 시나리오도 끝낼 때가 왔 다!’
아무튼 그런 희망찬 마음을 안은 채 얼른 준비를 시작했다.
무기를 챙기고, 혹시나 싶어 창고 의 감자들도 가득 쪄다가 챙기고.
같은 조에 속한 나머지 세 명에게 도 얼른 상황을 전파한 뒤 준비를 시키고.
아무튼 끝이 다다랐다는 생각에 다 들 힘이 넘치고 있었지만.
“……저기, 형님?” “왜요?”
“여긴 또 뭐하는 곳인가요?”
그렇게 불러내져 모인 곳은 그런 희망조차 잡아먹을 만큼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운동장 서너 개는 합친 공동 한복 판에 덩그러니 불을 밝힌 슈퍼마켓 하나.
주변에 몰려들어 웅성대는 익숙한 얼굴들을 본 병운이 고개를 갸웃했 다.
“그보다 슈퍼마켓이라니. 저거 분 명 다 없어진 거 아니……?”
“이 ‘게임’。] 제 편이라는 증거 중 하나죠.”
“증거……?”
“그런 게 있습니다.”
오랜만에 봤음에도 민수의 얼굴에 떠오른 뻔뻔함은 변함이 없었다.
어깨를 으쓱한 그가 병운과 태환의 손을 번갈아 잡았다.
“아무튼 병운 씨 일행들이 마지막 이네요. 그간 잘 버텨줘서 정말 고 맙습니다.”
“하하, 뭘요. 저희야 뭐 그냥 산골 짝에 처박혀서 감자나 까먹던 것밖 에 없는데……
“그렇게 있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요. 다들 알고 있겠지만 상황이 마 냥 좋게만 흘러간 건 아니라서.”
단체 채팅방으로 연락할 수 있는 총 24개 조.
그중 진작 합류한 예진 조를 제외 하면 남는 조는 23개.
그리고 그 중 소환명령에 응한 것 은 17개 조에 불과했다.
만에 하나 연락을 받지 못했을 리 는 없었을 테니.
그들이 대충 어떤 꼴이 됐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무 오래 걸렸어.’ 답답한 입맛을 다신 민수가 억지로 한숨을 삼켰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연락이 닿는 25개 조가 경기도 전 역으로 흩어진 와중이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싸움에 휘말 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뒤집어 생각하면 25개 조 중 17개 조씩이나 살아남은 거지만.’
어쨌든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사 라지는 건 아니다.
만약 이쪽의 준비가 조금이라도 빨 랐다면.
그들 또한 지금쯤 합류해서 우리 쪽에 가세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아니다.’
뺨을 짝짝 때리며 민수가 마음을 다잡았다.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로 합리화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희생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산 사람은 산 사람이 해야 할 일 을 하면 되는 거다.
만반의 대비를 하고, 충분한 준비 를 갖추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근사하게 죽 창 한 대 찔러줘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
잠깐 생각이 나락까지 갔다 오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층 차분한 얼굴로 민수가 슈퍼마 켓의 정문 앞에 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백여 쌍 조금 안 되는 시선들.
조금씩이나마 괴롭고 지친 기색이 엿보이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포기한 이들은 없는 눈빛들.
“일단 지금까지…… 살아남아주셔 서 감사합니다.”
“정말 잘 버티셨습니다. 그간 여러 분이 견딘 인고의 시간에 경의를 표 하는 바입니다.”
이 ‘게임’을 헤쳐 나가는 플레이어 의 눈빛이다.
절대로 그냥 죽진 않겠다는 독기와 의지로 똘똘 뭉친 눈빛.
그 눈빛들을 앞둔 민수가 나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보통 이런 자리에선 지도자급 되 는 사람들이 앞에 나서서 이런저런 멋있는 소리 한두 마디 정도 떠들어 주는 게 국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만.”
“……
“전 그런 거 안 좋아합니다. 그리 고 여러분도 안 좋아할 거고요. 영 양가 없는 소리에 시간 낭비하느니, 바로 실질적인 문제로 넘어가 봅시 다.”
코트 품에 넣어놨던 연노랑색 책자 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표지에 짙은 먹으로 써넣은 위풍당 당한 네 글자.
마침 가까이 있던 플레이어 한 명이 그걸 알아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삼재검법( 才劍法)?”
“무협지 좀 읽으신 분은 대충 아시 겠죠? 아마도 그 삼재검법이 맞을 거다……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게 맞다고 굳이 확언하지 못한 건 약간의 의심 때문이었다.
무림의 태곳적 무학이 보관된 수련 동에서 나온 건데.
이게 진짜로 무협지에 흔히 나오던 그 삼류 무공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 른다.
“뭐, 종류야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아무튼 이거 외에도 다양한 기초 무 공 비급서들이 지금 제 손 안에 있 습니다.”
“그럼 그게……?”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시나리오 일단 무협 기반 시나리오입니다. 즉 여러분도 무공을 익힐 수 있고, 익 혀야만 한다는 겁니다.” 웅성웅성!
놀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본 플레이 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싸우러 갈 것처럼 불러놓고 무공 수련이나 하라니 다들 당혹스 럽겠지.
하지만 이 단계가 해결되지 않는다 면 단언컨대 반격 따윈 불가능하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익혀야만 합 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 어떤 반 론도 접수하지 않겠습니다.”
“그, 그럼……?”
“이 자리의 모든 플레이어에게 알 립니다. 제가 지정하는 무공 비급서 를 사용하여 무공 스킬을 획득하십 시오. 그리고……
순간, 민수의 부릅뜬 눈이 각오로 불타올랐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해당 무공 스킬을 Lv.5까지 올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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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방법 가리지 마세요. 던전과 몬스터의 씨를 말려서라도 플레이어 토큰을 수급하십시오. 이상!”
반격 준비가 시작되었다.
* * *
한편 그 시각. 수련동 수직 통로. 나선계단 인근.
“결국, 맹주가 지상의 토인들을 끌 어들였다고 합니다.”
“정신 나갔군.”
“……아미타불.”
짧지만 강하게 염불하며 염주알을 만지작거리는 운상대사.
그 옆에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송대암이 불평을 터뜨렸다.
“제길, 그러니까 내 몇 번이고 말 하지 않았나! 근본도 없는 지상의 토인 따위를 무림맹주로 앉혀서는 안 됐다고!”
“하지만 어쨌든 지금 온 맹도가 맹 주님의 은혜를 입고 있는 건 분명한 지라……
“그냥 그 선에서 멈췄어야 했어! 대체 저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그래, 토인들을 끌어들인 거야 전력 을 확충해야 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삼재검법이니 육합권이니.
하나 같이 삼류 무공이라고는 하지 만, 어쨌든 무공은 무공이다.
비급서 며칠 속독한다고 뚝딱 익힐 수 없는 물건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밀어붙인다는 건.
토인들이 무공을 속성으로 학습할 수 있다는 어떤 전제가 있음이 분명 하다.
“애초에 천마에게 건네받았다는 그 비급서들이 정말 우리가 아는 그 무 공인지도 확실하지 않지. 천마 그자 가 거기에 무슨 짓을 해놨을 줄 알 고?”
“그리고 마침 마공의 특성도 속성 으로 익힐 수 있다는 게 장점 중 하나지. 분명해. 지금 맹주는 천마의 사주를 받아 자기가 끌어들인 토인 들을 마교로 개종시키려는 게……
“할 말 다 하셨습니까?”
말을 끊으며 나선 것은 지금껏 잠 자코 있던 당사련이었다.
평소 걸치고 돌아다니던 흑의가 아 닌 한결 가벼운 복장.
허리춤에 찬 단검과 주머니들을 매 만진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송 대협과 대사께서는 입장이 확 고하신 것 같으니 제가 더 말씀 보 태진 않겠습니다.”
“뭐라고?”
전 밑으로 가겠습니다.”
채앵!
“당 소저! 그게 무슨 말인가!”
냅다 칼을 뽑아 든 송대암이 언성 을 높였다.
배신감 가득한 그의 표정 앞에서도 당사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밑으로 가겠다고? 당 소저마저도 자청하여 저 천마의 수족이 되려는 건가?!”
“말씀 삼가십시오. 송 대협. 강해지 려 내려가는 겁니다.”
“겨우 그깟 힘 때문에 강호 무림에 죄를 짓겠다는 건가?! 먼저 간 당가 의 장문인들께 부끄럽지도 않나?!”
“……자존심 세우면서 다가올 강호 의 파멸을 방조하는 게 더 부끄럽군 요.”
“ 뭐야?!”
“송 대협. 얘기 나온 김에 말씀 올 리겠습니다. 스스로가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당사련이 가슴을 쭉 폈다.
당돌한 그녀의 태도에 송대암의 칼 끝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대체 언제까지 그리 학처럼 고고 하게 계실 생각이십니까? 그런 자존 심 챙기면서 저 위에 있는 그 악마 들에게 대항하시려고요? 정말 그런 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당 소저!”
“자기 자존심을 남에게 강요하는 건 그만두십시오! 우리는 살아야 합 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속죄를 하든 뭘 하든 할 거 아닙니까!”
그래, 자기라고 안 찝찝한 건 아니 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천마의 제자가 되라는 거 아닌가.
“대협께서 어찌 생각하시건, 전 맹 주님 생각을 지지합니다. 여기서 이 러고 있는 우리에 비해, 맹주님은 훨씬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계 십니다.”
하지만 그런 굴욕이나 찝찝함에 얽 매여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강호 무림의 멸망이 코앞에 닥쳤는데.
정파의 순수성 따위를 대체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자기 목숨을 걸고 몇 번이고 사선 을 넘나들면서까지 열심히 뛰는 맹 주님이십니다. 자기와 하등 상관도 없는 외지에서 온 우리를 위해서
요.”
“이젠 알아줄 사람도 없어질 강호 의 순수성을 잃는 건 부끄럽고, 강 호의 운명을 그 한낱 토인에게 맡겨 놓는 스스로의 한심함은 안 부끄러 우십니까?”
“아아아아악!”
채앵!
어둠 속에서 충돌하는 장검과 단 검.
당사련의 단검에 튕겨 날아간 송대 암의 검이 저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 다.
바닥에 쇠 부딪치는 아스라한 소리 만이 메아리로 남았다.
침묵을 지킨 채 서로를 노려보는 무림맹의 생존자들.
결국, 참다못한 당사련이 갑갑한 한숨을 토해냈다.
“……먼저 출수(III手)하신 걸 보니 설득의 여지는 없겠군요.”
“억지로 권하진 않겠습니다. 전 맹 주님께 말씀드려 내일 내려갈 테니, 여기 계신 분들도 진지하게 고려해 보시지요.” 단검을 도로 허리춤에 꽂은 당사련 이 몸을 돌렸다.
아무도 차마 잡을 엄두를 내지 못 하는 고고한 학 같은 발걸음.
압도당한 무림인들이 주춤주춤 자 리를 비키선 사이.
통로 출입구쯤에서 잠시 발을 멈춘 당사련이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전 간혹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강호 무림을 몰락하게 한 건…… 정말로 제국일까요?”
대답도 듣지 않고 당사련의 뒷모습 이 사라졌다.
출입구 너머로 그녀의 뚜벅거리는 발걸음이 멀어졌다.
그 자리의 누구 하나도 섣불리 입 을 열지 못했다.
각 문파의 장문인들은 물론이고, 송대암 자신까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을 바르르 떨던 송대암이 저 밑을 내려다봤다.
“……천마 갈중혁.”
괴물의 목구멍 같은 깊고 어두운 심연 너머.
자신의 검을 삼켜 버린 저 시커먼 무저갱 밑바닥.
저곳에 그 노괴가 자신의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분노와 공포를 주체 못 한 송대암 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대체…… 뭐야?”
위천협, 팽서운, 그리고 당사련까 지.
대체 그 노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있기에.
강호의 젊은 후기지수들이 그에게 이리 손쉽게 넘어간단 말인가? 수련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내용은 별 거 없었다.
운기조식을 하고, 검을 휘두르고, 단련을 하고.
딱 이 세 개만 끝없이 반복하는 게 수련의 전부였다.
물론.
“ 일어났느냐?”
“목소리 나오는 걸 보니 아직 할 만한 모양이구나.” 그걸 안 자고 계속 반복한다면 얘 기가 달라진다.
눈 뜨자마자 들어오는 갈중혁의 인 자한 표정에 은비의 얼굴이 흙빛으 로 물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제가 그 만……?!”
“아니, 되었다. 슬슬 한 번 쉬게 해줄까 싶어서 일부러 깨우지 않은 것이니.”
“……혹시 제가 얼마나 쓰러져 있 었나요?”
“이틀을 연속으로 수련하고, 두 시 진 정도 잠들었지.”
“시진•…”?”
“플레이어들 기준으로는 4시간 정 도 되겠느니라.”
48시간 무박 수련하고 4시간 수면.
믿어지지 않는 설명에 은비가 입을 쩍 벌렸다.
이틀 무박에 고작 4시간 동안 잔 것치고는 몸이 이상할 정도로 가뿐 하다.
설마 그에게 얻은 배움이 벌써 효 과를 보이는 걸까?
“겨우 이틀 하고 효과를 바라느냐? 본좌는 한 게 없다. 그냥 네 몸이 일어나야겠다고 해서 일어난 것뿐이 니라.”
“그, 그런가요……
“이제 이틀일 뿐인데 벌써 스스로 를 몰아세우고 있구나. 좋은 징조다. 본교의 무학 근반에 깔린 것은 바로 그런 갈급함이니라.”
웃으며 내밀어진 갈중혁의 손에는 벽곡단 몇 개가 쥐어져 있었다.
뒤늦게 든 허기에 체면 몰수한 은 비가 허겁지겁 그것을 받아 먹는 사 이.
느긋하게 그 옆에 앉은 갈증혁이 말을 이었다.
“한두 식경 정도 쉬었다 하자꾸나. 본좌도 노쇠하니 슬슬 흠에 부치는 구나.”
“알겠습니다. 스승님.”
“원,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설마 여기까지 와서 본교의 마인을 제자 로 거두게 될 줄이야.”
그리 말하며 껄껄 웃는 갈중혁의 얼굴은 말끔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얘기로만 듣던 천마와 는 영 다른 모습.
마지막 벽곡단을 오물거리며 은비 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하신 분이 야.’
환일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천마 란 마인들의 수괴.
허구한 날 무림에 쳐들어오는 나쁜 놈들의 수장이라 한다.
그러니까 그런 그에게 가르침을 청 했을 때는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있 었다.
뭔가 자해라도 시키는 게 아닐까. 아니면 이상한 도술이라도 부리는 게 아닐까.
그게 아니더라도 그야말로 악랄하 게 화를 내며 악귀처럼 굴지 않을 까.
‘한데 그런 게 전혀 없어.’
가혹하고 매서운 수련임에는 변함 이 없지만.
결국 몸이 고될 뿐이지, 딱히 사악 한 짓을 하진 않는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본인은 언제나 고고한 모습을 유지할 뿐이다.
거기에 인자한 인상까지 합쳐지니 그야말로 신선 그 자체.
마(魔)니 패도(伴道)니 하는 살벌 한 단어가 전혀 연상되지 않는다.
“……스승님께서는.”
“ o 으
“왠지 제가 알고 있던 천마와는 다 르신 것 같네요.”
좀 당돌하다 싶은 제자의 물음.
하지만 스승은 굳이 거기에 화를 내지 않았다.
주름살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어딘 지 쓸쓸한 미소.
지긋이 웃은 갈중혁이 은비를 돌아 보며 대답했다.
“그리 보이더냐?”
“네, 네. 천마라기보다는 뭐냐, 도 를 깊게 쌓으신 신선 같다고 해야 하나……
“신선…… 허허. 살면서 본좌에게 신선이라 한 건 네가 처음이로구 나.”
“죄, 죄송합니다.”
“뭘 미안해하느냐? 그리 느낄 수도 있는 거지.”
갈중혁이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깨달은 것뿐이니라. 정(正)이 니 마(魔)니, 그런 건 결국 옹졸한 이들이 자신들의 협(依)에 짓눌려 쌓아온 울타리에 불과하다는 걸 말 이다.”
“울타리요?”
“세월이 무림을, 그리고 우리를 그 리 만들었단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칼을 잡은 이들에게도 법도 가 필요하고, 지켜야 할 선을 그어 줘야 할 테니. 하지만……
본디 좋은 의도로 만들어졌을 그것.
결국, 그것이 무림의 발목을 붙잡 았다.
정파, 마교, 그리고 이 강호에 몸 을 담은 모두를.
“본좌는 그리 생각한다. 설령 제국 이 쳐들어오지 않았다 해도, 언젠가 무림은 스스로 멸망하고 말았을 것 이라고.”
“스승님……?”
“단지 제국은 그때를 앞당겼을 뿐 이지. 결국, 무림을 망하게 한 것
저 드높이 솟은 수련동의 천장.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천마의 목 소리에 서리는 피비린내.
“……스스로가 쌓아온 그 협(依)인
것이야.”
노인의 시선은 어느덧, 먼 과거를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