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016
정보의 무덤 (4)
카운터에 도착하자 흑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여자가 두 사람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하이 기어 사용자 등록 페이지입니다. 두 분 모두 처음이신가요?”
외형은 인간이었지만 얼굴에 이음새가 있고 좌우대칭으로 작은 볼트가 박혀 있었다.
투박하다면 투박하지만, 어쩌면 기계 냄새를 풍기는 게 취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이 친구는 처음이고 저는 사용자 코드가 있습니다. 지금 등록해도 될까요?”
“네. 코드명을 말씀해 주세요.”
“욜가의 아들. 동국東國입니다.”
시로네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페르미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머, 랭커시네요. 동국 랭킹 7위, 욜가의 아들. 위대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페르미가 의뭉스럽게 눈으로 웃었다.
‘연기가 수준급이군. 하긴, 기계 얼굴이니 딱히 노력할 필요도 없으려나.’
튜토리얼 관리자 마그네티.
하이 기어의 실시간 접속자를 관리하는 그녀가 페르미의 정체를 모를 리 없었다.
마그네티가 화면을 조작하며 말했다.
“하이 기어의 규정에 따라 신규 사용자를 등록시킨 욜가의 아들 님께 특전이 발동됩니다. ‘뉴 페이스’ 보상으로 1억 은하가 지급됩니다.”
시로네가 눈에 힘을 주며 페르미를 돌아보았다.
“야.”
“받을 수 있는 건 받아야지. 걱정하지 마. 1억 은하는 너에게 사용할 테니까.”
“됐고.”
시로네는 더 이상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하이 기어를 하러 온 게 아니야. 여기서 오퍼레이터와 연락할 수 있다고 그랬잖아.”
“성미 급하기는.”
페르미가 마그네티에게 물었다.
“하이 기어의 최초 설계자에게 말을 전할 수 있을까요? 급한 일입니다.”
“특정 운영자를 지목하는 건 규정에 어긋납니다. 건의 사항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역시…….”
페르미가 물러서려는 분위기를 풍기자 시로네가 마그네티에게 다가갔다.
“잠깐이면 돼요. 일단 제 이야기를 들으면 오퍼레이터도 생각이 바뀔 겁니다.”
“죄송하지만 승인할 수 없습니다. 하이 기어의 운영자는 자체 규정을 준수합니다.”
“운영자? 그렇다면 당신은 인공지능이 아니군요. 제가 있는 행성의 인간인가요?”
“……제 권한을 초월하는 질문입니다.”
목소리는 단조로웠으나 시로네는 그녀의 반응이 약간 늦은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도 알잖아요, 지금 인류가 어떤 상황인지. 세계의 운명이 걸린 일이에요.”
“응? 세계의…….”
그 말을 음미하던 마그네티의 기계 얼굴이 기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푸…….”
그리고 결국 참지 못했다.
“푸하하하! 세계의 운명이래. 진짜 미치겠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잖아?”
“그게 뭐가 웃기죠?”
시로네의 표정에 살기가 스멀스멀 올라오자 페르미가 입맛을 다셨다.
‘역시…….’
가짜와 익명이 판치는 언더 코더에서 ‘진심’이란 조롱거리가 될 뿐이었다.
“뭐가 웃기냐고 묻잖아요?”
시로네가 눈을 부릅뜨자 페르미가 말했다.
“진정해. 여긴 가상 세계야. 세상이 망하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싸우다 죽었는지 알아? 이 현실이 웃겨? 천만에. 당신은 그저 현실에서 도망친 것뿐이야.”
페르미는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암담했다.
“하아. 그러니까 여기는…….”
그때 마그네티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생각이야 자기 마음이지만, 운영자에 대한 폭언은 페널티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일정 시간 하이 기어에 접속할 수 없게 되거나, 영구 추방당할 수 있어요.”
“어디 해 봐.”
시로네의 몸에서 미라클 스트림의 빛이 타올랐다.
“내가 이곳을 공격해도 웃을 수 있을까? 그때는 현실이 뭔지 깨달을 수 있겠어?”
“다시 접속하면 돼요.”
시로네의 눈썹이 꿈틀했다.
“반면에 당신은 영구 추방될 거고,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겁니다. 이 공간에서 벌어질 최악의 상황은 그것뿐이에요.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
“시로네 씨.”
시로네는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너무 화가 나서 이번만 장단에 맞춰 줄게요. 여긴 현실이 아닙니다. 제가 바깥에서 어떤 사람인지 당신은 몰라요. 세상을 위해 싸우는 투사일 수도 있고, 당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악당일 수도 있겠죠.”
페르미가 동의했다.
“음.”
“또한 저도 당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물론 저도 이름은 들어 본 유명인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세상을 구한다고 떠벌리지만, 어떻게 알겠어요? 이 꿈에서 깨어나면 자신의 힘을 이용해 실컷 즐기고 있을지.”
“나는……!”
“실제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정말로 중요한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죠. 언더 코더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제발 현실은 현실에 두고, 여기서는 매너를 지키세요. 당신의 진지함은 이곳의 유저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페르미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내 말이 그거라니까.’
“모르겠어.”
시로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현실이든 언더 코더든 똑같은 사람이잖아. 비록 진짜 육체는 아닐지라도 나는 지금 사람하고 대화하고 있는 거잖아. 어째서 외면하는 거야? 당신의 세계가 파괴당하고 있다고!”
“……아주 진상이네.”
시로네는 답답했다.
“어떻게 증명하면 될까? 여기서 무릎이라도 꿇으면 내 진심을 믿어 줄 거야?”
마그네티는 코웃음을 쳤다.
“무릎? 인간이 개가 되어 짖고, 해부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시체가 되는 자들도 부지기수예요. 현실의 연쇄살인마가 여기서는 아픈 자들을 돌본다고요.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어요? 전부 가짜라고요.”
“좋아.”
미라클 스트림이 천장까지 솟구쳤다.
“그렇다면 그 가짜를 파괴하겠어. 그러니 돌아가. 돌아가서 창문을 열고 바깥을 봐.”
마그네티의 손이 화면으로 옮겨 갔다.
“……운영자를 공격하는 행위는 영구 추방입니다. 분명히 경고했어요.”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 시로네가 마그네티를 향해 몸을 던졌다.
“잠깐……!”
페르미가 손을 내미는 그때.
“부탁이야.”
카운터 앞에 멈춘 시로네가 바닥을 짚었다.
“세상을 구하고 싶어.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어. 진심을 전할 방법은 없지만, 그래서 나에게 속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그냥 속아 주면 안 될까? 어쩌면 이것으로 누군가를, 하나의 생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을지 모르잖아.”
“…….”
마그네티는 시로네를 노려보았다.
감정으로 충만했던 기계의 얼굴이 다시 차가워지고.
“하아.”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뭐라고 전해 드려요?”
시로네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한 가지 알아 둘 게 있어요. 같은 운영자지만 저도 오퍼레이터에게 명령할 위치는 아니에요. 이상한 메시지라면 응답조차 하지 않을 거예요.”
시로네는 벌떡 일어났다.
“응! 괜찮아. 시로네가, 아니 야훼가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전해 주면…….”
“페르미.”
페르미가 말을 끊었다.
“아르디노 페르미가 아주 큰 사업을 물어 왔다고 전해 주세요. 분명 만족할 거라는 말도.”
그러고는 시로네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본명으로 거래를 한 적이 있는 내가 하는 게 나아. 야훼라는 이름은 여기서는 안 통하니까.”
“좋아요. 보냈어요.”
마그네티가 전송을 끝냈으나 그로부터 5분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역시 응답이…….”
삐- 삐-.
그 순간 카운터 안에 탑재되어 있는 화면에 알람 메시지가 떴다.
‘정말로 왔네.’
솔직히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다.
“응답이 왔어요. 지금 재생하겠습니다.”
시로네와 페르미가 입을 다문 가운데 잔뜩 눌린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꺼져.
“…….”
끝? 이게 끝이라고?
시로네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마그네티가 카운터에 턱을 괴며 말했다.
“이것도 이례적인 거예요. 언더 코더는 수많은 콘셉트질의 향연이지만 오퍼레이터의 성격은 진짜 괴팍하거든요.”
페르미가 동의했다.
“내 이름도 통하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지. 일단 하이 기어 안으로 들어가서 방법을 찾자.”
“그래도 응답을 했잖아.”
시로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로 관심이 없다면 꺼지라는 말도 하지 않았을 거야. 다시 한번 시도해 봐.”
“아니, 그게…….”
시로네가 옆구리를 찌르자 페르미가 두 손을 쳐들며 카운터로 밀려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페르미가 마그네티를 돌아보았다.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까요?”
시로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뭐라고 보낼까요?”
“흐음.”
페르미의 눈빛이 변했다.
“바깥 세계의 데이터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 장치를 조건부 경매에 내놓을 생각인데…….”
시로네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조건은 세 가지야. 첫째, 기록을 해독할 능력이 있는 자. 둘째, 열람한 데이터를 나와 공유할 것. 셋째, 경매는 선착순으로 낙찰함.”
화면을 두드리며, 마그네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만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혹시 관심이 있으면 개인적으로 거래해도 상관없을 거 같아서. 이상.”
페르미를 보는 시로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법이 있을 줄 알았어.’
하여튼 쪼아야 말을 듣는다니까.
“보냈어요.”
말이 끝나는 순간 시끄러운 벨 소리가 터지고, 마그네티가 눈을 깜박거렸다.
“코드명 오퍼레이터가 운영자 권한으로 음성 대화를 요청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물어볼 것도 없었다.
페르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변조로도 숨길 수 없는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뭐야? 운영자 채널을 사적으로 이용해? 똑똑한 놈인 줄 알았는데.
“어쨌든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잖아?”
-착각하지 마. 너무 짜증 나서 연결한 거야. 내가 선착순에서 질 것 같아?
“사실…… 그것도 아직 확정된 건 아니야.”
-어디서 약을 팔아? 경매를 들먹인 것 자체가 네가 기록 장치를 해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지. 거기에 따른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선착순이라는 극단적인 경쟁 방식을 택한 거 아냐?
‘하여튼 까다로워.’
페르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지만 상황이 좀 미묘해. 네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애먼 놈에게 넘어갈 판이거든. 내 옆에서 날강도 하나가 칼을 겨누고 있어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시로네가 나섰다.
“안녕하세요, 오퍼레이터 씨. 저는 시로네라고 합니다. 듣기로 디 어비스의…….”
-닥쳐. 너한테 연결한 거 아니야.
시로네는 울컥했다.
-시로네? 야훼가 끼어든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그딴 기록 장치, 나한테는 없어도 그만이라고.
페르미가 눈웃음을 지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경매에서 사들이는 물건만 봐도 뭐에 미쳐 있는지 짐작이 가는데.”
-…….
“그러지 말고 같이하자고.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디 어비스에서 쓸 프로그램 하나만 만들어 줘.”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안 돼. 태양전 해야 돼. 너는 안 할 거야? 그러다가 서국에 먹힌다?
시로네가 다시 나섰다.
“오퍼레이터 씨, 태양전이 뭔지는 모르지만…….”
-모르면 꺼져. 왜 자꾸 끼어드는 거야? 그리고 어떻게 태양전을 모르냐? 멍청하긴.
시로네의 목에 핏줄이 일어섰다.
“몰라. 하지만 그게 사람 목숨보다 중요해?”
-하하! 말은 잘하네. 네가 여기서도 야훼인 줄 아나 본데, 자신 있으면 찾아오든가. 듀얼로 날 이기면 무슨 요구든 들어주지.
페르미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