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194
금단의 영역 (1)
“인간 세상으로 나가겠다고?”
화족의 족장 루티아가 물었다.
“네, 족장님. 저는 제 남편을 도와 인간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다. 소명이라 생각합니다.”
요라한은 침묵으로 사과를 표시했다.
‘족장님에게 아르망은 유별난 딸 같은 존재. 떠나보내는 아픔도 크겠지.’
무엇보다 그녀는 화족을 지킬 수 있는 능동적 성향을 가진 유일한 전사였다.
“그래.”
루티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이런 날이 왔구나. 화족은 인간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선대부터 내려온 우리의 존재 이유.”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요라한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였을까, 선대 화족은?’
화족은 대개 수동적이라 세월이 지날수록 정체성이 옅어져야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이 오랜 시간 동안 하나의 소명을 지켰다. 이건 성향의 문제가 아니야.’
어떤 깨달음이다.
‘진리 앞에서는 능동도 수동도 존재할 수 없는 법. 초대 화족은 알고 있었던 거야.’
인간에 대해, 인간의 삶에 대해…….
‘어쩌면 나보다 더 깊이.’
요라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미카스 왕국의 세력이 화족의 영역을 침범하는 상황이에요. 이대로는 한 달 안에 접촉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가 화족들이 이주할 수 있는 마땅한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후후. 역시 늘 다정하구나, 요라한은.”
요라한은 얼굴을 붉혔다.
“걱정 말거라. 화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비록 수동적이지만, 또한 그렇게 이어 온 것이 우리다. 잘할 수 있을 게야.”
아르망이 나섰다.
“하지만 족장님, 인간은…….”
루티아가 말을 끊었다.
“그래, 위험한 종족이지. 하지만 아르망, 너는 이제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네 남편의 뜻을 따를 수 있겠느냐.”
그녀가 요라한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이라도 떠나거라. 화족의 이전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인간이 바라보는 세계와 다르단다. 네가 아무리 좋은 안식처를 찾는다고 해도 그곳이 꽃이 피어날 자리는 아닌 게야.”
화족은 광합성만으로 섭식이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루티아의 허락을 받은 요라한과 아르망은 집으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소중한 장소인 만큼 동작은 굼떴다.
‘정말 떠나기 싫다. 하지만 하루 이틀 미루다가는 정말로 이곳에서 살게 될 거야.’
꿈을 이루기 위해 애써 눈물을 삼키던 그가 침대 밑에 둔 상자를 발견했다.
“어? 이거…….”
화족의 마을에 온 뒤로 꺼내지 않았던 단도를 만지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여보, 숫돌 좀 써도 될까?”
“단도는 왜? 평소에는 쳐다도 안 보더니.”
“인간 세상으로 나가는 거니까. 예전에는 늘 가지고 다녔지. 이런 걸 가지고 다녀야 나쁜 사람들을 피할 수 있어.”
아르망은 피식 웃었다.
“무슨 걱정이야? 내가 널 지킬 건데.”
그러고는 요라한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장담하는데, 너는 절대로 이거 사용하지 못할걸. 참새 손질도 벌벌 떨면서.”
“…….”
그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쳇! 누가 뭐래? 그래도 위협은 할 수 있잖아. 녹슨 검을 들고 있으면 누가 겁을 먹겠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숫돌을 꺼내는 요라한의 모습에 아르망은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그래도 제법 든든한 건 사실이었다.
동이 틀 무렵, 침대에서 자고 있던 요라한은 바깥의 비명 소리에 눈을 떴다.
“뭐, 뭐야……!”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아르망이 장검을 들고 문을 나서고 있었다.
화족의 아이들이 창백한 얼굴로 다가왔다.
“언니!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이야?”
뒤를 따라온 요한이 바깥을 살피자 일단의 병력이 마을 입구를 점거하고 있었다.
“기마병?”
금속 갑옷으로 무장한 상태였고 깃발의 휘장에는 사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미카스 가문.”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만, 천혜의 오지를 뚫고 오기에는 병력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
‘개간 사업과 병행하여 조금씩 침범하는 게 왕국의 전략이었다. 그런데 왜……?’
요라한은 기마병의 선두를 보았다.
아직 청년티를 벗지 못했지만, 둘로 갈라진 턱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남자가 있었다.
‘아마도 미카스 가문의 장남…….’
미카스 아레온.
‘소식을 들었을 때가 3년 전이니까 올해 열여덟 살. 제왕의 피를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났군.’
인기가 없었을 뿐 요라한도 사상가이기에 권력자의 속성은 눈에 훤했다.
아레온의 옆으로 백면서생이 말을 몰았다.
“왕자님, 여기가 화족의 마을인 것 같습니다. 다음 전략을 지시하시죠.”
“흐음, 화족이라.”
아레온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상한 능력을 가졌지만 기록에 의하면 위험하지는 않다. 오히려 어떤 명령이든 복종하는 노예종.’
학자의 기록이었다.
‘즉,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시종을 거느릴 수 있다는 거지. 이 또한 왕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 꼰대가 기를 쓰고 개간 사업을 하는 이유가 있었군.’
물론 다른 이유도 수십 가지일 터였다.
‘어쨌든 내가 아버지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 숲을 뚫고 여기까지 왔어.’
야심가인 아레온은 많은 인재들과 교류했고 그중 하나가 옆에 있는 피스크였다.
미궁 같은 숲을 정확히 헤쳐 온 인물.
“피스크.”
아레온이 말했다.
“이곳이 내 역사의 첫 번째 점령지가 될 것이다. 화족을 데려가면 아버지도 인정하시겠지.”
왕위 승계가 굳혀질 터.
“아마도 위대한 왕의 후계자로 생각하실 겁니다. 형제분들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니까요.”
아레온이 전방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정복하라.”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100명이 넘는 기마대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황당하게 지켜보고 있던 화족들이 어찌할 줄을 모르는 그때 족장 루티아가 소리쳤다.
“도망쳐!”
그들의 인파를 역류하며 달려간 아르망이 검을 뽑으며 기마대로 돌진했다.
요라한이 뒤따랐다.
“여보!”
“오지 마! 최대한 멀리 떨어져!”
“같이 갈 거야.”
“미쳤어? 그러다 죽어! 아이들을 지켜 줘. 너는 통솔할 수 있잖아. 족장님 혼자서는 무리야.”
“흐으.”
반박할 여지가 없는 옳은 말에 요라한은 입술을 깨물며 몸을 틀었다.
“시간만 벌고 빠져!”
고개를 끄덕인 아르망은 잡념을 지우고 전투에 집중했다.
“정격조종.”
그녀의 검이 하늘을 날고, 기사들의 강철 장갑 사이로 피 분수가 터졌다.
기사들이 픽픽 고꾸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아레온의 눈이 반짝거렸다.
“저 여자는?”
피스크가 노트를 펼쳤다.
“화족 중에도 극히 드물게 능동적 성향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육식종이라고 부르지요. 고유의 능력과 결합하여 굉장한 전투력을 보인다고 합니다.”
“확실히 강하군.”
아레온이 덧붙였다.
“그리고 강한 것은 아름답지. 피스크, 저 여자를 잡아야겠다. 생포할 수 있겠지?”
“네.”
피스크는 유능하다.
“기마대를 셋으로 나누어 한 부대는 퇴로를 막고 한 부대는 주민을 잡아라. 3분 안에 끝내.”
부관이 깃발로 신호를 보내자 기마대가 칼로 베인 듯 열을 맞추어 흩어졌다.
요라한은 적의 책략을 간파했다.
‘기마보다 빠를 수는 없어. 이대로는 전부 잡힌다. 어떻게든 응전을 해야…….’
퍼뜩 떠올린 그가 루티아에게 말했다.
“족장님! 숲으로!”
화족이 숲으로 들어가자 잠시 갈등하던 기마대가 말을 버리고 뛰어들었다.
“흥! 그래 봤자 공격도 못 하는…… 응?”
마치 숲이 살아 움직이는 듯 온갖 식물과 벌레가 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길! 이상한 기술을 쓰잖아!”
아무리 나뭇가지를 베어도 공격은 끝이 없었고, 결국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숲을 살핀 피스크가 말했다.
“애를 먹는군요.”
“저쪽도 마찬가지인데. 제대로 훈련이 된 건가?”
전권을 위임받은 자는 책임질 것도 많은 법, 피스크는 말에서 내려 두 팔을 벌렸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돌연 그를 중심으로 강풍이 불더니 두 다리가 뜬 채로 화살처럼 날아갔다.
예상치 못한 접근에 아르망이 황급히 몸을 뒤틀자 손이 어깨를 스쳤다.
피스크가 말했다.
“느려.”
그 순간 아르망은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만약 시로네가 사는 시대였다면 전기와 유사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흐윽!”
현재의 그녀로서는 공기가 칼날처럼 예리해지는 현상을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팔뚝의 베인 상처를 붙잡은 채 뒤로 물러서자 피스크가 다시 땅에 착지했다.
검을 불러들인 아르망이 물었다.
“암기인가?”
“아니.”
피스크가 손을 내밀었다.
“정신의 힘.”
“…….”
“여자여, 나는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다. 나의 왕께서 너를 찾으시니, 순순히 항복해라. 그러면 누구도 해치지 않을 것이다.”
“흥.”
송곳니를 드러낸 아르망이 검을 후렸다.
“화족을 우습게 보는구나.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것일 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아니다.”
저 멀리 숲이 흔들리더니 기진맥진한 기사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나오는 게 보였다.
“고문서에서 봤지. 자연 만물과 동화된다는 가설이 사실인 듯하군. 하지만…….”
피스크가 머리 위로 손을 들었다.
“인간은 자연 만물의 현상을 지배하니, 이것이 불, 물, 땅, 공기를 통합하는 제5의 원소.”
공기가 뜨겁게 달구어지더니 손바닥 위로 호박 크기의 불덩어리가 탄생했다.
“정신의 집중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고 불을 만들어 낸 상황에 아르망의 표정이 멍해졌다.
“파이어볼.”
그가 팔을 휘두르자 불덩어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숲의 초입에 떨어졌다.
“안 돼!”
펑 하는 폭발이 일어나고, 숲속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피스크가 말했다.
“어떠한가? 자연의 불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 이것이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다.”
연기에 질식할 것 같은 주민들이 다시 숲을 빠져나오자 기마대가 그들을 포위했다.
“선택해라. 저들의 목숨을 저버리면 너는 살 수 있겠지. 싸울 텐가, 항복할 텐가?”
“…….”
그렇게 전투가 끝났다.
상호 간의 희생 속에서 기마대의 손실이 예상보다 컸으나 아레온은 기분이 좋았다.
“다들 모였나?”
화족 전원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집결한 가운데 아르망이 주위를 살폈다.
‘요라한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망쳤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겠지만, 반대의 경우도 가능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제발, 제발 살아만 있어 다오.’
아레온이 말했다.
“나는 미카스 왕국의 왕자다. 오늘부로 이 영토는 미카스령이 될 것이고 너희들 또한 이제 왕국의 백성이다. 만약 이를 부정할 시에는…….”
장광설이 이어지는 동안 요라한은 창고의 틈새로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결국 잡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