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28
시로네가 아는 사실은 이러했다.
아이론 왕국의 귀족 모임에서 상원 귀족 발테스가 누구라도 자신보다 용기가 있다는 걸 증명한다면 아끼는 화병을 주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하원 귀족 무스가 도전했다. 그가 실행한 방법은 포상으로 건 화병을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저 술자리의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내막을 보면 오랫동안 곪은 정치적 갈등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아이론의 귀족 체계는 양원제야. 상원은 왕의 의지를 전하고 하원은 평민을 대표하지. 덕분에 아이론은 부국이 되었지만, 귀족 간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야.”
평민을 정치에 끌어들이면 귀족의 권위는 약해지지만 국가의 부는 막강해진다.
“상원의 힘은 군사력에서 나오고 하원의 힘은 세금에서 나와. 결국 두 파벌의 싸움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거야. 하원 귀족인 무스가 건방을 떨자 발테스는 속이 끓었지. 당시에는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앙금은 남아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게 앵무 용병단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화병 사건 3개월 후에 무스의 영지에 내전이 발발했어. 정체 모를 군대가 침략을 했거든. 여기서부터는 가문의 첩보를 통해서 들은 사실인데, 내전을 일으킨 자가 사실 발테스래. 사병이 아닌 용병을 고용해서 무스를 친 거지.”
“설마, 거기에 속한 용병이……?”
“그래, 그들이 앵무 용병단이야. 물론 수많은 용병단이 참전했지만 앵무 용병단은 압도적인 성과를 냈어. 신생 용병단의 승부수였을 수도 있지만, 내가 들은 첩보에 의하면 호전성이 굉장히 강한 집단이래. 대부분 용병들이 돈을 보고 일하지만 그들에게는 일종의 신념 같은 게 보였다는데. 어쨌든 앵무 용병단을 위시로 몇 안 되는 부대는 마침내 무스의 내성까지 진입했어. 하지만 승리를 눈앞에 둔 그때 갑자기 발테스의 사병들이 후방에서 밀려들어 오히려 용병단을 기습한 거야.”
시로네는 당시의 상황을 짐작했다.
용병을 고용하여 적을 치게 만들고, 다시 사병으로 그 용병들을 친다.
승리와 결백을 동시에 얻는 전략이었다.
“발테스는 처음부터 무스를 숙청할 생각은 없었어. 평민의 지지를 받는 하원의 힘은 생각보다 막강하니까. 다만 경고를 해 주고 싶었던 거겠지. 결국 처음부터 용병들은 버리는 패였던 거야. 전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정치적으로 보자면 완벽한 승리지.”
“하지만 그렇게 끝나 버리면 하원 귀족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 아냐?”
“물론 그렇지만 표면으로 드러낼 수는 없지. 어쨌든 상원은 왕의 비호를 받는 집단이니까. 아마도 협약이 있었을 거야. 무스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는 건, 발테스에게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았기 때문일 테니까.”
리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결국 싸운 자들만 버림받은 건가? 정치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기사도에 어긋나는 짓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결국 그런 식으로 세상은 돌아가는걸. 심지어 나는 어릴 때부터 이보다 더한 첩보들을 많이 접했어. 세상은 우리들의 생각만큼 원칙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야.”
침묵이 이어졌다. 그들 또한 언젠가 세계의 거대한 힘이 작용하는 곳으로 진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화병 사건은 그들과 상관없는 일이지만, 남의 일도 아니었다.
테스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버려진 거야. 무스의 영지를 공격했던 용병들은 대부분 죽거나 도주했어. 아이론 왕국은 공식적으로 그들을 도적단으로 지칭했어. 지금도 전장에서 탈출한 소수의 인원은 레드 라인을 통해 수배 중이야. 루카스라는 죄수도 그런 부류일 거야.”
시로네는 뭔가 꺼림칙했다.
“국가에서 추적하는 수배자들이잖아. 아무리 섬이라고 해도 어떻게 몇 년을 버틸 수 있지? 사칭일 가능성도 있잖아. 앵무라는 이름이 딱히 생소한 것도 아니니까.”
“사칭이라…….”
테스는 새벽하늘을 바라보았다.
“시로네, 시장에서 여자를 만났다고 그랬지? 이상한 놈에게 걸려서 함께 도망쳤다고.”
“마르샤 누나?”
“그래. 처음 들었을 때는 연결이 안 됐는데, 지스에게 앵무 도적단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확신했어. 앵무 용병단을 이끄는 단장의 이름이 떠올랐거든.”
“응? 프리먼 아니야?”
테스가 고개를 돌렸다.
“클레이 마르샤. 그게 단장의 이름이야.”
“…….”
“사칭일 수도 있지. 하지만 모든 게 맞아떨어지고 있어. 프리먼 조직으로 명칭을 바꾸고 웅크리고 있는 앵무 용병단. 섬에 들어온 마르샤라는 이름의 이방인. 내 직감은 그들이 진짜라고 말하고 있어.”
“단장이라고…….”
나름 사람을 잘 본다고 자부하는 시로네지만 대화할 때는 용병단의 단장이리라고는 짐작조차 못 했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진짜인 것인가?
‘A급 수배자.’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귀족과 범죄자의 결탁을 이야기하며 비소를 지었던 마르샤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도.
테스는 마르샤의 사정을 모르지만 시로네의 눈에 담긴 부담감을 읽을 수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 사람과 어떤 일이 있었든 우리는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지스의 여동생을 구하러 가는 거니까. 만나 보고 판단하면 돼.”
“응.”
번뇌를 지운 시로네는 또렷한 눈빛으로 말의 옆구리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저 멀리 토아산의 그림자가 보였다.
강행 돌파(1)
서쪽에서 프리먼 조직의 아지트로 들어가는 길은 없다. 중앙에 원주민 자치 구역이 있기 때문이다.
유나를 납치한 팔코아의 부하들은 자치 구역을 관통하는 대신 마차를 타고 토아산을 크게 우회하여 북쪽 절벽의 초입으로 진입했다.
아지트에 도착했을 때는 동이 트고 있었다.
허름한 창고 건물에서 팔코아는 의자 하나를 두고 부하들을 기다렸다.
풀린 동공으로 앉아 있는 그의 발밑에 씹다 버린 루프의 껍질이 널브러져 있었다.
“형님, 데려왔습니다.”
팔코아에게 인사한 부하들은 유나가 담겨 있는 포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쿵 찍는 소리가 났으나 비명은 없었다. 다만 포대가 극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팔코아의 턱짓에 부하가 칼로 포대를 찢었다.
마치 누에를 벌린 것처럼, 눈물과 땀에 젖어 있는 유나가 겁에 질린 얼굴을 드러냈다.
“살, 살려 주세요.”
“큭큭.”
팔코아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확실히 핏줄은 핏줄이야.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모습이 오빠랑 똑같군.”
“오빠. 지스 오빠…….”
하루 동안 보지 못했다. 납치된 상황에서도 그녀는 지스가 걱정스러웠다.
“너.”
유나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팔코아의 말에 섞인 살기에 반응한 것이었다.
“네가 여기 왜 왔는지 알아?”
“몰, 몰라요. 제발 집에 보내 주세요.”
“집에 가고 싶겠지. 하지만 안 돼. 지금 네 오빠가 아주 열심히 일을 하고 있거든. 꼭 성공하기를 바라야 할 거야. 무능력하면 네 목이 떨어져 나갈 테니까.”
“오빠한테 무슨 짓을 시킨 거예요?”
유나는 알고 있었다, 밤마다 피곤에 절어 들어오는 지스의 표정이 늘 우울하다는 것을.
도와줄 수 없기에 내색하지 못했지만 팔코아를 본 순간 모든 것이 자명해졌다.
“당신이 오빠를 괴롭힌 거지! 나쁜 사람!”
“푸하하! 그래, 확실히 좋은 놈은 아니지. 꽤 똑똑한데? 하지만 이건 몰랐던 모양이야.”
벌떡 일어난 팔코아가 유나의 팔을 비틀었다.
“아아!”
“나쁜 놈한테 나쁜 놈이라고 하면 진짜로 다친다는 거 말이야. 알겠냐, 이 빌어먹을 꼬맹아?”
“아파요! 아파!”
“가뜩이나 짜증 나 죽겠는데 감히 내 성질을 건드려? 네 오빠처럼 어디 하나 부러져야…….”
“그만해.”
차가운 목소리에 팔코아가 입을 다물었다.
다만 무언의 시위라도 하듯 유나의 팔을 꺾은 손에서 힘을 풀지는 않았다.
“팔코아, 민간인을 건드리는 건 규율 위반이다.”
“…….”
팔코아의 관자놀이가 실룩하더니 비로소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프리먼.”
아가도 프리먼.
현 프리먼 조직의 수장이자 앵무 용병단 시절에는 서열 2위의 실세였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하얀 롱코트를 걸친 그의 인상은 창백함 그 자체였다.
눈썹은 완전히 밀어 버렸는지 남아 있지 않았고 입술은 병든 사람처럼 파리했다.
팔코아의 표정이 불같이 뜨거워졌다.
‘재수 없는 자식.’
부단장 루카스는 그래도 말이 통하는 놈이었지만, 프리먼과는 절대 상극이었다.
그럼에도 여태까지 말을 따랐던 것은 단장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서열 2위이기 때문이다.
팔코아가 입술을 이기죽거리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대장. 여태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여긴 웬일이야? 돈이라도 떨어졌나?”
부하들은 어느 편에도 서지 못했다.
상관은 프리먼이지만, 팔코아 또한 단장에게 프리 롤을 부여받은 행동대장.
무엇보다 심적으로 팔코아의 편이었다.
단장이 잠적한 이후 앵무 용병단의 남은 자들은 갈리앙트섬에 들어왔다.
프리먼은 단장이 해결할 때까지 조용히 숨어 있자는 주의였지만 팔코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섬의 상권을 장악했고, 루프로 얻은 자금으로 갈리앙트 자치 정부를 매수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약에 중독된 자들도 상당수였다.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훗날 용병단으로 복귀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팔코아의 행보에 프리먼은 제재를 가했으나, 대부분의 부하들은 팔코아의 편에 섰다.
언제 올지 모르는 단장보다는 지금 당장 얻는 부와 쾌락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프리먼은 내정으로 물러났으나 이번에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앵무의 이름을 달고 있다면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약에 취해서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지도 모르는 거냐? 넌 앵무의 위상을 실추시켰어.”
팔코아는 코웃음을 쳤다.
“앵무? 언제부터 우리가 과거의 영광만 바라보며 살았지? 지금 이 꼴을 봐라. 내가 벌어들이는 돈이 아니면 조직이 여태까지 버텼을 거 같아?”
프리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미쳤구나, 팔코아.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조직을 이끄는 사람은 엄연히 나다.”
“그딴 건 상관없어. 난 당신을 인정하지 않거든. 애초에 부하들을 챙기든가. 이제 좀 살 만하니 윗대가리 행세를 하려고 들면 곤란하다는 거야.”
철컥 소리가 났다.
마정탄을 쏘는 리볼버가 어느새 프리먼의 손에 쥐여 있었다.
“말을 가려서 해라. 단장 대리는 나야.”
프리먼 또한 스키마의 고수.
약한 생물이라면 노출된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만큼 강력한 기운이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팔코아는 그 차가운 기운을 마치 자신의 몸에 칼을 박듯이 받아들였다.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입을 놀렸다.
“어이구, 무서워라.”
“…….”
프리먼도 알고 있었다, 극강의 호전성을 가진 놈에게 고통은 오히려 삶의 활력소라는 것을.
‘다시 들개가 된 건가.’
강행 돌파(2)
앵무 용병단에 가입하기 전에도 팔코아는 오직 전투의 욕망으로 살던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을 5년이나 섬에 처박아 두었으니 정신이 돌아 버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프리먼은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앵무의 자부심마저 버린 거라면, 지금 말해라. 없애 주지.”
“자부심?”
팔코아는 어깨를 들썩였다.
“어이, 내가 하나 말해 줄까? 앵무 용병단은 이미 끝났어. 단장은 돌아올 생각도 없다고. 부하들도 한계야. 너도 그만 포기하고 이쪽으로 넘어와.”
프리먼은 대답 없이 리볼버를 겨누었다.
단지 마정탄을 쏘는 게 아닌, 거너 특유의 스키마가 더해진 전투 방식은 팔코아도 우습게 볼 수 없었다.
부하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어느 쪽이라도 손끝 하나만 움직이면 신호탄이 될 터였다.
그 순간 갑자기 문이 열렸다.
“어이구, 아주 살판 났네.”
팔코아가 튀어 나가려는 정신적 관성에 브레이크를 걸고, 프리먼 또한 방아쇠를 당기려는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멈추고 미간을 찡그렸다.
불쾌한 쇼크를 준 목소리의 주인을 짜증스럽게 돌아본 것도 잠시, 창고의 모두가 멍해졌다.
“단, 단장……?”
머리가 단발이고 옷차림도 바뀌었지만 분명 그들이 아는 클레이 마르샤였다.
“오랜만이야, 다들.”
창고로 들어오며 마르샤는 분위기를 읽듯 주변의 배치와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유나를 지켜보더니 마지막으로 시선을 팔코아에게 넘겼다.
팔코아는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해낸 일이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길을 아래로 내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전부 알고 있다는 것은 마르샤의 옆에 서 있는 부하의 표정만 봐도 알았다.
부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
팔코아는 화내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까.
저 여자가 앵무의 머리였다.
분위기 파악을 끝낸 마르샤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뭐. 대충 얘기는 들었어. 술도 팔고, 사장 소리 들어 가며 계집질도 하고, 약도 처먹고. 그렇지?”
“단장, 난…….”
마르샤의 손이 뺨을 후려갈겼다.
이타, 삼타의 따귀질이 날아들 때마다 팔코아는 질릴 정도로 고개를 되돌렸다.
찰진 파열음 속에서 과연 팔코아가 언제까지 버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하들은 겁에 질렸다.
결국 팔코아의 눈에 불이 켜졌다.
“으아아아! 단장! 큭!”
그러거나 말거나 마르샤는 오른발로 복부 아래쪽을 내질러 팔코아를 쓰러뜨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그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았으나 마르샤는 차분했다.
“뭐야, 그 개눈깔은? 잘하면 치겠다?”
팔코아는 턱이 부서질 정도로 이빨을 깨물었으나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타락한 성모.
세상 누구하고도 칼부림을 할 수 있는 팔코아지만 그녀만큼은 찌를 수 없었다.
“뒷골목에서 빌어먹던 들개 따위가, 불쌍해서 거두어 줬더니 뒤통수를 쳐? 그러고도 네가 앵무야?”
몸에 칼이 들어와도 버티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대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장이 뭘 알아? 내가 아니었다면 앵무라는 이름도 이미 없었을 거라고! 5년 동안 조직을 얼마나 키웠는지 알아? 갈리앙트섬이 전부 우리 거란 말이야!”
“자랑이다, 병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