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310
물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로네와 마찬가지로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준동경계의 핵심은 끝없는 공겁이지?”
페르미는 자신의 말을 했다.
“생각 속에서 사건을 계속 파고드는 거야. 이미 벌어진 일을 망상으로 처리하고, 새로운 페이지를 연다. 공겁, 공겁, 또다시 공겁. 그렇게 사건을 초기화해서 네가 원하는 세계가 될 때까지 관철시키는 구조. 마치 앙케 라처럼.”
“나한테…….”
이를 악문 제르비스가 외쳤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글쎄?”
페르미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했을까, 내가?”
빛을 달리는 소녀 (6)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간단해. 아포칼립스에 하나의 정보를 퇴적시켰을 뿐이야. 위저드는 심장이 뚫려 즉사한다, 라고 말이야.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제르비스는 말이 없었다.
그들이 아포칼립스에 들어간 것은 알고 있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보를 퇴적시켰다고? 도대체 언제?’
“모노리스.”
페르미가 말을 이었다.
“네 생각의 유일한 사각일 거야. 바깥 세계에서 우회해서 준동경계에 접속했거든. 네가 앙케 라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선택권이 생기니까.”
제르비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위저드를 죽인 게, 아포칼립스에 그런 정보가 퇴적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래.”
“아니, 말이 안 돼. 아포칼립스는 이곳의 정보가 퇴적되는 시스템이야. 그 역행이…….”
제르비스는 깨달았다.
“아.”
역행이었던 것이다.
페르미가 풍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현실에서 인과는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지만, 생각은 오히려 반대야. 인간은 무의식에서 이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의식화시키거든.”
심층 12단계의 작용이었다.
“최면 같은 거랄까? 무의식에 특정 정보를 심을 경우 렘 영역을 지나 논리를 갖춘 하나의 생각으로 발전된다. 그래서 네가 위저드를 죽인 거야. 반드시 그래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스스로 얼마든지 만들었겠지.”
제르비스는 이를 깨물었다.
무의식이라는 거, 눈으로 본 적도 없지만 거짓이 아니라는 것만은 자명했다.
“그래, 제르비스. 너는 분명 신이야. 네 생각 속에서 원하는 결과는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어떤 허무맹랑한 상상을 해도 인과야 나중에 보충하면 그만. 하지만 우리도 이게 처음은 아니거든.”
페르미는 양쪽 검지를 엑스 자로 교차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에게는,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네, 였던가?”
“…….”
제르비스는 끝났다고 느꼈다.
이제 생각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고, 저들은 얼마든지 결과를 바꿀 터였다.
“나가.”
그가 소리쳤다.
“내 생각에서 사라져!”
바슈카의 성이 모래처럼 흩날린다. 토르미아 군대도, 리퍼의 군대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미로와 가올드, 에덴과 씽이 소멸하는 과정에서 페르미가 말을 이었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나도 네 생각 속 인물일 뿐이겠지. 하지만 이미 사건은 분기됐어. 현실에서 너는…….”
“꺼져!”
페르미의 몸이 퍽 소리를 내며 증발했다.
남은 사람은 시로네가 유일했다.
제르비스가 악을 질렀다.
“감히 내 생각을 속여? 사라져! 이건 내…… 컥!”
풍경이 흔들렸다. 동시에 제르비스가 피를 토해 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더 이상 준동경계는 발동되지 않았다.
“위저드.”
시로네는 배경만 남아 있는 하늘을 살폈다. 창공에 번개가 치고 있었다.
호오오오오.
무상신의 화신이 혀를 길게 빼내며 넘실거리더니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
1프레임 소실.
목이 거꾸로 돌아간 제르비스의 준동안이 충격으로 무섭게 흔들렸다.
“으으, 으으으!”
예측할 수가 없다.
시로네에게 죽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도의 쇼크였다.
전투 시간 : 6시간 7분
제르비스 현실중준동경계중사망 : 1,002회
“제르비스의 상태가 이상해.”
시로네가 말했다.
새로 펼친 준동경계에서 제르비스는 무릎을 꿇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죽인……다. 죽인…….”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상체를 펼치더니 앞으로 돌진했다.
“크아아아!”
다중안의 동공이 풀린 것을 본 시로네가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본체가 의식을 잃었어. 살의의 충동만 남은 거야. 당분간 꽤 날뛰겠는데.”
“제가 갈게요.”
위저드가 방향을 틀어 돌진했다.
무한무의 느낌은 여전히 섬뜩하지만 이제는 그녀도 주저하지 않았다.
‘알 게 뭐야? 그딴 거.’
신의 징벌이 대기권을 뚫고 들어왔을 때, 두 세계의 사건은 분기되었다.
위저드는 보랏빛 섬광이 내리꽂히는 것을 보고 최후의 순간을 직감했다.
‘영원한 소멸.’
주마등처럼, 시간은 더욱 느려진다. 멈춘 시간 속에서 그가 서 있었다.
쉬-.
하비츠가 입술을 검지에 댔을 때, 위저드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비츠가 아니야.’
나였다.
고통과 두려움, 불안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녀가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었다.
“많이 생각했잖아.”
하비츠가 그녀에게 걸어왔다.
“많이 주저했고, 많이 노력했잖아. 충분히 상처받았고, 충분히 용서했어. 더 이상 너를 숨겨 줄 수 있는 생각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아.”
‘응.’
“위저드.”
하비츠가 어깨를 짚었다.
“이제 결정해야 돼.”
위저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무상신의 화신이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호오오오오!
풍경을 부수며 돌진하는 제르비스를 노려보며 위저드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은 필요 없어.’
무한무에 대한 공포니, 사람들이 투영하는 자신이니, 빠져나갈 도피처니.
‘이미 결정했으니까.’
설령 그 길이 틀린 길이라고 해도, 거대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가자.’
가자, 위저드.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 버리자.
그 순간 다시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빛이 별처럼 반짝거리는 것이.
“아아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보같이.’
여태까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어떻게 저걸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저 빛은…….’
세상 따위가 빼앗을 수 없는 나의 삶, 나의 죽음.
‘내 전부였단 말이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지금도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까?
‘왜 혼자라고 생각했을까? 날 보고 있었는데. 날 비춰 주고 있었는데.’
이것은 빛과 위저드의 이야기.
또한 지금도 자신의 별을 찾아 하늘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위저드의 별이 광채를 뿜어내며 그녀가 달리는 길을 밝게 비추었다.
모든 것들이 멀어진다.
가족들, 친구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질 수 없는 것들, 포기해야 하는 것들.
마지막으로 하비츠가 스쳐 지나갔다.
‘안녕.’
위저드는 돌아보지 않았다.
묘하게도,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던 듯했다.
호오오오오!
위저드의 화신이 태아의 순수함을 간직한 채 긴 혀를 빼물고 흔들렸다.
‘무섭지 않아.’
한 인간으로 태어나 빛을 향해 달리다 끝난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내 별을 찾았거든.’
번뇌도, 욕심도, 미련도 없다. 후회도, 집착도, 공포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초공(超空).’
무(無). 상(想). 신(神).
아직 남아 있는 것 (2)
***
라그랑주 문명.
-경고! 경고! 외부 개체 유입! 전 트리니티 요원은 멀티넥서스로 집결하십시오!
쿠안은 천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멀티넥서스?’
끝을 볼 수 없을 만큼 넓은 공간에 수많은 캡슐들이 빼곡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컥…… 컥!”
쿠안은 자신이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은 자를 쳐다보았다.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고 덩치가 큰 것을 제외하면 사람과 거의 흡사했다.
“네가 레온이냐?”
처음 캡슐을 열었을 때는 다른 외모에 당혹했지만 주저하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생각을 거치지 않았을 뿐 이곳에 온 것은 그의 의지. 따라서 위화감은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자가 시이나를 죽이려는 적이었다.
“살, 살려…….”
캡슐 안의 남자가 눈을 떴다.
하지만 접속은 완전히 끊어진 상태가 아니었다.
양쪽 세계를 동시에 보고 있는 그가 어지러움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제, 제발. 그만…….”
“왜? 이제는 좀 현실 같나?”
“안 죽일게요. 시이나, 절대로 안…… 허억!”
쇼크가 왔다. 캡슐 내부의 의료 장치가 제세동과 급속 수혈을 시작했다.
-생명유지 한계선 근접. 응급 소생술을 실시합니다. 성공 확률은 74퍼센트입니다.
그때 멀티넥서스의 입구가 열렸다.
문의 역광을 돌아보니 20명 정도의 인원이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우린 트리니티다! 너를 요원 살해 혐의로 긴급체포 한다!”
쿠안은 태연하게 돌아섰다.
그들이 어떤 화기로 무장했는지는 몰라도 차원을 넘는 건 이곳에서도 쉬웠다.
그보다는 바깥 세계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말이 통하는 곳이었나?’
리포트에 의하면 마이너스 시간대를 가진 우주라고 했다.
하지만 사고의 역전이나, 몸이 거꾸로 움직인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트리니티의 손에 전기가 발생했다.
“일단 제압해!”
사방에서 퍼지는 플라즈마를 빤히 지켜보던 쿠안은 한쪽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