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4
루이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말 한마디만 지어내면 되는 것을 못 하다니. 그래서 만년 부집사 꼴을 못 면하는 거겠지.
“친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나?”
“막내 도련님과 자주 다니는 건 알았으나 친구라는 것까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먼저 경거망동할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 아이였다면 1만 권의 서적을 분류하지도 못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로네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테무란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집사장 루이스가 나섰다.
“지금 편을 드는 것인가?”
그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려 있었으나 테무란은 노련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 또한 계약직인 시로네가 막내 도련님과 친구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만 부집사로서 사실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시로네를 벌하자고 주장하는 건 비쇼프뿐이었고, 가주라고 해도 가족의 의견은 중요했다.
결국 가족을 위해 가주가 있는 것이니까.
긴장이 풀린 리안이 크게 숨을 내쉬고, 시로네도 한결 표정이 가벼워지는 그때.
“나는 인정할 수 없다.”
클럼프가 최종 결단을 내렸다.
“아버님.”
“할아버지!”
비쇼프와 리안이 동시에 불렀으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극과 극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친구로 인정한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관계가 이어지면 결국 소문이 날 것이고 정적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리안의 미래에도 좋지 않아. 그러니 두 사람은 좋은 추억을 쌓았다고 생각하고 이쯤에서 절교를 하는 게 옳다고 본다.”
레이나는 할아버지에게 서운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가문의 일은 중요하다. 사실 무엇보다 더.’
가족들은 현역에서 뛰고 있고, 무엇보다 라이는 공인 시험을 앞두고 있다.
정치적으로 트집이 잡힐 만한 여지를 없애려는 건 핏줄의 당연한 의무였다.
‘목숨을 구한 것만 해도 선방한 거야.’
하지만 리안의 생각은 달랐다.
적의에 이글거리는 막내 손자의 시선을 클럼프는 해맑은 미소로 받아쳤다.
‘꽤 멋진 기운을 담게 되었구나, 리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의 마음이야 어찌 모를까마는, 많은 인생이 걸려 있다.
클럼프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1명도 없다는 게 방증이었다.
“시로네, 어떠냐? 철없는 손자에게 우정을 가르쳐 준 것은 고맙지만, 이쯤에서 리안을 보내 줄 수 있겠느냐? 귀족과 평민이 친구로 어울리는 건 힘든 일이다.”
잠시 생각하던 시로네가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비쇼프는 물론 레이나와 라이까지도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누구보다 당황한 건 리안이었다.
“시, 시로네.”
“제가 리안에게 방해가 된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리안과 저는 친구니까요. 그 점을 헤아려 주신다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리안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부끄럽다.’
마음 한구석에는 시로네가 죽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신뢰가 부족한 건 나였어.’
시로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를 버리는 건 또 하나의 자신을 버리는 것임을.
‘협상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시로네?’
리안이 검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선포하겠습니다.”
레이나의 얼굴이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지 마.’
시로네하고는 경우가 달라서, 리안이 흥분할 때면 늘 사고가 터지기 때문이다.
불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시로네에게 돌아선 리안은 어떤 말을 내뱉기도 전에 검을 바닥에 꽂았다.
가족들이 대리석 바닥을 뚫은 검을 멍하니 지켜보는 순간 리안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젠트 가문의 삼남 오젠트 리안은, 이 시간부로 시로네의 검이 되겠습니다.”
“뭐야, 이 멍청아!”
비쇼프가 체신도 잊고 소리쳤다. 설령 진심이라고 해도 어린 시절에 할 만한 게 아니었다.
레이나가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너, 기사 서약을 한 거야?”
기사 서약.
다시는 번복할 수 없는 맹세이자 스스로를 한 자루의 검으로 회귀시키는 결정이다.
온갖 모략이 난무하는 귀족 사회에서도 이 서약만큼은 반드시 지켜지는 이유는, 기사에게 명예란 자신의 생명이자 가문의 수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평생에 단 한 번. 리안은 그토록 무서운 약속을 시로네에게 건 것이었다.
비쇼프는 기가 막혔다.
기사 서약을 해 버린 이상 철회는 불가능하다. 굳이 서약의 무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철회하는 순간 천하의 덜떨어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
“리안,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시로네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으나 리안은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럼 내가 친구도 평생 안 보고 살 줄 알았어? 어때, 이제 빼도 박도 못하지?”
검을 뽑은 리안이 고개를 돌리자 가족들이 평생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 이번에는 좀 크게 쳤습니다.’
그래도 통쾌했다.
“흐음.”
클럼프는 거대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이 정도로 철이 없을 줄은 몰랐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건 자신을 닮았기 때문이리라.
‘하긴, 기왕 철이 없으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감정을 숨긴 클럼프가 근엄하게 물었다.
“리안, 네가 검이 되겠다고 하는 걸 보면 저 소년에게 그만한 자격은 있다는 뜻이겠지?”
“차고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대답해 보아라. 그 자격의 발로는 저 소년의 뛰어남이냐, 너의 허접함이냐?”
리안은 생각했다.
시로네는 뛰어난가, 아니면 자신이 모자란 것인가? 할아버지는 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일까?
그가 대답했다.
“검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킬 뿐입니다.”
“크크.”
클럼프는 만족했다.
‘천만다행으로 기본은 되어 있군.’
리안의 말대로 검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주인이 원하는 방향을 가장 강력하고 예리하게 베고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말 하나는 잘하는구나. 검술은 허접스러운 주제에. 너 같은 검을 얻은 네 친구가 불쌍하다.”
리안이 막내의 도끼눈을 치켜떴다.
“할아버지!”
물론 더 이상 긴장감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 버린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모두 맥이 풀려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클럼프가 성격대로 시원하게 결론을 내렸다.
“됐어, 이걸로 끝내. 네 주인도 일으켜 세우고. 시로네, 아직 다듬어지진 않았지만 주인의 발등을 찍는 검은 아닐 것이다. 손자를 잘 부탁하마.”
시로네는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겸양을 떠는 건 오히려 오젠트 가문의 자존심을 해하는 일이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놈이 알아서 한 짓을 내가 뭐. 어찌 됐건 계약은 끝났다고 들었다.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지?”
“네.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립겠구나. 하지만 이렇게 두 사람이 평생을 약속한 친구가 되었으니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서운할 테지. 어이, 집사장.”
“네, 큰 어르신.”
“시로네가 타기로 한 마차를 지금 출발시키게. 부모님을 모셔 오도록.”
“알겠습니다.”
집사장은 즉각 저택을 떠났다.
가주고 뭐고, 이제는 자신의 손을 까마득히 떠난 일이었다.
귀족들의 사고방식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루이스였다.
꿈을 향한 첫걸음(7)
***
시로네와 리안은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불려 나가 무릎을 꿇은 뒤로 벌써 정오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하하! 아까 우리 가족 얼굴 봤지? 아주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니까.”
“그런데 정말 괜찮아? 기사 서약이라는 거 말이야. 나 때문에 무리한 일을 한 것 같아서.”
리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기사 서약의 무게는 알고 있었다.
“시로네, 친구라서 서약을 한 게 아니야. 너는 형하고 달라. 너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난 그런 사람에게 내 인생을 건 거야.”
진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냥 듣고 있기에는 낯이 간지러워 시로네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돌렸다.
“하하! 부담되네. 하지만 네가 날 지켜 주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발전해야 할걸.”
리안이 급소를 맞은 듯 움찔했다.
“아픈 데 찌르지 마.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네 담력에는 놀랐다. 가족들이 전부 모인 앞에서 할 말 똑 부러지게 다 하고. 안 무서웠어?”
“후후, 거기에는 특별한 비결이 있어.”
시로네는 리안과의 대결 직전에 깨달은,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를 설명했다.
검술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으나 막상 이야기를 들은 리안은 어리둥절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다고? 그런 짓을 왜 해? 혹시 너…… 바보 아냐?”
“바보?”
리안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듣다니.
“아니, 잘 들어 봐. 절벽에서 뛰어내리라는 게 아니라, 상상을 해 보라고.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이 닥친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미래를 괜히 상상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해야 해결책이 보인다는 뜻이야.”
“하지만 뛰어내리면 죽어. 너야말로 잘 생각해 봐. 뛰어내리면 죽는다고.”
“어휴, 진짜! 절벽에서 뛰어내리지라도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거야!”
“아하, 그런 거라면 할 수 있지. 예를 들어 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체 없이 뛰어내릴 거야. 그게 기사니까.”
시로네는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이 말한 의미하고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게 리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하고는 정반대구나.’
이렇게 만나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때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다.
레이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손을 흔들자 시로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안녕. 상대편 진영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아군 기지로 대피 왔어용.”
“나가. 사나이들끼리 얘기하는 중이야.”
리안의 축객령에 시로네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왜 그래, 리안? 누나가 이번에 얼마나 많이 도와주셨는데. 어서 들어오세요.”
“야, 몰라서 그래. 이 마녀는 분명…….”
습관적으로 악담을 내뱉으려던 리안이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시로네와 레이나, 레이나와 시로네. 두 사람의 이름이 번갈아 오가고 있었다.
붙임성 있는 레이나가 고양이처럼 총총 걸어와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
“그나저나 리안, 너 멋있더라. 기사 서약이라는 카드를 꺼내다니. 정말 너한테는 못 당하겠다.”
“어째 놀리는 걸로 들린다?”
“헤헤, 들켰나?”
“아우, 그냥 확! 대체 여기에 온 저의가 뭐야? 나 약 올리려고 온 거지?”
“어허! 이 누나를 뭐로 보고. 이래 봬도 첩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왔지. 저쪽 진영에서 꽤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거든.”
“이 마당에 더 심각할 일이 뭐가 있어?”
“사실 아빠가 이번에 라이 데려갈 때 너도 보내면 어떨까 하셨거든.”
리안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게다가 천재인 라이조차 공인을 장담하지 못하는데 자신이 왜 간다는 말인가?
“무슨 소리야? 견학이라도 하라고?”
“아니, 카이젠 검술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너도 알지? 토르미아 왕국에서 가장 큰 검술학교. 200년 동안 배출한 공인 1급 검사만 10명이라던데.”
리안은 황당했다.
“뭐어? 그런 걸 상의도 안 하고 자기들끼리 결정하면 어떡해? 게다가 이제야 시로네랑 마음껏 놀 수 있게 됐는데 무슨 학교를 가? 카이트 선생님은 어쩌고?”
“사범님도 이미 알고 계셔. 그래서 어제부로 계약을 끝내고 아침에 고향으로 돌아가신 거야. 작별 인사는 이미 하셨다던데, 너 못 들었어?”
리안은 카이트의 검을 살폈다. 이 검이 있었기에 자신의 의지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스승님.’
누구보다 리안을 아꼈던 사람이다.
순순히 계약을 해지한 이유 또한 제자가 조금 더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잖아. 시로네는 어쩌고?”
“아니, 그래서 이번에 나온 말이 그건데, 차라리 너랑 시로네랑 같이 검술학교에 입학시키는 게 어떨까 하시는 거 같아. 어제 네가 그랬잖아, 시로네가 너보다 검을 잘 쓴다고.”
시로네는 깜짝 놀랐다.
리안의 성격상 먼저 말을 했을 리는 없고, 레이나가 자신에 대해 물어본 듯했다.
‘왜 나를…….’
근거 없는 망상이 스치는 동안 리안은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야 그렇지만, 시로네는 검술학교 안 가. 따로 하고 싶은 게 있거든. 사실 나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누나가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봐.”
“응? 따로 하고 싶은 거라니?”
레이나가 고개를 돌렸으나 시로네는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애초에 평민을 검술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하는 상황조차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오젠트 가문에서 시로네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리안이 기사 서약을 한 이상,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시로네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시로네가 주저하자 리안이 대신 말했다.
“시로네는 마법사가 될 거거든. 검술에는 관심이 없어.”
레이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 마법사? 그럼 너 마법사 지망생에게 검으로 승부해서 진 거야? 진짜 한심하다.”
“시끄러! 나도 안다고! 하지만 시로네는 천재란 말이야! 검술 쪽으로 나가도 라이보다 훨씬 잘나갈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