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170
신민이 침묵을 지키는 것에 만족한 집행자가 시로네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너는 이단이다! 아니, 네피림이라고 할지언정 율법에 관여할 자격은 없을 터! 모두 저자를 체포하라! 라의 신성함을 모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라!”
“시로네, 일이 복잡해졌어! 지금 피해야 돼.”
에이미가 시로네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시로네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를 지켰다.
“아니, 가지 않을 거야. 카냐의 어머니를, 그녀를 구해야 돼.”
전방에서 10여 명의 케르고인이 칼을 빼 들고 달려왔다. 거인의 기술을 사용하는 그들의 속도는 치타처럼 빨랐다.
시로네는 그들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선두의 케르고인이 검을 쳐들었다. 후발대도 시로네를 포위하며 칼을 휘둘렀다.
그 시점에 시로네의 광폭이 폭발했다.
빛의 장막이 케르고인들을 강타했다. 광자에 담긴 질량은 미소하기에 처음에는 얼얼할 뿐이었으나 초당 20회의 속도로 후려치자 몸이 찢어질 것 같은 반탄력이 전해졌다.
시로네를 포위하던 케르고인이 모조리 튕겨 나갔다.
엉덩이를 끌며 땅바닥에 길게 미끄러진 그들은 하나같이 경악의 눈빛으로 시로네를 바라보았다.
“네, 네피림? 진짜로 네피림이었단 말인가?”
빛의 마법은 심리적인 면에서 효과가 컸다. 오직 천사만이 구현할 수 있는 현상이었고 시로네가 네피림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마법이었다.
여세를 몰아 시로네는 포톤 캐논을 집중시켰다.
위기감을 느낀 집행자가 청동상을 가로막는 순간 시로네에게서 섬광이 튀어나왔다.
집행자는 동물적인 반응속도로 몸을 뒤틀었다. 섬광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내장이 짓눌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통은 나중의 문제였다.
포톤 캐논이 거인의 동상을 강타하자 종을 때린 듯 웅장한 울림이 퍼졌다.
장내를 진동하는 음파에 신민들이 귀를 막으며 물러섰다.
시끄럽게 무언가를 소리치고 있었으나 귓가에 남은 이명이 말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그럼에도 거인의 동상은 멀쩡했다.
포톤 캐논의 위력은 철문조차 찌그러뜨릴 정도지만 동상에는 구겨진 흔적조차 없었다.
신민들의 눈에 환희가 차올랐다.
“오오! 앙케 라! 저희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영생을, 영생을!”
사태가 심각해지자 에이미가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든 시로네를 데려와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했다.
그 순간 리안이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웠다.
“기다려. 아직 시로네는 끝나지 않았어.”
“그게 문제가 아니야.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저들과 싸워야 한다고.”
“그렇다면 싸우면 되잖아?”
에이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여태까지 나누었던 우정과는 상관없다. 지금의 리안은 오직 시로네의 기사였다.
“왜 그러는데, 리안?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거야?”
“있어. 너희들 지금 이상해. 시로네를 말려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당연히 도망쳐야지. 천국에서 적이 되면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이야.”
“그러면 카냐의 어머니는?”
에이미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현실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시로네는 카냐의 어머니를 구하려고 하고 있어. 적이었던 마르샤 누나에게 그랬듯이, 마법학교 학생들을 위해 그랬듯이. 그런데 어째서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 거야? 설마 너. 우리가 살던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
리안의 분석이 정확했다. 다른 규칙과 법이 적용되는 곳이기 때문에, 저들이 선택한 죽음까지 떠맡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에이미, 이곳이 천국이든 어디든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시로네는 카냐의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고 말했어. 그렇기에 나는 시로네와 함께 싸울 거다.”
에이미는 광장을 돌아보았다. 시로네의 주위로 시그나와 엑스드로 무장한 메카인과 고대 마법을 다루는 노르인이 둘러싸고 있었다.
인간의 정신이란 하찮은 것이 아니다. 설령 이곳이 천국이라고 해서 생명의 진리가 달라질 수는 없었다.
에이미의 얼굴에서 갈등의 기색이 사라졌다.
“나도 시로네를 믿어. 가자, 리안.”
에이미가 몸을 날리자 친구들이 곧바로 뒤를 따랐다.
신민들이 시로네를 에워싸고 있는 곳에 빛이 번쩍하더니 십여 명의 사람들이 바깥으로 흩어졌다. 광폭을 시전한 시로네가 모습을 드러내자 에이미가 등을 기대며 물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어. 시그나와 엑스드는 원거리에 약하고 고대 마법은 바람 계열이 대부분인 거 같아. 그것도 약해. 클로브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천국의 입장에서 연옥은 지옥이었다.
클로브의 실력이 아무리 허접해도 험난한 연옥을 누비는 마법사였으니 이곳의 자들보다는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시로네 일행은 각자의 위치에서 신민의 공격을 받아 냈다.
문제는 반격을 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신민을 설득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사망자가 나오면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킬 여지가 있었다.
“쳇! 귀찮게 하네.”
카니스가 바닥에 손을 짚으며 섀도 월을 시전했다.
성벽처럼 솟구친 그림자의 표면에서 날카로운 가시들이 튀어나왔다.
메카족이 엑스드를 앞세워 막아섰으나 그들도 딱히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시로네, 언제까지 버틸 수는 없어. 이제 결정을 해야 돼.
시로네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사실 싸우지 않고 전투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조명 마법 샤이닝이었다.
순간적으로 강렬한 빛을 쏘여 적들의 시야를 봉쇄한다면 전투의 분위기는 급격히 식는다.
‘하지만 샤이닝만으로 가능할까?’
지금이 대낮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빛의 세기를 아무리 키워 봤자 태양광을 이길 수는 없었다.
태양보다 강한 빛을 만들기가 어려운 이유는 빛의 진동하는 성질 때문이었다.
단일 면적에 들어있는 광자의 숫자를 최대한 늘려야하는데 진동하는 빛은 압축에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빛의 세기를 높일 수 있지?’
그 순간 시로네의 눈빛이 번뜩였다.
빛의 진동을 멈출 수는 없다. 하지만 태양보다 강한 빛을 내는 건 가능할지도 모른다.
-눈을 감아! 샤이닝을 시전할 거야!
시로네는 동작을 멈추고 스피릿 존으로 들어갔다. 빛의 입자들이 빠르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눈을 감았으나 방어막을 구축하고 있는 카니스는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뭐야, 저거? 빛이 왜 저래?’
시로네에게 모여드는 빛은 기존의 샤이닝보다 훨씬 흐릿했다. 빛이 약하다는 건 발광성을 줄였다는 얘기. 결국 어떤 식으로든 진동을 억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편광 방향을 통일시켰어.’
어떤 입자는 수직으로 진동하고 어떤 입자는 수평으로 진동한다. 시로네는 광자에 중력을 가해 빛의 진동 방향을 통일시킨 것이었다.
결과는 경이로웠다.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개수의 광자가 한 점에 모여들고 있었다. 보통의 광자보다 안정화되어 있기에 빛의 색감도 회색에 가까웠다. 샤이닝이 백광을 내기 시작했을 때는 정상치보다 수십 배의 밀도를 자랑했다.
-지금 시전한다!
시로네는 눈을 질끈 감으며 광자의 통제를 풀어 버렸다. 빛의 입자가 고비 풀린 망아지처럼 사방으로 발산했다.
세상을 집어삼키는 백광의 밝기는 무려 30만 루멘에 달했다. 한낮의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보다 두 배 이상 강렬한 세기였다.
시로네는 보지 않고도 마법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얼마나 빛이 강렬한지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도 어렴풋이 음영을 구별할 수 있었다.
‘됐다! 진짜로 됐어!’
신의 입자는 시로네가 구사하는 마법의 핵심 원리였다.
질량의 포톤 캐논, 에너지의 레이저. 그리고 이번에는 광자를 압축시켜 섬광 폭발을 일으키는 샤이닝 임팩트였다.
자연광의 세기를 초월하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생물체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비살상 마법이었다.
빛이 사라진 뒤에도 신민들은 눈을 감고 있었다. 혹시라도 공격을 당할까 봐 상체를 젖히고 있었고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침묵이 흘렀다.
시로네 일행이 먼저 눈을 뜨고, 이어서 신민들도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네, 네피림. 네피림이시여.”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메카족이 하나둘씩 무기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샤이닝 임팩트는 전투를 막은 것 이상의 효과였다.
빛의 정령과 계약을 하더라도 태양보다 강한 빛을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가능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빛의 힘을 다루는 천사일 것이다.
테스가 턱 밑으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후아. 시로네, 이건 무슨 마법이야? 실명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농담처럼 건넨 말이지만 진심이었다. 태어나서 이토록 강렬한 빛은 쬐어 본 적이 없었다.
리안이 대검을 칼집에 넣으며 다가왔다.
“어쨌거나 적들을 무력화시켰으니 됐어. 이제 일화의 술을 중지하면 되는 건가?”
“쉽지 않을 거야. 다른 신민들과 다르게 케르고인은 흔들리지 않고 있어.”
에이미의 말대로 집행자를 위시한 술법 관계자들이 매서운 눈으로 시로네를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샤이닝 임팩트의 위력에 주눅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네피림의 힘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신적인 타격은 받을 이유가 없었다.
오직 라를 추종하는 그들에게 하위의 율법은 두렵지 않았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네피림이여? 너는 신성한 라의 율법을 어지럽힌 것이다. 내정부에서 움직이면 너의 수명도 오늘로서 끝이다.”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해 봐. 나조차도 모르는 내 수명을 너희가 좌지우지할 수는 없어.”
집행자의 콧잔등이 일그러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목을 베고 싶지만, 솔직히 싸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평생을 몸 바쳐서 얻은 187년이다. 이제 영생이 눈앞에 있는데 여기에서 생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시로네의 손바닥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신민들이 겁을 먹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포톤 캐논으로 어설프게 화를 부추기기보다는 레이저로 확실히 박살을 내는 전략이었다.
적빛의 광선이 동상으로 뻗어 나가자 신민들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하지만 더 이상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시로네가 네피림이라면 신민의 선에서 어찌할 존재가 아니었다.
1. 신의 자비 (4)
레이저에 맞은 자리가 달아오르면서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동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집행자는 이를 갈았다. 시로네에게 덤빌 수도, 동상의 파괴를 막을 수도 없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푸른 전광이 다발로 떨어지며 시로네의 주위를 뜨겁게 가열시켰다.
바닥이 폭발하면서 흙먼지가 일었다.
집행자는 벼락이 날아온 곳을 확인했다. 광장의 입구에서 한 무리의 요정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시로네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도 무리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요정을 한 눈에 발견했다.
그녀만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화장을 한 얼굴 또한 아름다웠다.
신민관리부의 부장, 이기린이었다.
시로네의 주위로 친구들이 포진했다. 신민들과 싸울 때에는 느낄 수 없었던 긴장감이 피를 빠르게 돌렸다.
의아한 점은 선제공격이 전기였다는 것이다.
전기는 정령에 가까운 속성이기에 요정이 부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가 벼락을 친 거지?
-아직은 알 수 없어. 하지만 무리 중에 마찰력을 다루는 요정이 있을 거야.
대기 중의 전하를 마찰시킨다면 벼락을 일으키는 게 가능하다. 전하의 배치에 따라 전기가 흐르니 정확도가 떨어진 것도 당연했다.
리안이 대검을 뽑으며 걸어나갔다.
“요정 부대 총출동인가?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시로네 또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천국의 율법을 어겼으니 내정관이 출동하는 건 정상적인 일이었다.
신민들이 좌우로 물러서며 이기린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날아온 요정들이 시로네 일행과 10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시로네는 요정 무리의 말단에 서 있는 페오페를 보았다.
다른 요정과 달리 그녀는 맹한 눈으로 전방을 얼보고 있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이기린이 시로네 일행을 가리켰다.
“너희로구나, 네피림을 사칭하여 천국에 들어온 자들이. 그것만으로도 중죄이거늘, 이제는 성스러운 일화의 술까지 방해하려 하느냐?”
집행자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네피림이 아니라 네피림을 사칭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조금 전에 소년이 시전한 능력은 분명 천사의 것이었다. 네피림이 아니라면 어떻게 빛을 다룬단 말인가?
“이기린 님, 이들이 이단이란 말씀이십니까? 저자는 분명 빛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현혹되지 마라. 땅의 나라에는 빛의 마법을 다루는 기술이 있다. 게다가 다른 자들은 검증할 필요조차 없는 이단. 그런 식으로 요정까지 속이려 한 것이다.”
카니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말을 들어 보니 자신들에 대해 자세히도 조사했다. 게다가 전투력이 떨어지는 페오페가 함께 와 있다는 건 그녀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방증이었다.
“젠장, 그러게 내가 떠나야 한다고 했잖아. 저 요정이 배신한 거야. 처음부터 믿는 게 아니었다고.”
페오페가 미간을 구겼다.
배신? 자신은 이기린의 명을 받고 정신없이 따라왔을 뿐이다. 도착하기 전까지는 저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
“흥! 그래! 내가 다 일러바쳤다! 너희는 이제 죽은 목숨이야! 그러게 적당히 설쳤어야지!”
어차피 인간에게 결백을 주장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페오페가 오히려 없는 죄를 자처하며 더욱 약을 올렸다.
“배신하지 않았어.”
시로네가 말했다.
“페오페는 옳은 판결을 내렸어. 그런 요정이 이제 와 자신의 신념을 훼손시킬 이유가 없잖아.”
페오페는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와 그런 말을 해 봤자 마음 상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많아졌다.
옳은 판결. 신념.
여태까지 선배들에게는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던 가치들이었다.
이기린은 신경 쓰지 않았다. 3천 년 이상을 살면 인간보다 세밀하게 개념을 쪼갤 수 있다.
인간이 사랑을 백 가지 정도로 나열한다면, 그녀는 아마 1만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사건은 독립적이 된다.
남의 집을 훔쳐본다고 해서 도둑은 아니다.
그 집의 자물쇠를 부숴도 도둑은 아니다.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도 도둑은 아닐 수 있다. 심지어 거기서 어떤 물건을 집어도 도둑은 아닌 것이다.
집어 든 물건을 들고 밖으로 나왔을 때에야말로, 도둑이라는 개념은 완벽하게 성립된다.
일부의 사건에서 전체를 예단하려고 드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인지능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로네와 페오페의 대화도 지금의 상황과는 독립적인 사건일 뿐이었다.
“나는 신민관리부의 부장, 권위의 요정 이기린이다. 이단 주제에 네피림을 사칭하여 천국에 들어온 죄. 고결한 일화의 술을 방해한 죄로 너희의 수명을 전부 삭감한다.”
시로네의 이마에 주름살이 잡혔다.
“언제나 그런 식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거야? 일화의 술도 마찬가지야. 어째서 신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지?”
“너희는 거인에게서 태어났다. 다시 돌아가는 게 무에 그리 억울하지?”
“헛소리야. 어떤 부모도 자식에게 살을 돌려 달라고 하지 않아.”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거두어 먹기 위함이다. 생물이 죽는 이유는 다른 생물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함이야. 너희도 이 율법에 얽매인 존재일 뿐이다.”
“씨를 뿌리는 것은 새로운 씨를 맺기 위함이야. 생물이 죽는 이유는 다른 생물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야. 인간은 그렇게 번창하는 거야. 삶의 의미가 없는 생명 따위, 죽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이기린은 시름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직감은 어째서 틀리지를 않을까. 시로네에게서 미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단답구나. 상종을 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다. 무엇들 하느냐! 당장 일화의 술을 시작하라!”
이기린이 명령에 기다렸다는 듯 집행자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