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04
“그래도 기록관은 온다잖아. 저기…… 아무래도 내가 먼저 하는 게 좋겠지?”
네이드는 매치가 승인된 날부터 걱정이 많았다.
클로저가 이루키를 벼르고 있으니 아마도 자신의 상대는 빅터 사비나가 될 터였다.
헤이스트로 가속하면서 사방에 윈드 커터를 뿌려 대는 어마무시한 여자.
졸업반을 제외하면 전국 톱 20에 들 수 있는 실력자였으니 상성을 떠나서 힘든 싸움이 될 게 분명했다.
6. 마법 격돌 (2)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기껏 끼워 줬더니 앓는 소리나 하고.”
“그럼 어떡해! 내가 지면 시로네가 얼마나 분하겠어! 도대체 왜 나를 지목한 거야? 너도 알고 있잖아. 나는……!”
“차라리 지는 게 낫지. 도망치는 것보다는 말이야.”
네이드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루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차피 너랑 나 둘 중에 1승만 챙기면 돼. 지금 분위기 보면 몰라? 우리는 시로네를 단테의 앞까지 데려다주는 말의 역할이라고. 그건 중요한 일이지. 우리 멤버가 아닌 사람에게는 절대로 시킬 수 없는 일이야.”
“이루키…….”
네이드의 얼굴이 감동에 젖어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네가 진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몇 가지 변수는 있지만 그래도 이길 확률이 있으니까 너를 선택한 거야. 부담 갖지 말고 열심히 해.”
이루키의 말이 옳았다. 승부에서 이기든 지든 시로네가 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그를 적에게 데려다주는 것은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었다.
먼 훗날 도망쳤다는 기억은 갖고 싶지 않기에, 또한 시로네의 친구로 당당할 수 있기 위해 모험을 걸어야 할 때였다.
“그래! 한번 해보자! 까짓것!”
@
첫 번째 매치가 치러지는 주말이 돌아왔다.
네이드와 사비나의 대결은 크게 이슈는 되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벌써부터 이천번 수련장에 도착해 있었다.
시로네와 단테의 대결이 성사되느냐의 여부를 가늠하는 첫 번째 대결이라 비중은 결코 낮지 않았고 팀의 색깔도 확실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관전 포인트가 많았다.
에이미가 이천번 실습장에 도착했을 때는 빈자리가 없을 만큼 사람들로 차 있었다.
“에이미! 여기야!”
세리엘이 임시로 설치한 관람석의 1열에서 손을 흔들었다. 자신도 나름 빨리 온다고 왔기에 일찍 도착한 그녀의 열성에 기가 찼다. 옆자리에는 마크와 마리아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마크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인사하고 마리아가 얌전하게 고개를 숙였다. 에이미는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아주고는 세리엘의 옆자리에 앉았다.
“너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아주 한가한가 봐?”
“헤헤! 사실은 마크에게 특별 지령을 내려 뒀었거든. 나도 온 지는 얼마 안 됐어. 그래도 이런 이벤트를 멀리서 구경할 수는 없잖아. 특히나 시로네에게 중요한 경기인데.”
“중요하기는 무슨. 하여튼 알게 모르게 사고 많이 친다니까.”
에이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속마음까지 태연한 건 아니었다. 에어하인 단테는 천재로 주목받던 그녀조차 귀에 딱지가 생길만큼 들어 왔던 이름이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마법사 지망생들을 누르고 명실공히 왕국 서열 1위에 오른 소년. 여태까지 시로네가 넘은 장벽과는 차원이 달랐다.
시로네도 천국에서 실력이 일취월장했으나 단테가 구사하는 정보 마법은 프로들도 쉽게 따라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시작한다! 시작합니다, 선배님!”
마크의 목소리에 에이미는 이천번을 살폈다.
네이드와 사비나가 실습장에 들어가 있었고 시로네는 이루키와 함께 사이드 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심판은 이천번 전담 교사가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는데 오늘은 사드 선생님이었다.
네이드와 사비나를 중앙으로 불러들인 사드가 경기 규칙을 설명했다. 물리적 충돌이 심각하게 발생할 시에는 심판 재량으로 경기를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게 요지였다.
네이드와 사비나는 귀가 안 들리는 사람처럼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눈싸움을 벌였다.
10분 전만 해도 끙끙 앓던 네이드였지만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지 차분한 표정이었다.
클로저가 네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 어쩌면 복병일지도 몰라. 첫날에 내 주먹을 피했을 때도 싸움에 익숙한 놈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
“아니, 그보다는…….”
단테는 클로저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으나 뒷말은 끝내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단순히 싸움에 익숙하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굳이 비슷한 유형을 뽑자면 카니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이번 대결에서 밝혀지겠지. 어떤 상대라고 해도 사비나가 이길 테니까.”
설명을 끝낸 사드는 네이드와 사비나에게 지정된 위치로 돌아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시작 지점은 양측의 합의를 통해 정했는데 각각 30미터씩 도합 60미터였다.
스피릿 존은 닿지 못하지만 수열식을 통해 선제타격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다.
“그럼 이제부터 네이드와 사비나의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드가 시작 신호를 주기 위해 팔을 들자 웅성거리던 학생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잦아들었다.
이천번 대인 전투를 경험한 졸업반 학생들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긴장된다고 말한다.
전진과 후진, 공격과 방어 등 스피릿 존을 초반에 어떤 식으로 운용하느냐에 따라 대결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방식의 네 가지 형태는 기본이고 갖은 변칙적인 형태들이 다양한 변수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대결의 초석이 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작!”
네이드와 사비나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
전진, 공격, 선제타격이었다.
수열식의 대결은 호각이었다. 두 사람의 스피릿 존이 중첩되면서 일렉트릭 볼트와 윈드 커터가 교차했다.
속도면에서는 광자를 제외하고 전기를 따라잡을 수 있는 원소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전하에 민감한 전기력은 정확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윈드 커터가 먼저 네이드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그의 스피릿 존이 흔들리는 순간의 틈을 노리고 사비나는 헤이스트를 자신의 몸에 걸었다.
지그재그로 질주하는 사비나의 모습을 시선으로 쫓을 수 있는 학생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람 크기의 물체가 고양이처럼 움직이는 모습은 트릭이 있는 마술 쇼를 보는 듯했다.
네이드의 배후를 선점한 사비나가 수도를 휘두르자 칼날 바람이 네이드의 목을 자르고 지나갔다.
‘먹힘 판정? 끝인가?’
사비나가 생각하는 순간 팔을 통해 미약한 전기가 흘렀다. 네이드의 장기인 이미지 카피 마법이었다.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수십 명의 네이드가 주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흥! 잔기술은 제법이네!”
일일이 확인하다가는 시간이 지체되고 함정에 빠질 위험이 높다. 사비나는 곧바로 집중력을 끌어올려 고등기술인 커팅 플라워를 전개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으고 회전하자 사방으로 윈드 커터가 퍼져나갔다.
네이드의 환영 중의 하나가 급하게 몸을 날렸다. 커팅 플라워의 반경 밖으로 빠져나온 네이드는 사비나를 바라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장거리 윈드 커터를 초당 마흔 발 이상 쐈다. 확실히 고급반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에어 마법은 공기를 압축시키는 프레스 계열과 공기를 휘두르는 블로 계열로 나누어진다. 그의 생각에 사비나는 블로 계열을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가 아닌가 싶었다.
‘역시 기본 모드로는 안 되나?’
네이드가 정신을 집중하자 주위에 청색의 구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자기 볼트가 구름에서 퐁퐁 튀어나와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돌아다녔다.
“플라즈마?”
사비나는 황급히 접근을 멈췄다. 아무리 그녀라도 플라즈마 앞에서는 허튼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와, 저게 플라즈마구나. 저 자식, 저번에도 요행이 아니었나 보네.”
“바보냐? 요행으로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실제의 플라즈마는 초고온에서 발생하지만 현상을 구현하는 마법에서는 전지의 영역이기에 온도 자체가 높아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전기 마법사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였다.
플라즈마는 전기가 구름처럼 퍼져서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물에서는 물고기가 왕이듯이 전기 구름 안에서는 전기 마법사가 왕이었다.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볼트 마법의 단점은 플라즈마의 영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오히려 볼트의 궤적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다. 환경자체가 전기이기 때문에 마법에 들어가는 정신력의 소모도 줄어들고 무엇보다 패시브 스킬이었다.
전기 마법사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능력.
하지만 극한의 환경에서만 발생하는 플라즈마의 전지를 이해하는 건 프로들조차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비나는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긴장했다. 전기 마법사가 플라즈마를 깔았다면 실력 차가 크게 나지 않는 이상 접근을 자제하라는 게 전투 교범의 조언이었다.
“그렇다면…….”
사비나는 전술을 바꿨다. 플라즈마의 영역으로 침투하지 않고 네이드를 공격하는 방법은 외부에서 토네이도를 발생시켜 통째로 쓸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토네이도를 시전하자 10미터 높이의 소용돌이 여러 개가 춤을 추며 돌아다녔다.
네이드는 이미지 카피로 시선을 교란하면서 어떻게든 거리를 좁히려고 했다.
일렉트릭 쇼크 한 방이면 된다. 1초만 스턴 상태에 빠뜨리면 플라즈마의 영역에서 시전하는 초고속 전기 폭격에 버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사비나는 헤이스트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빈틈을 주지 않고 이천번을 자유로이 돌아다녔다.
플라즈마의 영역이 확장되어가는 만큼 소용돌이의 개수도 늘어났다. 사비나가 승부를 걸기로 작심한 듯 30개의 토네이도를 하나씩 합치기 시작했다. 숫자가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었으나 크기는 4배 이상 커졌다.
이대로 토네이도가 전부 합쳐진다면 이천번 위에서 피할 곳은 없다. 네이드는 무언가 해야 한다면 지금이라고 판단하고 플라즈마의 전기력을 통해 지각을 조사했다.
32퍼센트 정도가 금속이었다.
물론 이천번의 정보로 구현된 환경에 불과하지만 전도체라면 무엇이든 플라즈마로 통제할 수 있었다.
‘다른 직종의 기술이라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것저것 가리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자신이 패하면 시로네의 대결을 성사시켜야 하는 부담은 오로지 남아 있는 이루키가 지게 된다.
네이드는 플라즈마로 자기장을 발생시켰다. 암석에 섞여 있는 대략 금속 가루들이 지면을 뚫고 솟구쳤다. 자기장 폭풍을 일으키자 금속 토네이도가 즉석에서 생겨났다.
사비나는 식겁했다. 크기는 자신의 토네이도에 비해 10분의 1도 되지 않지만 대략 3톤에 가까운 질량이 같은 속도로 회전한다면 파괴력만큼은 호각이었다.
‘아니. 내 비장의 무기는 아무도 깰 수 없어!’
사비나는 이를 악물고 15개의 토네이도를 합쳤다. 회전융합은 굉장한 고급기술이지만 그녀는 불과 2분 만에 30개의 토네이도를 합치는 데 성공했다.
가히 태풍이라고 부를 만큼 거대한 회오리가 일어섰다. 그 태풍의 눈을 향해 네이드의 금속 토네이도가 돌진했다.
이것이 마지막 공격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학생들이 숨조차 쉬지 못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2개의 토네이도가 이천번의 중앙에서 충돌했다.
질량과 크기의 대결이었다. 강철 토네이도가 거대 토네이도의 내부에서 마음대로 춤을 추면서 기류를 난도질했다.
사비나의 팔찌에서 안티매직이 작동하면서 빠른 속도로 게이지가 줄어들었다.
네이드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사비나의 토네이도를 흐트러뜨리고 있지만 체급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크으윽!”
자기력보다 강한 풍압이 금속의 밀집상태를 천천히 해체시키면서 속도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서로 상쇄되어가는 회전속도의 어느 지점에서 두 개의 힘이 정확히 맞물렸다.
사비나의 토네이도가 난기류로 변해 흩어졌다. 굉음이 터지면서 강풍이 이천번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사이드에서 지켜보던 친구들이 풍압을 이겨 내지 못하고 밀려났다.
학생들은 공간을 장악한 먼지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어떤 먼지는 위로 올라가고 어떤 먼지는 내려앉으면서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비나는 구부정한 자세로 숨을 헐떡였고 네이드는 아예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사드는 마스터 팔찌를 통해 두 사람의 게이지를 확인했다.
둘 다 정신력이 바닥까지 떨어져서 누가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경탄한 대상은 사비나가 아닌 네이드였다. 고급반의 중위권에 불과한 그가 전국에서 노는 사비나를 이 정도로 밀어붙일 수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이거 모르겠는데? 어쩌면 사비나가 질 수도…….’
사비나는 숨을 헐떡이며 걸어갔다. 예상치도 못했던 무명의 학생과 호각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6. 마법 격돌 (3)
“가만두지 않겠어!”
사비나는 헤이스트를 시전할 여력도 없이 돌진했다. 어차피 상대도 플라즈마를 시전할 상태가 아닐 터였다.
그 순간 네이드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나왔다.
“내가 졌다.”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에 네이드의 목을 공격하려던 사비나가 황급히 돌진을 멈췄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손으로 끝내고 싶었지만 항복 선언을 한 뒤에 공격하면 실격이었다.
막상 이렇게 되자 이긴 것 같지도 않고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하지만 네이드가 마지막 충돌에서 모든 힘을 써 버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흥, 운이 좋았네. 무릎 꿇고 정식으로 패배를 시인해.”
네이드는 곧바로 약속을 지켰다.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기에 입만 움직이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 내가 졌다.”
사비나의 인상이 구겨졌다. 이런 룰을 정한 이유는 패배감에 잠긴 비참한 모습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네이드에게서는 그런 독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 남자 맞니? 여자한테 졌는데 그렇게 순순히 무릎을 꿇을 수 있어?”
“졌으니까 졌다고 하는 거지. 그리고 사실 되게 쪽팔리거든? 이제 그만해도 되겠지?”
네이드는 정말로 패배한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차라리 승부를 부정하듯 웃기라도 했으면 기분이 덜 나빴을 것 같았다.
사드는 멀어지는 네이드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조금 더 해 보지. 사비나도 거의 바닥이었는데. 그래도 잘했다, 네이드.’
예상보다 대결이 빨리 끝났다. 클래스 포의 학생이라면 강한 파괴력을 내는 마법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실전에서는 캐스팅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이번 대결은 상성도 잘 맞물렸고 수준도 비슷해서 힘과 힘의 대결로 깔끔하게 끝낼 수 있었다.
친구들에게 도착한 네이드가 주체할 수 없는 미안함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시로네, 이루키! 미안해! 져 버렸어! 진짜, 미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팀으로 싸우는 건데. 나도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거고. 괜찮아,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루키가 한마디를 보탰다.
“너치고는 잘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발전했잖아.”
솔직히 네이드가 이 정도까지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앵무 도적단의 루카스와 싸울 당시에는 아예 포기해버리더니 그래도 근래 들어서는 조금이나마 통제가 되는 모양이었다.
“먼저 숙소에 들어가서 쉴게. 그래도 되지?”
“그래. 지쳤을 텐데 일찍 들어가.”
시로네도 그것까지는 말리지 못했다.
그렇게 네이드는 학생들의 인파에 섞여 실습장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숙소가 아닌 외진 공원이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 비로소 속마음이 터져 나왔다.
“아우! 제길! 이 멍청이!”
시로네의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비나는 정말로 강했고 거기서 더 대결이 진행되었다면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그에게는 학교라는 울타리가 필요했다.
“호호호! 여기 있었네? 태연한 척하더니 창피해서 죽고 싶은 모양이지?”
네이드는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뒤를 쫓은 사비나가 서 있었다.
“아직도 나한테 볼일이 남았냐? 대결은 끝났잖아.”
“아니, 나는 좀 남은 거 같아서 말이야. 솔직히 불쾌하거든. 이유는 모르겠는데 네가 제대로 승복을 안 하고 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어서.”
“무릎까지 꿇었는데 더 이상 뭘 어쩌란 말이야?”
“그걸 잘 모르겠거든. 여기서 다시 한 번 꿇어 볼래?”
네이드는 사비나의 억지를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시로네에게 미안할 뿐이었고, 친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냥 알아서 생각해라. 네가 나보다 세다고 소문내고 다녀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둬. 난 간다.”
네이드가 숙소로 몸을 돌리는 순간 사비나가 말했다.
“내가 좀 알아보니까, 웨스트 가문 꽤나 유명하더라?”
네이드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막장도 그런 개막장이 없던데. 보아하니까 가주는 백수 도박꾼에 안주인은 사교계에서 왕따라며? 가진 것도 없으면서 사치나 하고 다니는 걸로 소문이 자자……!”
우르릉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기도가 막힌 사비나는 세상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걸 보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깊은 숲 속에서 나무둥치에 처박혀 있는 상태였다.
사비나의 목을 움켜쥔 네이드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시 말해 봐.”
“컥! 커억!”
네이드의 얼굴을 시선에 담은 사비나는 공포에 질렸다. 인간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악인도, 사이코패스 살인마도 아닌 그냥 괴물이었다.
‘여기서 죽는구나…….’
가정이 아닌 확신이었다. 차라리 살인자에게 붙잡혔다면 모를까, 짐승에게 물린 상황에서 자비를 기대하는 멍청한 인간은 세상에 없으니까.
“살고 싶어?”
사비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이 점차 흐려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실금해버렸다.
“목뼈를 부러뜨려 줄까? 아니면 피를 말려줄까?”
사비나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머리와 몸의 연결이 끊어진 듯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였다.
“흐으으응! 흐응!”
네이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손에 전류를 모았다. 이대로 피를 증발시켜 버릴 생각이었다.
손아귀에 전력이 집중되는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네이드의 짐승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네이드,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지 않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