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96
간도는 벙커로 들어가 시로네의 팔을 걸치고 일으켜 세웠다. 그런 다음 능숙하게 그의 몸을 뒤로 돌려 등에 업었다.
한참이나 지켜보던 플루의 귀에 간도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멋있었다, 플루.”
간도의 말이 머리로 이해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글썽이는 눈망울로 간도를 쳐다보던 플루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새겨졌다.
“감사합니다.”
최악의 프로젝트 (1)
시로네는 눈을 떴다. 잠시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이어서 청량감이 느껴졌다.
그가 누워 있는 곳은 마법협회의 회복실이었다. 성인 하나가 들어갈 만한 캡슐에 유리 천장이 달려 있었고 쿠션은 포근했다.
시로네가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유리 천장이 텅 소리를 내며 옆으로 젖혀졌다. 좁은 시야 사이로 플루의 초름한 얼굴이 들어왔다.
“어때? 좀 괜찮아?”
“아, 네. 어떻게 된 거죠?”
“벙커에서 의식을 잃었어. 무리하게 마법을 시전하니까 그렇지. 다음부터는 스피릿 존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밀도를 높여. 뇌의 과부하를 막아 줄 거야.”
플루의 목소리는 전과 달리 나긋나긋했다. 시로네로서는 어색한 일이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슬픔을 읽었기에 내색하지는 않았다.
“네, 감사합니다.”
시로네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자신이 누워 있던 것과 같은 캡슐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유리 천장이 열려 있었으나 구석에서는 누군가가 수면 중이었다.
플루가 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직 근무자야. 수면 캡슐은 정신 활동성을 높여 주거든.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 만능은 아니니까.”
시로네는 캡슐에서 빠져나와 기지개를 쳤다. 깊은 잠을 잔 것처럼 머리가 개운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죠?”
“2시간. 의외로 회복력이 빠르네. 6시간 정도 예상했는데.”
정신 내구력이라면 자신이 있는 시로네는 만족스럽게 몸을 풀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플루를 살폈다. 몇 시간 전과 달리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저기…….”
“따라와. 협회장님이 찾으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플루는 출구로 걸어갔다. 시로네는 그녀를 따라 승강장으로 갔다. 승강기를 기다리던 그녀가 층수를 확인하며 말했다.
“못 들었을까 봐 말해 주는 건데, 너는 합격이야.”
포톤 캐논을 시전하고 곧바로 기절했기에 가올드의 말을 들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플루의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어. 너는 협회장님과 함께 천국에 가게 될 거야.”
플루는 아는 사실을 말했다.
어차피 시로네는 이제부터 그녀가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최고 수준의 기밀을 듣게 될 터였다. 더 이상 입조심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후발 주자가 되겠지. 나는 당연하지만 간도 님도 가올드 님을 직접 보좌하지는 못해. 그만큼 엄청난 수준의 작전이라는 거겠지.”
플루는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가올드 님은 평생을 바쳐 준비한 프로젝트라고 했어. 조력자가 있다면 최고의 마법사들일 거고, 그렇기에 소수 정예일 거야. 너는 거기에 포함된 거야.”
플루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은 시로네는 미안한 기분을 느꼈다. 가올드 정도의 강자와 무언가를 함께할 수 있다는 건 마법사로서 최고의 영예였다.
“미안해요. 속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아타락시아는 시로네가 목숨을 걸고 터득한 비기. 하지만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목숨 같은 건 얼마든지 내던지는 마법사가 세상에는 널리고 널렸다. 자신이 잘났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였다.
플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같은 생각으로 시로네를 무시했다. 누군가에게 얻은 마법으로 가올드에게 발탁되었다는 건 그녀의 자존심을 뭉개는 일이었다.
하지만 벙커에서 가올드를 상대하는 모습을 본 이후에는 생각이 변했다. 플로 또한 가올드를 위해 얼마든지 죽을 수 있지만, 시로네처럼 목숨을 담보로 덤빌 배짱은 없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너는 협회장님의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플루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과 기분이 달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수와 부사수로 티격태격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시로네의 달큰한 눈빛을 느낀 플루가 질색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황급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그녀는 마치 방어선을 뚫고 침투하는 적군을 타격하듯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아직 멀었어! 아타락시아의 위력은 인정하지만 리스크를 보완하려면 더 가다듬어야 해. 수많은 변칙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야 진짜 마법사라고.”
시로네는 흘려듣지 않았다. 골드 시티에서 뱀파이어를 제압한 플루의 실력은 확실히 마법협회의 직원증을 목에 걸 자격이 있을 만큼 출중했다.
“네. 열심히 할게요, 선배님.”
“흥!”
승강기의 문이 청명한 전자음을 내며 열렸다.
최악의 프로젝트 (2)
시로네는 18층에 도착했다. 직원이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지만 협회장실 문을 넘어서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는 시로네에게 플루가 말했다.
“잘 들어. 이 문 너머에 협회장님이 있어.”
시로네는 플루를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들은 얘기는 절대 바깥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돼. 내가 알고 있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니까. 나는 앞으로 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내색하지 마.”
시로네는 플루의 각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이곳에 오기까지 목숨을 걸었다. 가올드가 어떤 말을 꺼낼지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감당할 수준이었으면 싶었다.
시로네를 대신해 플루가 문을 노크했다.
“시로네가 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강난이 얼굴을 내밀었다. 바깥을 먼저 살핀 그녀는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왔구나. 빨리 회복했네.”
“네. 신경 써 주신 덕분에요.”
“들어와. 플루는 내려가서 볼일 보고. 수고했어.”
플루는 서운해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끼어들 영역이 아니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럼.”
플루가 자리를 떠난 뒤에야 강난은 문을 활짝 열었다.
협회장실의 낡은 소파에 염색을 끝낸 가올드가 몸을 파묻고 있었다. 벽지에서 매캐한 시가 냄새가 났다.
“왔냐? 앉아라.”
가올드의 맞은편에 앉자 강난이 차를 내왔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포문을 열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는 세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미로는…….”
가올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학교 동창이다.”
“네, 알고 있어요.”
“참 이상한 애였지. 아니, 엉뚱하다고 해야 하나? 하루는 자기가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더군. 그래서 해 보라고 했더니 카데바가 필요하대.”
가올드는 미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로네 또한 가올드에 대한 호기심만큼이나 미로라는 사람이 궁금했었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서 해부학 실습장에 숨어 들어가 카데바를 꺼냈지. 그냥 조직만 채취했어. 물론 걸리면 퇴학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다음 연구실로 데려갔는데 테이블에 수조가 있더라고. 옆에는 막 이상한 장치들이 놓여 있고 호스들은 엉겨서 달라붙고…….”
가올드는 표현하기 귀찮은지 과장스럽게 손을 허우적댔다.
“네, 어떤 곳인지 알 것 같아요.”
“수조에 이상한 것들을 마구 집어넣더라고. 아주 역겨운 광경이었지. 그래서 그냥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끝까지 나를 붙잡더라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대. 결국 오도 가도 못하고 붙잡혔지.”
눈빛만으로 세상 모두를 압도할 것 같은 가올드가 미로에게 꼼짝 못 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상상해 보면 절로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렇게 준비가 끝났어. 미로가 나에게 작은 컵을 주더라고. 그러더니 정액을 받아 오래.”
“쿨럭! 쿨럭!”
공교롭게도 차를 마시던 시로네의 목에 사레가 들렸다.
“그, 그래서…… 주셨나요?”
“내가 미쳤냐? 당연히 안 된다고 소리치고 도망, 아니 나와 버렸지. 그런데 다음 날이 되니까 어디서 구해 왔더라고. 샀다더군. 실험이 다시 이어졌지. 끓이니까 아주 역겨운 물이 되더라고. 미로는 그것을 원시수프라고 불렀다. 나는 내기를 했지. 여기서 뭐라도 하나 나온다면 팬티만 입고 학교를 뛴다고.”
시로네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학교생활은 변하지 않은 듯했다.
“약속한 한 달이 지나고 다시 연구실로 갔지. 미로는 완전히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거기서 뭐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냐? 그냥 워낙 엉뚱한 아이라서 장단이나 맞춰 주고 있었던 거지.”
“하하! 그렇죠.”
그 순간 가올드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하지만 있었다.”
“……네?”
“역겨운 액체는 이미 말라붙었고, 수조는 끈끈한 점액질로 뒤덮여 있었지. 그리고 안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물체가 살고 있었어.”
“혹시 어딘가에서 가져와서…….”
가올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이 어떤 생물을 상상하든 지식에 기반한 패턴이 나오게 마련이야. 하지만 그건 완전히 달랐어. 정말로 독자적인 환경에서 탄생한 생물체였던 거야.”
시로네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가올드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제1급 대마법사가 된 지금에도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는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충격에 떨리고 있었다.
“단언컨대 네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머리가 아닌 본능에서부터 느껴지는 이질감. 그 생물체는 우리와 완전히 달랐어.”
“미로 씨는…… 어떻게 그걸 만들었죠?”
인간이 생명체를 창조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현재 인류가 도달한 영역은 운동성을 지닌 마도 생물체 하비스트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비스트를 생물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로는 거기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오늘의 일은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더군.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짐작이 가. 미로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스케일 마법사다. 자신이 만든 특정 공간에서라면, 수억 년의 시간을 빠르게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원시 생명체를 진화시켰다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내가 속옷 차림으로 학교를 달려야 했다는 게 중요하지. 덕분에 나는 변태로 낙인이 찍혔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시로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시로네의 심정을 이해한 가올드가 피식 웃었다. 물론 조금 전의 말이 농담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미로는 그 생물체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결국 일주일 후에 죽었다. 그날 미로가 많이 울었지. 그럴 거면 왜 만들었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만큼 이상한 애였어. 종잡을 수가 없었지.”
시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올드가 들려준 일화만으로도 절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생명체뿐만이 아니야. 그녀는 창조의 천재였다. 온갖 생각지도 못한 발명품을 만들어 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물어봤더니 눈에 보인다더군. 사물의 이름을 들으면 저절로 원리가 떠오른다는 거야.”
“이름을…… 들으면?”
시로네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래. 어쩌면 그녀는 아카식 레코드에 도달했는지도 몰라. 어쨌거나 미로는 마법사회에서 빠르게 두각을 드러냈다. 이모탈 펑션은 오래전에 열었고 자기력으로 시공간을 비틀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성공에는 관심이 없었어. 머릿속이 호기심으로만 가득 찬 여자 같았다. 그렇게 해서 결성하게 된 것이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다.”
“네. 저도 거기에 소속되어 있어요.”
시로네는 자신이 거기에 속해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크크, 인생 꼬인 걸 축하한다. 창단 멤버는 세 명이야. 나, 미로 그리고 세인이라는 얼빠진 놈이 하나 더 있지.”
“세인이라는 분이 서번트 신드롬이죠? 이스타스의 마스터키를 만든.”
“뭐…… 딱히 좋아하는 놈은 아니야.”
가올드는 한마디로 설명을 생략해 버렸다.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듣고 싶었던 시로네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네가 들어야 할 1급 기밀이다.”
가올드가 표정을 고치자 시로네도 침을 꼴깍 삼켰다.
“결과적으로 미로의 천재성은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갔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12명의 군주, 즉 ‘성전’이 미로를 주시하기 시작한 거야. 그들은 오래전부터 천국의 사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성전의 군대 발키리다.”
시로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카즈라의 왕 오르캄프가 자신을 부른 이유도 아타락시아를 이용해 발키리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최후의 전쟁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성전은 거핀의 후계자를 찾았지. 그 과정에서 미로가 낙찰되었다. 앞길이 창창한 소녀가 순식간에 인류를 위한 방파제가 되어 버린 거야. 짐작할 수 있겠냐? 늙을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숙명을 업고 혼자만의 세계에 영원히 갇히는 기분을?”
시로네는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마침내 세계에서 이름난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재판이 시작되었다. 20인의 심판이라고 불리는 날이지. 제국의 1급 사신들, 라미 교의 교황, 살아 있는 성聖이라 불리는 인격자, 인권 단체의 수장 등. 균형을 맞추기 위해 미로의 스승인 알페아스, 토르미아 왕국 교사회 감사인 올리비아도 투표권을 받았다. 결과는 찬성 16, 반대 1, 기권 3. 결국 그렇게 미로가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지.”
“어떻게 그런 짓을…….”
미로에게는 인류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일이다. 설령 자의로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진실 여부를 의심해도 모자랄 판국에, 고작 20명이 모여서 한 사람의 인생을 끝장내 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 나에게는 모든 과정이 너무도 복잡했지만 세상은 지극히 쉽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한 명의 희생으로 전 인류를 구할 수 있다는 명제 앞에서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했지. 그렇게 정신없는 며칠이 지나고, 마침내 떠나는 날이 왔다. 그리고 미로는…….”
가올드의 목소리가 급격히 잠겨 들더니 이윽고 말이 사라졌다. 그는 넋이 나간 듯 무의미한 공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숨이 거칠어지면서 눈동자에 실핏줄이 올라왔다. 강인한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눈물이 감기지 않은 눈동자에 차오르고 있었다.
-제발 미로를 살려 주십시오! 저는 한평생 신의 종으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았습니다! 제 영혼을 바쳐도 좋습니다! 그러니 제발 미로만은……!
-가올드라고 했느냐?
-제발…… 제발 이 어린 종에게 신의 은총을! 신의 자비를……!
-신 또한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
시로네는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방 안의 기재들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리고 있었다.
‘뭐지?’
가올드에게 고개를 돌린 시로네는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눈물이 말라 버린 가올드의 눈동자에는 범접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풍경이 바뀌고, 거대한 불길이 타올랐다.
벙커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그 지옥에 가올드도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가올드의 눈동자는 점점 말려 올라가 흰자가 드러났다.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지고, 이빨을 드러낸 입술은 기괴하게 찢어져 있었다.
‘으으! 이건 너무하잖아.’
화신술의 힘으로 버티고 있지만 정신이 아닌 진짜 물리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18층이 폭발해 버릴지도 몰랐다.
강난의 낮고 예리한 목소리가 불길을 뚫고 들려왔다.
“협회장님.”
거짓말처럼 지옥의 풍경이 사라졌다. 가올드는 새삼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제야 시로네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가올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에게서 20인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미로는 세상을 떠났다. 그날 이후 나는 한 가지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이제 실현만을 남겨 두고 있지.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자고 한 이유다.”
시로네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들을 준비를 끝마쳤다. 그런 시로네를 잠시 지켜보던 가올드가 튕기듯 상체를 세우더니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미로의 시공을 파괴할 것이다.”
“…….”
시로네는 일단 가올드의 말을 머리에 담았다. 그리고 의미를 분석했다. 깨닫고 난 뒤의 느낌은 처음 들었을 때보다 훨씬 섬뜩했다.
“미로의 시공을…… 파괴한다고요?”
미로를 되찾아오겠다는 뜻이었다. 가올드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세계는 멸망의 수순을 밟게 될 터였다.
“미로의 시공이 사라지면…….”
“그래. 천국의 군대가 쳐들어오겠지. 8명의 대천사, 수십 명의 평천사, 수백 명의 타락천사, 수천에 달하는 마라들, 거인과 요정, 고대 마법, 스키마, 메카 무기의 화력으로 무장한 신민들. 어느 쪽이 이기든지 간에 우리가 사는 세계는 초토화될 것이다. 나는 너에게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가올드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20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각오가 이제 와 흔들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시로네는 양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불안감이 사실이 되었다는 게 답답했다. 아니,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문제였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담보로 잡고 한 여자를 구출하는 일이었다. 겁에 질린다거나,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문제에 봉착하자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방법은 있는 건가요?”
미로를 데려올 수 있었다면 가올드는 진즉 그렇게 했을 터였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이 걸려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물론 있지.”
가올드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시로네의 모습에 전보다 더욱 믿음이 갔다.
최악의 프로젝트 (3)
“미로의 시공은 천국과 이곳의 중간 지점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이해하기 쉽게 압력이라고 하자. 결국 양쪽의 압력이 동등한 상태에서 미로를 짓누르고 있는 거야. 그런데 갑자기 한쪽의 압력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가올드의 말을 상상한 시로네는 오싹했다.
“펑! 미로는 산산조각 부서져 버리겠지. 그렇기 때문에 미로를 데리고 나오지 못하는 거다. 미로는 차원의 벽을 만든 순간부터 거기에 갇혀 버린 셈이지.”
“하지만 천국의 입장은 다르겠죠.”
“그래. 천국에서는 미로의 생사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지. 놈들이야 차원의 벽을 부수고 쳐들어오면 그만이니까. 이번에 미로의 시공에 균열이 간 게 좋은 예시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엄청난 압력일 텐데.”
“대천사들이 작당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놈들은 우주가 시작되던 순간의 힘을 다루는 자들이다. 증폭의 이카엘. 탄생의 카리엘, 파괴의 유리엘 등. 모든 게 끝날 뻔했지. 하지만 미로도 인간계에서 두 번 나오기 힘든 천재다. 그렇기에 거핀의 후계자가 된 것이겠지만. 어쨌든 균열을 막았다면 그녀는 현재 삼매경에 들어갔을 거야. 자력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이상 상황이 악화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 쪽도 전력 보강이 필요하지. 그게 바로 시로네, 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