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06
“결과만 말해 주면 돼.”
시로네는 기억을 더듬어 순서대로 외웠다.
“흑, 백, 백, 흑…….”
시불상폭매로 최강 패가 나올 때까지 돌렸기에 시로네가 오픈한 횟수는 다른 사람보다 몇 배나 많았다.
그 시점에서 이루키는 팀원 5명과 연합 팀 6명이 5일 동안 조합하고 개패되었던 패를 전부 계산했다.
“역시 다르다. 확률이 달라.”
“무슨 소리야? 확률이라니…….”
이루키가 손을 내밀고 중얼거렸다.
“잠깐. 어? 이상한데? 이러면 안 맞는데.”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나간 그는 마침내 오류를 찾아내어 수정했다.
“그렇구나. 24시간마다 초기화야. 이러면 맞아떨어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설명을 해 줘야 알지.”
이루키가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이건 실제의 카드 게임이야.”
“……라는 걸 지금쯤 깨달았겠지.”
헤르시의 말에 피쇼가 물었다.
“어떻게 장담하지? 아무리 계산이 빨라도 주의를 기울이는 건 다른 문제야.”
“서번트를 움직이는 건 직관이 아니야. 보통 사람이 이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행동에 옮긴다면, 서번트는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만들어 두고 최상의 선택을 하지. 순간순간마다 전체를 살아가는 거야. 물론 비효율적이지만, 생각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보통 사람과 구별이 가지 않아. 5일 차라면 여태까지의 패를 통해서 유의미한 데이터를 추출할 거야.”
“내일부터는 그쪽도 확률을 조작한다는 것인가?”
헤르시가 검지를 들었다.
“하루에 소환되는 스크럼블의 개수는 72개. 그리고 흑과 백의 개수는 정확히 반반, 즉 36개씩이야. 한마디로 일흔두 장의 카드를 두고 패를 깐다고 생각하면 돼.”
안찰이 물었다.
“랜덤이지만 카운팅이 가능하다?”
“바로 그거야. 실제 카드 게임이랑 같은 거지. 흑과 백은 각각 서른여섯 장이고 누군가는 흑을, 누군가는 백을 갖는다. 그 개수에 따라 확률이 변하는 거지. 쉽게 예를 들자면 서른여섯 장의 흑색 카드가 이미 공개된 상태에서 랜덤 카드를 오픈하면 어떻게 될까?”
“백이 나오겠지. 더 이상 나올 흑색 카드가 없으니까.”
“정답. 이것만 알고 있어도 게임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지. 나처럼 말이야.”
“……라는 생각으로 경기를 했던 거야.”
이루키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헤르시가 유리한 패를 선점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소나의 탐색 능력과 확률 조작. 이것으로 계속 경기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거지.”
시로네가 물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이 랜덤 카드를 오픈할 경우가 생기잖아. 만패가 될 수도 있고, 그렇게 쉽게 주도권을 유지하지는 못할 텐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규칙이 드러난다.”
이루키가 손바닥을 뒤집었다.
“개패시킨 패, 즉 캉에서 패한 카드는 파기되는 게 아니라 다시 랜덤 상태로 되돌아간다. 즉, 셔플이지.”
“……라는 식인데.”
헤르시가 양쪽 엄지를 들었다.
“총 스무 장이라 가정하고 안찰이 흑을 여섯 장, 피쇼가 백을 여섯 장 소지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상태에서 누군가가 랜덤 카드를 오픈한다면 흑백의 확률은 정확히 50퍼센트. 그런데 여기서 피쇼가 캉을 걸어 안찰의 패를 개패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안찰이 말했다.
“내가 가진 흑색 카드 여섯 장이 다시 셔플되겠지.”
“그래. 랜덤 상태의 카드 중에서 흑색이 백색보다 상대적으로 많아지기 때문에 흑이 나올 확률이 높아져.”
“그게 바로 카운팅이군.”
헤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전날에 보유한 패는 오늘의 확률과 무관. 따라서 캉을 걸어 이기거나, 일부러 아군의 패를 개패시키는 방식으로 확률을 움직이는 거지.”
“여기에서 두 가지 가정이 들어간다.”
이루키가 말했다.
“만약 헤르시가 자의로 이 규칙을 깨달았을 경우,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절대로 모를 거야. 시불상폭매를 통해서 계산한 확률이니까. 하지만 누군가에게 정보를 넘겨받았을 경우에는 장담할 수 없어.”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이 뭔데?”
이루키와 헤르시가 동시에 말했다.
“R의 확률은 두 종류로 나뉜다.”
이루키는 시로네를 가리켰다.
“처음 계산할 때 내가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시로네가 시불상폭매로 연달아 다섯 번 정도 랜덤 카드를 돌린 상황에서 평균값과 동떨어진 확률이 나왔기 때문이야. 그러다가 떠올렸지. 당시에 시로네가 일부러 캉을 받지 않은 적이 있었어.”
“응. 캉에서 이길 수 있었지만 일부러 안 받았지. 개패시키고 조합을 다시 짜려고.”
“그게 변수였던 거야. 그렇다면 이것을 토대로 또 하나의 숨겨진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숨겨진 규칙이라면?”
“캉의 대결에서 개패된 카드는 셔플되지만, 시간 초과로 개패된 카드는 셔플되지 않는다. 즉, 파기된다.”
R의 확률 (3)
“아…….”
시로네 일행은 비로소 깨달았다.
“알겠어? R에 숨겨진 또 하나의 확률. 우리가 이것을 이용하면 헤르시보다 더 강력한 확률 조작을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할 거야.”
헤르시가 미소를 지었다.
“30년 역사의 스크럼블 로열. 숨겨진 규칙은 대결이 끝난 이후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니까.”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았지?”
헤르시가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돈. 학교에 다닐 때나 불문율을 따지지, 졸업한 지 수십 년 된 놈들이 신경이나 쓸 것 같아? 특히나 음지의 연구회를 이끈 자들 중에는 개차반이 많거든. 술, 도박, 여자, 마약중독자도 있고. 얼마 쥐여 주니까 술술 불더군.”
“그래서…… 이 시점에 우리에게 말하는 이유가 뭐야?”
헤르시는 숲의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프링스를 돌아보았다.
“용서하지 않겠어. 복수해 주마. 열 받아 미치게 해 주지. 비밀을 샅샅이 파헤쳐 주마.”
손가락 10개에 붕대를 감은 채 중얼거리는 모습에서는 예전의 총명한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완전히 맛이 갔군.’
어쨌거나 그의 광기 또한 필요할 시점이 올 터였다.
“전술적으로 확률을 조작할 인원이 필요해. 프링스는 저 모양이고, 에덴은 마지막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그나마 케이든이 내일이면 합류한다는 게 위안거리야.”
피쇼가 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최대한 많이 스크럼블을 수집해서 나에게 전해 줘. 저쪽에서도 무한을 만든다면 다음 서열에 따라 승패가 갈릴 거야. 패의 대결에서 내가 이기겠다. 이제 2일 후면 대결이 끝나. 이제부터는 선택보다는 집중이야.”
“……라는 전략을 구사할 확률이 높아.”
이루키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리쳤다.
“즉, 헤르시에게 패를 집중시켜서 경기를 끝내는 거지. 이제 수집 가능한 총 카드 수는 백마흔네 장. 그 안에 승부를 내야 해.”
도로시가 말했다.
“피쇼에게 지지 않겠어. 사비나가 견제해 준다면 비슷한 속도로 모을 수 있을 거야.”
에이미가 물었다.
“그럼 헤르시의 전략에 대비한 우리의 전략은 뭐야?”
이루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최대한 패를 분산시킨다.”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수도 바슈카의 교외에 위치한 아라모네스 보육원에 손님이 찾아왔다.
작은 텃밭에서 고구마를 심고 있던 아이들이 말끔한 정장 차림의 청년을 발견하고 하던 일을 멈추었다.
“안녕, 꼬마야?”
“누구세요?”
청년은 대답 없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여기는 여전하군.”
아이들과 함께 텃밭을 일구던 40대 초반의 중년 여성이 천천히 일어섰다.
“페르미.”
“잘 지내셨나요, 레이첼 씨? 미모는 여전하시군요.”
칭찬은 고맙지만 친구의 아들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여기에는 왜 온 거니?”
“집에 오는 것도 문제가 됩니까? 14년 만인가요?”
어머니를 여읜 페르미는 가문의 사정에 의해 한동안 보육원에서 지내야 했다.
“일단 들어오너라.”
페르미는 아이들에게 미소를 던지고 보육원으로 들어갔다.
“저 아저씨 되게 잘생겼다.”
“응. 근데 뭔가 좀…… 무서워.”
방에 들어가자 레이첼이 차를 내왔다.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딱히 안 올 일이 있나요? 벌써 14년 전인데요.”
레이첼이 황급히 말을 꺼냈다.
“페르미, 그날의 일은…….”
“됐어요. 이미 잊었습니다.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요. 유혹한 것도 저였으니까요.”
레이첼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거…… 받으시죠.”
페르미가 안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냈다.
“토르미아 중앙은행에서 발급한 수표입니다. 안심하고 쓰세요.”
레이첼의 시선이 액수에 고정되었다.
‘10억 골드.’
한숨을 내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페르미, 이건…….”
“받으세요. 욜가 재단이 파산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힘들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욜가 재단은 페르미의 어머니 욜가가 설립한 아동복지 재단이었다.
“받을 수 없어.”
“왜요? 더러운 돈일까 봐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당한 거래니까.”
-원장님, 이건 정당한 거래예요.
아홉 살 소년의 붉은 입술이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생각하지 말자. 떠올려서는 안 돼.’
“미안해요.”
레이첼이 고개를 들자 페르미가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어요. 진심입니다.”
그저 아홉 살의 아이와 할 수 있는 가벼운 입맞춤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허락했던 당시의 감정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어 레이첼을 괴롭히고 있었다.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사망한, 정확히는 행방불명된 욜가가 서류상으로 사망 판정을 받자 그녀의 지원을 받던 보육원도 휘청거렸다.
당시 아르디노 가문은 세상에 발을 들이대지도 못할 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페르미 또한 은신할 곳을 찾아 보육원에 들어온 시점이었다.
막대한 채무, 날마다 찾아와 보육원을 엎어 놓고 가는 빚쟁이들, 아름다운 여자에게 뻗히는 유혹의 손길들.
수십 명의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레이첼은 꿋꿋이 버텨 나갔으나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원장님, 제가 돈을 구해 올게요.
아홉 살 꼬마의 당돌한 소리에, 처음에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 고픈 것이라 생각했다.
욜가라는 위대한 어머니를 하루아침에 잃었고, 새로운 엄마인 레이첼은 수십 명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나누어 주어야 했으니까.
‘페르미는 특별한 아이였지.’
범접할 수 없는 지성과 통찰,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을 목도할 때면 어른인 레이첼조차 기가 죽을 정도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매몰찼었는지도 모른다.
의지하게 될 것 같아서.
-1골드를 벌어 왔어요.
아홉 살짜리가 가져온 골드를 보았을 때는 레이첼의 눈도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벌었어요.
-솔직히 말해! 어디서 훔친 거야?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을 훔치면……!
-정말로 벌었어요. 안 받으실 거예요?
보육원생들을 전부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돈을 눈앞에 두고 레이첼은 이를 악물었다.
-제가 갚아 줄까요, 원장님?
-뭐?
-부채 말이에요. 제가 전부, 갚아 줄까요?
회상에서 벗어난 레이첼은 페르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표정, 세상에서 불가능할 게 없을 것 같은 신비로운 여유를 보고 있노라면 오래된 친구가 저절로 떠올랐다.
‘어쩜 이리 욜가와 똑같을까?’
-만약 제가 부채를 갚으면, 저만의 레이첼이 되어 줘요.
-무슨 소리니, 페르미? 나는 언제나 너희들에게…….
-저에게 수십 명의 형제 따위는 필요 없어요.
레이첼은 입을 다물었다.
-오직 나만을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에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작된 거래였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6개월 뒤에 페르미는 보육원의 부채인 1,200만 골드를 전부 갚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