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12
규정외식-감가상각의 거래.
17억 골드짜리 정보 마법, 인디케이터가 담긴 칩이 손바닥 위로 튀어 올랐다.
그것을 삼키고 마법을 시전하자 구슬의 전기가 장막으로 펴지면서 내부 회로가 드러났다.
이제부터는 순수 두뇌의 영역이지만 보안 등급에 비했을 때 암호 체계가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다.
‘정보 마법의 전문가는 없나 보군.’
물론 쉽다는 뜻은 아니었고, 페르미는 30분 정도를 헤맨 끝에야 겨우 암호를 해독하는 데에 성공했다.
구슬이 붉은 빛을 내며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풍경을 드러냈다.
거대한 동굴 내부는 통째로 깎아서 조각한 듯 해골들이 벽에 달라붙어 있었고, 뱀처럼 휘어진 동굴 끝에서는 몇몇 인물들이 술잔을 들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페르미가 왔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그들이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건, 소름이 돋을 지경이군.’
굳이 보안장치로 접근을 막지 않더라도 동굴의 공기는 칼날이 떠 있는 듯 날카로웠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페르미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자리의 누구를 지목하든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페르미를 기다리고 있는 자가 바로 시간 마법의 정점에 오른 남자였으니까.
“결국 찾아왔군. 수완은 인정해 주지.”
“아무리 쫓기는 신세라고는 해도 이런 곳까지 들어와 있을 줄은 몰랐다고요.”
미소를 지은 페르미가 눈에 붕대를 감고 있는 남자에게 걸음을 옮겼다.
“영겁의 성찰자, 아르민 씨.”
상아탑에서 탈퇴한 아르민은 미로와 손을 잡았고, 몇몇 인물들과 함께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나를 찾았지?”
페르미는 미로와 맞먹는 여걸인 욜가의 아들에다가 천재지만, 그래도 이 상황은 의아했다.
“솔직히 말하면, 들었어요. 세인 씨에게.”
‘세인.’
블랙 라인에서 스네이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 또한 미로를 돕고 있었다.
‘페르미를 순순히 보냈다는 것은 승낙의 의미인가?’
“일단 전에 말씀드린 협상부터…….”
아르민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기던 페르미가 우뚝 발길을 멈췄다.
1센티미터만 더 다가갔어도 죽었을 것이다.
‘우와.’
생전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살기를 내뿜고 있는 자는 아르민 뒤편의 벽에 기대어 있는 외팔이 검사였다.
한때 카이젠 검술학교 교관이었던 파르카 쿠안으로, 현재는 아르민과 일을 하며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앉아라.”
아르민이 허락한 뒤에야 살기의 장막이 물러났다.
“……네.”
페르미는 정직하게 대답하고 의자를 빼냈다.
‘휴우, 어른들이군.’
세상 무서울 게 없는 페르미지만 이 순간만큼은 얌전한 마법학교 학생처럼 행동하는 게 좋을 터였다.
‘또한 이것이 고모의 친구들.’
소위 미로의 라인업.
세인도 그렇지만 현재 잠적 중인 전 마법협회장 가올드까지 포함하면 가히 막강의 스쿼드였다.
‘어머니에게도 있었지.’
페르미에게도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던 욜가의 동료들이 있었다.
‘그날의 사건만 아니었다면…….’
페르미의 차가워진 눈빛을 느끼며 아르민이 물었다.
“여기에 온 것은 거래 때문이겠지?”
“약속한 자금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서명만 남았죠.”
페르미는 감가상각의 거래 계약서를 꺼냈다.
“기한은 일주일. 거래 금액 1천억 골드. 3년 할부로 하겠습니다.”
아르민은 거래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까지 해낸 것만으로도 페르미의 재능은 미로에게 들었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과연 옳은 일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로가 페르미에게 이스타스의 조사를 허락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약속은 지키셔야죠.”
페르미의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초조함이 묻어나는 것은, 그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미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페르미와 아르민의 약속은 오래전의 일이지만 이제는 미로도 얘기를 들은 뒤였다.
“책임질 자신 있는 거냐?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설령 살아서 나온다고 한들, 미로를 적으로 두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페르미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과연 19년 전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
“확실히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 고모가 가진 것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생각에 잠겨 있던 아르민이 펜을 들고 서명하자 페르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약속대로, 서명했다.”
지금보다 훨씬 앳된 페르미가 찾아왔을 때만 해도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거래가 성사되었다.
“감사합니다.”
규정외식을 시전하자 황금처럼 빛나는 한 장의 칩이 소환되었다.
시간 정지 마법, 스톱이었다.
***
네 번째 스크럼블이 소환되면서 이루키와 헤르시의 패가 줄어들자 랜덤 카드의 확률이 널뛰기 시작했다.
‘어째서 패를 분산시키지?’
헤르시가 느낀 의문은 다음 랜덤 카드를 오픈하는 것으로 명확해졌다.
‘또 흑이다.’
78퍼센트의 확률로 백이 나와야 하는 차례였다.
‘물론 22퍼센트의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된다는 것은…….’
명백한 확률 조작이었다.
“그렇군. 캉을 받지 않고 있어.”
“도로시, 캉.”
이루키가 캉을 걸고 1초가 지나자 도로시의 패인 ○○○(종교)가 개패되었다.
“캉이나 파오를 선택하지 않았을 경우 개패된 카드는 랜덤 카드에 섞이지 않아.”
헤르시의 말을 들은 피쇼가 마스터 카드의 현황을 확인했다.
“사비나가 스크럼블을 파괴하고 있어. 속도는 우리가 월등하지만, 이대로는 큰 이득을 볼 수 없다.”
“비슷하게 간다고 봐야겠지. 이제 남은 스크럼블은 수집한 것까지 더해서 40개 안팎.”
최종의 최종까지 가야 승부가 결정될 터였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이긴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확률이 고정되게 되어 있으니까.”
체스 말이 줄어들수록 변수 또한 줄어드는 이치였다.
“이 게임의 승자는 케이든이다.”
헤르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다섯 번째 스크럼블이 소환된 지 한참이 지났으나 에이미와 케이든에게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오오오!”
크로스소드가 풍차처럼 회전할 때마다 사방에 한파가 몰아쳤다.
에이미가 파이어 미스트로 주위를 둘렀으나 이번에는 에어 커트와 흡사한 칼바람이 불의 장막을 갈랐다.
모든 속성을 검술에 녹일 수 있는 실력자.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게 적십자성의 운명인가?
“헛소리하지 마!”
에이미의 홍안이 빛나면서 화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일도一道!’
집중의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집중을 관통하자 일시적인 삼매경에 들어가면서 육체가 횃불처럼 불타올랐다.
“뭐지?”
섭씨 1천 도 이상의 불을 두른 상태에서 버틸 수 있는 마법사는 없다.
‘진공이군.’
공기와 불의 속성을 결합한 마법.
화염의 내부를 진공상태로 만들어 열의 대류를 차단시키는 에이미의 비술 ‘화인’이었다.
“하지만 복사열은 차단할 수 없을 텐데?”
에이미가 화인의 상태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10분이었다.
“충분해, 너 같은 멍청이를 쓰러뜨리기에는.”
“멍청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누구나 살면서 한 가지의 짐은 있는 거야. 그렇다고 자포자기해서 남의 인생까지 망치려고 들지는 않아.”
“그럴 수도 있겠지.”
크로스소드를 세운 케이든이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차가운 냉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알고 있나? 내 운명의 무게는 모든 인간의 무게보다 무겁다.”
‘그게 멍청하다는 거야!’
에이미가 돌진하는 광경은 마치 거대한 불덩어리가 굴러오는 듯했다.
“어리석군. 검사에게 근접전을 시도하다니.”
여태까지 전투에서 에이미가 먼저 거리를 좁히고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그럴까?”
에이미의 화염이 막무가내로 치솟으면서 불의 거인이 되어 케이든을 덮쳤다.
‘마법이 아니야?’
크로스소드가 거인을 베었으나 빙결의 기운이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프리트.’
에이미에게 장착되어 있는 또 하나의 전지.
고대의 정령 잭 오 랜턴이 일도의 기운을 타고 화염의 마신으로 진화한 것이었다.
“화권!”
불의 연기로 이루어진 이프리트의 주먹이 수십 개로 분리되어 휘둘렸다.
퍼어어어어엉!
화염의 폭발과 함께 흑과 백의 마지막, 제6차 스크럼블이 소환되었다.
***
‘됐다.’
시로네는 차분하게 눈을 떴다.
시간이 어느덧 자정을 향해 다가가는 지점에서 시불상폭매의 시간기는 사물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풍경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100경.’
시로네가 마침내 도달한 수열식의 도착 지점이었다.
한편으로는 기대했지만, 예상대로 경천동지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100경이란 숫자는 오직 인간의 스케일에서만 위대할 뿐, 이 또한 자연수의 극히 좁은 구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에덴을 제압하기에는 충분한 시간기였다.
그가 일어나자 풍경이 정상적으로 되돌아오고 광천사의 화신이 나무의 꼭대기 높이까지 솟아올랐다.
“에덴은…….”
마스터 카드를 확인한 시로네는 스크럼블이 없는 지역을 중심으로 에덴을 찾아 나섰다.
스피릿 존을 최대한 활용하여 사냥감을 몰듯 반경을 좁혀 나간 끝에 마침내 에덴이 공감각에 잡혔다.
아마 상대방도 느끼고 있을 테지만, 그녀는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았다.
“……왔군.”
시로네는 에덴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스터 카드는 없다.’
마찬가지로 에덴 또한 시로네의 화신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을 조절하는 능력의 정체인가?”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어.”
시로네는 에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지. 에덴, 너의 전능은 절대적이지 않아. 단지 강할 뿐이야.”
“인간이란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대해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니까.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증명하려고 하는 거지?”
“단지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증명인가?”
“가올드를 부정하잖아.”
“그가 먼저 신을 부정했으니까.”
“그래서 완벽하지 않다는 거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라면…….”
“죽을 수도 있어.”
시로네가 말을 끊었다.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단지 너를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지금이라도 포기해. 네 전능은 절대적이지 않아. 그 상태에서 내 공격을 받는다면…….”
시로네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어.”
에덴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껏 생각했다는 방법이 이건가? 내 정신을 흔드는 거?”
“잘 들어, 에덴.”
“아니, 좋아. 그래, 네 말이 옳다고 치자.”
에덴의 방어막이 신성한 빛을 발했다.
“내 전능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신께서는 나를 보살피고 계신다. 자만 따위는 없어. 설령 완벽하지 않더라도 너를 이기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에덴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완벽하지 않다면 피하겠다. 그것이 신이 나에게 주신 또 하나의 해법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