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2
“히익! 잘못했어요!”
시로네 일행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불호령만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더 이상의 불똥은 떨어지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뜨자 생각에 잠긴 시이나가 보였다.
‘어떻게 나를 미행한 거지?’
최대한 주변을 경계하며 여기까지 온 시이나였다.
스피릿 존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고작 학생에게 미행을 당할 정도로 그녀의 눈은 어설프지 않았다.
시이나는 시로네 일행이 뒤에 감추고 있는 것에 해답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숨긴 건 뭐야? 이리 내놔.”
네이드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시이나의 눈에서 살기 비슷한 것이 나오자 황급히 들고 있던 망토를 내밀었다.
물론 마지막까지 망토를 뒤집어서 주는 기지는 잊지 않았다.
“이게 뭐야?”
너저분한 망토를 보고 시이나는 인상을 찡그렸으나 이내 진가를 확인했다.
겉면으로 돌리는 순간 망토를 든 팔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치마처럼 두르자 이번에는 허리부터 잘려 나간 듯 하체의 풍경이 투사되었다.
“투명 망토?”
비로소 전말을 깨달은 시이나가 네이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물었다.
“네이드, 이것도 네가 자랑하는 그 특허품이니?”
“네.”
“정말로 네가 만들었단 말이지?”
“하, 하지만 블랙마켓에는 내놓지 않았어요! 저도 그 정도 양심은 있다고요.”
“하아.”
시이나의 한숨에 일행의 어깨가 흠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았다.
공인 6급의 마법사로서 미행을 당했다는 것은, 제자들의 잘못보다 자신의 미숙함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 뻔히 들킬 거라는 걸 알면서? 실망했다는 건 또 뭐고?”
시로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장난삼아 미행한 건데, 선생님이 남자랑 포옹하는 걸 보고 따라 들어왔어요. 그리고 문밖에서 대화를 듣다가 불륜이라는 생각에 그만…….”
“뭐? 불륜?”
시이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가 이토록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불륜이라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네이드가 황급히 받아쳤다.
“하지만 그렇잖아요! 그런 대화를 듣고 어떻게 오해를 안 하겠어요! 대체 저 사람은 누구예요?”
네이드는 여전히 캔버스에 가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저 말인가요?”
사람의 마음을 절로 따듯하게 만드는 목소리에 이어 의자가 끼익 밀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후 그가 캔버스 너머로 얼굴을 드러냈다.
시로네 일행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20대 후반의 미남자.
하지만 정말로 놀란 이유는 그의 외모가 아닌, 두 눈에 칭칭 감긴 허름한 헝겊이었다.
‘이 사람…….’
화가인데, 맹인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시로네를 괴롭히던 초상감이 엄청난 강도로 엄습했다.
‘흐윽!’
솜털이 일어서고 뼈가 얼어붙는 듯했다.
덜덜 떨리는 손목을 붙잡고 길게 심호흡을 하자 일말의 책임감을 느낀 네이드가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설마 선생님이 우릴 죽이기야 하겠냐? 내가 다 책임질게.”
“응?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시로네는 점차 편한 기색을 되찾았다.
평상시 초상감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한기였지만 그런 만큼 사라지는 시간도 빨랐다.
“시이나, 그만하고 용서해 줘. 사장은 잘 모르지만 네가 가르치는 학생 같은데.”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더욱 용서할 수 없지. 미행이야 그렇다 쳐도 남의 집에 무단 침입을 했다고. 하여튼 못된 것만 배워 먹어서.”
남자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네 제자잖아. 선생님이 안에 있으니, 만약 걸려도 괜찮다고 생각했겠지.”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한 말에 네이드가 나섰다.
“맞아요. 진짜로 그래서 그런 거예요. 시로네는 거짓말 안 하니까 물어보세요. 그냥 남의 집이었으면 절대로 안 들어왔죠. 저희가 좀도둑도 아니고요.”
시로네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네이드가 정말로 저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제가 확실히 들었어요.”
시이나는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짚었다.
거짓은 아닐 테지만, 살아 보겠다고 순진한 눈망울을 초롱거리는 모습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놈들이 투명 망토까지 써서 나를 미행해? 하여튼 영악한 것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남자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이나의 제자를 보게 되어서 기분이 좋은 듯했다.
“아르민이라고 합니다. 시이나하고는 어릴 때부터 남매처럼 지냈죠. 올리페르 학파에서 수학했거든요.”
아르민이 내민 손을 네이드가 냉큼 붙잡았다.
“아하, 그러셨군요. 저희들의 바보 같은 오해를 사과드립니다. 기별도 없이 방문해서 죄송하고요.”
시이나가 소리쳤다.
“방문은 무슨! 무단 침입이잖아!”
“헤헤, 그래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거죠. 솔직히 저도 선생님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기분이 좋다고요.”
시이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콧김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어색한 만남인 것은 사실이기에 잠시 동안은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고 있어. 차부터 내올 테니까.”
아르민이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정확한 걸음걸이로 문을 나서자 시로네 일행은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대체 저분은 누구예요? 정말로 그냥 오빠 동생 사이인가요?”
“아르민 오빠는 나와 동문이야. 올리페르 학파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라고 기대를 모았던 사람이기도 하지. 지금은 화가가 되었지만 어릴 때부터 재능은 나보다 훨씬 뛰어났어.”
“대단한 분이셨네요.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눈은 어째서……?”
시이나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네이드는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 찔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금세 표정을 풀고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오빠는 눈을 잃은 거야.”
“네? 선생님 때문에요?”
“아홉 살 무렵, 오버플로우가 찾아왔지. 에너지 흡수에 대한 이론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이 온 거야.”
시이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나를 구해 준 사람이 아르민 오빠야. 오빠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어. 두려움을 외면하지 말라고. 고개를 돌려 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그때 오빠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 알아? 나보다 두 살 위인 열한 살이었어.”
열한 살이라고 해 봤자 어차피 어린아이였다. 그런데도 시이나를 오버플로우에서 구원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재였는지 말해 주는 대목이었다.
“아르민 씨의 조언으로 오버플로우를 극복한 건가요?”
“아니. 난 그 정도로 강한 아이가 아니었어. 올리페르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특혜를 받았던 기고만장한 꼬맹이일 뿐이었지. 당시에는 오빠가 싫었어. 공포를 직시하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거든. 난 그러고 싶지 않았어. 무서우니까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거잖아.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만 한다고 생각했어. 그때는 참 어렸지.”
시로네는 공인 6급의 마법사인 시이나가 겁에 질려 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아르민 오빠를 피해서 산이나 들, 강가에 나가고는 했어. 아르민 오빠는 어떻게든 나를 찾아냈지만, 그럴 때마다 또다시 도망쳤지. 그렇게 이상한 술래잡기가 이어지던 어느 날…… 사건이 터진 거야.”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장마 기간이었는데,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렸어. 그런 궂은 날에도 나는 강가를 돌아다니고 있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그렇게 지나갔을 일일 텐데, 공교롭게도 상류를 막고 있던 둑이 무너진 거야. 엄청난 양의 강물이 저지대를 휩쓸었어. 마을의 절반을 침수시킨 홍수였거든.”
그녀는 17년 전의 일을 회상했다.
강물에 휩쓸린 어린 시이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물살에 휩쓸렸다.
죽기 살기로 발버둥을 쳐서 떠올랐을 때는 그녀가 알던 강가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상류에서 건물 잔해와 가축이 떠내려오고, 하류에는 날카롭게 부러진 나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낀 순간이었다.
‘살려 주세요. 누가 제발……!’
물은 빠르게 몸을 불려 갔다. 육지가 까마득하게 멀어 보였고, 조약돌이나 주우러 다녔던 실개천이 폭 25미터의 대형 급류로 변해 버린 상황이었다.
물색은 시커멓고, 물살이 암석에 갈라져 소용돌이가 생겼다.
“사람 살려! 누가 좀 살려 주세요!”
대륙 10대 학파인 올리페르라는 명함도 대자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살려 달라고 끝없이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시이나!”
신의 계시를 들은 것처럼 시이나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쳐들었다.
강물 위에 위태롭게 휘어진 나뭇가지에 아르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오빠!”
“손 내밀어!”
시이나는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발생한 돌물에 휩쓸려 물에 잠기고 말았다.
“시이나!”
몸을 날려 머리부터 입수한 아르민은 그로부터 수 초가 지난 뒤에야 그녀를 안고 떠올랐다.
물을 먹은 시이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푸하! 푸하!”
“시이나! 정신 차려! 강을 빠져나가야 해!”
“살, 살려! 살려 줘!”
가까스로 소용돌이 지대를 벗어난 아르민은 전방을 돌아보고 좌절했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지옥 같은 급류뿐이었다.
게이지 대칭성(3)
‘큰일이다.’
당시 아르민의 나이도 고작 열한 살이라서, 스피릿 존을 확장시켜 장애물을 피하는 게 전부였다.
“시이나! 눈 떠! 정신을 놓으면 안 돼!”
“오빠! 살, 살려……!”
시이나는 냉정을 찾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린 두 사람의 육체 능력으로 도강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르민은 혼자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델폰스 지역까지만 가면 돼. 거기서부터는 삼각주라 수량이 줄어들 테니까. 현재 속도로 보자면 20분 정도면 도착할 거야.’
20분? 아득한 시간이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의 시이나를 데리고 급류 속에서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멍청하긴.’
할 수밖에 없잖아.
풍경은 괴기스럽게 일렁거리고, 그 사이로 목숨을 위협하는 수많은 것들이 밀려들었다.
아르민은 사력을 다해 몸을 뒤틀었다.
흙탕물이 눈에 들어와도, 바위에 부딪혀도, 부러진 나무가 피부를 베어도, 그의 시선은 끝까지 정면의 풍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시이나의 조막만 한 손이 허리를 꼬집는 게 느껴졌다.
연약한 생명이 자신에게 모든 걸 의지하는 기분은 비참했지만, 그보다 더한 사명감이 정신을 깨웠다.
하류에 목적지가 보였다.
하지만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강 쪽으로 부러진 나무들이 흉흉하게 길목을 차단하고 있는 상태였다.
“시이나, 잘 들어. 저 나무 밑으로 지나가야 해. 오빠가 널 누를 테니까 숨을 꾹 참고 버틴 다음에 최대한 멀리 헤엄쳐서 올라가. 알았지?
“오빠! 무서워! 난 못해!”
“해야 돼! 할 수 있어!”
2개의 소용돌이가 맞물린 곳을 통과하자 급류의 속도가 2배 이상 빨라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르민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목만 떠 있는 시야 너머로 홍수의 쓰레기들이 괴물처럼 덮쳐 왔다.
아르민은 발에 쥐가 날 정도로 자맥질을 했다.
날카로운 것들이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지속적으로 피를 흘린 데다 체온이 떨어져서 의식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에 도착했다.
가까운 지점에서 살펴보니 역시나 잠수밖에 답이 없었다.
“시이나! 간다!”
아르민은 거리를 재며 타이밍을 계산했다. 그리고 충돌하기 직전 시이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지금이야!”
시이나의 비명 소리가 물에 잠기고, 반작용으로 떠오른 아르민의 시야에 물에 젖은 나무둥치의 날카로운 표피가 확대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온 신경은 시이나를 짓누르는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가 충분히 나무 밑으로 들어간 순간 비로소 손에 힘이 풀렸다.
‘잘했어, 시이나.’
아르민이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과 동시에 얼굴에 아득한 충격이 전해졌다.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그 순간까지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빠아아아!”
하류로 멀어지는 시이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된 거야.”
시이나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시로네 일행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델폰스 지역까지 안전하게 떠내려간 나는 마을 주민에게 구출됐어. 심림 지대를 벗어난 이후 위험한 장애물은 없었고, 아르민 오빠도 의식을 잃은 채 떠내려왔지. 학파 사람들이 동원되어서 치료를 했지만 진단 결과는 영구적인 안구 손상. 그 이후로 오빠는 시력을 잃었어.”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오빠는 두려움을 이기는 법을 몸소 가르쳐 준 거야. 덕분에 나도 오버플로우에서 빠져나왔지만, 오빠는 빛을 잃고 말았지. 학파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었던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린 거지.”
시로네는 가슴이 먹먹했다.
인간에게 눈을 잃는다는 건 거의 전부를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마법을 배우는 것도 제한이 될 수밖에 없다. 그가 얼마나 실망하고 괴로워했을지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소식은 근래 들었어. 오빠가 3년 전에 이곳으로 왔다는 걸 말이야. 빛을 그리는 화풍을 개발하는 중이래. 그래서 내가 모델이 되기를 자청한 거야.”
“그런 줄도 모르고 저희는…… 죄송해요.”
불륜으로 오해했다는 것 자체가 두 사람에게 실례되는 행동인 듯했다.
분위기가 어두워지려는 그때 아르민이 다과를 내왔다.
“내가 방해했나? 시이나가 옛날 일을 꺼내는 경우는 드문데 말이야.”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