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0
‘직시하는 거야.’
이 또한 아르민이 가르쳐 준 것.
무한의 영역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들이 난해한 괴물로 탈바꿈했다.
미지라는 이름의 괴물.
개인적인 이미지일 테지만, 지금 느끼는 공포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괴물이 시로네를 씹어 삼켰다. 잘근잘근 해체되는 감각 속에서 기억들이 흩어졌다. 여태까지의 삶도 1억 년 전의 일처럼 무의미할 뿐이었다.
‘안 돼. 기억해야 해.’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자아를 잃어버리는 순간 무한의 영역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터였다.
‘흐으으으!’
시로네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만약 스피드건 당시라면 이미 의지가 꺾였을 테지만, 치열한 리바운드를 통해 정신을 단련시킨 상태였다.
‘조금만 더…….’
이모탈 펑션이 위력을 강하게 할 것이다. 다만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외줄타기.
기억이 대부분 증발한 가운데 삶의 의지마저 사라질 즈음, 시로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지점이야!’
끝없이 부풀어 오르던 스피릿 존이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오고, 마치 그 힘을 모조리 뿜어내듯 광자 출력의 위력이 까마득히 상승했다.
시로네가 소리쳤다.
“출력!”
“시로네, 괜찮아? 지금 상태 멀쩡한 거야?”
“출력부터 확인해!”
어깨를 움찔한 네이드가 계기판을 돌아보았다.
출력 효율 22퍼센트.
0.1퍼센트도 까딱하지 않던 효율이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된다! 올라가고 있어, 시로네!”
“으아아아!”
정신적 고통을 악으로 이겨 낸 시로네가 더욱 강력한 빛을 수정구에 주입했다.
“출력 효율 36퍼센트!”
시로네의 스피릿 존이 무섭게 진동했다.
그의 내구력으로도 무한의 영역에서 밀려드는 막대한 정신력을 감당하기 벅찰 지경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출력 효율 59퍼센트.
냉정한 이루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시로네! 조금만 더!”
계기 장치의 바늘이 흔들리는 모습이 현재 시로네의 정신을 대변하는 듯했다.
‘집중을 유지하기 어려워!’
입술을 깨문 시로네는 사방식의 방어형으로 스피릿 존을 변화시켰다. 프레임이 얽히면서 으드득하고 조여지는 환청이 들렸다.
압력을 버티게 되자 섬광의 세기가 기하급수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출력 효율 87퍼센트.
“으으으으으으!”
전신이 덜덜 떨리고 뇌가 흔들렸다.
시로네는 새삼 아르민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인지 깨달았다. 무한의 개념을 정신에 접목시킨다는 것은 열반에 드는 것 이상으로 강력한 힘에 짓눌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으아아아!”
시로네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는 순간 코어의 램프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출력 효율 100퍼센트.
어처구니없는 결과 앞에서 네이드는 전율했다.
광자 출력을 10분간 유지하는 힘으로도 고작 17퍼센트를 가리키던 장치가 지금은 터질 듯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됐어! 이루키, 시작해!”
넋을 잃고 바라보던 이루키는 황급히 원격제어 장치의 버턴을 눌렀다.
광섬유를 타고 올라간 빛이 지상에서 수백 가닥으로 퍼지면서 학교 전체를 거대한 거미줄처럼 감쌌다.
댕. 댕. 댕.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
숙소에서 공부를 하던 마리아는 종소리를 듣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벌써 12시네. 시간 진짜 빨리 간다.”
그러다가 오늘 낮에 있었던 발표회를 떠올리고 기지개를 편 채로 굳었다.
‘영혼의 주파수. 자정.’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아무리 시로네 선배님이라도…… 귀신이라니.’
잊으려고 할수록 더 신경이 쓰였다. 심지어 발표회에서 본 아귀의 모습까지 떠올랐다.
“아이, 참. 뭐야, 괜히 생각나게.”
키워드만 심상에 심으면 나머지는 스스로 상상한다는 것을 시로네는 알았던 것이다.
‘영혼의 주파수가 맞으면 그때부터 귀신이 보인다고? 그럼 오늘부터 나도…….’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애써 주제를 돌리기 위해 마리아는 창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허공을 걸어 다니는 것 같은 누군가를 보았다.
“…….”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고, 이어서 엄청난 속도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어…… 어…….”
마리아의 창문 밖에서 멈춘 것은 얼굴 반쪽이 썩어 있는 오래된 시체였다.
그녀의 턱이 덜덜 떨리는 그때, 한쪽 눈이 없는 시체가 고개를 돌리더니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꺄아아아아아악!”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었으나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똑같은 비명 소리가 복도를 타고 방마다 튀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6)
***
벽에 부딪힌 꽃병이 산산조각 터졌다.
꽃병을 집어 던진 에이미는 반대편 벽에 팔다리를 대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뭐, 뭐야?”
종이 울리는 순간 진짜로 귀신이 나타났다.
이게 네이드가 말한 공명 작용이라는 것일까?
처음에는 환각인 줄 알았지만 창문에 비치는 건 분명한 실체였다.
“그어어어어…….”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에이미는 곧바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갔다.
수많은 여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복도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에이미는 경악했다. 그들의 뒤편으로 수십 마리의 귀신이 턱을 달깍거리며 달려오는 것이었다.
“에이미! 살려 줘! 나 귀신이 보여! 어떡하지?”
창백해진 세리엘의 얼굴을 본 에이미 또한 비로소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귀신을 믿은 적은 없다. 하지만 혼자 공동묘지에 가기는 싫은 게 인간이기도 하다.
“으으…….”
파도처럼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에이미도 건물 밖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산의 초입에 자리한 적막한 수련관에서, 괴상한 괴음이 정적을 깨트렸다.
에텔라는 명상에서 빠져나왔다.
몸을 세우고 돌아서자 흉물스럽고 투명한 형체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문득 귀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세상의 악과 싸우는 구도자의 마음에는 특별한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귀신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에텔라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귀신도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루키의 방정식이 얼마나 상대를 잘 예측하는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귀신이 또다시 위협했다.
“그르르르!”
“그르르르?”
에텔라는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손을 들어 병사의 코를 눌러 보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손은 그대로 관통하여 병사의 뒤통수로 빠져나갔다.
“하아! 하아!”
수증기가 얼어붙은 빙결의 영역 안에서 시이나는 몸을 가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욕실 문을 연 순간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것은 희끄무레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변태, 라는 생각이 든 순간 뒤로 몸을 날린 시이나는 수증기를 얼렸다.
하지만 장막을 친 후에 생각해 보니 이곳은 7층이었고, 얼굴의 형태도 기묘했다.
“…….”
밧줄처럼 길게 늘어진 수증기 틈으로 노려본 결과는 썩은 시체의 얼굴.
“뭐야?”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히 영혼의 주파수였다.
네이드의 말이 사실일까?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없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어어어…….”
아귀가 입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시이나는 본능적으로 창문을 얼렸다.
서리 너머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순간 시이나는 냉정을 되찾았다.
홀로그램이라는 것을 간파한 게 아니다. 자신의 빙결 마법을 이토록 쉽게 무력화시킬 존재는 없다는, 마법사로서의 자부심이었다.
“네까짓 게 감히…….”
욕실에 걸린 가운을 끌어당긴 그녀가 몸을 가리며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병사는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기괴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바깥으로 나가 건물을 살펴보니 흐릿하게 빛을 쏘고 있는 반구형의 장치가 보였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가운을 벗었다.
“후우.”
몸에 남아 있는 물기가 쩍 소리를 내며 얼어붙더니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얼음 결정이 사방으로 퍼졌다. 어느새 그녀의 몸에는 물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들이 진짜……!”
시이나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
자정을 기점으로 알페아스 마법학교는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어두컴컴했던 창문들이 연달아 불을 켜고, 문밖으로는 학생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어디나 같은 상황이었다.
인간의 반응을 예측하여 설계한 프로그램은 수십 가지의 패턴으로 대응 확률을 높였고, 혼이 나간 학생들은 속았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무작정 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사람 살려!”
“귀신이다! 귀신이 나타났다!”
소수의 의심은 군중심리에 파묻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행동을 전부 예측하기란 어려운 일일 테지만, 이루키가 원하는 건 세부적인 반응이 아닌 군중 전체를 유도하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홀로그램은 마구잡이로 사람을 뒤쫓는 듯 보였지만 높은 곳에서 지켜보면 군중을 한 장소로 집결시키는 데 동선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400명에 달하는, 전교생의 거의 대부분이 불 꺼진 중앙 건물 앞으로 모였다.
사람과 건물 사이에 갇힌 학생들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급반 아이들은 울며 엄마를 찾고, 고급반 학생들은 싸울 태세를 취했다.
“온다! 어떻게 좀 해 봐!”
“으아아아! 덤벼! 덤벼 보라고, 이 자식들아!”
그아아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시체의 군대가 칼을 쳐들고 돌진하자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는 학생도, 싸우려는 학생도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으……!”
턱이 덜덜 떨리는 그때, 병사의 몸에서 빛이 번지더니 수백 개의 선이 되어 하늘로 솟구쳤다.
“뭐, 뭐야?”
혹시 성불인가?
어린아이들이 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뒤편의 중앙 건물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 짝. 짝.
400명이 동시에 옥상을 올려다보자 네이드를 중심으로 시로네와 이루키가 서 있었다.
“발표회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학생들이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교사진이 도착했다.
저급반, 고급반, 졸업반을 각기 담당하는 교직원 전체가 모인 상황이었다.
시이나가 씩씩거리며 인파를 가르고 나아갔다.
“너희들! 당장 내려오지 못해! 이게 무슨 짓이야? 학교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잖아!”
네이드가 윙크를 하며 말했다.
“아, 시이나 선생님. 좋은 밤이네요.”
“좋은 밤은 무슨! 빨리 안 내려와? 내가 올라가면 죽일지도 모르니까 빨리 내려와!”
“그래도 일단은 발표회잖아요. 끝은 내고 가겠습니다.”
발표회? 이런 오밤중에 무슨 발표회?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쟤들 짓이었어? 그럼 전부 가짜라는 거잖아!”
“속았다! 젠장!”
아직 얼떨떨한 자들이 많았지만, 사태를 파악한 학생들은 시로네 일행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 사기꾼 자식들아! 클래스 파이브 주제에 감히 우리를 속여? 이건 발표회도 뭣도 아니야!”
“저런 놈들은 수행평가 빵점을 줘야 돼. 너희들은 이제 끝났어.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다고 이런 사기를 쳐?”
쇄도하는 비난 속에서도 시로네 일행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욕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자 네이드가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