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57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그녀가 절망에 잠긴 표정으로 천천히 검을 쳐들었다.
‘죽어야 해. 이용당할 수는 없어.’
태어날 때부터 세례를 받아 크리아의 믿음을 지키며 단련했던 세월이 스쳤다.
“악을 멸하소서!”
눈을 질끈 감고 소리친 그녀가 목을 쳐들고 검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
“큭!”
갑자기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면서 칼날이 목덜미 앞에 우뚝 멈추었다.
“포기하지 말아요.”
눈을 뜨자 시로네가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붙잡은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무슨 힘이…….’
무력이라면 여느 기사 못지않다고 자부하거늘, 팔이 1센티미터도 당겨지지 않았다.
시로네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빛의 연기가 칼날을 휘감고 있기 때문이리라.
“놔라! 악의 졸개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
“할 수 있어요.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말아요!”
‘멍청하긴.’
그 한계를 넘지 못하니까 무의식에 있는 순교 코드가 발동되는 것이 아닌가?
“흐으으으!”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검을 끌어들이자 팔이 조금씩 굽혀지기 시작했다.
상급 성기사다운 의지에, 시로네가 매섭게 눈을 뜨며 반대쪽 손을 치켜들었다.
‘할 수 없지.’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몸을 날린 시로네가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때렸다.
텅 하는 울림과 함께 그녀의 정신에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빛의 해일이 밀려들었다.
“허억!”
동시에 그녀의 뒤통수에서 잉크처럼 검은 방울들이 쭉 하고 빠져나왔다.
‘아, 아아.’
악이 사라진 마음속에 감동이 가득 차오르자, 그녀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인간의 마음이란…….’
흘러내리는 눈물조차 빛으로 이루어진 듯했다.
‘이다지도 무한한 것인가?’
투쟁의 시대(1)
“키이이이이!”
오직 세이나만 들을 수 있던 환청을 이제는 모두가 듣고 있었다.
세이나의 마음에서 강제로 밀어낸 검은 방울들이 사악한 형태로 뭉쳐 허공을 맴돌았다.
“저, 저게 뭐야?”
가히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고, 세이나의 부하들은 저런 것을 생전 본 적이 없었다.
“악, 악이라고?”
그들이 유독 공포를 느낀 이유는 하늘의 물체가 인간, 생육신의 감정이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내면 깊은 곳에 가지고 있는 것.
‘두렵지 않아.’
오직 세이나만이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악의 형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하고 상관없는 존재 같다. 저것이 나를 해칠 수 있으리란 의심조차 들지 않아.’
마음에 없기 때문에 공포도 없다.
물론 살아가면서 다시 의심은 싹트겠지만, 그녀에게는 경이로운 현상이었다.
편견의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휘말리더니 결국 혼돈의 개념으로 흩어졌다.
‘시대의 야훼.’
세이나는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미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인정할 수 없어!’
시로네를 인정하는 것은 유일신 크리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나약했을 뿐이야! 모든 인간은 신의 아래에 있다.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는 거야.’
그녀가 쏘아붙였다.
“이것으로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의 교리는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경건하고 성스러우니까.”
라미교와 필요 이상으로 얽히고 싶지 않은 시로네는 이 정도가 좋다고 생각했다.
“부하들에게 자결을 멈추라고 지시해요. 의미 없는 희생은 막아야 하니까.”
“자결이 아니고 순교다. 그리고 이건 어쩔 수 없어.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악에 굴복하지 않는 법을 배워 왔다.”
“그렇다면…….”
시로네가 성기사들에게 걸음을 옮기자 편견의 5시가 더욱 소리를 높였다.
“야훼를 죽여라! 야훼는 너희들의 가족을 죽이고,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을 것이야. 저 야훼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절대 악이다.”
세이나의 마음에 다시 의심이 차올랐으나, 아직은 세례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성기사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신이시여! 당신에게 이 몸을 바칩니다!”
“죽을 필요 없어요.”
대열의 중심에 도착한 시로네가 말했다.
“저 여자의 말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저를 공격해도 상관없어요.”
“시로네! 무슨 짓이야!”
네이드가 소리쳤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방법밖에 없어.’
세이나의 마음에 있는 악을 몰아냈을 때, 시로네는 11감으로 느꼈다.
사탄에 준할 정도의 악.
‘그 에덴조차 공포를 느낀 감정이다. 적어도 세이나 수준의 신앙심이 필요해.’
“이야아아아!”
편견이 사실로 확인되자 성기사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고 덤볐다.
“어리석기는! 당장 멈……!”
부하들에게 달려가던 세이나가 눈을 크게 뜨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신성력이 깃든 칼날이 휘둘릴 때마다 시로네의 상체가 여러 개로 잔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악한 악마여! 죽어라!”
마족과의 전투로 단련된 성기사의 무위는 세계 수준과 비교해도 낮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검을 베어도 그곳에 시로네의 목은 있지 않았다.
이루키가 중얼거렸다.
“양자 중첩. 저건 위험한데.”
확률의 문제이기 때문.
어떤 공격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재수 없으면 어린아이 칼질에도 당할 터였다.
네이드가 말했다.
“설마……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건가?”
“아니, 움직일 필요가 없는 거지. 주사위 던지기가 결과의 전부라면 행동은 의미가 없으니까.”
아주 높은 확률로 공격을 피하거나, 아주 낮은 확률로 칼에 맞을 뿐이었다.
“어쨌든 시로네가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해결하자. 편견의 5시를 공격해.”
그때 세이나가 다가왔다.
“잠깐 기다려! 섣불리 나섰다가 또다시 악의 유혹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넘어가지 않아.”
네이드가 전방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여자가 어떤 말로 모함해도 나는 시로네를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 장담하지?”
히든 코드를 몸소 체험한 세이나는 마음의 작용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다.
“이미 있거든, 시로네를 죽이려고 한 적이.”
“…….”
“시로네가 그랬지, 발버둥치지 않으면 내가 가라앉아 버린다고. 난 그때 처음으로 나를 위한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꺼낸 이야기였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됐어. 내 꿈을 이루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지. 그러니까…….”
네이드의 몸에서 푸른 전기가 피어올랐다.
“시로네는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 절대로 원망하지 않을 거야.”
크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뭉친 전기가 뇌신전생이 되어 편견의 5시를 향해 쇄도했다.
그녀가 두 팔을 벌렸다.
“후후, 얼마든지.”
뇌신전생이 거칠게 공격을 퍼부었으나 전하의 움직임이 그녀를 비켜 나갔다.
‘히든 코드.’
직감했으나, 대처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나서야겠군.”
이루키가 편견의 5시를 향해 걸어가자 세이나가 뒤를 따르며 물었다.
“어떡하려고? 저건 악의 기만술이야.”
시옥은 모르지만 악의 성향에 대해서는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흥미가 생기는 거야. 현실의 논리에 어긋난 논리. 그렇다면…….”
이루키의 눈에 불이 켜지면서 아토믹 봄이 꼬리를 물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학습하면 되지.”
퍼퍼퍼퍼퍼펑!
연쇄 폭발의 궤적이 편견의 5시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 지나갔다.
‘진짜 황당하네.’
미소를 지은 이루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 사고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길게 입을 찢은 그가 정신을 집중하자 눈에서 전기가 튀기 시작했다.
‘오버 드라이브.’
성능은 엑스마키나와 동급.
뇌에 있는 신경들이 스파크를 터트리며 히든 코드의 논리를 분석했다.
‘하나의 차원에 갇힌 논리가 아니야.’
다차원 방정식.
또한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꿈을 구성하는 초월적인 논리 체계였다.
“크으으으!”
현실에 있는 수학을 전부 붕괴시키고 새로운 수학을 만드는 것과 같은 난이도였다.
‘아니, 그것과도 달라.’
고정불변의 진리 같은 건 다차원에 없다.
‘조금만 더…….’
이루키는 무한에 가까운 문이 설치된 거대한 미로를 빛의속도로 탐험했다.
‘여기서 이 문을 열고…….’
붉은 문이 열리자 대뇌 네트워크의 특정 부분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이쪽으로 돌아서 이 문을 열고.’
뇌가 불에 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이루키는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아하.’
억울한 감정은 사치일 뿐.
‘또 해 보지 뭐.’
그렇게 수천 번을 회전시키자 혼돈에 대한 이미지가 어렴풋이 그려졌다.
‘문이 있다는 것은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논리라고 한다. 하지만 다차원 방정식은…….’
일단 문을 열면 돌아가는 문이 사라져 버린다.
‘혼돈이구나.’
어느새 세이나까지 참전해 싸우고 있지만 이루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흐흐흐. 흐흐흐.”
눈, 코, 입에서 피가 질질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이루키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다, 이거.”
한편 시로네는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했다.
‘슬슬 위험한데.’
양자 중첩으로 공격을 피한 횟수가 4만 회를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루키는 아직 멀었나?’
굳이 의견을 교환하지 않아도 세 사람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알고 있다.
‘히든 코드를 파훼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루키라면, 한순간의 혼돈을 논리의 영역으로 전환할 수 있을 터였다.
‘단 한순간.’
“허억!”
그때 성기사의 눈에 성안이 발동되더니 전염되듯 모든 자들의 눈에 불이 켜졌다.
“나가! 내 안에서 나가!”
나태의 4시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야! 나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아! 오, 신이시여. 죄송합니다. 저는…….”
그들의 팔이 조금씩 올라가고, 날카로운 칼날이 목젖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래서 유독 눈에 띄었다.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사악한 눈빛으로 이루키를 노려보는 성기사는.
‘유혹에 굴복했어.’
성안이 꺼진 그가 송곳니를 드러내더니 땅을 박차고 시로네를 지나쳤다.
“이루키!”
“크르르르! 크르르르!”
끓는 소리를 내는 성기사의 귓가에 나태의 4시의 환청이 들렸다.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해. 나를 도와라. 그럼 세이나가 너를 선택하게 해 주마.
성기사라고 어찌 사랑을 모르겠는가.
“세, 세이나.”
하지만 악마는 인간의 작은 소망을 파고들어 거대한 욕망으로 증폭시킨다.
성기사가 이루키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내가 최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