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72
시로네가 한 걸음 다가오자.
“허억!”
베나하르는 자신도 모르게 턱을 벌리며 폐의 공기를 전부 토해 냈다.
‘기술이 아니라고? 이게 정말로 인간의…….’
순수한 정신이란 말인가?
“……라. 잘 들어.”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베나하르는 잠시 의식이 끊어졌음을 깨달았다.
얼마나 오래였는지는 어느새 앞에 다가와 있는 시로네의 위치가 말해 주고 있었다.
‘왜 이렇게 키가 크지?’
감각이 돌아오면서 자신이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무렵.
“장관을 만나러 가겠다. 생각이 바뀌었으니까, 똑똑히 전해.”
“네, 네…….”
“내가 물어보는 질문에 장관은 확실한 대답을 준비해야 할 거야. 만약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아라크네는 절대로 원하는 걸 이룰 수 없을 거다.”
“네, 네.”
시로네가 스피릿 존을 해제하자 쇼크에 마비되어 있던 장기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 아아…….”
땅을 짚은 채로 경련하던 베나하르의 발밑으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물밑 작업(3)
시로네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솔직히 섬뜩한 기운이었고, 거기에 담겨 있는 파괴력도 상상을 초월했을 터였다.
‘배가 가라앉을 뻔했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제압해서 다행이지, 탑승객들의 목숨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다.
시로네가 평소와 다른 살기를 드러낸 데에는 이에 대한 분노도 깔려 있었다.
‘외교 장관 케언즈.’
오메가를 통해 대충은 알고 있지만 케언즈의 나이는 상당히 젊은 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케언즈의 기록은 열두 살까지. 물론 그때도 보통내기는 아니었지만.’
그 이후 22년을 살면서 어떻게 진화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시로네는 눈을 마사지했다.
“피곤해.”
정치에 깊이 관여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란기였다.
‘물건이라고 했지. 사람을 두고 말이야.’
세계 미인 대회가 치러질 때에도 그녀는 고위 관료를 접대했으니 그것 자체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마지막에 그녀가 보여 준 미소는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진심이었다.
‘마음을 던진다.’
정치에 관여할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라크네 범선.
“죄송합니다.”
궁궐처럼 꾸며 놓은 거대한 방에서 케언즈는 무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나?”
살가운 미소를 짓고 있는 무희들 사이에서 케언즈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베나하르가 재차 고개를 숙였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실제로 만난 시로네의 무위는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싸워 보지도 않았다며?”
반은 맞는 얘기였다.
“…….”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다면 좋은 싸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 와 의미는 없을 터.
‘마음이 꺾였다. 그자의 정신은…… 인간의 것이 아니야.’
얼마나 많은 사선, 인간의 한평생을 전쟁으로 압축시킨다고 해도 불가능한 정도의 정신 강도.
실력의 고하를 떠나, 시로네와 ‘전투’할 수 있는 자들은 정신적으로 얼마나 단련된 것인가.
‘단련? 아니, 미친 거지. 광기의 영역에서만 시로네와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됐어.”
케언즈는 망한 패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자네는 그만 돌아가. 그리고 란기 오라고 해.”
“그게…….”
몇 가지 사실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한 베나하르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이 좀 꼬였습니다.”
한쪽 눈썹을 들고 베나하르를 쳐다보던 케언즈가 의미 없는 냉소를 지었다.
그날 저녁.
시로네는 포이네에게 일을 맡기고 홀로 아라크네의 범선으로 향했다.
하늘을 날아 700미터 거리를 훌쩍 뛰어넘자 연회가 펼쳐지는 갑판이 보였다.
다들 실무진이었고 다른 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진미들의 성찬이 이어졌다.
무풍지대의 아늑한 달빛을 받으며 술을 마시는 사람들 사이로 시로네가 착지했다.
“후우.”
그들은 마법에 놀라지 않았다.
다만 상호조약을 깨고 하늘을 통해 배에 침입한 사실에 불쾌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뭐야, 너는? 지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훈장을 차고 있는 남자가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호위 마법사가 말렸다.
“차관님, 저자가 시로네입니다.”
“오대성?”
능력은 케언즈에 훨씬 못 미치지만, 차관에게는 연륜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흠흠, 상아탑의 별을 뵙습니다.”
정치인에게는 눈엣가시라도, 상아탑과 척을 져서 좋을 일이 없었다.
적어도 성전이 열리기 전까지는.
“케언즈를 만나러 왔어요. 지금 어디 있죠?”
‘어린놈이 장관 이름을 막 불러?’
사소한 도발에 넘어갈 그가 아니었으나 공적인 일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셨으니 내실에 계실 겁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안내해 주지 않을 거면 비키시죠.”
“후우.”
좋게 마신 와인이 확 올라오자 차관은 숨을 길게 내쉬며 취기를 뱉었다.
“뭐, 좋습니다. 상아탑의 별께서 하시는 일에 토를 달면 안 되겠죠. 하지만 제가 듣기로, 해상 교류는 시로네 님께서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아라크네는 기꺼이 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연회는 누가 지시한 거죠?”
차관이 미간을 구겼다.
“전수조사 건에 대해서는 합의가 끝났습니다. 자국의 식량을 자국이 소모하는데 불만이 있으십니까?”
“그걸 굳이 갑판에서?”
차관이 술잔을 들더니 밤하늘을 돌아보았다.
“뭐…… 날씨도 좋고, 달도 밝으니까요.”
시로네의 눈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그가 자세를 바로 고치며 말을 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다. 다른 배는 풍족하게 먹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저희도 국가 중대사를 띠고 출진하는 정예입니다. 나름의 루틴이 있고, 추구하는 바도 뚜렷합니다. 이런 식의 감성적인 접근은 별께서 협정을 어긴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 못합니다.”
외교부 차관답게 심리전은 물론 언변도 강했다.
“협정이라.”
오늘 낮에 베나하르가 했던 짓을 생각하면 시로네는 기가 찰 따름이었다.
“좋아요. 협정을 어긴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아니, 뭐.”
차관은 애써 웃음을 참았으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 사소한 문제야, 안 그렇습니까? 상아탑과 아라크네의 관계가 그리…….”
시로네의 눈빛을 본 순간 차관은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럼 이제 장관에게 얼마나 협정을 잘 지키고 있는지 듣도록 하죠. 심각한 일이야 있겠어요? 하지만 만약 신뢰를 심하게 깨트리는 부분이 있다면…….”
귀족들은 눈조차 깜박이지 못했다.
“내일 아침에도 이 배가 바다에 떠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 시로네가 돌아서자, 차관이 망치에 얻어맞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니, 잠시만. 별님, 아니 시로네 님.”
“연회 즐기세요.”
시로네가 고개를 돌리며 사람들을 훑었다.
“1명도 빠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세요. 다시 돌아왔을 때 번거롭지 않도록.”
베나하르가 내실로 가는 문을 열고 나왔다.
“무슨 일이지?”
시로네를 발견한 순간 낮에 있던 일이 떠오르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 시로네 님.”
“아까 예고한 대로 장관을 만나러 왔어요. 지금 내실에 있다고 하던데요.”
베나하르는 시로네의 너머에 있는 차관을 보았다.
‘안 돼! 안 돼!’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차관이 소리를 내지 않은 채 계속 입을 놀렸다.
‘장관한테 가면 안 돼. 설사든 지병이든, 무슨 핑계라도 대서 돌리란 말이야!’
대충 뜻은 이해했으나 베나하르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오시죠. 안내하겠습니다.”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차관이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결국 눈은 마주치지 못했다.
문이 닫히고, 남아 있는 귀족들은 남국의 따듯한 기온에서 한기를 느꼈다.
“……이런 젠장.”
“낮의 일은 용서하십시오. 제가 사람을 몰라뵙고 설치고 말았습니다.”
베나하르는 자신의 실수가 케언즈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못을 박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1명의 마법사로서 시로네에 대한 존경도 담겨 있었다.
“자칫 사람이 다칠 수도 있었어요. 저에게 불만이 있다면 다음에는 따로 불렀으면 하네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문을 열자 고급 식당의 테이블에 케언즈와 란기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란기?”
시로네가 되물었으나 베나하르는 고개를 숙이며 문고리를 잡을 뿐이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로네가 다가가자 케언즈가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십시오. 상아탑의 별을 뵙습니다. 소문으로 듣던 대로 상당한 미남…….”
“란기, 어떻게 된 거야?”
케언즈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지만, 란기를 부른 것은 분명 호의가 아닐 터였다.
“하하! 선약이 있다고 하셔서요. 사실 란기하고는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같이 자리를 하면 어떨까 해서 제가 불렀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시로네…….”
란기의 자태는 평소보다 아름다웠으나 마음의 창은 이미 닫힌 상태였다.
“일단 얘기를 들어 보죠.”
케언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직원들이 음식을 날랐다.
“바깥에서는 연회가 한창이고…….”
“죄송합니다!”
케언즈가 테이블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자 직원들이 화들짝 동작을 멈췄다.
“전부 제 불찰입니다. 낮의 일도, 연회도, 협정을 어긴 것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보지 않고서도 시로네의 의도를 짐작했다는 것은 확실히 탁월하지만…….
“어떻게 책임질 건데요?”
행동이 없다면 말은 무가치하다.
“식량을 개방하겠습니다. 저희도 얹혀 가는 신세인데 같이 나누어야죠. 전수조사를 받겠습니다. 병력도 있으니 치안대로 쓰셔도 상관없습니다.”
“흐음.”
시로네는 다리를 꼬았다.
“이번 항해에서 아라크네가 노리는 것은?”
“……털어놓겠습니다. 알다시피 디오나스는 해적이 세운 국가입니다. 왕은 무력으로 철권통치를 하고, 국민의 대다수도 해상 약탈로 생계를 꾸려 가고 있죠. 저희는 디오나스를 카르트시아의 정식 국가로 승인하는 대신, 한 가지를 얻고자 합니다.”
“그 한 가지란?”
“고대 문명 마이카의 유물.”
말이 끝나는 순간 시로네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게…….”
태초부터 일어난 원자의 모든 움직임이 담겨 있는 5차원 큐브를 뒤졌을 때.
“뭐야?”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누구도 모르죠. 오래전에 남태평양 어딘가에 존재했던 문명이고, 지금은 바다 밑에 잠겼을 것이라는 설만 돌죠.”
“그런데 디오나스가 알고 있다고?”
평대한다는 건 흥분했다는 증거였기에, 케언즈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카르트시아는 세계에서 변방이니 생소하실 겁니다. 하지만 열도 10왕국은 오래전부터 마이카의 유물을 조사했어요. 그런데…… 세계대전 이후 디오나스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해일의 피해는 없다고 해도, 마족의 피해마저 전무하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니까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메가에 없는 건 존재하지 않아. 따라서 마이카 문명도 속설에 불과한 이야기.’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하지만 그런 속설 정도는 기록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나는 모르고 있지?’
일반인이 알고 있는데 시로네가 모른다는 것은, 오메가에서만 제거되었다는 뜻.
‘말소? 아니, 그건 불가능해. 리셋을 한다고 해도 말소 로그는 남아 있는데.’
논리적인 추론은 아니었다.
‘바깥 세계.’
오메가에 존재하는 모든 카테고리를 제거한 결과 남아 있는 게 하나였을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바깥 세계와 연관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메가를 우회할 수 없어.’
일단 거기까지 생각한 시로네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