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99
00099 [열여섯 번째 역] 둘 아닌 셋 =========================================================================
세베루스의 빌헬른과 대질이 있던 날, 1왕자 레이먼드에게 끌려가 훈계를 받은 리건은 경징계를 받았다.
무슨 일이었느냐, 요즘 한동안 잠잠하여 철이 든 줄 알았다, 이사벨이 세베루스로 가게 된 것을 알고도 그런 짓을 하느냐 따위의 비난의 말을 들었다.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밤 만취해 대부분의 기억을 잊었지만, 지금서 가장 기억나는 것은 ‘잉그리드 양을 어떻게 대했기에, 빌헬른이 그런 식으로 폐하 앞에서 너를 폄하하게 만드느냐.’ 비슷한 추궁까지 당했었다는 것이다.
그로도 모자라 리건은 세베루스로 사절단원들을 배웅하는 자리에까지 지키고 서있어야 했다. 왕명이었다. 정중하게 이사벨의 손등에 입 맞추며 후일을 기약하는 빌헬른의 눈이 제게 닿았을 때, 리건은 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잉그리드와 그의 사이를 죄 망치고서, 유유히 떠나버리는 세베루스인들을 저주했다.
아버지인 국왕도 ‘이번 일로 네게 크게 실망했다.’라며 처음으로 큰 진노를 표했다. 밀로아에도 곧 소식이 닿을 테니 클레아의 새된 고함도 예정되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리건은 뒷정리를 핑계 삼아 밀로아로 내려가는 일정을 미루었다. 클레아를 피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 이유 중 하나다.
리건은 빌헬른의 뒷모습이 잊힐만큼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자존심을 회복하지 못했다. 파블리아 저택으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초라하고 병신같은 모습으로 잉그리드를 마주보고 싶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잉그리드가 혼자 생각을 하고 싶다고 말한 후 쭉 그를 멀리하고 있기도 해서, 더더욱.
잉그리드가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잉그리드를 만나 일을 더 망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헥트르 에이버리, 빌헬른 다잉 투 새드 2세, 그 둘만 해도 리건은 버거웠다. 앞으로 잉그리드에게 다가올 수많은 괜찮은 남자들을 생각하면 그보다 끔찍할 수가 없다. 너무 과분한 여자였다.
한동안 헤젠과 함께 별장의 사무실에 처박혀 있었다. 보름날 잠깐이라도 잉그리드를 잊고 싶어 밤사교회를 찾아갔다가 기분만 상했다.
로만뷔트 밤사교회에는 세베루스의 국왕과 리건 에스펜서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몸싸움을 벌였다는 조롱이 만발해있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리건은 고민 없이 걸음을 돌렸다.
리사에게 쥐어 터지느라 정신이 없던 대니얼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함께 끌고 나왔다. 혼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씨발, 대니얼을 내놓지 못해?’ 소리치며 따라오는 리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리사 제미엔, 적당히 까불어.’ 워낙 기분이 더러웠던 터라. 리사는 ‘뭐, 씨발, 뭐! 뭘 야려, 이 새끼!’하고 소리치면서도 더 따라오지 않았다.
“야, 너 한동안 어떻게 살았어? 오랜만이다?”
“나랑 따로 술이나 해.”
“오, 그러면 여자 부르자.”
“씨발, 그 놈의 여자 타령 그만 하고 입 좀 닥쳐.”
대니얼은 기분이 더러워보이는 성격파탄자 친구에게 덜미가 잡힌 것과, 그의 맷집을 길러주는 데 일조하는 여자 사이에서 대체 어느 쪽이 더 불행한 건가 생각해야 했다. 리건은 살이 훌쩍 빠져 있었다. 안색이 어두워 가뜩이나 날카로운 인상이 더욱 흉흉하다.
그동안 잊고 살았지만 대니얼도 리건의 소식을 들었다. 디어 축제날의 사건은 솔직히 이제 알 만한 니들은 다 알만큼 퍼져 있다. 아직도 잉그리드를 잊지 못한 세베루스의 국왕 이야기라거나 하는 식으로. 대니얼은 벨라 계집애가 제 성질을 못 이겨 난동을 부리는 것을 진정시키느라 그 진풍경을 놓쳐 땅을 치고 아쉬워했던 터였다. 리건이 갈 데 까지 가서 옆나라 귀족도 아닌 옆나라 왕의 죽빵을 날릴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어쨌든 그 후로 리건이 왕궁에 소환되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돌고 어찌저찌 무마가 되었다고까지 들었다. 세베루스의 사절단원들이 별말 없이 떠났다 하니 무마가 되긴 했을 것이다.
그런 커다란 스캔들과 가십과 루머의 주인공이 된 리건이 한동안 안보이다가 이번에 다시 나타났다. 대니얼은 새삼 제 친구가 대단하기는 하구나 생각했다. 저렇게 미친놈처럼 살며 옆나라 왕의 얼굴을 패고도 어떻게 큰 벌 한번 안 받는지. 역시, 아버지를 잘 만나야 인생이 펴나봐. 대니얼은 자신의 도박중독 아버지를 떠올리며 고개만 저었다. 그러다 깨달음에 얼어붙었다. 아니, 잠깐만, 그럼 내 미래의 자식새끼도 날 두고 그런 생각을 할 거 아냐? 역시, 돈 많고 집안 괜찮은 여자를 만나야겠어. 뭔가 좀 빠진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 술기운과 약기운에 그렇게 생각 했다.
두 사람은 엘뷔니 외곽의 시가지 으슥한 술집에 마주 앉았다. 고급의 술집으로 간혹 리건이 밤사교회가 열리지 않는 날 술과 약과 여자가 필요할 때 드나들던 곳이었다. 신혼 초에 자주 왔다갔다 했던 곳이기도 했다. ‘아, 오랜만이네.’ 반가운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대니얼이 예쁜 여자들에게 괜히 추파를 던져대며 건넌 자리에 앉았다.
“난 왜 끌고 왔어?”
“그냥 내 앞에서 술이나 처마시라고.”
리건의 표정이 사나워지기 시작했지만 대니얼은 아랑곳 않고 시가를 물며 지나가던 아가씨에게 야한 농담을 건네거나 슬쩍 손을 뻗어 엉덩이나 가슴을 만지려 해댔다. 속이 너무 허하고,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대니얼을 끌고 나왔는데 저 꼴을 보고 있으려니 구역질이 난다. 후회가 됐다.
“씨발, 리사한테 너 족치라고 했어야 했는데.”
“야, 무서운 소리 마. 리사 걔한테 한 번 맞아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걔 때문에 나 맷집 엄청 세진 거 아냐?”
대니얼 새끼가 돌았는지, 쳐맞는 데에 익숙해져서 맷집이 세졌다 자랑질을 해댄다.
“아직 엉덩이랑 정강이에 멍이 안빠져서 좀 힘들긴 한데, 리사가 조만간 리사네 아버지랑 뵙게 자리만들어준대. 미안하다고.”
“너 그래서 오늘 또 그렇게 쳐맞고 있었냐?”
“맞다보니까 뭐, 견딜만도 하고……. 잠깐 몇 대 맞고 군무대신이랑 안면 트게 되면 그거야말로 이득보는 장사지.”
리건은 태평하기 짝이 없는 대니얼의 중얼거림에 헛웃었다. 저 놈의 생각 없음이 부러울 지경이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렇게 별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하루하루가 생각이라는 것으로 끔찍해졌다. 다른 여자를 볼 때도 그렇지만 약을 할 때면, ‘이걸 끊어야 잉그리드와 아기를 볼 수 있는데.’ 술을 마실 때면 ‘너무 취해서 이성을 못 차리면 어떻게 하지.’ 잉그리드를 생각하면 ‘잉그리드가 아직도 화가 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뭘 그리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는데도 잉그리드가 화가 났다는 건 알겠어서. 매듭 없는 실뭉치를 풀어내려 애쓰는 기분이 들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니얼이 독한 위스키를 대번 털어 넘기며 두서없이 물었다.
“아, 맞아. 벨라가 너 안 찾아갔냐?”
리건은 비딱하게 앉아 다시 잔을 채우다가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날 찾아올 이유가 있어?”
“그 날, 벨라 고 기집애가 나 물어뜯고 울고불고 지랄이 나서 너한테 따지니 뭐하니 난리도 아니었는데. 그 날 후로 안 보여서. 백작한테 혼났다는 얘기도 들리는 거 같고, 뭐. 혹시나 아나 물어봤지.”
“그 날?”
“아, 잉그리드 양이 얘기 안 했어?”
리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벨라의 이야기가 나오다가 잉그리드의 이름이 거론될 이유가 하등 없었다.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진짜 몰라? 벨라 그 년이 사람들이 지천에 깔린 디어 축제에서, 아주 제대로 돌았는지 잉그리드 양한테 별의별소리를 다 지껄였다니까. 내가 그거 막겠다고 끌고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잉그리드 양도 그 날 꽤 화가 나 보이던데. 아, 그 다음에 바로 큰 일 터져서 말을 못했나?”
리건은 멍청하게 대니얼의 말을 되감았다.
저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씨발, 대체 뭐라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벨라가, 잉그리드를 만났다고? 잉그리드가 벨라를 만났다고? 리건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서 나를 모욕해도 괜찮아요. 그래요, 괜찮다고 생각해요.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최소한 당신을 나누는 정부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아. 나, 내가 당신에게 헌신하는 만큼 당신 정부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지 않을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잉그리드가 갑자기 정부니 뭐니 하는 소리를 떠들어댔던 밤.
잉그리드가 처음으로 그의 지난 여자문제를 거론하면서,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 밤이다.
리건은 정부가 없었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잉그리드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댄다 생각해 화를 냈었다.
“첫째날, 둘째날.”
“둘째 날. 너 없을 때.”
“……무슨 말을 했는데.”
“네가 여태까지 했던 말들을 조금 더 계집애 버전으로 쌍스럽게 말했다고 보면 되나.”
뻣뻣하게 굳은 리건의 얼굴을 알면서도 대니얼은 놀리듯 히죽였다. ‘그러게 누가 말 함부로 하고 다니래?’ 핀잔까지 놓으며 낄낄 비웃는다. 리건은 서서히 정수리까지 차오르는 뭉근한 노여움을 느꼈다. 잉그리드가 그에게 정부니 여자니 얘기를 하게 된 것이, 벨라 때문이었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무언가를 놔버리는 것은, 조금도 그의 의지대로가 아니었다.
*
한밤중이었다. 카렌디 백작인 보르미르는 일찍이 잠을 청하기 위해 누워 있었다.
“배, 배, 백작님! 손님이……!”
“뭐냐, 이 시간에.”
“이, 일이 났습니다!”
보르미르는 하인이 헐레벌떡 달려와 아뢰는 말에 크게 놀라 잠옷바람으로 일어서야 했다.
백작저의 우측에 위치한 별채. 현재 카렌디 백작의 서녀인 벨라 랜스터가 그곳에서 하녀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얼마 전 큰 문제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다.
카렌디 백작은 꽤 아끼던 어여쁜 서녀에게 한시적으로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체벌을 가한 후 하녀들과 함께 먹은 값을 하라 별채에 밀어 넣었다. 에스펜서 공작부처에게 머리를 땅에 대고 사죄할 마음이 들 때까지 그리 살아라. 하는 잔인한 명령과 함께였다.
벨라는 아주 고집스럽게 일을 하지 않았고, 하녀장은 카렌디 백작에게 아뢰어 그녀의 체벌을 허용 받았다. 그 바람에 벨라의 종아리와 손, 팔뚝, 등 온 곳이 성한 데 없는 회초리 자국으로 뒤덮였다.
그럼에도 벨라는 죽어도 사과하지 않겠다 버텼다.
그러기를 2주째였다. 독하기로는 남부럽지 않다. 오늘도 울분을 삭이며 버텼다. 좁다란 방안에서 잉그리드를 저주했다. 죽여 버릴 년. 경고라고 하더니 정말로 카렌디 백작에게 그 날 바로 찔렀다. 다른 밤사교회원이 그랬다면 같이 고발할 거리가 있었을 테니 어찌 해보기라도 했을 텐데, 잉그리드는 그럴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쿠당탕탕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날 리가 없는 요란한 소리다. 하인들이 무언가 고함을 치는 소리도 났다. 쾅. 쾅. 문이 열렸다 닫히는 것같은 소리도 났다.
쪽방처럼 좁은 독방은 벽도 얇아서, 소리가 잘 들린다. 씨발, 어디 있어! 소리치는 남자가 있었다.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얇은 이불을 덮고 누워있던 벨라는 벌컥 자신의 방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렸다.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상체만 일으켜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니 이곳엔 있을 리가 없는 남자가 서있었다.
붉은 머리칼의 푸른 눈동자, 훤칠한 키와 늘씬한 자태를 가진 한때 그녀의 남자였다.
“리……”
리건이 어떻게 여기에 있지? 벨라가 제 꼴이 지금 성치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허둥지둥 이불을 당겨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하인들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들어온 리건이 벨라의 멱을 잡아 챘다. 푸른 눈동자에 경멸이 넘실거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