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000
00999 [무도회] =========================
그렇게 하나둘씩 준비를 하다 보니, 마침내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아잣! 기합 넣고!”
마치 운동 경기에 출전하기 전 같은 느낌으로 기합을 넣는 탑와와 루벨라의 모습에 루이스는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모습은 분명히 자신인데,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처음에는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어쩐지 쌍둥이 형제를 보는 것 같다.
“그럼 다녀올게.”
“죄송해요.”
“응? 뭐가?”
“제가 좀 더 제대로 된 추종자였다면, 이럴 때 굳이 이런 모습을 하지 않으셔도 되었을 텐데…”
어린 아이 답지 않은 표정과 말. 아마도 환경에 맞서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겠지. 탑와와 루벨라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렇게 귀여운 추종자가 있으니 이런 모습도 되어 보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는 가만히 루이스를 끌어당겨 품에 안아 주었다. 똑같이 어린 아이 모습이 되어 버린 터라 완전히 품안에 넣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는 변함이 없다.
“그럼,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탑와와 루벨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집을 나섰다. 문가에 서서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이스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는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달이의 상대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묘할지도 모르겠지만 잘 부탁해.”
“별 말씀을.”
여동생의 모습을 하고서도 여동생답지 않은 털털한 느낌의 여신. 룩스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면서도 공손하게 탑와와 루벨라를 맞이했다.
여신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베일과 위성을 꺼내 장착했다. 몸 전체를 감싸는 커튼 같은 느낌의 베일과, 그런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위성이 자리를 잡자 다시 한 번 룩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준비 됐어.”
“그럼, 가시죠.”
앞장 선 룩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이내 공간을 넘어 바츠크렌의 궁성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이던 이들은 탑와와 루벨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얼핏 보기에도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귀족들. 그 귀족들 앞에 도열한 기사들. 탑와와 루벨라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맞이하는 모습 자체가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룩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번 무도회를 위해 특별하게 시공된, 마치 눈이 내린 듯한 새하얀 대리석이 깔려 있고 다시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붉은 색 양탄자가 무도회장인 중앙 홀까지 이어져 있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고개를 숙인 이들의 머리 위에 이름과 작위 같은 기본적인 정보가 떠오른다. 처음엔 긴장했지만 이렇게 둘러보니 어쩐지 거짓된 천국의 유저나 NPC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탑와와 루벨라는 앞장 서서 그녀를 인도하는 룩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넣었다.
[저기…] [네. 말씀하십시오. 여신님.] [지금 이 사람들, 나를 여신이라고 생각하고 이러는 거잖아.] [맞습니다.] [여신이 아니라 루이스라고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급할 것 없습니다. 일단 단상 위에 올라서 자리에 앉은 뒤에라도 늦지 않을 테니까요.] […]베일에 가려진 탓에 제대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이용해서 작은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모처럼 여신이 왕림한 줄 알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있는 귀족이나 왕족들에게는 살짝 분통이 터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걱정 마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여신의 대리자 자격으로 참석한 이에게 해코지를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닐 테니까요.] [만약 한다면.] [사실을 몰랐다고는 해도 실제로는 여신을 능멸했으니 그 죄를 물어 천벌을 내리시면 될 일이지요.] [와아… 사악해.] [참고로 천벌에 필요한 공헌도는 주신께서 넉넉하게 준비해 주셨습니다. 남기는 것도 아까운 일이니, 망설이지 말고 가차 없이 쓰도록 하십시오.] [헐…]실제로는 여신을 능멸한 죄를 물어 천벌을 내리는 것이지만, 저들로서는 영락없이 루이스를 모욕한 죄로 천벌을 받는 셈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루이스가 다시 이 땅을 밟게 된다면, 오늘 내려질 천벌 때문에라도 저들은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쩌면 룩스가 이번 일을 앞장서서 돕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 때문이 아닐까. 여신은 스스로도 모르게 그런 생각마저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메시지를 나누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무도회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모습의 인물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는 것이 보인다. 슬쩍 이름과 작위를 살펴보니, 국왕을 비롯한 왕실 직계의 인원들이다.
[많기도 하다.] [좀 그렇긴 합니다.] [주신께서 거느리신 가족보다도 많은 것 같아.] [하하…]말하는 의미야 모를 리 없지만 바꿔서 생각하면 은근히 형진을 돌려 까는 듯한 말이라 룩스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설마 형진이 지금 상황을 지켜보는 걸 모를 리는 없으니 작심한 발언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아무리 베일로 가렸어도 일단은 가족이니 루이스의 모습을 알아보지 않을까 싶어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늘어서 있는 이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몇몇 이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훔쳐보는 기색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의외로 작은 체구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앞장 선 룩스의 뒤를 따라, 무도회장 한쪽에 우뚝 솟아오른 단상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모두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자 비로소 바깥에 늘어서 있던 이들이 왕실 직계를 선두로 해서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들이 단상 아래 자리를 잡자, 가만히 발치에 시립해 있던 룩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먼저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룩스는 가만히 단상 아래 늘어선 이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본래는 여신께서 직접 이번 무도회에 참석하실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그분을 대신하여 추종자 가운데 한 분이 대신 이곳에 왕림하셨습니다.”
그 말에 자못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
“그럼… 저 분은?”
“룩스 왕자. 그럼 저분은 여신님이 아니라는 말씀이시오?”
누군가의 질문에 룩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여신에게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여기 이분은 여신께서 가장 총애하시는 추종자 가운데 한 분으로서, 과거 이 나라에 속해있던 분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여신은 가만히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베일을 살짝 열어 단상 아래의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여 주었다.
“어?”
“저, 저분은…”
“루이스 왕녀?”
귀족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던 왕족들 역시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룩스 왕자! 그리고 루이스 왕녀! 이게 무슨 짓인가! 감히 왕실의 어른들을 능멸할 셈인가!”
그 중에서도 왕실 직계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성 가운데 하나가 크게 노한 표정으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탑와와 루벨라가 살펴보니, 그녀는 궁주의 직함을 달고 있었다.
가만히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그녀의 상세 정보를 살핀다.
해당 여성은 후궁들 중에서도 제1왕후의 파벌이며, 제1왕후는 방계 왕족 가운데 가장 강성한 세력을 등에 업고 있다. 이를테면 이 후궁은 제1왕후의 행동대장인 셈이다. 슬하에 자녀는 한 명이며 가문도 이미 죽은 룩스와 루이스의 모친에 비해 별 볼 일 없지만 왕후에게 빌붙어 나름 궁 안에서 제법 세력을 구가하고 있는 중이다. 국왕과 밤을 보낸 것은 이미 3년 전의 일이고, 대신 은밀하게 젊은 기사 한 명과 밀회를 나누고 있다. 룩스와 루이스의 모친이 죽음을 맞이한 일의 배후에도 관련되어 있어서 오누이가 신의 추종자가 되었을 때도 뒤에서 갖은 험담을 쏟아낸 바 있다.
원래대로라면 국왕이 뻔히 앞에 있는데 일개 후궁 따위가 이런 식으로 큰 소리를 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그녀가 제1왕후의 행동대장 격이라는 건 왕실의 식구들 뿐만 아니라 이곳에 참석한 귀족들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즉, 그녀의 말 자체가 제1왕후의 말을 대신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큰 차이가 없는 셈이다.
“궁주는 그 입 다물라!”
다짜고짜 천벌을 내릴 수도 없는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문득 룩스의 입에서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청소년의 그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뭐… 뭐라?”
보호와 균형의 추종자가 된 뒤에도 룩스는 왕실의 어른들에게 나름대로 겸손한 태도를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이들은 별로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호통을 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당혹해서 말문을 잃은 궁주를 향해 룩스는 노여움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내 분명히 말했을 터. 이 분은 과거에 이 왕실에 속한 가족 가운데 하나였을지는 모르나, 지금은 여신의 뜻을 받들어 그 의지를 대신하는 역할로 이 자리에 자리하셨다. 그런 분을 함부로 낮추고 능멸하는 것은 곧 여신을 능멸하는 것!”
룩스는 궁주를 향해 벼락같이 손가락을 뻗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감히 여신을 능멸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그, 그건…”
당혹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궁주는 잠시 허둥대다가 제1왕후를 바라보았으나, 그녀는 차갑게 궁주를 외면했다.
탑와와 루벨라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룩스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천벌… 때릴까?]그러자 룩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어째서?] [말을 함부로 하기는 했어도 죽을죄는 아니니까요. 굳이 천벌을 내리지 않아도 저 궁주는 이미 끝장이 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헤에…] [솔직히 말해 천벌이 아깝습니다.]룩스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가운 국왕의 시선이 궁주에게 내리꽂혔고, 그 궁주는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근위기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정확히 어떤 벌이 내릴 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아마도 그녀는 더 이상 왕실의 구성원으로 행세하고 다니기 어려울 것이다. 스스로는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차피 저 궁주의 가치는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굳이 공헌도 아깝게 천벌을 쓸 필요도 없다.
“뭐야? 왜 이래! 무엄하다!”
소란은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끌려 나가는 궁주가 아니라, 그녀의 소생인 왕녀가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기사들의 행동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름 행동대장을 할 정도의 머리는 있었던 궁주와는 달리, 그녀의 소생인 왕녀는 최소한의 분위기 파악을 할 정도의 지능조차 갖추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감히 너희들 따위가… 윽!”
뭐라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기사들은 국왕이 차가운 시선으로 눈짓을 보내자 그녀를 단숨에 기절시킨 뒤 그대로 끌고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던 무도회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 앉아 버렸다. 하기야 사람이 끌려나가는 모습을 보고도 웃고 떠들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없이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국왕이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여신의 대리자께 무례한 모습을 보인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국왕의 눈빛은 별로 사과의 기색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최소한 자식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라는 정도는,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못한 탑와와 루벨라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천벌… 때릴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