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001
01000 [무도회] =========================
상당히 분위기가 싸해지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여신이 올 거라고 철석 같이 믿게끔하여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어 놓고는 바람 맞혀 버린 탓이 절반. 그리고 지금까지 왕실에서 천덕꾸러기로 지내왔던 오누이가 하루아침에 상전이 되어 버린 것에 대한 당혹과 질투, 그리고 분노가 나머지 절반의 이유일 터.
당장 단상 아래 서 있는 국왕부터 시작해서 왕실의 가족들 모두가 호의와는 무관한 감정을 스멀스멀 뿜어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 아래 도열한 귀족들 가운데 반절 정도는 당혹을, 그리고 나머지 반은 흥미진진한 기색을 보이고 있다. 당혹해 하는 이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흥미진진해 하는 이들은 시작부터 물 먹어 버린 왕실 인사들의 모습을 고소해 하고 있는 것이리라.
곧이어 몇몇 방계 왕족들이 귀엣말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탑와와 루벨라가 뭘 속닥거리고 있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자, 그런 그녀의 생각에 반응하듯 위성 가운데 하나가 팽이처럼 빙그르르 돌더니 귀엣말을 나누고 있는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지며 목소리가 전해진다.
“예정대로 진행하는 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긴, 아무리 여신의 대리인 자격이라도 왕실의 어른들이 저 꼬맹이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모양새가 되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죠.”
“맞습니다. 추종자로 선정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국왕이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이대로 계속 이어갈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저들이 보는 앞에서 폐하가 추종자 자격이 없다는 식의 얘기를 듣기라도 하면…”
“그런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겠지요.”
“그럼 어떻게…”
“왕실 인사들은 비공개 석상에서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런 방법이 있겠군요.”
확실히 국왕이 조막만한 여자애, 그것도 지금껏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딸에게 머리를 숙이며 추종자가 되기를 청원하는 것은 별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 아니, 단순히 모양새를 넘어서 그건 이들에게 있어 모욕이나 다름없는 일. 하물며 나라 안의 모든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벌일 일은 아니다.
“흥.”
하지만 탑와와 루벨라는 작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이 추종자니 교단이니 하는 것에 목말라 있어도 저런 자들을 받아들일까 보냐.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다니, 그런 식의 방법에 이쪽이 반드시 응할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 고작해야 작은 여자애일 뿐이니, 어른들이 그러라고 하면 따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생각 같아서는 바로 천벌을 때리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룩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모습에 꾹 눌러 참았다.
대신 속닥거리고 있는 왕실 인사들에게 마킹을 해둔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꼭 손을 봐주고 말테다.
속닥거리던 왕실 인사들의 의사는 곧바로 국왕에게 전해졌고, 예정했던 대로 인사를 드리는 과정을 진행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국왕은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일단 왕족들은 단상 아래에 마련된 자신들의 자리로 물러나고, 그 뒤에서 나란히 도열한 채 대기 중이던 귀족들이 먼저 인사를 드리기 위해 다가왔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신의 대리인이신 루이스 왕녀님. 저는…”
바츠크렌이라는 나라의 실권을 거머쥐고 있는 왕실의 직계와 방계들이 빠진 상태다보니 귀족이라고 해도 작위가 꽤 낮은 편이다. 사실 이들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떻게든 왕실과 연결이 되어 있긴 하겠지만, 중앙에서 밀려나 많은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는 왕실과의 인연을 따지는 것 자체가 뭐한 상태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단 뒤로 물러난 왕족들과는 달리, 귀족들은 사실상 여신을 등에 업고 강력한 실세로 등장한 오누이의 눈에 들기 위해 정중하고도 유려한 말투로 자신과 가족의 소개를 이어갔다. 물론 그래봐야 탑와와 루벨라에게 있어서는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지만.
그래서 여신은 뭐라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인사말은 한 귀로 흘러들으면서 사전에 수집된 정보를 열람하고 있었다.
처음 그들에게 인사를 온 귀족은 바츠크렌의 국경 방위를 담당하는 세 가문 가운데 하나를 맡고 있는 자였다. 그는 달랑 두 명의 자녀만 데리고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 방계의 방계까지 그야말로 집안 식구들을 총출동시킨 다른 가문들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이쪽은 제 장남인 주야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꽤 장래가 유망한 편이죠.”
그의 말대로 주야라는 청년은 생김새도 훤칠하고 국경 방위를 담당하는 가문의 장남답게 신체 역시 꽤 강하게 단련이 되어 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자랑스럽게 소개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나 할까.
제법 그럴 듯한 모습이라 고개를 끄덕였던 여신이었지만, 반사적으로 상세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주야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넘은 청년이었지만, 건드린 여자의 수가 이미 열이 넘어 가고 있었다. 이것만 해도 여신으로서는 기겁할 노릇인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번에 무도회의 참석이 결정되자 그 여자들은 물론이고 그녀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까지 단숨에 정리를 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정리란 것은 단순히 전별금을 주고 이별을 통보했다든가 하는 식의 얘기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존재 자체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는 얘기다.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부터 이 주야라는 남자는 지금 여신이 모습을 빌리고 있는 루이스를 노리고 있었다. 이제 고작 일곱 살 밖에 안 된 꼬마 아이를 말이다. 그 과정에서 지금껏 건드린 여자나 사생아들이 걸리적거리자, 문자 그대로 깨끗하게 정리를 해버린 셈이다.
“이런 미…”
꽤나 그럴 듯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주야의 모습을 지켜보던 여신의 입에서 그와 같은 말이 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꽈릉!
“꽥!”
이곳에 모인 청년들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준수한 모습을 지니고 있던 주야는 느닷없이 어디선가 내리꽂힌 벼락에 맞아 볼썽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철푸덕 쓰러지고 말았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떨떠름한 모습으로 지켜보던 왕족들까지도 갑작스런 사태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마른하늘의 날벼락. 아니,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하늘을 볼 수조차 없는 대연회장이니 그 표현도 맞지 않다.
역시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룩스가 슬그머니 여신을 돌아본다. 그 시선을 받은 탑와와 루벨라는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 아니거든?]본래 탑와와 루벨라는 룩스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반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루이스의 모습을 한 뒤로는 말을 놓고 있었다. 나름 새로운 모습에 맞는 성격과 말투를 스스로 설정한 탓이다.
[그럼 이 천벌은…]이제 와서 여신이 그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는 얘기는,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천벌을 내린 것이라고 봐야한다.
[설마… 주신께서?]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룩스는 여신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 노릇하게 구워져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주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주신께서는… 크흠, 가족이 많으신 편이지만 아이들에 대해서는 매우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아하.]확실히, 난봉꾼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형진이지만 그것만은 탑와와 루벨라도 부정할 수 없는 얘기다. 애초에 지금 자신이 왕성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것도 그런 형진의 의사로 인한 것이니까.
그런 형진에게 있어 루이스라는 먹이감을 노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생아까지 단숨에 정리해 버린 저 비정한 청년의 행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보는 자들이 있어서 지금은 천벌에 그쳤지만 죄상이 드러난 이상 머지않아 주시자든 집행자든 형진의 명을 받은 누군가가 찾아들게 되지 않을까.
“어, 어어…”
자신만만하게 아들을 소개하던 귀족은 갑작스럽게 벼락을 맞고 나뒹군 자식의 모습에 얼이 빠졌다. 그의 상세 정보를 살펴보니, 이 자리에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자신들끼리 예선전을 치른 탓이었다. 그 과정에서 촉망 받던 방계 출신의 기사 하나가 죽고, 가문 안에서 예법을 가르치던 이의 가문이 몰살당한 것으로 나오는 걸로 봐서는 저 가문에서는 그런 식의 행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런 식이니 자신의 사생아를 모조리 정리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한 자식을 자랑스럽게 이 자리에 세울 수 있는 것이겠지만.
사실 저들로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극한 환경에서 가문은 물론이고 국가 방위의 첨병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니 그 정도의 잔혹한 생존 경쟁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문 고유의 특성이니 존중해 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곳은 탑와와 루벨라라는 여신의 추종자를 뽑기 위한 자리. 자신들의 가법이 중요하더라도 그것을 여신 앞에서 자랑스럽게 내보여서는 안 되었다. 물론 저들로서는 설마 그런 내밀한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지는 못할 거라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저 더러운 자를 눈앞에서 치워라.”
차가운 룩스의 말이 이어지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근위병 가운데 일부가 국왕을 바라보았다. 가능한 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자 하면서도 긴장과 두려움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국왕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근위병들은 쓰러져 있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그렇지 않아도 앞서 왕실의 모습 때문에 싸늘해져 있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아 버렸다. 은은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던 악단들마저도 놀란 탓에 넓은 연회장 안에서는 작은 기침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을 정도다.
청년이 근위병들에게 들려 나가자, 단상 아래 도열해 있던 귀족들 가운데 일부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 보인다. 탑와와 루벨라가 그런 기색을 눈치 채고 시선을 돌리자 갑자기 마킹 표시가 후두둑 눈앞에 나타나는가 싶더니, 연쇄적으로 벼락이 연회장 안을 휩쓸기 시작한다.
꽈과과과광!
“꺄아악!”
“으악!”
벼락을 맞은 이들은 사실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었다. 비명을 지른 이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벗어나려다가 벼락을 맞고 쓰러진 자들 옆에 서있던 이들이었다. 하기야 바로 코앞에서 시야를 하얗게 물들이는 백열광과 함께 벼락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으아아앙!”
놀란 아이 하나가 울음을 터트리자 연쇄적으로 연회장 안은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뒤덮이고 말았다. 갑자기 벼락이 쏟아져 내린 이유야 바로 짐작이 되었지만, 그렇게 삽시간에 놀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자 탑와와 루벨라는 난처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저기.] [네. 여신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닌데, 그래도 좀 상황을 봐가면서 천벌을 내리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전해주겠어?]천벌을 내리라고 그것에 필요한 공헌도까지 준비를 해놓고, 자신은 손 쓸 틈도 없이 이렇게 미친 듯이 천벌을 쏟아내면 어쩌라는 얘긴가. 이럴 거면 무도회니 뭐니 해서 자기를 내세우지나 말던가.
살짝 화가 난 목소리로 탑와와 루벨라가 그렇게 말하자, 룩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도록 하죠.]여신의 말이 전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시금 새로운 천벌이 떨어져 내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번 터져버린 아이들의 울음보는 쉽게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른도 그런 모습을 보면 기겁을 하며 오줌을 지릴 판인데, 하물며 아이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
[그건 그렇다 쳐도. 어쩔 거야, 이 분위기.] [하하…]힐난하는 여신의 말을 들은 것일까. 문득 그녀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위성 가운데 두 개가 연회장 중앙으로 날아가는가 싶더니, 홀로그램 같은 것을 사방에 뿌리기 시작했다.
“어?”
“이건…”
날아간 두 개의 위성을 중심으로, 주위에 숨겨져 있던 위성들이 모여들더니 주위의 모습을 순식간에 바꾸어 버린다. 화려하게 치장된 연회장의 모습이 순식간에 꽃과 나비, 그리고 귀여운 동물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언덕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놀래서 엉엉 울던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바뀌어 버린 모습과 더불어 자신들에게 다가와 고개를 내미는 동물들과 요정처럼 날아다니는 나비들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들이 갑작스러운 환상에 현혹되어 잠시 울음을 멈춘 사이, 퍼뜩 정신을 차린 근위병들은 급히 움직여 천벌을 받고 널브러진 자들을 끌어냈다. 처음 벼락을 맞은 주야라는 이름의 청년 때는 그들도 놀라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자 어느 새인가 적응을 해버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