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003
01002 [출항] =========================
“으응…”
희망과 생명은 작은 진동음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스한 눈으로 고개를 들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어났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의 남편. 역시나 그녀를 깨운 진동음 때문에 깨어난 모양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헐벗은 그녀와 그녀의 아바타를 어루만지고 있다.
“흐응…”
자신도 모르게 콧소리를 내고 만다. 격렬했던 어젯밤의 여운이 아직까지 신체에 남아 있었던 탓이다. 그래놓고도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운이 넘치는 그의 몸을 보니, 어쩐지 조금 질릴 정도다.
그대로 한 번 더 이어지려는 걸까. 뭐… 그것도 나쁘진 않다.
“알람인 것 같은데. 확인하지 않아도 돼?”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은 채로 그가 말을 건넨다. 희망과 생명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도 반사적으로 침대 옆에 놓여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쨌든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진동음은 멈춰야겠다는 생각에서.
“선발대 출항식…”
“아… 그거 오늘이었나?”
“응. 아마도.”
여기서 선발대라는 건 다름 아닌 화성 개척단의 선발대를 의미한다. 형진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었단 달의 개척과는 달리, 인류의 손에 의한 행성 개척이 오늘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화성의 테라포밍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왔다. 아폴로 계획에 의한 달 착륙처럼, 단지 성공이 목적이었다면 벌써부터 시도되었을지도 모르는 수준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고작해야 탐사선을 몇 번 보내는 수준에 머무른 것은, 행성 개척을 위해 소모되는 비용이 그것을 성공시켰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적다는 판단 때문이다. 로켓 하나 쏘아 올리는 데만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판이니 어지간한 나라는 시도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고 최강의 수퍼 파워라 불리는 미국도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그런데 돈을 쏟아 부을 정도로 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미라지 코어의 등장으로 인해 전부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가장 부담스러운 운송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어 더 이상 수익과 비용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자 세계 각국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우주 개발에 뛰어들게 되었다.
침체 국면에 접어들어 문을 닫는 곳이 속출하던 조선소들은 경쟁적으로 우주 사양의 화물선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사용 중이던 화물선들 역시 우주 사양으로 개조되었다. 우주선만이 아니다. 건설 장비를 비롯해서 행성 개척에 필요한 장비와 물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미 달이라는 훌륭한 성공 사례가 존재하는 이상, 이것은 실패할 수 없는 사업이다. 국채가 발행되고 숨어있던 자본들이 모조리 끌어올려져 산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각국의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실업률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서부 시대의 개척민을 꿈꾸고 있었다.
“우… 가기 귀찮아.”
희망과 생명은 투정을 부리듯 형진의 가슴에 매달리며 그렇게 말했다. 모처럼 그를 독점하게 되었으니 그냥 이대로 뒹굴거리며 하루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럼 가지 말까?”
그녀의 말에 형진이 씩 웃으며 그렇게 속삭였지만 희망과 생명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안 돼. 중요한 날인 거 알잖아.”
그러자 형진은 공연히 놀란 척 하면서 그 말을 받았다.
“오오. 우리 여신님께서도 이제 책임감이란 것이 생기신 모양이군.”
물론 그러면서도 손은 드러난 그녀의 가슴으로 향한다. 희망과 생명은 뻗어 오는 그의 손을 찰싹 쳐내면서 눈을 흘겼다.
“놀리면 놔두고 갈 거야.”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킥.”
그들은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물론 한창 애정이 충만한 남녀가 함께 욕실로 들어가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결국 한 차례 사랑을 나누고 나서야 그들은 욕실을 나와 옷을 챙겨 입었다.
헐리웃의 여신다운 모습을 순식간에 갖춰가는 희망과 생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리페까지 비서의 옷차림을 갖추자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리페도 같이 가는 거야?”
“물론. 비서 한 사람 정도는 따라가야 하지 않겠어?”
“그거야 그렇지만.”
처음에는 본신과 아바타로 동시에 그에게 안긴다는 것에 대해 기겁을 했던 희망과 생명이지만, 보호와 균형에 이어 공포와 죽음마저도 그러한 행위를 받아들이자 그녀 역시 뒤를 따랐다. 사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좀 있었지만 애초에 형진이 변태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의 다른 아내와 잠자리에 같이 드는 것보다는 아바타를 끼워 넣는 편이 나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화성은 믹타라고 칭해지는 국가협의체가 개발을 주도하는 곳이다. 믹타는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의 다섯 나라인데, 여기에 인근의 국가들이 참여하여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형식이다. 이 나라들은 G7이나 브릭스에 비하면 존재감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각각의 지역에서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쪽이다.
“출발은 호주의 퍼스로군.”
퍼스는 서호주의 중심지이다. 믹타에 속한 다른 나라들의 중간쯤에 위치한데다, 도시 주변에 넓은 사막 지대가 펼쳐져 있어서 화성에 세울 건축물들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기 용이하다는 점 때문에 이번 화성 개척의 중심지로 선택되었다.
“곧장 갈 거야?”
희망과 생명이 넥타이를 매주는 것을 지켜보며 그렇게 묻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글쎄. 모처럼인데 태평양 횡단이나 한 번 해볼까?”
그녀는 지구에서 헐리웃의 여신으로 군림할 때부터 비행기라는 탈 것에 상당히 심취해 있었다. 오죽하면 집 앞에 활주로까지 놓았겠는가. 물론 지금에 와서는 부양자동차라는 새로운 탈 것에 빠져 들어서 비행기는 창고에 처박혀 있는 중이긴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어?”
“그런가.”
일전에 부양자동차로 미주 대륙을 횡단한 전례가 있긴 하지만, 태평양은 그것보다도 훨씬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하려고 하면 못할 것은 없겠으나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할 수 없지. 그럼 재단 사무실로 직접 가는 수밖에. 다 됐어.”
“고마워.”
서툰 솜씨긴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내 넥타이를 매는 일을 마치고 뿌듯해 하는 표정이 귀엽다. 형진은 감사의 의미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진한 키스를 해주었다.
“키스는 고맙지만, 이 손은 뭔가요. 변태씨.”
어느 틈엔가 그의 손이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다.
“본능이라고 생각해 줘.”
어젯밤에 그렇게 만져댔으면서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 한 편으로는 어쩐지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는 자신이 있다.
“옷 구겨지니까 그만 둬 주시겠어요?”
시치미를 뚝 떼고 희망과 생명이 그렇게 말하자 형진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아쉽지만 할 수 없지.”
그렇게 장난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곧바로 공간을 넘어 퍼스에 위치한 희망과 생명 재단 사무실로 옮겨갔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기 중이던 그녀의 추종자들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맞이한다. 본래대로라면 이런 식으로 공간을 넘어 등장하는 모습에 기겁을 해야 맞겠지만, 희망과 생명 재단의 핵심 구성원 대부분은 이미 여신의 추종자들이다보니 긴장하는 기색은 보여도 놀라거나 하지는 않는다.
“늦어서 미안해요. 그럼 바로 갈까요.”
“모시겠습니다.”
재단 측에서 준비한 탈 것은 일종의 리무진이었다. 하지만 기존에 리무진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기다란 자동차가 아니라, 부양자동차라는 컨셉에 맞춰 새롭게 만들어진 신형이다.
“이건… 자동차라기보다는 잠수정 같은 느낌인데.”
“굳이 기존의 자동차 형태를 그대로 이어갈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물론 이것도 과도기적인 디자인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부양자동차는 자동차라고 불리기는 해도 기존의 자동차와는 완전히 다른 측면이 여럿 있다. 무엇보다도 바퀴가 필요 없고, 노면을 따라서 달릴 필요도 없다. 기존의 이차원적인 주행에서 벗어나 삼차원적인 주행을 하게 되는 이상 기존의 탈것 가운데 가장 비슷한 주행 형태를 가진 탈것인 잠수함과 닮은꼴이 되는 건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사실 기존의 자동차 업체가 레저용 보트 같은 걸 만드는 일 자체도 그리 드물지 않은 편이다. 어떤 회사는 아예 레저용 잠수함까지 만든 전력이 있을 정도다.
“오… 대단해.”
일단 크기부터가 기존의 어지간한 자동차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인지라 내부 역시 엄청나게 넓고 쾌적했다. 공간 왜곡을 쓰지 않고도 이 정도의 실내 공간을 향유할 수 있다니. 잠시 지구 쪽에 신경을 쓰지 않은 동안 이런 걸 만들어냈다는 사실에는 형진도 조금 놀랄 정도다.
“직접 운전을 못하는 건 좀 그렇네.”
말굽 모양으로 배치된 커다란 소파에 몸을 기대며 희망과 생명은 살짝 심드렁한 목소리를 냈다. 행사만 아니라면 이 커다란 탈것을 직접 몰아봤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배어나온다.
“갈 때는 이걸로 태평양 횡단을 해보자.”
“선발대의 도착 장면을 지켜봐야 하지 않겠어?”
“그거야 타고 가면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잖아.”
“하긴.”
형진이 그녀의 옆에 앉자, 말쑥하게 차려입은 추종자가 웨이터 같은 느낌으로 다가와 말했다.
“바깥의 모습을 보시겠습니까?”
“음? 가능해?”
“물론입니다.”
추종자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리모컨 하나를 꺼내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벽면에 리무진 바깥의 영상이 나타난다.
“곡면 디스플레이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신께서 지니신 권능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만.”
“아니. 훌륭해. 정말 대단하군.”
단순히 곡면 디스플레이를 실용화했다는 것을 넘어서 그렇게 구부러진 화면으로도 이질감 없이 주위 경관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대단하다. 미라지 코어의 기술 독점으로 인해 다른 나라나 기업의 기술 발전이 둔화될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던 것이 무색할 정도다.
감탄한 기색으로 주위를 바라보는 형진에게 희망과 생명이 말했다.
“실은 거짓된 천국에서 일하는 잡신들이 손을 쓴 모양이야.”
“어떻게?”
“수호신들처럼 완전히 신격이 유명무실해진 정도는 아니지만, 보잘 것 없는 신격을 지닌 자들이 지구의 과학과 기술에 심취한 모양이야. 개중에는 벤처 기업을 창업한 이들도 있는데, 이 곡면 디스플레이도 그들의 작품인가 봐.”
“그건 또 의외네.”
신격이나 권능으로는 다른 신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잡신 일부가 인간 사회의 시스템 그 자체를 이용하려고 마음먹은 모양이다. 하기야 제대로 된 기업을 하나 만들어 소유하고 있다면 어지간한 교단 이상 가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테니 그것 역시 제법 훌륭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전투나 일상생활에는 별로 효용이 없는 권능이라도 이런 식의 기술 개발에 유효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잡신들이 자신의 아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찾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좋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양성을 중시하는 형진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조차 없이 오히려 그런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을 기뻐하고 있었다. 희망과 생명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리무진은 곧바로 퍼스 시내를 달려 항구 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놓고 보니 멋지다.”
“정말.”
그곳에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함대라는 말을 사용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듯한 느낌의 대규모 선단이 항구 바깥에 열을 지은 채 늘어서 있는 것이다.